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160화
흘러간다 (15)
“내가 원한 건 정상회담이 아니라 배상금이었을 텐데.”
“회담에 저희 측 대표도 배석합니다. 저희는 최대한 라힐 님의 의견이 관철되도록 지원하겠습니다.”
나는 모리스의 미소 띤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마음을 읽을 수 없는 상대와의 대화는 항상 껄끄럽다.
UA가 굳이 이런 타이밍에 기계인간으로 대사를 교체한 이유는 뻔했다. 그들은 진실을 꿰뚫어보는 내 권능을 경계한다. 내 권능을 기피한다는 것 자체로 뒤가 구리다는 걸 말해주고 있지.
“좋다.”
나는 흔쾌히 대답했다.
“나브니를 만나겠다.”
“언제쯤으로 날을 잡을까요?”
“삼 일 후.”
오데르와 먼저 겨뤄보길 다행이다. 얼마 전의 나는 의욕만 넘칠 뿐이지 권능을 어떻게 써야 할지조차 몰랐으니까.
하나의 중국과도 비슷했달까.
그놈도 마력만 많았다뿐이지 내실이 없었지.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다. 나는 독립된 신격으로서 욕망의 에사인을 대면할 준비가 되었다.
회담 일정이 예정대로 잡혔다. 장소는 UA가 정글 한가운데에 마련한 중립지대였다. UA는 장소만 마련해준 게 아니라,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오천 명의 평화유지군을 급파했다.
UA는 분명 나름대로 노력을 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선수들의 생각은 달랐다.
십만 명의 전사들, 각종 기계화 장비들.
우리는 주어진 삼 일 동안 동원 가능한 전력을 총집결시켰다.
위세를 보이려는 건 신성 위원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우리보다 세 배 많은 병력을 끌고 와서 회담장 인근을 둥글게 둘러쌌다. 맹세코 저렇게 많은 목생족을 한자리에서 보는 건 난생처음이었다.
- 나브니! 나브니!
목생족 군단이 함성을 내지를 때마다 나무들이 부르르 떨며 잎사귀를 한 움큼씩 떨어뜨렸다. 우리 쪽 전사들도 질세라 뱃가죽이 터질세라 고함을 질렀다.
오천 명의 평화유지군은 꿔다놓은 보릿자루나 마찬가지였다.
이미 양군은 피를 뒤집어쓸 준비를 마친 채였다.
“......무시무시하군요.”
홍정수가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의 꽉 쥔 주먹이 잔떨림을 일으키는 걸 보았다.
그는 여기 올 필요가 조금도 없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공당의 대표일 뿐이지, 전사는 아니고 장군은 더더욱 아니었으니.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이유를 들어 그의 합류를 말렸었다. 그러나 그는 굳이 나와 함께하겠다고 우겼다.
- 정치인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결과를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책임을 져야 할 필요도.
홍정수는 정치를 환멸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환멸하던 무리와 같은 부류가 되는 걸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그가 물러서지 못한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목소리만 큰 오합지졸일 뿐입니다. 라힐 님의 군대는 저것들보다 훨씬 강한 적들을 넘어왔습니다.”
검은 날개를 가진 비익족 여전사가 비웃는 투로 말했다.
엘리시아,
그녀는 더 이상 강철의 자매단원의 복식을 입지 않았다.
그녀는 금빛 갑옷을 벗어 던지고, 무릎까지 늘어지는 흑색 사슬갑옷을 걸쳤다.
방패와 검을 버리고, 키보다 큰 롱 메이스를 들었다.
나는 엘리시아의 힘이 근래 부쩍 늘었음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잊힌 영광당을 창당하며 많은 난민들의 선망과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뒤틀린 영혼들의 수를 헤아릴 수가 없군요. 나브니의 죄가 실로 깊고 무겁습니다.”
화이트모카는 여느 날과 같이 마대 자루같이 헐렁한 옷 한 벌만 걸친 채였다.
달라진 건 그의 손에 들린 지팡이뿐이었다. 저 흰 지팡이는 마그나크록의 송곳니를 깎아 만든 것으로, 사용자의 주술력을 증폭하는 신물이라 들었다.
엘리시아와 화이트모카, 두 당대표는 실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실력자였다.
홍정수 혼자만 엉덩이 무거운 정치인 행세를 할 수 없었던 다른 이유였다.
나는 이유야 어찌 되었건 그의 결기가 마음에 들었다.
에신에서 금배지 달려면 저 정도 각오는 되어있어야지.
“어디 보자, 슬슬 시간이.......”
나는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회담 시작까지 약 오 분여가 남아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표들의 손을 한 차례씩 쥐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전쟁만큼은 피하셔야 합니다.”
“전사들은 라힐 님의 명령에 따라 기꺼이 죽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나브니에게 죄를 물을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위대하신 분뿐입니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내게 한마디씩 남겼다.
“가능한 한 여러분의 의견을 참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휘장을 젖히며 막사 밖으로 나섰다. 밖에는 장군들이 열을 맞춰 날 기다리던 중이었다.
“주군.”
오르기가 그들을 대표하여 내게 경례했다.
죽을 준비가 되어있다던 엘리시아의 말은 일부분만 옳았다.
장군들의 머릿속에는 오직 적을 찢어발길 생각뿐이었다. 그들은 나와 함께 싸운다면 결코 패배할 일이 없을 거라 여겼다.
“제가 지시를 내리기 전까지 결코 먼저 나서지 마시길 바랍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오르기에게 신중할 것을 주문하고는 우리 진영을 걸어 떠났다.
중립지역은 평화유지군이 점거 중이었다.
평화유지군은 다인종으로 구성된 전사와 주술사, 그리고 기계화 보병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라힐 님이십니까?”
“그렇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나는 젊은 장교의 안내를 받아 회담장 안으로 들어섰다. 나무 테이블과 머릿수에 맞게 준비된 음료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썰렁한 곳이었다.
“드디어 뵙는군요.”
주근깨가 촘촘하게 돋은 금발 머리 소년이 내게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소년은 나름대로 옷도 빼입고 넥타이도 맸으나, 너무 어리고 앳되어 보여서 이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소년이 단지 들러리가 아니라는 걸 입증할만한 단서는 그의 허리춤에 찬 얇고 긴 펜싱검 한 자루가 전부였다.
“모리스탄 총독 월터 스콧입니다. 그냥 스콧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UA를 대표하는 자격으로 라힐 님을 서포트하기 위해 왔습니다.”
소년이 가슴에 손을 얹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모리스탄 총독이시로군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나는 그와 악수를 나누었다.
모리스탄은 영국의 속령이다. 어떤 자가 이끌고 있을지 궁금했는데, 직접 만나 보니 과연이란 말이 절로 나온다.
그의 죄업 역시 여느 지도자들 못지않게 두터웠거든.
만약 그의 업을 발판 삼아 이 자리에서 응징의 일격을 날린다면, 회담장은 물론이거니와 목생족 진영까지 두 쪽으로 갈라버릴 수도 있겠다.
“앉으시죠, 나브니 님은 조금 늦으실 겁니다.”
나는 자리에 앉으며 회담장 구석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사정이 있답니까?”
“그보다는 주목받는 걸 즐기십니다. 그래도 늦어도 십 분 내에는 오십니다.”
나브니는 스콧이 예견한 대로 정확히 십 분 후에 등장했다.
“.......”
나는 불쾌한 기분이 드는 걸 표정으로 감추지 않았다.
나브니는 욕망의 지배자라는 별호에 걸맞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녀는 헤어스타일과 머리카락 색깔, 키와 가슴 크기, 심지어 발의 사이즈까지, 내가 살면서 굳이 구체화한 적은 없는, 그러나 물으면 이러하다고 대답했을 법한 이상적인 형상 그대로의 모습을 지녔다.
한마디로 요악하자면 우르술라를 꼭 닮았다는 뜻이다.
누님의 미모를 허락도 없이 빌려다 썼으니 불쾌할 수밖에.
“......어처구니가 없군.”
“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일까?”
말투마저 똑같다.
“본래 모습을 드러내라. 베어버리기 전에.”
나는 살기를 가감 없이 드러내었다.
“이게 내 본래 모습이다. 나는 네 욕망을 비추는 거울이니.”
“사실입니다. 나브니의 실체는 사람마다 다르게 보인다고 합니다.”
스콧이 중재에 나섰다. 나는 더 화를 냈다간 나브니의 페이스에 말려들고 만다는 걸 깨달았다.
욕망을 읽힌다는 건 아주 불쾌한 경험이었다. 마치 사람들 앞에서 발가벗겨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그녀가 노리는 지점일 터였다. 평정심을 잃은 채 회담에 임했다간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시작하지.”
나브니가 내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스콧은 나와 나브니의 사이에 자리했다.
“우선 너희 주술사가 우리 인부들을 죽인 건부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나브니가 내 말을 뚝 잘랐다.
“그럴 필요가 있냐니, 무슨 개소리냐.”
“내 말은 굳이 여기까지 와서 하찮은 인간 몇 명이 죽은 이야기를 꺼낼 필요가 있냐는 의문이다.”
그녀는 손을 들어 내가 일어서려는 걸 저지했다.
“발끈하지 말고 내 이야기부터 들어. 네가 진실과 거짓을 꿰뚫어본다면, 나는 네 욕망을 꿰뚫어보니까. 나는 네가 나만큼이나 인부들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 네가 진정으로 바라는 건 그들의 넋을 애도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죽음을 지렛대 삼아 네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라는 것도 알지. 내 말이 틀렸나, 라힐?”
“내 정치적인 목적은 오로지 나라를 위함에 있다.”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렸나?”
그녀의 눈동자가 날 들여다보며 초승달처럼 휘었다.
“거짓 눈물조차 흘리지 않았나? 뭐, 좋아. 우린 생각보다 공통점이 많을 것 같다, 라힐. 우리는 우리가 지도자로서 하는 말들이 얼마나 공허한지 잘 알고 있지. 국민의 아픔보다는 언제나 내 몸뚱이의 아픔이 더 크고, 국민의 배고픔보다는 내 주린 배를 채우는 게 더 간절한 법이잖나. 다른 사람을 위해 눈물 한 방울 짜내는 건 강변에서 사금을 캐는 것만큼 힘들지만, 나를 연민하는 건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쉽지.”
“도대체 뭘 말하려는 거냐?”
“널 위해 준비한 물건이다.”
나브니가 품에서 하얀 가루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이 물건에는 아직 주인이 정해지지 않았다. 다르마알에게 납품하는 물건과는 달라, 몇 가지 주술적인 정련을 거치면 이 물건을 흡입한 자의 영혼은 점차 네게 귀속되지. 너는 죽어서도 충성하는, 진정한 의미의 백성을 거느리게 될 거다.”
“...어처구니가 없군. 나는 네 가루 장사나 도와주자고 여기 온 게 아니다.”
“말했을 텐데, 내 앞에서 욕망을 부정하는 건 부질없는 일이라고.”
그녀의 붉은 입술이 느슨하게 벌어졌다.
“정 부정하고 싶다면 대답해 보거라. 너는 대통령이라 불리면서도 굳이 왜 왕좌에 앉아서 국정을 볼까? 너는 민주주의를 가르친다면서 왜 널 왕처럼 떠받드는 크록들의 행동을 고쳐주지 않는 것일까? 정말로 네 목적이 국민을 위함이라면, 너는 왜 너보다 뛰어난 정치인에게 자리를 넘기고 일선에서 물러나지 않는 걸까?
내가 대신 대답해주도록 하마,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한 것 같으니. 권력이란 오로지 네 것이어야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네가 선거를 치른 건 그저 공화국의 구색을 갖추기 위함이다. 너는 민주주의란 헛소리에 지나지 않고, 네 의견은 항상 옳다는 걸 마음 깊이 알고 있지. 네가 황제를 적대하는 이유는 그저 그가 너의 꿈을 먼저 이뤘기 때문이다.”
“계속 헛소리를 하게 놔둘 겁니까?”
나는 스콧에게 항의했다.
나브니가 소리 높여 웃었다.
“나는 못 할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네 욕망을 입 밖으로 꺼내줬을 뿐이야. 그리고 나는 너를 비난하지도 않았다. 실은 나는 네 꿈을 이뤄주고 싶다, 누구보다도.”
그녀가 혀를 내밀어 윗입술을 슬쩍 핥았다.
“그게 욕망의 에사인이 해야만 하는 일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