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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61화 (161/205)

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161화

흘러간다 (16)

회담장으로 출발하기 전, 나는 이네스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그녀는 군체의식과 하나일 때 수많은 영혼의 기억을 공유했는데, 그중에는 나브니의 영향력 아래 놓였던 성노동자도 많았다.

“나브니는 널 샅샅이 벗겨먹을 거다, 라힐.”

이네스가 평소보다 훨씬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욕망이란 너란 사람을 규정하지만, 그것들 중에는 네가 인정하고 싶지 않을 추한 것이 얼마든지 있어. 나브니는 그런 것들을 밖으로 끄집어내 전시할 거다.”

“그럴 때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지?”

“대응 못 해, 그건 분명 네 일부니까.”

그땐 이네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몰랐다.

이제는 알겠다. 우르술라의 몸을 빌린 이 요물에 의하자면 나는 꽤나 권력을 즐기는 인간인 모양이었다.

게다가 내 마음속 밑바닥에는 황위를 향한 열망도 있나 보다.

나 아니면 누구도 해낼 수 없다고 여겼기에 이 힘과 권력을 놓아주질 못하는가 보다.

“과연 너는 욕망의 에사인이 맞군.”

“알아보겠느냐.”

나브니의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그러니 얼굴도 모르는 하찮은 것들을 위해 살겠다는 입 발린 말은 그만 집어치우거라. 너는 그것들의 기쁨이나 슬픔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어디 그뿐이겠느냐? 때에 따라서는 그들의 슬픔이 네 기쁨이 될 수도 있지.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도 네가 잘 알 터.”

그래, 잘 알지.

나도 평소 그게 미안했다고.

근래 내 조각상 앞에서 이런저런 소원들을 비는데, 소원을 들어줘야 할 나란 놈이 소원을 비는 사람보다 하등 나을 게 없다는 거.

애초에 어쩌다 나 같은 놈이 에사인이 됐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외교부 특채 소식에 전화기 붙들고 펄쩍 뛰던 놈 아니었나?

그런 놈이 지금 국제정세를 논하질 않나 남의 나라에 특작부대를 파견하질 않나.......

권력욕 하나만큼은 확실하네.

스윽.

나브니가 가루를 내 쪽으로 밀었다.

그녀가 팔을 움직일 때, 나는 그녀의 유혹적인 몸짓에서 눈을 떼놓지 못했다.

이 심각한 분위기에, 자리에, 나 스스로도 어이가 없다만, 꿈에서나 그리는 이상적인 조형이 코앞에서 살아 움직이니 눈이 이성의 제어를 들어먹질 않았다.

“참지 않아도 된다.”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은은한 라벤더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향기마저도 내 맞춤으로 세팅하다니, 기가 막힌 디테일이다.

“비난은 잠깐뿐이지만, 쾌락은 영원하다. 누구도 네게 맞설 수 없도록 무한히 강해져라. 부, 영예, 여자, 네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거머쥐어라. 오직 나만이 널 도울 수 있다.......난 너를 너보다 잘 이해하는 유일한 존재니까.”

“...대단하시구만.”

나는 나브니의 검은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나직하게 감탄했다.

이쯤에서 인정해야겠다, 그녀는 대단히 위험한 여자다.

하지만 내가 감탄한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 스콧이었다.

스콧은 대화가 이 지경까지 왔는데도 팔짱을 낀 채 눈이 뚫어져라 사태를 관망하기만 할 뿐이었다.

UA를 대표하는 자격으로 날 서포트하겠다더니, 누가 보면 서포터가 아니라 벙어리를 데려다놓은 줄 알겠다.

“어떠냐, 나와 손을 잡겠느냐?”

“그러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다.”

“들어보도록 하마.”

그녀가 허벅다리를 꼬며 등을 의자에 기대었다.

나는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품에서 미리 준비해둔 자그만 물건을 하나 꺼냈다.

내 것은 돌돌 말린 종이였다.

“미안, 신하들이 요구한 게 많거든. 기억력이 그리 좋지 못한지라.”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종이를 편 뒤 위에서부터 국어책을 읽듯 무미건조한 투로 읽어 내려갔다.

“먼저 배상금이다. 한화로 50조 정도면 적당하다는 게 중론이더군. 그 정도 금액이라면 우리 국민의 목숨을 앗아간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다는 걸 인정해주도록 하지.

둘째, 네 그 알량한 가루약을 만드는 시설을 모조리 폐쇄해라. 그리고 약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삶을 되찾아주기 위해 국가의 역량을 총동원하도록.

셋째, 이제니오스 신성 위원회의 리더십은 국제사회와 어우러져 함께 갈 수 없다는 걸 증명했다. 군대를 해산하고, 의회를 휴정하고, 공화국의 신탁통치를 받아들여라.

넷째, 이제니오스 신성 위원회 위원장 나브니는 공화국 대통령 라힐에게 머리를 조아려 사과하고...”

“잠깐!”

나브니가 뾰족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마저 읽도록 내버려두지 그래. 이 뒤가 재미있는 대목인데.”

“도대체 그것들이 다 무엇이지? 우린 서로 손을 잡는 이야기를 하고 있던 게 아니냐?”

“그랬지. 먼저 네가 죗값을 치른 후에.”

그녀가 날 가만히 쳐다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네가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니다. 네 욕망을 직시해라, 라힐.”

“뭘 모르나 본데, 이게 정확히 내가 원하는 바야. 나는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날 위해서 널 단죄하려는 거라고.”

나는 그녀에게 처음으로 미소 비슷한 걸 지어주었다.

“그게 질서의 에사인이 해야만 하는 일이잖냐.”

거듭 말하지만 그녀는 대단한 달변가다.

원하기만 한다면 누구든지 꼬실 수 있을지도.

하지만 이번만큼은 상대가 나빴다. 아무리 유혹적인 모습을 하고 달변을 늘어놓는다 한들, 내게 지은 죄를 숨길 수는 없는 법이라.

“하지만 너는...”

나는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자꾸 내 소시민적인 면모를 강조할 필요 없어. 내가 결함 많은 놈이라는 건 내가 잘 안다고. 얼마나 결함이 많은가 하면 일생일대의 기회를 앞에 둔 이 순간조차 흉신을 무릎 꿇리겠다는 천박한 영웅심리에 들떠있을 정도지.”

“실례합니다.”

드디어 스콧이 끼어들었다.

“이쯤에서 배상금액을 조정하고 몇 가지 안을 손봐서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그 안 중 하나라도 내가 받아들일 성싶으냐.”

나브니가 코웃음을 쳤다.

“그렇다면 협상 결렬이로군.”

“라힐 님, 협상 결렬은 전쟁을 의미합니다. UA는 언제나 공화국의 편에 서겠습니다만, 현재 UA 회원국은 황국을 상대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전쟁을 치르는 중입니다. 이제니오스 신성 위원회는 공화국이 단독으로 상대할 수 없는 강국이고, 저희도 현실적으로 공화국을 돕는 데 한계가 있으니만큼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하시는 게...”

“총독님도 그쯤 하시죠. 제 권능이 어떤지 잘 아시잖습니까.”

스콧 총독의 입이 다물렸다.

하루 만에 당사국에 연락, 삼 일 만에 회담장 마련.

한통속까지는 아니더라도, UA와 신성 위원회가 필요 이상으로 친한 관계였다는 정황은 차고 넘쳤다.

“이해할 수가 없군. 네 꿈을 이룰 기회와 맞바꾸려는 게 지금껏 일궈온 터전을 멸망으로 몰아가는 선택이란 말이냐.”

“나야말로 이해가 안 가는데. 남의 나라 국민에게 정신계 마법을 걸 때 뭘 기대했던 거지? 그런 얼굴을 하고 나오면 로맨스라도 생길 줄 알았나?”

“아니었어? 나는 네가 내게 반했다고 생각한다만.”

나브니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끝까지 알아내지 못한 건 그녀의 진정한 속내였다. 그녀의 정신계 방어능력은 마음을 읽는 내 권능으로 간파할 수 없을 만큼 두터웠다.

- 시작합시다.

나는 오르기에게 명령을 내렸다.

별안간 회담장 바깥이 시끄러워졌다. 멀찍이서 병사들의 고함이 들려오는가 싶더니, 난데없는 뿔피리 소리가 모든 소음을 집어삼켰다.

스콧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라힐 님, 이런 식의 개전은 국제법에 어긋납니다!”

“저쪽 세계의 국제법이겠죠. 그리고 저는 언제나 제 편이라는 UA가 성문화하지도 않은 관례를 문제 삼지는 않으리라 봅니다.”

충천한 화광이 천막의 얇은 천을 온통 붉게 물들였다. 흡사 온 세상이 타오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우리 군대는 동쪽 숲을 완전히 불살라버릴 작정으로 작전에 임했다. 소울필렛과 맞바꾼 소이탄이 흡사 우박을 퍼붓듯 적진에 들이쳤다.

소이탄환에는 얼마 전 내가 직접 사인해 생산에 들어간 마법시약이 들어가 인화력을 몇 배나 높게 끌어올렸다.

목생족도 가만히 있진 않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급수차를 수백 대나 대기시켜놓은 것을 보았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약점에 대한 대비를 하고 나왔다.

하지만 우리가 화염계 마법과 소이무기를 결합시킬 줄은 몰랐겠지.

숲과 함께 재가 되거나, 병력과 장비의 손실을 감수하고 도망치거나, 선택의 폭이 넓진 않을 거다.

스스스.....

나는 불타는 숲을 배경 삼아, 손을 앞으로 뻗어 울토르의 대검을 소환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나브니. 지금이라도 내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살려서 보내주도록 하마.”

나브니의 미소가 점점 짙어졌다.

“옛날에 너 같은 남자가 있었다. 기록으로 남기지 못했을 만큼 까마득한 옛날이었지.”

그녀가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손가락을 위로 뻗으며 딴소리를 했다. 스콧 총독은 막사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까딱하다간 오천 명의 평화유지군도 함께 잿더미가 될 판국이니까.

막사가 점점 흐릿해졌다. 병사들의 고함소리도 아스라이 멀어졌다. 대신 나타난 건 황량한 사막과 부스러지는 모래먼지였다.

나는 눈을 부릅뜨며 주변을 쳐다보았다. 정신계 방어를 위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술법은 내 방어능력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몸을 팔아 하루하루 연명하던 천한 계집애에 지나지 않았어. 그 남자에겐 죽기 전까지 말도 못 붙여봤지.”

나브니가 내 앞에 서있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고대 황국의 복식을 입고.

그녀의 손에는 기다란 채찍이 들렸다. 짐승 가죽을 단단히 꼰, 무기로 쓰기 위해 만든 채찍이었다.

촤아악.

마력을 가득 머금은 채찍이 그녀의 팔이 움직일 때마다 칼날처럼 낭창낭창 휘어졌다.

“반면 그는 하늘이 시샘할 만큼 뛰어난 재능과 운을 독차지한 귀인이었어. 심지어 운명마저 그를 도왔어. 그는 나라에서 제일가는 고귀한 여식을 아내로 맞이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세상 전부와 싸우기를 원했어. 모든 왕국을 자기 발아래 무릎 꿇릴 때까지 멈추지 않았지.”

낯익은 이야기였다. 어째서 나브니의 입에서 이 이야기가 나오는지는 모르겠으나.

“투스라인가?”

신성 파르마 제국을 멸망지화로 이끌었던 자.

출신도 모습도 잊힌 채 황위 뒤에 숨어버린 자.

나브니가 말하는 귀인이란 황국의 황제를 가리킴에 틀림없다.

“뭐야, 알고 있었네.”

나브니가 킥 웃었다.

그녀의 채찍이 팽팽하게 곤두서 내 가슴께를 가리켰다. 나는 즉시 대검을 들어 방어자세를 취했다.

움직임이 평소 같지 않았다. 정신계 마법이 이목을 가리고 있는지라.

나는 오데르와 싸우며 얻은 깨우침을 다시금 되새겼다.

에사인을 상대할 때는 상대의 영역이 아닌 내 영역에서 맞서라.

이 환상이 그녀의 영역이라면, 미몽에 갇힌 지금에도 똑똑히 보이는 그녀의 죄업은 내 영역이다.

“역시 기세가 좋구나, 여기까지 와서도.”

그녀는 탐욕과 집착으로 얼룩진, 욕망의 지배자다운 미소를 지었다.

이어서 그녀의 모습이 본래 자신의 것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 없으리만치 썩어 문드러진, 오래전에 죽은 자의 형상이었다.

등이 부풀고, 몸집이 커지고, 독소로 가득 찬 입이 쩍 벌어졌다. 찢어진 거죽에는 구더기가 들끓었다.

“너 정말 그 남자와 닳았는걸.”

그녀가 머리 위에서 날 내려다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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