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164화
기상 (2)
“너 같은 놈이 생기는 게 싫다면 나라 관리를 똑바로 하면 될 텐데. 정치고 전쟁이고 죄다 손 놓은 양반이 자식 관리는 왜 그렇게 철두철미하게 하는지.”
“그 의문은 더 위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오래전에 가족을 등진 자가 왜 자꾸만 자식을 가지는지부터.”
일리가 있다.
황제는 투스라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시절, 자식을 지키기 위해 대륙을 정벌했다고 한다.
과거의 그는 최소한 자기 가족에게만큼은 따뜻한 사람이었다.
어쩌다가 그런 양반이 이렇게나 잔인하게 변하고 말았을까?
내가 환상 속에서 그러하였듯, 권력에 맛을 들이면 누구든 타락하고 마는 걸까?
“형님이 넘어갔다고 하니 로비 결과는 물어보나 마나겠네.”
“그렇지는 않다. 귀족들을 움직이려면 삼상회를 장악해야 하는데, 형님은 삼상회를 이끄는 세 개의 머리 중 하나일 뿐이니까.”
우르가 내게 빳빳한 서류를 한 장 내밀었다.
“읽어봐라.”
나는 서류를 펴서 서류 제목을 소리 내어 읽었다.
“거룩하고 고귀한 황국의 지배자이자 에사인 중의 에사인, 에신 템 황제가 공화국 대통령 라힐에게 보내는 동맹 제안서.”
“동맹이라고요?”
박이나 실장이 놀라 물었다. 놀라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졸데만 확보하면 끝날 일을 동맹제의까지 받아왔다고?”
“마저 읽어봐.”
그가 여전히 떫은 표정을 지은 채 말했다.
쓸데없는 외교적 수사들을 걷어내고 나면 서류는 다음과 같이 요약되었다.
첫째, 에신 템 황제는 스트리아령을 경제특구로 지정하며, 스트리아 대영주의 자치권을 인정한다.
둘째, 에신 템 황제는 공화국 대통령 라힐을 그의 네 번째 권능이라 공표한다.
셋째, 에신 템 황제는 우르 황자를 공화국 영사로 임명한다.
넷째, 황국과 에신 공화국은 상호 방위조약에 합의한다.
다섯째, 에신 공화국은 UA에서 탈퇴한다.
다 읽고 나자 나는 비로소 우르가 못마땅해하는 이유를 이해했다.
일 년 전에 이런 제의를 받았다면 쌍수 들고 환영했겠지.
하지만 이 시점에서는 애매하다. 나는 작지만 나만의 세력을 착실하게 세워가는 중이고, UA와의 조약을 파기하는 건 신의 문제였다.
“확실히 말해둔다만 나 때문에 그 같잖은 조약에 서명할 생각 따위는 하지 마라. 동생 하나 간수 못 해서 민폐 끼칠 일은 없을 테니.”
정기호가 담배를 발로 비벼 끄며 말했다.
“나도 이졸데는 걱정하지 않아. 네가 있으니까. 내가 고민하는 건 다른 문제다. 황국이 어디까지 약해졌는가 하는.”
포탈을 처음 열 때만 해도 황국은 결코 넘볼 수 없는 아성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위상이 예전만 못했다.
예전만 못한 정도가 아니라, 먼저 동맹을 구걸할 지경이 되었다.
물론 이 동맹 요청서는 이름만 황제를 내세웠을 뿐, 작성은 삼상회의 귀족들이 했겠지.
귀족들은 평범한 인간이니만큼 무너져 가는 전선을 피부로 느끼는 중이겠고.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 저자세인데.
정말로 이렇게까지 급하다는 것일지?
“황국이 그 어느 때보다도 약해져 있는 건 사실이다.”
우르가 말했다.
“아버지가 일선에서 물러난 후로도 황국은 잘 운영되어 왔다. 내치는 길레악과 그니르가 맡고, 민심은 로켄과 오림이 다스리고, 외적이 나타나면 울토르와 이케이드가 정벌을 떠나는 식이었지. 균열이 벌어지기 시작한 건 이케이드의 죽음부터다.”
나는 동의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일곱 권능도 죽이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는 게 밝혀졌으니.”
“이케이드의 죽음은 죽음 그 자체보다 그 뒤에 벌어진 일이 시사점이 훨씬 크다. 백성이야 내팽개친 지 오래라지만, 이 나라를 지탱하는 일곱 권능만큼은 결코 죽게 둬서도, 무시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케이드와 울토르의 죽음 앞에서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남은 권능들은 자연히 아버지를 저버리고 각자 살길을 모색하는 중이다. 로켄이 군체의식의 힘을 흡수한 게 단적인 예다. 아버지가 수하들을 잘 감시하고 있었다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일이지.”
“내분이 일어나고 있다고?”
“당연하다. 나는 질서의 궁에 머물면서 일곱 권능 중 누구와도 만나지 못했다. 황군을 멋대로 데려가 군대를 꾸린다는 소식만 들려오더군. 나는 내 형님을 세뇌한 게 아버지인지 길레악인지도 확신하지 못한다. 아버지와 유일하게 대화를 나눠왔던 게 형님이건만, 이젠 묻지도 못하게 되었으니.
게다가 드디어 이케이드와 울토르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졌다. 짐작하겠지만 백성들의 슬픔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정든 고향을 떠나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 깊은 정글까지 몸을 의탁하러 찾아오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우르가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
“황국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라힐.”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더니.
안팎으로 온갖 악재들이 줄기차게 밑동을 찍어댄 끝에, 마침내 천년왕국이 수명을 다해가는 모양이다.
“실장님.”
“네.”
“장관과 당대표들을 모두 소집하세요.”
결단이 필요할 시기였다.
그러나 나 혼자 내려서는 안 될 결단이었다.
“오면서 ESS라는 것들과 엮였다. 듣자 하니 국영방송이라던데, 이런 건 대체 언제 만든 거냐?”
박이나 실장이 회의를 준비하러 떠나자마자 정기호가 말을 걸어왔다.
“내가 만든 게 아니야. 총리가 주도했지. 내가 한 거라고는 거기 뉴스에 아나운서 꽂아준 것밖에 없다.”
“그것들이 국영이었다고?”
나는 그의 말투가 비우호적이라는 걸 뒤늦게 눈치챘다.
“왜, 무슨 일 있었냐.”
“아주 모기같이 들러붙더군. 너무 끈덕지기에 당연히 한국 기자일 줄 알았다. 다른 건 몰라도 우리 입국일정을 미리 알고 온 것만은 확인해봐야 할 것 같다.”
그건 수상하긴 하네.
나도 정기호가 입국했다는 걸 TV로 먼저 알았을 정도니까.
통신망도 깔리지 않은 나라라는 걸 감안한다면 놀라운 보도속도였지.
“한국인들이 주축이긴 할 거야. 아무런 노하우도 없이 언론사를 만들어내진 못했겠지.”
“내 분야는 아니다만, 달랑 언론사만 만들어둔다고 끝이 아니지 않나. 언론을 감시할 뭔가가 있어야지 않나?”
“네 말이 맞다. 방송을 관리감독하는 기구도 있어야겠고, 언론대응팀도 둬야겠고, 보도지침도 만들어야지. 이렇게 할 일이 또 늘어나는구만.”
그런 걸 만드는 건 방송사가 두엇 더 생기고 난 뒤의 이야기일 줄 알았는데.
이러다가 고용노동부까지 세우게 될지도 모르겠다.
잠시 후 박이나 실장이 회의가 준비되었음을 알려왔다.
나는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내가 참석하면 내 눈치 보느라 할 말 다 못 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더라고.
특히 홍정수가 그랬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정책에 쓴소리 마음껏 하던 그는 전쟁을 한 번 겪더니 눈빛부터 변했다.
뭐랄까, 순해빠진 양 같더라고.
충격이긴 했을 거야.
십수만의 생명이 산 채로 화장되는 꼴을 보았으니.
현대 한국인의 감성으로는 소화하기 버거운 장면이었다.
그래도 그가 벌써부터 주눅들어버리면 안 됐다. 아직 같이 가야 할 길이 구만리장천이었다. 때문에 나는 박이나 실장을 통해 화두만 전달해주었다.
- 지금이 기회인가?
거병하여 쓰러져가는 거인의 발목을 칠 때인가?
동맹제의를 구겨 던져버리고, 피 냄새에 이끌린 하이에나들과 함께 노쇠한 육신을 나눠먹을 것인가?
금방 결론이 나올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들이 회의를 하는 동안 나는 관용차를 타고 공방으로 향했다.
김송화 장인의 공방은 개축에 개축을 거듭하여 지금은 거대한 공장으로 거듭났다.
공장 한쪽에선 카둔이 주도하는 대규모 프로젝트가 한창이었다.
영광의 용광로.
범인들은 일곱 권능만을 우러러보지만, 칼끝에 죽고 사는 전사들은 황국의 영광이 카둔의 손에서 빚어졌다는 걸 안다.
전설적인 무구를 독점제작해온 카둔의 작업장이 이제 내 땅에서 웅비를 준비하고 있었다.
“마침 잘 왔다, 라힐.”
카둔이 날 알아보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녀는 채굴이라도 하다 온 것처럼 잿가루를 잔뜩 뒤집어쓰고 있었다.
“어떠냐? 멋지지?”
그녀가 천장에 닿을 듯한 어마어마한 크기의 용광로를 가리키며 물었다.
“예, 정말 멋집니다.”
나는 솔직히 감탄했다.
전생에서도 말로만 들었을 뿐이다.
아무리 내가 간덩이가 부었다고 해도 황도 심처에 박혀있는 에사인의 작업장에 숨어들 정도로 미치진 않았거든.
“완성이 머지않았다. 늦어도 올해를 넘기지 않겠지. 완공식을 할 때 네가 와줬으면 하는데, 가능하겠지?”
“물론입니다.”
나는 서둘러 덧붙였다.
“전쟁 중이라면 못 가겠군요.”
“너는 도무지 쉬질 않는구나. 덕분에 나도 원 없이 일을 해본다만.”
그녀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흐뭇하게 웃었다. 역시 이쪽 사람들은 전쟁을 받아들이는 자세부터가 달랐다.
“그리고.......오늘 널 보자고 한 이유는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은 용광로 때문이 아니다.”
그녀가 고갯짓으로 내게 따라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그녀를 뒤따라 공장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수많은 인부들이 구획별로 나뉜 작업장에서 저마다의 일에 몰두 중이었다. 그들은 특별히 언질을 받은 것인지 내 등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일에만 집중했다.
“너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에사인에겐 필멸자인 시절이 있었다.”
카둔이 여전히 걸음을 멈추지 않으며 말했다.
“나는 인간일 적부터 일찌감치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걸 깨달았지. 한 번 배운 걸 두 번 들을 필요가 없었고, 한 번 만들어본 건 두 번 만들 필요가 없었다. 스승은 내 천부적인 재능을 질시하다 못해 오데르의 검을 고용하기에 이른다.”
그녀는 그 대목에서 날 돌아다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네가 태어나기도 전의 이야기이니 곤란해하지 말거라.”
“당연히 그럴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지루한 얘기는 건너뛰자꾸나. 여차저차해서 나는 대장장이들을 아우르는 에사인이 되었다. 나는 대륙의 역사를 뒤바꿔놓은 무구들을 만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대단한 무구를 만든다 한들 마음속의 갈증은 채워지지 않았다. 나는 이 세계에서 내가 무구제작자 이상의 역할을 해야만 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만들어본 게 강철의 자매단이지만, 그건 답이 아니더구나.”
그녀가 날 데려간 곳은 공장에서 가장 안쪽에 위치한 작업장이었다. 나는 작업장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이중삼중의 보안설비를 통과해야만 했다. 그녀의 공방에서 안면인식 스캐너까지 보게 될 줄은 몰랐다.
- 카둔 님, 그리고 방문자 한 분, 신원 확인했습니다.
스피커 너머로 고저가 없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이잉.
강철 문이 좌우로 열리며 공방 안쪽이 개방되었다. 나는 공방 안에서 상상조차 못 한 물건을 발견하고는 입을 쩍 벌렸다.
“이건.......설마 이런 걸 만들고 계셨습니까?”
“놀랐지?”
놀란 정도가 아니었다. 나는 벌어진 턱을 아직도 다물지 못하는 중이었다.
카둔이 제작 중인 물건은 탱크였다.
하지만 저 물건은 우리가 익히 아는 탱크와는 묘하게 생김새가 달랐다. 포탑이 있어야 할 자리에 제단과 흡사한 기묘한 구조물이 들어섰다. 그 밖에도 주술적인 장치임에 분명한 여러 부착들이 여기저기 장착되었다.
구석에는 분해된 K-2 전차 부품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대충 흘겨봐도 탱크 서너 대 분량에 필적할 분량이었다.
“하지만.......어떻게 이런 걸 알고 만드시는 겁니까? 한국과 우린 기술이전 조약을 맺지 않았...”
나는 멍청한 소리라는 걸 자각하고는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강철의 에사인이었다. 그녀가 만들지 못할 물건이라고는 세상에 존재치 않았다.
“방금 기술이전이라고 했더냐.”
카둔이 검댕 묻은 코를 손으로 슥 닦으며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앞으로 기술이전이란 말은 우리나 하게 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