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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66화 (166/205)

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166화

기상 (4)

가만, 이 비슷한 제의를 소설에서 읽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천하삼분지계가 등장했던 게 삼국지였나, 초한지였나.

대륙을 세 개로 갈라먹은 건 삼국지고, 망해가는 황국을 차지하기 위해 레이스를 벌였던 건 초한지였던가.

확실히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이긴 하지. 유구한 역사 속에서 황국이 이토록 흔들렸던 건 지금이 유일하니.

그러나 소설과 현실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존재한다. 이빨이 빠지긴 했어도 황국은 여전히 호랑이라는 점.

삼국지 황제는 자기 신하도 무서워서 못 만나는 겁쟁이였지만, 여기 황제는 본신의 힘만으로도 대륙정벌이 가능한 괴물이라는 점.

그래, 가장 큰 문제는 길레악, 로켄, 오림, 그니르가 아니라 황제 본인이다.

누구도 황제가 가진 진짜 힘을 모른다.

최강의 에사인을 논할 때 첫손에 꼽히는 게 길레악인 이유는 황제는 언제나 논외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우린 심지어 그 작자 얼굴도 모른다고. 자식에게조차 가면을 씌우고 다니니까.

“고민이 되시나 보군요.”

모리스는 내가 답변이 없자 또 찻잔을 소환하는 마술을 부렸다. 그녀의 태연자약한 모습은 내게 또 다른 고민거리를 안겨주었다.

황제는 거악이다.

하지만 UA도 찾아보면 얼마든지 뒤가 구릴 짓을 많이 벌이고 있을 거다.

모리스탄 총독의 죄업이 흉신들과 비교해서 결코 가볍지 않았으니.

그렇다면 거악을 타도하기 위해 차악과 손을 잡는 행위는 용서받을 수 있는 건지.

그런 행위는 나를 그들과 무늬만 다른 종류의 괴물로 만드는 짓이 아닐지.

“알다시피 이 문제를 우리 의회가 논의 중이다. 내가 여기서 결정을 내린다고 해서 뭐가 바뀌진 않아.”

“그렇지는 않을 텐데요. 공화국은 인법 위에 신법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라힐 님의 한 마디가 의회의 합의보다 더 높다고 알고 있습니다.”

잘 아네. 부임한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법전까지 꿰고 있나.

“에사인 멋대로 하라고 인법 위에 신법을 세워둔 게 아니다. 에사인이 인간보다 더 유능하리라 믿고 융통성을 기대하는 거지.”

“그렇다면 이처럼 결단력이 요구되는 순간 인간을 능가하는 출중함을 보이셔야 하는 게 아닙니까?”

“시끄러. 한 마디만 더 하면 내정간섭으로 간주하겠다.”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주제넘었나 보군요. 제 감각센서는 복잡한 인간의 감정변화를 감지하는 데 서툴답니다.”

멋대로 할 말 다 하다가, 불리해지니 기계라는 걸 방패막이로 삼는구만.

“결과가 나오면 알려주도록 하지. 그동안은 얌전히 있으라고.”

“그리하지요.”

모리스 영사가 탑재된 바퀴 달린 의자가 끼익끼익 소리를 내며 멀어져갔다.

나는 오후 무렵에 당대표들에게 회동 제의를 받았다. 드디어 고대하던 결론이 내려진 듯했다. 마침 점심을 앞둔 때라 나는 그들을 식사자리에 초대했다.

홍정수, 화이트모카, 엘리시아 마르밀.

인간과 크록, 비익족.

식성도 취향도 다른 종족 간의 모임이라, 셰프는 이네스가 맡았다. 오직 그녀만이 여러 종족을 아우르는 요리법을 꿰고 있었기에.

이네스는 크록과 비익족에게 적합한 요리를 내온 것은 물론이거니와 나와 홍정수가 만족할만한 한식까지 준비해주었다.

나는 전채요리를 먹으며 그들에게 모리스 대표의 제안을 상세히 들려주었다.

UA에 대한 내 생각이 어떠한지도 들려주었다.

기본적으로 나는 UA를 신뢰하지 않으며, 그들과 이제니오스 신성 위원회 사이에 모종의 딜이 오갔던 것 같다는.

처음 운을 뗀 건 홍정수였다. 그는 이야기를 듣는 내내 이별을 통보받은 사람처럼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주제를 논하기에 앞서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제가 함께하는 시민당의 대표가 된 건 노동자의 권익을 끌어올려 일할 맛 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제가 후보자토론회 때 주장한 것들도 노동인권에 관한 쟁점들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노동권의 전문성만으로는 의사발언을 하는 데 한계가 느껴지더군요.”

홍정수가 숨을 크게 들이쉬며 말했다.

“근자에 전쟁터도 따라가 보고 여러 존경하는 의원님들과 토론도 해보며 느낀 바가 많습니다. 저는 감히 이런 일을 판단할 주제가 못 된다는 걸 알겠더군요. 하여 저는 대표직을 놓고 물러납니다. 이 자리가 함께하는 시민당 대표로서 저의 마지막 자리입니다.”

홍정수,

모름지기 정치인이라면 자신들이 만들어낸 결과를 직시해야 한다던 자.

결국 그는 자신이 빚어낸 결과에 집어삼켜진 것 같다.

“뭐라고요?”

엘리시아 마르밀이 날카롭게 되물었다.

“그만두겠다는 소립니다. 의원께서는 이제 절 보지 않으셔도 되니 나쁜 일이 아닐 겁니다.”

“여기까지 와서 물러나면 의원님 책임이 없어집니까? 불탄 숲이 되살아나고, 죽은 목생족이 소생합니까? 책임이 두렵답시고 회피하는 게 민주국가라는 대한민국의 가르침입니까?”

“책임은 어떻게든 집니다. 그리고 회피하려는 게 아닙니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절감하고 자리를 내려놓겠다는 의미입니다.”

“책임은 책임을 질 수 있는 자리에서 지셔야죠. 권력을 내려놓고 책임을 지겠다는 건 비겁한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니, 왜 저를 자꾸만 나쁜 놈으로 만드십니까. 저한테 뭐 서운한 거 있으십니까?”

홍정수가 낯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소리 높여 물었다.

엘리시아는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서운하다기보다 한심해서 그렇습니다. 성마족다운 기개를 보여주시라고요.”

성마족.

이 단어는 신조어다.

본래 에신인들은 포탈에서 건너온 인류를 마족이라 통칭했다. 그러나 공화국 국민들은 대통령인 내게까지 마족 딱지를 붙일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나를 비롯한 대한민국 출신의 아시아인은 성마족이라 불리게 되었다.

지도자로서는 달갑지 않은 말이기도 했다.

나는 신분과 종족에 따른 차별이 없는 이상향을 만들고 싶었거든.

한국인은 교육수준, 사회적 지위 등 모든 부문에서 현지인들을 크게 상회했다. 성마족이라는 단어에는 계층구조에 대한 경외감, 무력감이 포함되어 있었다.

“.......저는 그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의원님께 분명 말씀드렸을 텐데요.”

“적어도 사람이 좋아하는 말만 듣고 살 수 없다는 건 배우셨겠군요.”

“진짜 이러시깁니까. 굳이 가는 마당까지 서로 얼굴 붉혀야 하겠습니까?”

“제 앞에서 도망치신다면 제 존중은 끝까지 얻지 못하실 겁니다.”

“........”

홍정수는 한참 동안 가만히 앉아 분을 삭였다.

천적을 제대로 만났다고 해야겠지.

대기업과 맞장을 뜬 사회운동가가 말 한 마디 이기질 못하는 걸 보면.

“...좋습니다. 내뱉은 말을 번복하는 것도 면목 없지만, 대표직을 내려놓겠다는 말은 철회하겠습니다. 사죄하는 의미로 앞으로 더욱 뼈를 깎는 노력을 보이겠습니다.”

홍정수가 이를 부득부득 갈며 말했다. 그의 말은 내겐 이렇게 들렸다. 엘리시아의 콧대를 밟아놓기 전에는 도저히 못 물러나겠다고.

짝.

나는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박수를 한 차례 쳤다.

“이러다 음식이 식겠군요. 시장하실 텐데 배부터 채우시죠.”

이네스가 손수 음식이 담긴 접시를 날랐다. 그릇이 하나둘 비워지는 가운데 화이트모카는 거의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다. 크록이 저렇게 마르려면 얼마나 안 먹어야 하나 싶었는데, 그는 과연 먹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위대하신 분께 의회를 대표하여 말씀드립니다.”

화이트모카가 말했다.

“황국의 멸망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역사의 흐름입니다. 의회는 군을 일으킨다면 지금이야말로 적기이며, 해야 할 일을 제때 하지 못한다면 역사에 죄를 짓는 것이라는 데 동의했습니다.”

“UA와 연대한 작전에도 동의하나?”

“저는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으로서는 UA와 협력하는 것이 순리에 맞다고 봅니다.”

“동의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전력을 최대한 아끼고 UA의 병력을 우선적으로 소모시켜야 황국이 없는 훗날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엘리시아가 의견을 냈다. 홍정수는 차마 반대하진 못하였으나, 어떻게 그런 야만적인 발상을 할 수 있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엘리시아를 쳐다보았다.

“그러면 내 결단만 남았군.”

나는 젓가락을 식탁 위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동시에 모든 이가 발언을 멈추고 내 입만을 쳐다보았다.

“해봅시다. 대륙이 셋으로 갈라질 때까지.”

엘리시아가 득의로운 미소를 지었다.

화이트모카는 언제나처럼 표정이 없었다.

홍정수는 이 결정이 불러올 비극을 상상했는지 질린 듯한 모습이었다.

“전장은 전사들에게 맡기고, 여러분은 국내에 남아 군이 임무를 완수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지요.”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나는 식탁에서 일어섰다.

환영 속의 나는 민주적인 절차와는 거리가 멀었다.

환영은 나브니의 바람이 상당량 섞인 과장이었으나, 모든 게 거짓은 아니었다.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 의회의 결론을 기다리는 시일이 무의미하다고 여겼다.

나는 회견장을 나와 곧장 본궁 지하에 위치한 정보국으로 향했다.

이제 요식적인 절차는 통과했으니, 본게임을 시작할 때였다.

정보국은 최근 인원을 증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대륙 전체를 무대로 삼으려니 일손이 모자라도 너무 모자랐다.

바쁘게 돌아다니는 요원들 사이에 우르술라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얇고 투명한 검은 드레스를 입은 채 헤드셋을 쓰고 있었다.

그녀가 하는 건 도감청이 틀림없었다.

법적인 근거가 마련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왔느냐.”

그녀가 나를 슬쩍 쳐다보며 엷게 미소를 지었다.

“예, 방금 당대표들을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그러면 그 ‘결론’이라는 것도 들었을까.”

“그렇습니다만.......혹시 의회를 도청하신 겁니까?”

“부득이한 일이었다. 네가 그것들에게 분에 넘치는 권한을 쥐여 주는 바람에, 혹여 어떤 바보 같은 결정이 내려질지 알아둬야만 하지 않았느냐.”

“그래도 앞으로는 그러시면 안 됩니다. 그런 감시는 민주적 절차에 위배됩니다.”

“그냥 듣기만 했을 뿐인데도?”

“예.”

“아무런 나쁜 의도가 없는데도?”

“예.”

나는 그녀가 오해하지 않도록 힘주어 대답했다.

“너는 내게 하지 말라는 말을 참 쉽게도 하는구나.”

우르술라는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기분이 좋아진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런 너도 싫지 않다.”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가 콧잔등을 타고 내려오듯 내 얼굴을 훑었다. 나는 민망함을 견딜 수 없어 서둘러 주제를 바꾸었다.

“누님께서 좋아하실만한 일은 그런 불법적인 것이 아니어도 잔뜩 있습니다.”

“어디 들어보자꾸나.”

그녀가 다리를 꼬며 책상 위에 자리를 잡았다.

“우선 난민 중에서 우리 사람이 확실하게 된 자들을 추려 스트리아령으로 돌려보내주셨으면 합니다. 그들이 해줄 일은 황제가 서부전선의 영웅인 대영주 이졸데를 질투해 죽이려든다는 소문을 내는 겁니다.”

“명분을 쌓으려는 거로구나.”

“그렇습니다.”

황제는 신망을 빠르게 잃고 있다. 그러나 자연적인 속도에만 기댈 순 없었다.

이졸데는 스트리아령의 주민들에게는 살아있는 영웅이기 때문에, 그녀를 지레로 삼아 국경을 넘을 명분을 만들어볼 심산이었다.

“귀찮게 그럴 필요가 있을까? 이미 황국은 열 개가 넘는 나라와 전쟁 중인데, 우리만 명분을 따질 필요가 있겠느냐?”

“있습니다.”

나는 강하게 긍정했다.

“우리는 다른 나라와 달라야 하니까요. 우리는 대의와 함께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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