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163화
기상 (1)
나브니의 군대는 완전히 지리멸렬했다.
반대로 말하자면 우리의 압승이었다. 우리는 동쪽 숲을 제물로 바쳐 삼십만 군대를 격파했다.
수많은 목생족 병사들이 중립지대조차 벗어나보지 못하고 재가 되고 말았다. 불길은 적진을 완전히 집어삼키고도 여력이 남아 일주일이 넘게 타올랐다.
나는 접경지대에 십만의 군대를 더 파견해 적의 추가적인 공세를 대비했으나, 신성 위원회는 끝끝내 국경을 넘지 않았다.
우리에게 충분히 되갚아줄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파병을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했다.
가장 유력한 설은 내분이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자면 이제니오스 신성 위원회는 최소 세 개의 회원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미국, 멕시코, 나브니의 욕망의 왕국.
여기서 욕망의 왕국이 떨어져나갔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좀 더 복잡한 사정이 있을 거라고 추측한다. 나브니는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여자이나, 그건 미국이나 멕시코의 수장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어쩌면 그들은 나브니가 위원장을 맡을 만큼 강하지 않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우리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인정했을 수도.
어쨌거나 우리는 한시적인 평화를 마음껏 누리기로 했다.
이 상태가 오래가진 않을 테니까.
“무슨 생각을 하느냐?”
우르술라가 내게 물었다.
그녀는 며칠 전 일본에서 귀국해 내 곁으로 돌아왔다.
이 자리는 그녀가 일본에서 활동한 내역을 되짚어보기 위해 마련된 시간이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하.”
“흐음.......”
우르술라가 상체를 숙이며 내 눈을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나는 몇 초 버티지 못하고 그만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듯하다만.”
“정말로 사소한 것이라...”
“최근 사소한 것에 정신을 파는 시간이 길어지는구나.”
“죄송합니다, 누님.”
우르술라는 나를 더는 나무라지 않았다.
더 캐물었으면 난감할 뻔했다. 이건 그녀도 도와줄 수 없는 문제거든.
나는 최근 나다운 게 무엇인가 하는 사춘기적인 고민에 빠져있었다.
나브니가 전력을 다해 걸었던 정신계 술법의 후유증이었다.
그녀와 함께한 가상의 세월 속에서 나는 스스로의 의지로 타락했다.
환장하는 건 그 타락한 자아가 아직 내 안에 생생히 살아있다는 거.
신하들의 면전에서 험한 말이 나갈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염세적인 사고를 멈추기도 힘들다.
그래, 어차피 인간이 다 그러니.
어차피 넌 내게 원하는 게 있겠거니.
설령 사실이 그렇더라도, 이전까지의 나는 부정적인 사고를 꽤 잘 제어해왔었다.
가뜩이나 사람들의 죄업을 들여다보는 입장인지라, 한 번 염세적이 되면 한없이 그쪽으로 기울어지기 쉽거든.
“지친 것 같구나.”
“그건 아닙니다. 에사인이 지칠 리가요.”
“최근 쉰 날이 언제인지 말할 수 있겠느냐?”
“........”
나는 떠오르는 날이 없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도통 쉰 기억이 나질 않네.
잠을 잘 필요가 없어진 후로 밤낮으로 야근을 한 기억밖에.
“전혀 쉬지도 않고, 매번 죽음을 걸고 싸우고, 여자도 멀리하며 낙이라고는 없는 삶을 살아가는데 에사인이라고 해서 버틸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익숙해졌나봅니다. 직장생활도 그렇게 했거든요.”
목숨 걸고 싸우는 것만 빼고는 평범한 회사생활이네.
“그렇게 말하지 말거라. 누구라도 적절한 휴식은 필요한 법이다. 게다가 너는 이 나라에서 가장 쉴 자격이 있는 사내가 아니냐.”
“그렇게 말씀하셔도...”
“자, 따라오너라.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우르술라가 빙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턱을 괸 채 그녀를 올려다보다가, 문득 심장이 두근거리는 느낌이 들어 깜짝 놀랐다.
나브니의 술법에 당한 후로 처음으로 살아있다는 기분이 드는 순간이었다.
“.......그렇군요.”
나는 홀린 듯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랬던 겁니다.”
“뭐가 말이지?”
“아닙니다, 어서 어디든 가죠.”
나는 서둘러 그녀를 재촉했다.
이젠 알겠다.
우르술라가 환상 속에서 반란군을 이끌었던 이유를.
나브니는 우르술라의 모습으로 회담장에 나타났을 정도로 내 욕망을 속속들이 꿰고 있었다.
제대로 봤다, 나는 우르술라를 누구보다도 간절히 원한다.
그랬기에 그녀를 내 곁에서 치워버릴 필요가 있었던 거다.
우르술라가 나와 가까이 머물렀다면 아무리 환상이라고 해도 자기 매력이 통하지 않았을 테니.
우르술라는 나를 집무실 뒷방으로 데려갔다. 뒷방에는 ‘공화국 돌격부대 장군 라진’으로 가장할 때 썼던 소품들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이걸 입으라고요?”
“입어야지. 네가 얼마나 유명한지 모르는 것일까?”
“그럼 전 이걸 입는다치고, 누님은 어떡하시렵니까.”
“내 얼굴을 아는 건 정보국 요원들뿐이다. 자, 저기 서보거라.”
갑옷은 혼자 입기 불편하다. 얼굴까지 가리는 통짜 철판갑옷의 경우 특히 그렇다.
우르술라는 익숙한 손길로 내 겉에다 철로 된 벽을 한 겹 한 겹 쌓았다.
“네 얼굴을 가리는 건 아쉽지만.”
그녀가 투구를 씌우기 전 농을 건넸다.
농담이 맞겠지?
나는 그녀와 함께 궁을 빠져나와 번화가로 향했다.
수도는 못 보던 새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다. 이제 거리에는 트럭뿐만이 아니라 자가용이나 자전거도 제법 굴러다녔다.
도로는 바쁜 일상을 영위하는 다양한 종족들로 가득했고, 건물은 에신어와 한국어를 혼용한 간판으로 장식되었다.
노변은 터진 풍선과 색종이, 꽃잎에 뒤덮여 있었다.
깨진 술병과 음식물 쓰레기도.
삼 일 동안 지속된 축제의 여파였다.
나와 진소미를 형상화한 조형물도 곳곳에서 보였다.
“어떠냐? 네가 세운 나라가.”
우르술라가 물었다.
“같이 세웠죠. 저 혼자서는 못 할 일입니다.”
나는 겸양을 부렸지만, 미소가 지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신성 위원회와의 전쟁은 뜻하지 않았던 이득을 안겨다주었다.
여러모로 하나가 되기 힘든 다종족 국가에게 공통의 적을 만들어, 공동체라는 유대감을 일깨운 거다.
내가 회담장을 출발한 순간부터 국영방송사 ESS의 카메라가 따라붙었다고 들었다.
선거용으로 비치해둔 스크린을 통해서 정당 대표들과 함께하는 내 모습이 전국으로 나갔다. 인간, 크록, 수생족, 비익족, 묘인족 할 것 없이 전 국민이 손을 잡고 간절히 ‘우리’의 승리를 기원했다.
사회가 바뀌어가고 있다는 건 거리를 몇 분 걷지 않았는데도 쉽게 관찰할 수 있었다.
여러 종족이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흔했다.
비익족 여전사와 크록 전사가 나란히 걸어가거나, 중갑을 입은 모험가들이 분식점 앞에 옹기종기 모여 오뎅을 후후 불어 먹고 있기도 했다.
물론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난민 출신과 한국 출신의 격차,
계층 문제, 입법 문제, 종교 문제.
하나하나 쉽지 않은 산이었다.
“말수가 적어지는 걸 보니 또 일 생각을 하는구나.”
“...어쩔 수 없네요. 직업병인가 봅니다.”
“혹시 먹고 싶은 게 있느냐?”
우르술라가 식당 간판이 나란히 모인 곳을 가리켰다. 에신 출신을 상대로 영업하는 황국식의 요리점이었다.
“있더라도, 투구를 쓴 채로는 어렵겠죠.”
“테이크아웃하면 되느니라.”
그녀의 입에서 영어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우리는 튀김과 말린 고기 등 길거리 음식을 바리바리 싸들고 궁으로 돌아왔다.
너무 많이 들고 온 감이 있어, 경비를 서는 근위전사들에게도 조금 나누어주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집무실 책상 위에 음식을 깔아놓고 TV를 켰다.
사모하는 여인과 간식을 깔짝이고 있노라니 근래 머리를 떠나지 않던 정체성 문제는 부질없게만 느껴졌다.
지금 와서 하는 말이다만, ESS는 프로그램 편성을 더욱 다변화할 필요가 있다. 여기가 북한도 아닌데 주구장창 뉴스만 내보내는 건 너무하지 않냐고.
그래도 시청자의 의견을 반영하기는 하는 모양이다. 나와 관련된 별 시답잖은 가십거리로 뉴스 꼭지 절반을 채우는 걸 보면.
아길리는 ESS에서 완전히 자리를 잡아가는 모양새였다. 이젠 그녀의 이미지라고 하면 다가트 특유의 노출 심한 의상이 아니라, 단정한 아나운서의 복식이 먼저 떠올랐다.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스트리아 대영주 이졸데의 구명을 위해 황국으로 떠났던 우르 외교부장관과 정기호 장군이 귀국했습니다. 우르 장관은 예정되어 있던 인터뷰를 모두 취소하고, 요새도시를 통과하자마자 곧장 수도로 떠났습니다.”
나와 우르술라의 시선이 마주쳤다.
“알고 있었습니까?”
“아니, 나도 방금 보았다.”
그녀와 외유를 즐기느라 오늘 할 일을 전부 뒤로 미뤄뒀는데, 하필 그사이에 보고가 들어왔던 모양이다.
“어째 불안해지네요.”
화면에 비치는 우르의 표정은 빈말로라도 좋다고 할 수 없을 만큼 굳어있었다. 그와 동행한 정기호와 제후라도 마찬가지였다.
...제후라는 빼야겠다. 묘인족은 항상 웃는 얼굴로밖에 보이질 않아서.
똑똑.
박이나 실장이 노크와 동시에 문을 열더니, 우리를 보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어머, 죄송해요, 제가 방해했나요?”
“전혀.”
“방해다.”
우르술라와 내 말이 엇갈렸다. 박이나 실장은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갈등을 겪는 듯했다.
“말씀하시죠.”
“죄송해요, 오늘 아무리 찾아도 안 계시기에. 우르 장관님이 방금 입궁하셨어요. 표정이 좋지 않으시던데, 무슨 일이 있어 보이셨어요. 당장 대통령님을 뵙고 싶다고 하세요.”
“...갑시다.”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깐의 휴가가 이렇게 끝이 나는구나.”
“누님 덕분에 복잡한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종종 오늘처럼 시간을 내보죠.”
“먼저 가 보거라. 난 이것들을 마저 끝내겠다.”
우르술라가 먹다 남긴 간식에 손을 뻗었다.
나는 그녀를 남겨두고 곧바로 대전으로 향했다.
환상 속 화려하던 모습과 달리 투박하기만 한 대전에는 우르와 정기호, 제후라 세 명만이 자리했다. 정기호는 기둥에 몸을 기댄 채 담배 연기를 뻐끔뻐끔 피워 올렸고, 제후라는 팔짱을 낀 채 나를 뚫어져라 주시했다.
이상한 건 우르였다. 그는 답지 않게 불안한 얼굴로 쳇바퀴를 돌 듯 대전 바닥을 맴돌았다.
“어이.”
우르가 나를 홱 쳐다보았다.
“이제야 오는군.”
“갔던 일은 어떻게 됐냐? 이졸데는? 네 아버지는 뵈었고?”
“아버지는 만나 뵙지 못했다. 내가 만난 건 형님뿐이다. 일황자, 게라르 게네발.”
그가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무슨 문제라도 있었나?”
“문제? 문제라면 항상 있었지. 그 빌어먹을 혈통 자체가 문제다.”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내게 불안하게 매달렸다.
“이라올라를 기억하나. 한때 카둔의 챔피언이었던 여성이 어째서 아버지의 근위전사가 되었는지. 아버지가 장래가 유망한 자들을 세뇌시켜 자신의 심복을 늘리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 말이다.”
“그래, 알고 있지.”
“형님이 변했다.”
그의 말은 짧았으나, 담긴 내용은 컸다.
“세뇌당했다고? 네 아버지한테 말이냐?”
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충격으로 뒷말을 곧장 잊지 못했다.
“......하지만 왜 자기 아들을?”
“그야 뻔하지 않나.”
우르가 분노로 몸을 떨며 말했다.
“나 같은 놈이 또 생기는 걸 막으려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