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162화
흘러간다 (17)
채찍이 빠른 속도로 뻗어왔다. 나는 채찍 끝을 쳐내며 오른 어깨가 아직 예전 같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다행스러운 건 나브니의 무기술이 내 예상보다 훨씬 떨어진다는 점 정도.
그녀는 평생 싸움이라고는 해본 적 없는 사람처럼 서툴게 채찍을 휘둘렀다. 나는 방어에 전념하다가, 적당한 틈을 타 그녀의 왼발 뒤꿈치를 베었다.
날카로운 비명소리.
순간적으로 눈앞이 벼락이 치듯 번쩍거렸다.
“.......”
나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눈을 크게 떴다.
황량하던 사막은 온데간데없었다.
나는 높다란 왕좌에 앉아 무료한 표정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황금으로 치장된 대전은 날 접견하러 온 사람들로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볐다.
김형식 총리, 박이나 실장, 크롱크, 오르기, 우르, 이네스, 정기호, 진소미, 화이트모카, 카룩카이, 제후라...
뿐만이 아니다.
심판의 그니르, 최강의 에사인이라는 길레악, 심지어 그림자의 오데르까지 내 발밑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한 잔 더 할래?”
나긋나긋한 목소리.
한 여인이 다가와 새빨간 과일주가 담긴 잔을 권했다. 풍성한 흑발을 늘어뜨린, 쳐다보는 것조차 두려울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나는 잠시 그녀가 누구였는지를 떠올렸다.
우르술라?
언뜻 낯선 이름이 뇌리를 스쳐갔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기억은 금방 부스러졌다. 나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이름을 입 밖으로 끄집어냈다.
“필요 없어, 나브니.”
십여 년의 세월을 함께하고도 어떻게 그녀의 이름을 잊을 수 있었을까? 이래서는 무심한 남자라는 비난을 피하기 힘들지 않나.
나브니는 내 곁에 기대어 잔을 기울였다. 나는 그녀의 붉은 입술을 홀린 듯 쳐다보다가, 김형식 총리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오늘의 정례브리핑을 들으시겠습니까?”
“해보아라, 그래야 네 존재가 쓸모를 이어갈 수 있을 테니.”
“감읍하옵니다.”
부쩍 늙은 총리가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펼쳤다. 박이나 실장이 안쓰러운 얼굴로 그의 곁에 가서 섰다.
나는 총리가 무의미하기 짝이 없는 잡설을 늘어놓는 동안 나브니의 귓불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존엄한 지도자가 아랫것들의 하소연에 일일이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구태는 구시대의 에사인들과 함께 사장되었다. 총리의 넋두리는 무료한 나날이 흘러간다는 걸 일깨워주는 추임새에 지나지 않았다.
“......다음 안건입니다. 대장군 막시무스의 부대가 서쪽 변경에서 반란군에게 기습당했습니다. 막시무스 장군은 군을 대영주 메라의 영지까지 물린 뒤 전열을 재정비하고 있습니다. 그는 반란을 완전하게 제압하려면 십만의 군대가 더 필요하다고 합니다.”
총리는 십여 분이 지나서야 간신히 내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
반란은 대륙을 통일하고 안정기를 이룬 이 나라의 유일한 골칫덩이였다.
처음에는 고작해야 몇몇 탈영병의 난동에 지나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러던 것이 곰팡이처럼 세력을 불려, 지금은 정규군과 대등하게 겨룰 정도로 자라나고 말았다.
“성가시게 하는군.”
“송구하옵니다. 막시무스 장군께는...”
“위대하신 분이시여, 감히 청하건대 무능한 막시무스를 내치시고, 제가 군대를 이끌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맡겨만 주신다면 한 달 내로 반란군 수괴의 목을 베어 가져오겠나이다!”
등이 굽고 비쩍 마른 사내가 고개를 들며 외쳤다.
그니르.
한때 심판자라는 별칭을 달고 황제의 충성스러운 심복 노릇을 했던 그는 이제 나만 바라보는 개가 되었다.
그가 마치 나와 대립했던 과거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열렬하게 충성심을 내보일 때면 나는 흐뭇한 마음이 절로 들곤 했다.
“그래, 너라면 다를 것이라고 믿는다, 그니르.”
“감사합니다!”
사내의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막시무스는 갑옷을 벗기고 수도로 올려라. 임무에 실패한 벌은........팔 하나를 잘라내면 적당할까.”
“명을 받듭니다!”
잘린 사지는 어차피 새로 돋는다.
하지만 내가 그만큼 실망했다는 뜻은 전달할 수 있겠지.
나는 대전을 걸어 나가는 그니르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총리에게 넌지시 물었다.
“반란군의 리더가 누구지?”
“우르술라라고 하는, 위대하신 분께서 신경 쓰실 것도 없는 불충한 자이옵니다.”
“아하.”
반란군 건으로 과거에도 들어봤던 이름 같다.
하긴, 어쩌다 떠오른 이름치고는 너무 낯익게 느껴졌지.
나는 그 이름을 금방 다시 지워버렸다.
어차피 다시 들을 일이 없을 것이기에.
그니르는 탐욕스러운 기회주의자이나, 그렇기에 본인에게 주어진 찬스는 결코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는다. 그는 필요하다면 대영주 메라의 영지를 초토화시켜서라도 자신이 내뱉은 말을 지킬 것이다.
총리가 보고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갔다. 동시에 다시 무료하고 안온한 일상이 찾아왔다.
선물로 내 환심을 얻어 보려는 이름 모를 영주들, 단조로운 음악과 무희들의 반복되는 춤사위.
“후회하지 않아?”
나브니가 내게 물었다.
“뭘 후회한다는 거지?”
“그날 날 살려준 거.”
나는 고개를 내려 그녀의 발목어림을 살펴보았다. 그녀의 왼발 뒤꿈치를 뒤덮은 흉터가 보였다. 완미함에 가까운 육신의 유일한 흠결이었다.
“후회를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군. 덕분에 이렇게 세상을 얻을 수 있었는데.”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가끔 당신의 눈이 날 앞에 두고도 다른 곳을 헤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여인들이란 어찌나 이리도 한결같은지. 얼마나 많은 부를 가져다주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건 하나같이 끊임없이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
“그 눈 이야기는 그만해, 나브니. 나는 항상 너만 바라보고 있으니까.”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어? 그날 날 죽여버린, 평행세계의 당신은 어떤 운명을 맞이했을지.”
“난 네가 왜 기억도 잘 안 나는 과거의 일을 다시 끄집어내는지 모르겠는데.”
“대답해봐. 잠깐이면 되잖아.”
그녀가 속삭이듯 나를 재촉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세상만사에 무감각해진 내게 유일하게 살아있는 것이었다.
“글쎄. 무한한 힘과 권력을 두고 다른 선택을 내릴 이유가 없지만, 그랬더라면 머지않아 황제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 절망했겠지. 당시 일개 에사인에 지나지 않을 나로서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었을 테니. 결국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든지, 동료라고 부르던 너저분한 것들과 최후를 맞이하든지, 둘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당신이 바라는 미래가 그런 건 아니었지?”
“아니었어.”
나는 딱 잘라 대답했다.
“당신은 나와 함께한 세월을 후회하지 않지?”
“당연하지. 그 질문은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합의했을 텐데.”
“그러면 대체 왜 내게 이러는 거야?”
“나브니...!”
나는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그만 망부석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내 손이 그녀의 가느다란 목줄기를 움켜쥐고 있었다.
핏기가 얼굴 위로 몰리고, 파란 정맥이 터질 듯이 부풀었다. 그녀는 죽어가는 목소리로 내게 애원했다.
“제발.......이러지......”
번쩍.
눈부신 광채가 시야를 허옇게 물들였다.
나는 미간을 찡그리며 초점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황금과 비단으로 장식한 대전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대신 나타난 건 온통 찢어지고 기울어가는 막사였다.
쿵, 쿵, 쿵.
90밀리 박격포가 야지를 맹렬하게 타격했다.
기관총 소리, 군령을 내리는 장교들, 거대한 함성과 천지사방을 잡아먹는 불길.
나는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단 하나 바뀌지 않은 게 있다면 나브니였다. 그녀는 여전히 내게 목을 잡힌 채였다.
그녀는 목이 졸리다 못해 눈이 까뒤집어지고 있었다.
나는 얼결에 손의 힘을 풀어버렸다.
“쿨럭......컥, 커헉...”
그녀는 바닥에 쓰러져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부채처럼 산발한 모습.
저 비길 데 없이 아름다운 외양이 그녀의 진짜 모습일 터.
베었다고 생각한 발목은 멀쩡했다. 그 썩어가던 몰골을 비롯하여 내가 보고 겪었던 모든 것은 그녀의 정신세계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아쉽네.”
그녀가 입가를 타고 흐르는 침을 닦으며 힘겹게 웃었다.
“일 분만 더 버텼더라면 널 영원히 가둘 수 있었는데.”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정신계 술법이라면 군체의식을 상대할 때 익히 겪어본 바였다.
그러나 군체의식이 썼던 술법은 나브니의 것과 비교하자면 어린애 장난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그녀와 장장 십오 년이란 세월을 지새웠다.
나는 그녀와 손을 잡아 세상을 정복하고, 한없는 쾌락을 맛보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다 점차 어둠에 물들어갔다.
나는 그 과정을 올올이 꿰고 있었다.
그녀와 살을 맞대고 보낸 숱한 나날들마저.
어처구니없게도 지금 나는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료들보다 그녀에게 더한 유대감을 느꼈다.
“어이없다는 표정 짓지 마. 어이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내 모든 마력을 다 퍼부었는데도 네 정신력을 제압하는 데 실패했다는 게 좌절스럽네.”
그녀는 완전히 탈진해버린 것 같았다.
마력을 다 써버렸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다 환상이었지?”
“왜, 만족스러웠어?”
나브니가 쌔액 웃었다.
“흔해빠진 환상과 다를 거야. 조잡한 장난으로는 절대 널 속일 수 없을 거라고 오데르가 피드백을 해줬거든. 그래서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주연으로 참여했지. 그러니 너무 억울해하지 말라고. 너만 시간을 내다버린 게 아니거든.”
문득 오른손에 중량감이 느껴졌다. 나는 여전히 울토르의 대검을 소환해둔 채였다.
그녀는 내 시선을 의식한 듯 검을 쳐다보더니, 작지만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넌 날 못 죽여.”
그 말은 맞다.
나는 술법의 여파로 술에 취한 사람처럼 혼란스러웠다.
게다가 나는 그녀가 내 공격을 막기 위해 동원 가능한 다른 극단적인 수단도 알았다.
십오 년이란 세월을 함께하다 보면 별별 것을 다 알게 되는 법이다.
“하지만 난 널 어쩌지 못하지. 내 지배가 먹히지 않으니까.”
그녀가 옷을 추스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도 될까?”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이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의 악연은 이제부터 시작인 것 같다는.
“가라.”
나는 칼끝으로 막사 출구를 가리켰다.
“그리고 가루장사는 그만둬라. 안 어울리니까.”
“뭐?”
“신성 위원회도 그만둬라. 오래가지 못할 나라다.”
“뭐야, 설마 너 진심인 거냐?”
그녀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나는 그녀를 쳐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나더러 투스라를 닮았다고 했지. 나도 그 말에 일정 부분 공감한다. 다른 건 몰라도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는 그럴지도 모른다. 투스라를 도왔던 운명의 에사인이 이젠 나를 돕고 있기도 하지. 그래서 하는 충고다. 네가 변하지 못한다면, 네가 아무리 대단한 존재들과 손을 잡더라도 나는 결국 널 죽이고 말 거다.”
그녀의 까만 눈동자가 호기심을 담은 채 나를 훑어보았다.
“넌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알 텐데.......그래도 날 죽일 수 있다고?”
“너도 날 충분히 겪어봤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하도록 하지.”
“......그러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답을 해주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나도 딱히 그녀의 답을 들으려는 게 아니었다. 나는 막사 입구에 드리운 휘장을 젖히며 바깥으로 나섰다.
멈췄던 시간이 십오 년을 거슬러 돌아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