# 64
64화.
이서희와 그녀의 길드원들은 오타루의 호텔에 숙박하고 있었는데, 당연하게도 호텔에는 그 누구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의 눈앞에서 몬스터로 변했던 사람들을 제외하고 남은 이들은 처음 결계 근처에서 헤매고 있던 도마뱀의 숫자와 정확히 일치했으니, 결국 이서희를 제외한 그녀의 길드원 전부가 도마뱀으로 변했다는 얘기였다.
“방 안에 들어왔으면 문 닫을게, 시우야.”
“그래.”
은신한 정시우와 함께 호텔의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이서희가 문을 닫자, 정시우는 열쇠를 집어넣고 은신을 풀어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이서희는 두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나도 마나에는 제법 자질이 있는데 그런 내가 전혀 감도 잡지 못하다니…….”
“조금 특별한 물건이라.”
사실 정시우도 그 정도로 휴식처 입장열쇠가 제공하는 은신 능력이 출중할 줄은 모르고 있었더랬다. 평소였더라면 보다 자세히 탐구했을 이서희였으나, 지금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그녀도 그렇구나, 하고 가만히 넘어갔다.
하지만 그냥 넘어갈 수만은 없는 게 있었다.
“그러면…… 그 아이들은 뭐야?”
“아, 용세하라고 합니다!”
그녀의 손가락이 정시우의 품에서 기어 나와 숨을 들이쉬는 수아린과 용세하를 보며 묻는 이서희. 용세하는 자기 이름을 말하며 꾸벅 고개를 숙일 뿐이었지만, 수아린은 괜히 자신의 머리를 가지런하게 정돈하고는 치마를 삭삭 털어 내며 도도하게 대꾸했다.
“수아린이라고 합니다. 사정이 있어 이런 모습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아이가 아니에요.”
“수아린이라면 분명 얼마 전에 리타이어한 용오름 길드의…… 아, 목소리!”
리타이어했을 터인 플레이어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대한 놀라움보다도 자신이 건 전화를 받은 이가 그녀였다는 사실에 더욱 놀라는 이서희였다. 상황이 상황임에도 이서희는 도저히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 약혼자 있잖아요! 그런데 왜……!”
“아니거든요! 그쪽이 멋대로 떠드는 것뿐이거든요!”
마치 자신이 정시우의 여자 친구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했던 것처럼! 자신이 말해 놓고 자신도 데미지를 입어 해쓱해지는 수아린과 입술을 부들부들 떠는 이서희를 놔두고 정시우는 왜 갑자기 이 녀석들이 싸우나 싶어 고개를 갸웃했다.
“아린이도 그렇고 여기 세하도 그렇고, 리타이어하기는 했지만 유령이 아니라 확실히 살아 있는 애들이야. 자세한 사정까진 설명해 줄 수 없지만 일단 그렇게만 알아줘.”
“……혹시 그게 시우 네가 플레이어가 된 거랑 관련이 있니?”
굉장히 예리한 지적이었다. 그것까지 감출 필요는 없겠지. 정시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꼬리를 내보였다.
“정상적인 플레이어는 아냐. 나는 여전히 하늘성에 오를 수 없고, 지상에서만 활동할 수 있는 플레이어야. 반쪽짜리지.”
“그렇구나, 그래서…….”
지하 플레이어가 되는 방법, 개미굴이라는 곳이 존재한다는 것까지는 밝히지 않았다. 이서희도 깊게 파고들려 하지 않았다. 파고들 기운도 없다는 쪽이 더 정확했다.
“어쨌든 이 녀석들이 지금 나를 도와주고 있어. 그보다도 이번 사건 얘기로 돌아와서 얘기하자.”
“으, 응.”
정시우는 최대한 단순하게 설명했다.
자신은 지구에 몬스터들이 나타나던 시점에 맞추어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했다는 것, 그러다가 바로 얼마 전에 자신 또한 신과 관련된 흔적, 그들이 몬스터들을 부리고 있다는 증거를 발견했다는 것.
어쩌면 지구에 몬스터들이 나타나는 이 일련의 사태 자체를 신이란 작자들이 뒤에서 조종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하지만 나도 설마 놈들이 인간을, 그것도 지구인을 몬스터로 바꿀 수 있을 줄은 몰랐어. 놈들의 꿍꿍이를 보다 명확히 알기 위해 너에게도 내 능력을 말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던 건데…….”
보다 정확히는 맹목적인 모습을 보이던 이서희가 이미 신의 뜻대로 휘둘리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해 경계했기 때문이었다. 난리통을 겪고 난 지금은 이서희 역시 그의 우려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랬구나. 너는 이미 그들을 의심하고 있었구나. 역시 내가 어리석었어. 몬스터들과 끈이 맞닿아 있는 신을 그렇게나 쉽게 믿다니. 하마터면 너까지 위험하게 만들 뻔했어…….”
“아니, 그만큼 적의 힘과 마력이 거대하다는 얘기야. 아까도 말했지만 자책하지 마. 신의 힘에 홀려 넘어간 건 어디까지나 그들 스스로의 잘못이고, 나는 전혀 다치지도 않았잖아. 오히려 네가 잘못되지 않게 도와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흐으…….”
그 말을 듣던 이서희의 눈망울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지만 그녀는 끝내 울지 않았다.
울어 버리면 속은 시원해지겠지. 하지만 그랬다간 자신의 실수와 지금 이 순간의 감정까지 눈물과 함께 흘러갈 것 같았다.
정시우에게 기대면 마음은 편해지겠지. 하지만 지금 정시우에게 의지했다간 속절없이 무너지리라. 그것은 이서희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죽어 버린 길드 멤버들에게도 실례였다.
몇 분이 지나 간신히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눈가에는 여전히 눈물이 남아 있었다.
“고마워, 시우야.”
“별말씀을.”
남녀는 마주 보고 작게 웃었다. 모든 것이 바뀌어 버렸는데 주고받는 미소만은 그대로였다. 여전히 반짝반짝 푸근하게 빛났다.
이서희가 입을 열었다.
“나, 네가 여전히 좋아. 쭉 네가 좋았어.”
“대충 예상은 했어.”
“어쩌면 예전보다 더 좋아졌을지도 몰라.”
“그것까진 몰랐는데.”
“너한테 연락할 때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널 플레이어로 만들어서 다시 잘 해 보자는 생각밖에 없었어. 겸사겸사 같이 활동하기도 하고…… 그런데.”
그녀의 얼굴에 굳은 의지가 어렸다.
“아무래도 지금은 나 혼자 서야 할 것 같아. 혼자 걸어야 할 것 같아.”
“힘들어 보이는데.”
“힘드니까 더 그래. 너까지 힘들게 할 수 없잖아. ……어차피 처음부터 김칫국이기도 했고.”
수아린을 힐끗하며 쓴웃음을 짓는 이서희. 수아린이 반사적으로 움츠러들었다. 정시우는 대체 무슨 소리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녀가 고백을 해 온들 받아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의 표정에서 어느 정도 그의 감정을 읽어 낸 것일까, 이서희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다른 길드 멤버가 쓰던 방이 있어. 오늘은 그곳에서 쉬고, 내일 내가 한국에 데려다 줄게.”
“아니, 괜찮아. 비록 날개는 없지만 나한테도 이동 수단이 있거든. 그러니 네가 무리할 필요는 없어.”
큰일을 당한 이서희를 놔두고 떠나는 것은 미안했지만, 이곳에 있는 것이 그녀를 더욱 괴롭게 하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혼자 서겠다고 결심한 그녀에게 실례였다.
“함께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해, 서희야.”
“응.”
정시우가 이서희의 눈가에 남은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 내 주며 하는 말에 이서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아린은 그들 사이에 머무르는 세월의 힘을 실감하곤, 이서희의 얌전히 물러나겠다는 말에 자신이 기뻐해야 하는 것인가 생각했다.
“그럼 이만 가 볼게. 쉬어.”
“……시우야.”
“응?”
수아린과 용세하를 각각 어깨에 얹은 채 호텔 방문에 서는 정시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이서희가 말했다.
“기대지 않겠다고는 말했지만…….”
“조금 정도는 괜찮은데.”
“그러니까, 조금 정도는 기대려고.”
이서희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내가 만약 리타이어하게 된다면, 그땐 나도 도와줄 거야?”
“응.”
정시우가 진지하게 대꾸했다.
“언제 어떤 곳에 있는 던전에 들어가는지만 나한테 미리 알려 주면 그때부터 한 번 계산을 해 볼게.”
“뭐야, 그게.”
이서희는 픽 웃어 버렸지만 정시우는 더욱 더 진지하게 그 말을 반복했다. 그 기묘한 박력에 이서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좋아, 그럼 간다. 잘 지내.”
“응, 시우 너도 다치지 말고 잘 지내야 해.”
이서희는 정시우를 잘 알았다. 한 번 간다 하면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냥 떠나 버리는 성격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알면서도 정시우가 방을 나서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는 그 순간까지도 그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전보다 더욱 듬직해진, 자신이 기댈 수 없는 어깨를 마냥 바라볼 뿐이었다.
“오빠, 저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응?”
정시우가 호텔 복도를 걷고 있으려니 어디까지나 만남이 부족해서 여태까지 연애를 하지 못했을 뿐인 매력적인 젊은 여성 수아린이 그에게 물었다.
“저분이랑은 대체 어떻게 처음 만나신 거죠?”
“아, 그게…….”
둘 사이의 유대는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끝나 버린 인연임에도 저 정도라면 대체 둘 사이에 어떤 운명적인 만남이 있었단 말인가! 약간의 질투와 시기, 부러움과 원망과 분노와 회한을 최대한 티 나지 않게 담아낸 수아린의 물음에 정시우는 심드렁하니 대꾸했다.
“대학 같은 과 동기야. 새터(새내기 새로배움터)에서 처음 만났지.”
“평범해!”
“오히려 평범하지 않죠. 선배님은 CCC라는 말도 모르십니까? 캠퍼스 커플 씨X…….”
“용세하 씨, 조용히 해욧.”
“넵.”
이래선 만남이 부족했다고 변명할 수도 없지 않은가! 수아린이 발을 동동 구르는 가운데 그녀의 청춘에 일절 관심이 없는 정시우는 엘리베이터에 타며 은신을 다시 활성화했다. 이젠 이서희를 대신해 정시우가 이번 사태에 종지부를 찍을 때였다.
“그러면 그 신이란 놈을 좀 더 때려 주러 가 볼까.”
“그렇게 말했다가 정말 신이 직접 튀어나오면 어떻게 해요.”
“그럼 내가 맞는 거지 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시우는 신과 직접 조우하게 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애초에 전직 퀘스트를 할 때 자신이 죽었을 것이다.
그렇게 쉽게 신이란 놈들이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면 몬스터들을 부리거나 인간을 몬스터로 바꾸거나 할 필요 없이 그냥 지구로 직접 쳐들어오면 되었겠지.
물론 그 통로의 끝에 이번 사태를 일으킨 신과 깊게 연관된 세상, 혹은 그 일부가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것은 분명했으나…….
“원래 신이나 마왕 같은 놈들은 지들이 나서면 한 턴만에 게임 끝날 걸 가지고 괜히 약한 부하들부터 차례대로 내보내서 오히려 주인공을 키워 주는 바보 같은 놈들이야. 너무 걱정하지 마.”
“그러다가 정말로 신이 나타나면!”
“걱정하지 마. 그런 사태를 대비해서 어쩌다 초장에 최종보스를 물리치고 모든 사태를 종결짓는 시나리오도 있어.”
“오빠는 너무 지나치게 태평해요! 머리가 좋은데 왜 그걸 굴리질 않는 거예욧!”
“하긴 대학 동기였던 이서희 씨도 저렇게 똑똑…… 앗, 형님께 문제점이 있다는 건 아닙니다, 형님!”
정시우는 그동안 소외되어 있어 심심했다는 듯이 쫑알쫑알 떠드는 수아린과 용세하에게 하나하나 친절하게 대꾸해 주며 순식간에 오타루 시내를 벗어나 텐구산을 올랐다.
산에는 여전히 많은 숫자의 고블린 군단과 몬스터들이 있었고, 플레이어들은 놈들을 사냥하느라 더할 나위 없이 바빴다.
“도마뱀 인간들은 보이지 않네.”
“놈들을 리자드맨이라고 불러요. 파충류인 것치고는 숲에 서식하는 놈들, 빙원에 서식하는 놈들, 물가에 서식하는 놈들로 분류도 다양한데, 그렇게 푸른 비늘의 리자드맨은 저도 본 적이 없어요. 인간에서 화했기에 그런 것일까요…….”
“너도 그 신의 흔적과 조우한 적은 없다는 말이 되겠네. 리자드맨만 그 신을 섬기리라는 법이 없기는 하지만.”
그는 곧 신전이 있던 곳에 도착했다. 슬레지 해머로 신전과 그 터를 완전히 짓이겼기 때문에 신성한 기운이라곤 한 톨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의 품의 탐색기는 확실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 없지?”
“아예 없어요.”
“좋아.”
정시우가 탐색기를 꺼냈다. 이 부근이 자동으로 확대되며 통로와 이어지는 흔적이 클로즈업되었다. 그리고 그가 정확히 그 위치에 선 순간, 그는 자연스럽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닫게 되었다.
[세상 에이리하의 통로 : 위험도 조금 높음]
“하.”
정시우는 피식 웃으며 자신의 꼬리를 꺼내어 들었다. 어쩌면 자신에게 꼬리가 난 것은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비록 던전 입구를 뚫지 않게 된 지는 제법 되었지만, 꼬리를 다루는 것만은 그간 꾸준히 연습해 무척 자연스러워져 있었다. 그는 그것을 들어 게이트가 있는 위치를 푹 찔렀다. 직후.
[세상 에이리하에 접속합니다.]
그는 다른 세상에 로그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