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165화
기상 (3)
나는 그녀의 당당한 선언이 이후 에신의 세력구도를 바꾸게 되리라는 걸 직감했다.
지금껏 나라를 이끌어오며 나도 전쟁에 대한 나름의 철학이 생겼다.
가능하다면 피할 것.
피할 수 없다면 이길 것.
그녀가 만들어낸 무기는 승리를 담보해줄 신물이었다.
이렇게 가슴이 뛰는 게 주책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한국을 칭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기술력은 인간이 흉내 낼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배울 것들이 어찌나 많던지 기억도 나지 않은 수련공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더군. 심지어 나는 금속을 어떻게 합성해야 하는지조차 배워야만 했다. 믿어지나? 이 카둔이 금속을 다루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는 게?”
그녀가 탱크의 전면 장갑을 주먹으로 텅텅 두들기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 답례로 나도 그들에게 내 노하우 몇 가지를 전수해주었지. 기술력이 경이롭기는 하나, 그들의 공정에는 이상하리만치 마법이나 술법이 배제되었더군. 내 방식이 그들에게도 충분한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주고도 남겠지.
카둔이 직접 전수한 노하우라면 대한민국의 과학문명이 근간부터 바뀐다고 장담한다.
“제 눈앞에 분해된 탱크들이 보입니다만, 이것도 탱크의 일종입니까?”
카둔의 신무기는 궤도차량이라는 점, 두꺼운 장갑판을 가졌다는 점에서 탱크와 유사했다.
그러나 탱크라면 마땅히 달려있어야 할 크고 아름다운 주포가 없었다.
주포 대신 주술적 상징으로 가득한 제단을 얹어놨는데, 나로서는 저것의 기능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겠다.
그녀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이건 세상에 없던 물건이다. 그러니 이름도 새로 지어줘야지.”
“전장에서 어떤 역할을 맡게 됩니까?”
“일단 이동식 방벽이라고 해두마.”
카둔이 난데없이 차량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보이느냐?”
그녀가 가리킨 건 반원형으로 휜 제단이었다.
“마법의 반향이 퍼지는 걸 돕는 장치다, 하부는 마력을 증폭하는 엔진 역할을 하지. 상부를 통해 퍼져나간 마력은 반경 일 킬로미터 안팎을 아우르는 강력한 마력장을 형성한다.”
그녀가 팔을 굽혀 포물선 모양을 만들어보였다.
“마력장은 이렇게, 우산처럼 펼쳐져서 위에서부터 아래로 떨어지는 공격을 차단한다. 수준급의 주문시전자가 직접 개입하지 않는 이상 결코 뚫리지 않을 방벽이다.”
예전에 스트리아 영지를 지키기 위해 공성전을 벌일 때, 마법사들이 자주포 사격을 막기 위해 광역 방어마법을 시전했던 기억이 난다.
이 기계는 장거리 포격전술의 카운터였다.
“일종의.......방어마법 증폭제단이라고 보면 되겠군요.”
“정답이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복잡한 장치가 아니야. 마법사에게 안전한 장소와 손쉬운 이동방법을 만들어준 것에 불과하니.”
“제게는 충분히 대단해보입니다.”
“진짜 대단한 건 이놈이지.”
카둔이 차량 아래로 내려왔다. 그녀는 어질러진 작업대 사이에서 주먹만 한 크기의 쇠구슬을 찾아냈다.
구슬 표면에는 깨진 유리처럼 금이 죽죽 가있었다. 더 가까이 다가가니 미세한 잔금이 회로처럼 일정한 규칙성을 띠고 새겨진 걸 볼 수 있었다.
“조금 전에 내가 한국의 기술력을 칭찬했었지. 날 당황하게 한 건 K-2 탱크 자체보다도 K-2 탱크가 세계 최고의 탱크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포탈 바깥 세계는 서로를 조금이라도 앞서가기 위한 치열한 기술경쟁을 벌이고 있다는군. 그들의 선두에 선 국가가 개발 중인 게 사람이 탈 필요가 없는 무인 탱크라는 걸 들었을 때, 나는 목초지를 유랑하는 야만인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쇠구슬을 내게로 내밀었다.
“소개하지, 스틸하트라는 것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구슬을 받아들었다. 손바닥에서 강한 마력반응과 함께 흡사 심장처럼 펌프운동을 하는 듯한 진동이 느껴졌다.
이건 아티팩트였다.
이 작은 구슬 안에 마치 호수를 연상시킬 법한 대량의 마력이 고농도로 압축되어 있었다.
게다가 이 성질, 내게 익숙한 마력이다. 나는 분명 이런 마력을 가진 자와 싸워봤었다.
“마그나크록입니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그나크록의 뼈를 얻지 못했다면 시도조차 못 해봤을 작업이다. 스틸하트가 작동하려면 다량의 마력을 한곳에 오래 묶어둬야만 하니까. 하지만 좋은 소재를 구하는 건 어디까지나 시작단계에 불과하지. 프로젝트의 목표는 기계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다. 바깥 세계가 목표로 하는 것처럼, 사람이 조종하지 않아도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이게끔.”
그녀가 언급하는 건 무인전차였다. 잔금에서 회로와 흡사한 규칙성을 느낀 건 우연이 아니었다.
“...성공하셨습니까?”
“아직 닿지 못했다.”
그녀가 슬쩍 웃었다. 일생일대의 대적을 앞둔 전사에게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호기로운 웃음이었다.
“아직은 배움이 부족하다. 스스로 부족하다는 말을 이렇게 흔쾌히 해보는 게 대체 몇 년 만의 일인지 모르겠군.”
“카둔 님이라면 해내시리라 믿습니다.”
“나만 믿는다고 될 일은 아니다. 마침 네 부하들 중에도 기계에 생명을 불어넣는 방법을 고민하는 자들이 있더군. 팀장이라는 어린 친구는 마치 내 젊은 시절을 보는 것처럼 영특했다. 가끔 말을 웅얼거리긴 하는데, 그거야 사념을 읽으면 그만이니까.”
“김인재라는 친구일 겁니다. 컴퓨터에 관한 한 최고의 전문가죠.......가만, 그 사람이 카둔 님을 돕고 있었습니까?”
“모르고 있었나?”
“예, 전혀.”
김인재는 독자적인 AI 연구를 추진했던 천재 프로그래머다.
결과는 실패로 돌아갔으나, 나는 그의 가능성을 높게 사 자신만의 팀을 꾸릴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최근 팔에 구멍도 뚫려보고 전쟁도 치르느라 그를 까맣게 잊었다.
물론 그를 잊지 않았다 한들, 예전처럼 프로젝트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이기엔 나라가 너무 비대해졌다. 이제는 각자 자기 일을 알아서 잘 해야 할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스틸하트의 완성에 나만큼이나 열을 올리고 있는 게 그 아이다. 마음껏 꿈을 펼쳐보라고 공방에 연구실까지 만들어줬지.”
“두 분의 합작이라면 대단한 작품이 나오겠군요. 정말 기대가 됩니다.”
빈말이 아니었다.
이공계 최강자와 대장장이의 신이 만났으니 어떻게 기대를 안 할 수 있겠냐고.
공장을 견학한 후 닷새가 훌쩍 지났다. 의회는 닷새가 지났는데도 결론을 만들어내지 못해 아직도 지지고 볶는 중인 모양이었다.
긍정적인 점을 찾자면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기는 한 것 같다는 거.
의회의 결론을 기다리는 사이 나는 정보국으로부터 ESS 국영방송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당연히 예상했어야 할, 놀랍지도 않은, 하지만 등잔 밑이 어두웠던 첩보였다.
김형식 총리는 ESS를 설립하기 위해 안면이 있던 한국인 PD를 영입했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 한국인 PD가 우리나라에 대한 정보가 돈이 된다는 걸 깨달았던 거지.
그래서 촬영을 그렇게나 열심히 했던 것이고, 다른 나라 방송국에 취재정보를 팔아먹어서 한몫 잡았단 거고.
같은 사태를 막기 위해 여러 새로운 법이 입법되었다. 크록이 주축이 된 정당인 ‘위대한 여정’ 당은 방송국 PD가 되기 위한 자격요건에 신앙 검증을 넣자고 주장했다.
신앙의 자유, 사상과 언론의 자유 등 여러 헌법적인 권리를 침해하는 법안이었다.
덕분에 입안되는 법안이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지를 심사할 법제사법위원회도 따로 만들어야만 했다.
마치 도미노 같았다. 한 가지 일이 시작되면 다른 새로운 일거리와 연결되어 연쇄작용을 일으키고 마니.
“라힐 님, 모리스 영사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엿새째 아침에 모리스가 찾아왔다.
나는 그녀가 이보다는 더 빨리 찾아올 줄 알았다. 내가 친 사고가 워낙에 많았어야 말이지.
“안녕하십니까, 라힐 대통령님.”
모리스는 언제나처럼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제니오스 신성 위원회와의 협상이 결렬되었더군요.”
“아쉽나?”
“아닙니다, 사무국의 공식입장은 아닙니다만, 저 개인적으로는 라힐 님께서 언제나처럼 최선의 선택을 내리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아 그리고, 스콧 총독께서는 무사히 귀국하셨습니다. 라힐 님께는 아무런 악감정이 없으시다는군요.”
“나도 악감정이 없다고 전해다오.”
“기꺼이.”
모리스가 씨익 웃었다. 방금 그 웃음은 의미를 알 것도 같았다.
“그 말을 하려고 아침부터 찾아온 건 아닐 테고.”
“물론입니다. 최근 공화국 의회에서 황국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모색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때마침 사무국은 가맹국 간의 유대를 더욱 강화하고, 회원국 각기 인류평화에 이바지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데에 동의했습니다.”
자기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며 놀았다는 이야기를 길게도 하는구만.
“참고로 나는 둘러 말하는 화법을 안 좋아한다. 그런 정치인들은 다 저쪽 세계에 버려두고 왔거든.”
“죄송합니다. 우선 현재 UA가 처해있는 상황부터 설명드리겠습니다. UA의 상임이사국인 뉴 텍사스는 여러 회원국과 연합하여 황국을 동쪽에서부터 밀어붙이는 중입니다. 다른 상임이사국인 모리스탄은 황국의 북부를 압박하고 있습니다. 근래에 뉴 텍사스는 십만 이상의 군대를 격파하는 큰 전과를 올리기도 했습니다만, 아직 적의 주전력이 온전하기에 최종적인 승리에 이르기까지 많은 난관이 기다리는 게 사실입니다.”
“적의 주 전력이라면 무엇을 말하는 거지?”
“황제를 보위하는 길레악, 로켄, 오림, 그니르, 울토르의 직속군대를 가리킵니다. 이 중에서 섬멸된 건 울토르의 군대뿐이고, 그마저도 저희가 올린 전과가 아니었지요.”
길레악, 로켄, 오림, 그니르.
가장 강한 건 길레악이겠으나, 가장 까다로운 적수는 역병지기 오림이다.
오림의 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에서 나오거든.
뉴 텍사스가 미국을 등에 업고도 동부전선을 뚫지 못하는 게 오림 때문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계속해봐.”
“강요하는 건 아닙니다. UA는 회원국의 자발적인 의사를 최대한 존중하고자 합니다. 다만 저희는 라힐 님께서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를 놓치는 게 아닌가 우려됩니다.”
“두 번 오지 않을 기회라니.”
“공화국의 기세가 절정에 올랐습니다. 남으로는 마그나크록을 무찔러 후방의 위협을 제거했고, 동으로는 그 신성 이제니오스 위원회를 한발 물러나게끔 만들었지요. 하지만 아무리 기세가 좋다고 한들 정글에 갇혀만 살아서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크록이라면 모르겠으나 인간은 이런 습한 기후와는 맞지 않는 종족이 아닙니까?”
나는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여 계속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화면 속의 여성이 내게 손을 내밀며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말했다.
“UA와 함께하시지요. 군을 일으켜 진작 수명을 다했어야 할 나라를 장사 지내시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시는 겁니다. 황국은 남쪽으로부터의 침입에 전혀 대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공화국이 참전한다면 전쟁은 대나무를 두 쪽으로 자르듯 쉬워질 겁니다.”
“나더러 황국을 공격하라고?”
“예.”
모리스의 표정이 환히 밝아졌다.
예의 그 뜻 모를 미소였다.
“방금 네 입으로 난관이 많다지 않았나?”
“물론입니다. 그러나 그 난관을 넘어섬으로써 공화국이 받게 될 대가는 고작 전리품 몇 점 정도가 아닐 겁니다.”
“말해다오. 내가 뭘 얻을 수 있지?”
“UA 상임이사국으로서의 지위.”
그녀가 극적인 효과를 위해 한 템포 쉬었다.
“그리고 공화국은 모리스탄, 뉴 텍사스와 함께 드넓은 천하를 삼분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