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4화.
“와, 문 엄청 크다.”
정시우는 비드로 묵직해진 바지 양쪽 주머니를 어루만지며(그러고 보면 집을 나올 때 입은 트레이닝 바지 그대로였다.) 고개를 들어 전방을 살폈다.
정시우가 힘껏 점프를 해야 간신히 천장에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은 크기의 문이 앞을 떡하니 틀어막고 있었는데, 그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정시우는 힘이 센 만큼 각력도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테스트 던전이라고는 해도 이렇게 빨리 던전을 끝내다니…… 그것도 웨어울프들을 상대로 조금도 물러나지 않고 싸워 상처를 입지 않다니 말이 돼?’
신기한 눈으로 문을 살펴보고 있는 정시우와 달리 수아린은 기가 막혀 기진맥진해진 상태였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자신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받아 낼 때부터 그야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로 이상한 사람일 줄은 몰랐다.
“정시우 씨, 무술 같은 거 배웠어요?”
“그냥 태권도랑 합기도랑 유도랑 검도 기초만 조금. 타고나길 이렇다 보니 살아오면서 힘 조절해야 할 일이 많았거든. 그래서 배워 뒀어.”
과연 그가 말하는 ‘기초’가 어느 정도 수준일까, 수아린은 묻지 않기로 했다. 대신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
“보스 룸에 입장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체력과 마력을 점검합니다. 그리고 각자가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스킬이나 스펠을 준비해야 하는데…… 정시우 씨는 아직 스킬이 없으니 이건 어쩔 수가 없네요.”
“스킬과 스펠을 미리 준비하는 건 어째서야?”
“모든 던전의 보스는 던전 문이 열리고 단 3초간, 비선공 모드를 유지하거든요.”
기껏 잘 나가다가 또 게임 같은 얘기가 나왔다.
“내가 무조건 선빵을 갈길 수 있단 얘기야?”
“3초 안에 공격할 수만 있다면요?”
하지만 보스가 문 바로 뒤에 붙어 있는 게 아니니 근접 능력을 지닌 플레이어들은 종종 이 선공권을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고 그녀는 이어서 설명했다. 하지만 정시우는 대충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3초라 이거지, 알겠어.”
“던전의 보스는 해당하는 던전에 나왔던 몬스터들과 깊은 연관이 있어요. 이번 테스트 던전에는 웨어울프가 많이 나왔으니, 던전의 보스 역시 웨어울프, 혹은 그들의 상위종일 것이라는 짐작을 할 수 있겠죠.”
수아린은 스스로 그런 말을 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웨어울프의 상위종으로 넘어가면 대부분 레벨 100을 돌파하기 때문이다. 이 던전의 몬스터 선정 기준은 단단히 돌아 버렸다! 혹은 정시우가 돌아 버렸거나, 그도 아니라면 수아린이 돌아 버렸거나!
“어쨌든 내가 상대할 수 있는 놈이라는 건 변하지 않잖아. 그거면 됐어.”
“전 지금 바로 그것을 두고 깊은 고민 중이지만…… 아니, 그래요. 됐죠 뭐.”
체념하는 수아린을 놔두고 정시우는 후우, 깊은 숨을 내쉬며 무릎을 굽혔다. 추진력을 얻기 가장 좋은 자세였다.
어느덧 그는 챙겼던 몬스터 비드를 안전한 곳에 쌓아 두고 있었다. 속도를 늦추지 않기 위해 당연한 선택. 하지만 돈은 그대로 갖고 있었다.
“문 좀 열어 줘.”
“아, 추리력이 증가한 내 자신이 너무나 싫어.”
수아린은 보스 룸 도어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했다. 테스트 던전이라고 해도 보스는 무섭다. 죽는 일까지는 없다 해도, 보스전에서 얻은 트라우마로 인해 기껏 날개를 갖고 있음에도 플레이어로 승급하지 못하고 만년 후보생에 머무르고 마는 이들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 안 돼. 이 사람은 반드시 던전을 통과해 줘야 해……!’
하늘성에서 테스트 던전을 통과하지 못하는 이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개미굴의 테스트 던전을 통과하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되는지는 아직 모른다.
던전에서 빠져나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더구나 그가 던전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 해도 서포터로 거듭나지 못한 수아린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지금까지가 지나치게 순조로웠기 때문에 오히려 더더욱 불안했다. 보스를 만난 정시우가 허무하게 꺾여 버리는 미래가 눈앞에 그려져, 다음 순간에는 칠흑으로 물들었다.
애써 밝은 말투를 유지하고는 있었으나 사실 수아린은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던 몸. 한 번 불안해지기 시작하자 모든 것이 다 불안했다. 어쩌면 정시우와 만나고 지금까지 모두 그녀가 주마등을 대신해 꾸고 있는 꿈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좋아, 고마워.”
“네? ……아!”
그래서일까, 그녀는 자신이 어느덧 보스 룸의 문을 열어 버렸다는 사실도 뒤늦게야 깨달았다. 뒤늦게 아차 했으나 이미 열린 문을 다시 닫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더구나 정시우는 문이 열리고 자신이 빠져나갈 만큼의 틈이 생긴 순간 이미 민첩하게 앞으로 내달리고 있었으니!
[구워어어어어어어어어!]
“이런……!”
테스트 던전의 보스임에 분명한 괴수가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며 수아린은 급기야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웨어울프도 분명 터무니없는 몬스터였지만 방금 저놈에 비하면 격이 달랐다!
“레벨, 100……! 자이언트 블랙 울프!”
“하!”
그녀의 말이 정시우의 귀에 닿았을까?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보스를 향해 일직선으로 내달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전혀 그렇지 못한 것 같았다.
자이언트 블랙 울프는 빌어먹게도 문이 열리고 드러난 광대한 보스 룸의 제일 구석에 박혀 있었다. 아예 선공을 할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듯한 거리였으나 그 정도로는 정시우의 기를 꺾어 놓을 수 없었다.
“흡!”
“말도 안 돼!”
정시우는 1.3초 정도가 지난 시점에서 시간을 달리기라도 할 기세로 바닥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리곤 마치 앞에서 끌어당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눈부신 속도로 전방을 향해 공중대쉬를 펼쳤다!
“아이, 캔!”
“목숨이 걸린 상황에 굳이 개그까지 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플라이!”
[크와아아아아아악!]
정시우는 굳이 따지자면 사람이 아닌 맹수였다. 적을 약화시키기 위해 어디를 가장 먼저 공격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는 얘기다.
3초, 아슬아슬하게 적을 선공할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 그가 고른 부위는 바로 놈의 눈이었다.
[캬아아아악! 크화아아아아아!]
“후.”
정시우는 바닥에 착지하며 씩, 사납게 웃었다. 그 손에는 자이언트 블랙 울프의 왼쪽 눈알이 들려 있었다.
“싸움 도중에 적의 신체 부위를 채취할 수는 있는 거구나.”
“그 몬스터가 죽으면 사라져요! 그보다 뒤! 돌진해 와요!”
“알고…… 있어!”
정시우는 돌아보지도 않고 손에 들린 눈알을 뒤로 던졌다. 어디서 투포환이라도 하다 온 건지, 무시무시한 파공성을 내며 날아간 눈알이 이번엔 놈의 오른쪽 눈에 부딪혔다.
[캬학!]
결과는 공멸. 즉 놈의 오른눈까지 깔끔하게 터져 버리고 말았다.
“말도 안 돼…….”
방금 정시우는 적의 모습을 보고 있지도 않았다. 단지 기척만으로 적을 완벽히 파악하고 공격해 약점을 파괴했다는 것이다. 용오름 길드 멤버들과 함께 도전한 32단계 던전에서도 이렇게 행동하는 플레이어는 없었다.
“어, 눈에 맞았네. 나이스!”
“그냥 막무가내로 던진 거였냐!”
못 참고 태클을 걸고 말았다!
[캬아아아아아! 쿠와아아아아아아악!]
“후……!”
그러나 적은 양쪽 눈을 잃었다고 해서 무력화될 만큼 만만한 적이 아니다. 놈에게는 시각보다 더 예민한 후각이 있었고, 레벨 100을 넘는 몬스터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우월한 민첩성 또한 지니고 있다.
결정적으로 보스 룸이 열리고 3초가 지났다. 놈이 정시우에게 돌진해 그를 물어뜯는 것이 그리 어려워 보이진 않았다. 놈 또한 그렇게 생각했고, 바로 행동에 옮겼다.
[쿠와아아아아아!]
대지가 진동했다. 놈이 지나오는 바닥이 쿵쿵 패이며 돌가루가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빗자루 들고 다가오는 어머니보다도 무서웠다.
“정면에서 부딪히면 죽어요! 피하세요!”
“내가 모르고 있던 사실을 알려 줘서 고마워!”
[쿠오오오오!]
적이 어지간하면 태클을 걸어 다리라도 부러트려 보겠는데, 신장 3미터를 넘기는 자이언트 블랙 울프의 돌진에 태클을 걸었다간 이쪽 다리가 부러질 지경이다.
그렇다면 유도를 응용하여 놈의 힘을 받아넘기…… 려다가는 그의 인생까지 넘어갈 것 같았으니 이것도 스킵. 그럼 어떻게 한다?
‘시각은 확실히 무효화된 것 같고…… 놈이 믿을 구석은 후각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걸 이용해서 놈을 어떻게든 엿 먹일 방법이 없을까.’
정시우는 다급히 몸을 날려 놈의 돌진을 피하며 생각했다. 놀랍게도 곧 좋은 생각이 났다.
“좋아…….”
그는 상의를 완전히 벗었다. 조각처럼 반듯한 근육질의 몸매가 허공에 노출되었다.
“꺅, 뭐하는 짓이에요!”
수아린은 그를 타박하는 것과는 달리 아주 뚜렷하게 정시우를 직시했다. 거두어지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빛을 추구하는 자의 표정이 이러할까? 폰이 있었다면 사진까지 찍을 기세였다.
“자!”
[쿠와아아아아아앙!]
정시우는 본인은 가만히 멈춘 채 셔츠만을 돌돌 뭉쳐 반대쪽 벽으로 있는 힘껏 던졌다. 솔직히 바보도 아닌 이상 속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다행히도 자이언트 블랙 울프는 바보였던 모양인지 그것을 쫓아 있는 힘껏 내달렸다.
사실 그의 체내에 마나가 없어 몬스터들의 감지능력이 제 활약을 할 기회가 없었을 뿐이지만, 지금의 그는 그것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좋았어…… 하!”
사정이 어떻든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는 것만은 사실!
그는 자이언트 블랙 울프가 반대쪽 벽으로 돌진하며 셔츠를 따라잡기만을 기다렸다가, 놈의 돌진이 멈춘 바로 그 순간 거센 슬라이딩 태클로 놈의 뒷다리를 공격했다.
놀랍게도, 우드득 소리와 함께 놈의 다리가 그대로 부러졌다!
[꾸와아아아아아아아아!]
한쪽 눈이 뽑혔을 때보다도, 반대쪽 눈이 터졌을 때보다도 끔찍한 비명소리가 보스 룸을 가득 채웠다. 놈은 당장 다른 다리를 휘둘러 정시우를 공격하고자 했으나 그는 이미 뒤로 빠져나오고 없었다.
“생각보다 약하네!”
“당신이 이상해요, 당신이!”
만약 공격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이번엔 바지까지 벗을 생각을 하고 있던 정시우였으나, 그에게는 다행하게도, 그리고 한창 나이의 처녀에게는 애석하게도 자이언트 블랙 울프는 한쪽 다리를 완벽히 잃었다.
뒷다리 하나를 잃은 정도로 무엇이 달라지느냐면, 바로 놈의 돌진 속도가 달라진다.
[크으아아아, 크앙아아아앙!]
“그렇지, 조금만 더 힘내!”
처음 놈이 무지막지한 속도로 돌진을 해 올 땐 솔직히 조금 쫄았던 정시우였으나, 한쪽 다리를 잃고 절뚝거리는 자이언트 블랙 울프를 보면서는 인자한 웃음으로 다독여 줄 수도 있었다.
“으랏차!”
[끄아아악!]
물론 놈을 다독이는 것과 동시에 놈의 다리를 부러트리기는 했지만! 물러남을 모르는 정시우의 강직한 태클이 놈의 앞다리를 하나 완벽히 아작 낸 다음 순간, 자이언트 블랙 울프는 끝내 균형을 잃고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좋아, 이겼다.”
“납득할 수 없어…….”
스킬 하나 없는 플레이어 후보가, 레벨 100짜리 자이언트 블랙 울프를 상대로 이런 압승을 거둘 수 있으리라 누가 상상했겠는가. 그것도 이렇게 빠른 속도로!
[쿠, 쿠워어어어…….]
그러나 수아린이 말을 잃고 있건 말건 정시우는 차근차근 거대 늑대의 전신을 두들겼고, 마지막 남은 기운으로 그의 팔이라도 물어뜯으려던 거대 울프는 끝내 끝까지 그에게 유효타 하나도 입히지 못하고 목숨을 잃고 말았다.
“어, 얘도 시체 남았다. 보스도 루팅 가능한 거 맞지?”
“……아, 몰라.”
그렇게 정시우가 빠른 루팅으로 100달러 지폐 15장과 검고 작은 몬스터 비드 하나를 루팅한 다음 순간.
[테스트 던전이 클리어되었습니다.]
[정산이 시작됩니다.]
지하에서 피어오른 작은 불꽃이, 드디어 그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