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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36화 (136/205)

136화. < 욕망 (6) >

총기로 무장한 병력 수십여 명이 도심 한가운데에서 살해된 사건.

그들의 사인이 총상이 아니라 검상이라는 것,

사건 현장에서 장검을 든 소녀가 목격되었다는 것.

소녀의 신분이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차세대 아이돌 스타라는 것.

여론은 폭발하기 직전의 화산처럼 들끓고 있다. 설령 테일리시가 오디션에서 우승하더라도 이만큼의 주목을 이끌어 내지는 못할 것이다.

이미 대중을 납득시키기 어려울 만큼 일이 커져버렸으니, 차라리 이걸 역으로 이용해 에신을 세계에 널리 알릴 기회로 삼자는 것이다.

"물론 넌 이런 방식으로 유명해지는 걸 원치 않았을 테지. 강요하진 않을게. 네가 돌아온다면 언제든지 환영이다. 여기서도 널 필요로 하는 일이 아주 많으니까.”

"...다크 히어로가 뭐야?”

테일리시가 물었다. 박이나 실장이 나를 대신하여 대답했다.

"정의를 관철시키기 위해 사회의 규범이나 도덕적인 잣대를 무시하는, 악당 같은 영웅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네가 한국에서 한 일이 그런 경우에 해당되지. 너는 에신에서처럼 대가를 받고 살행에 나서지 않았잖아. 단지 자기가 지키고 싶은걸 위해 행동했을 뿐이지.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테고, 돈도 받을 수 없는데도.”

"무슨 말인지 알겠어.”

테일리시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속눈썹을 아래로 드리운 채 잠시지간 말이 없었다.

“할게.”

그녀가 대답했다.

"진짜 괜찮겠니?”

"괜찮다기보다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국에서의 삶을 살아본 뒤에도 다시 그림자로 돌아가기란 힘들 것 같아. 그렇다고 해서 나 같은 계집애가 사람들한테 웃음을 팔면서 산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거 같고. 네가 말한 다크 히어로가 딱이야.”

그녀가 오른손을 슬며시 검자루 위에 얹었다.

“더군다나 아직 처리하지 못한 것들도 많으니까.”

이 살기는 진심이었다.

그녀가 진심을 보여준 덕에 나도 결심을 수월하게 내릴 수 있었다. 그녀를 쐐기로 삼아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깨부수겠다는.

밝혀두지만 김의호 대통령은 테일리시가 십자가를 진다는 계획에 반대했다. 그는 어린 소녀 한 명에게 이런 짐을 지우는 게 온당치 못 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의 각료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그들은 정권 말기의 지지율을 지키는 일에 넌더리가 나있었다.

나는 각료들과 함께 성명문의 내용을 면밀히 조율했다.

우선 지금껏 대한민국을 괴롭혔던 모든 악재는 실은 거대한 악의 세력 때문이었다.

악의 세력은 이차원 너머에 도사리고 있으며, 마법과 술법이라는 불가사의한 힘을 자유자재로 다룬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들을 몰아내기 위해 차원 너머의 국가와 손을 잡았다. 이 나라의 이름은 에신 공화국이라고 한다.

이차원 국가와의 협력은 대한민국에게 수많은 이득을 안겨다줄 것이다. 대한민국은 앞으로도 에신 공화국과 군사적, 경제적인 협력을 이어나갈 것이며, 민간 부문의 교류도 차차 확대해나갈 계획이다.

성명문을 전달받은 김의호 대통령은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이제 인류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세계로 들어서겠군요.”

"이미 인류는 그 세계에 들어와 있습니다. 국민들만 모르고 있을 뿐이죠.”

마침내 성명문의 발표일이 정해졌다. 테일리시는 김의호 대통령이 성명문을 발표할 때 그의 곁에 서기로 했다.

우르 황자와 수석마법사 오르기도 동석이 결정되었다. 그들은 성명문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쇼맨십을 발휘할 광대 역할을 맡았다.

대한민국 정부가 성명 발표준비에 여념이 없을 때, 나는 테일리시와 함께 항상 머물던 호텔에 묵었다.

호텔에 들어오자마자 내가 맞닥뜨린 건 이상민으로부터의 스팸 전화였다.

- 나다.

- 전화 좀 제때 받으면 어디 덧 나냐?

- 방금 귀국했어. 이것도 빨리 받은 거다.

- 그래, 그렇다고 치고. 대체 이게 무슨 난리냐?

- 무슨 난리?

- 뉴스에서 온종일 떠들어대는 중이잖아. 테일리시 님이 간첩 침투사건하고 연루되어 있다며. 네가 출국한 나라가 인터넷이 안 들어 오는 게 아닌 이상 이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이 녀석은 쓸데없이 감이 좋았다.

내친 김에 나는 그에게 거꾸로 물어보기로 했다. 성명문이 발표됐을 때 일반인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

- 그 뉴스가 사실이라면 어떨 거 같냐.

- .......너까지 그러진 말자.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가 그렇게 나오면 진짜 같아서 무서우니까.

- 네 의견이 궁금해서 그래. 연예 쪽으로는 네가 전문가잖아.

- 일단 나는 개소리라고 본다.

- 어째서?

- CCTV 영상에 찍힌 건 테일리시 님이 맞아. 아니라고 우기는 사람도 있던데 내 눈까진 못 속이지. 하지만 영상 자체는 조작이다. 테일리시 님은 24시간 밀착형 서바이벌 오디션에 참가중이잖아. 카메라 감독이 어렵지 않게 알리바이를 증명해줄 수 있을 거다.

그는 말을 하다 말고 피식 웃었다.

- 게다가 달랑 칼 한 자루 들고 총 든 인간을 여럿 죽인다는 게 말이 되냐? 딥 페이크류 기술을 다루는 영상전문가가 장난을 친 모양인데, 아마 테일리시의 경쟁자중 한 명이 유포한 거겠지. 창조논란이라도 만들어 내서 데뷔를 막아보겠다는 속셈이 아니겠냐. 이럴 때는 연예계에 환멸이 느껴지기도 한다.

- 상민아.

- 왜?

- 언론에 나온 내용 전부 사실이다.

- 야, 진짜 너까지 그러지 말라니까.

- 못 믿겠으면 테일리시 바꿔줄까? 지금 옆에 있는데.

나는 테일리시를 돌아보며 물었다. 테일리시는 소파에 오도카니 앉은 채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중이었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감시라도 하겠다는 듯이.

-.......진짜냐?

- 그렇다니까.

- 야, 장난치지 말고.

- 이런 걸로 농담 안 해.

- 하지만........테일리시 님이 도대체 왜...

- 물론 테일리시한테 당한 놈들은 죽어도 싼 놈들이 맞다. 뉴스에서는 간첩이라고 떠들지만, 간첩보다도 훨씬 나쁜 놈들이지. 마약, 인신매매, 뭐 그런 입에 담기도 힘든 추악한 짓을 조직적으로 저지르고 다닌다. 그런 놈들과 목숨 내놓고 싸우는 게 테일리시가 맡은 진짜 임무야.

- 그럼 테일리시님은 007같은 거냐?

- 비슷해.

상민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그의 팬심이 어떤 방향으로 폭주할지 염려되었다.

아무리 당위성이 있다고 한들 살인은 이 세계의 도덕관 기준으로 큰 오점이었기에.

게다가 아이돌 팬은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이 티끌만큼의 오점도 없기를 바란다고 들었다.

연애만 해도 난리가 나는데, 사람을 죽인 일이 그냥 넘어가질 리가.

한참의 침묵 후,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 존나 멋지네.

- ...뭐?

- 존나 멋지다고. 어쩐지, 테일리시 님 같이 완벽한 여자가 단순한 아이돌일 리가 없다 싶었지.

- 너 내 말 제대로 들은 거...

- 고맙다, 봉팔아. 덕분에 모든 의문이 풀렸다. 왜 테일리시 님이 처음에 목각인형처럼 뻣뻣했는지, 데일리 오디션에서 췄던 춤이 춤이 아니라 무술 같았는지. 테일리시 님은 일반인이 아니라 군인이었던 거지, 그렇지? 그러면 간단하게 설명이 되네. 이럴 게 아니라 너한테 들은 이야기를 팬카페에다 올려야겠다. 아가리 파이터들 전부 닥치라고 하게. 출처를 관계자로 해두고 싶은데, 괜찮겠냐?

- 아니, 안 될 건 없다만......

- 진짜 고맙다, 나중에 밥 한 끼 사마!

전화가 끊겼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처음엔 개소리라더니, 태세전환이 이렇게 빨라도 되는 건가.

한편으로는 녀석이 진성 팬보이가 맞다 싶었다. 그는 믿고 싶은 이야기를 누가 들려주기만을 고대했던 것 같다.

"그때 같이 밥 먹었던 사람이지?”

테일리시가 다가오며 물었다.

"그래.”

"뭐라고 해?”

“고맙다던데. 아주 신이 나가지고는.”

"...의외네. 나는 경멸받을 줄 알았는데.”

"널 많이 좋아하는 것 같더라.”

"연예인 흉내 내면서 제일 적응 안 됐던 게 그거야. 무조건적으로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이 생기더라는 거. 에신에서는 더러운 년이라고 매도당하기만 하다가 그런 사람들을 만나니 기분이 나쁘진 않았어. 나도 사람이니까. 미움받는 것보다는 사랑받는 게 나으니까.”

그녀가 느끼는 감정이 내 감정과 비슷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이제 와서 목적 없는 암살이나 하던 시절로 돌아가라고 하면 고개부터 가로저을 테니.

"그 사람, 다시 만나볼 수 있을까?”

그녀가 물었다. 나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인과 교류하는 게 불가능해진 이상, 그녀는 선의를 가진 게 확실한 소수의 사람과 교분을 맺는 방향으로 가야 할 것이다.

드디어 대국민 담화문 발표날이 왔다. 나는 신분을 숨긴 채 자리에 함께했다. 프레스룸에는 오전 일찍부터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수백여 명의 기자들이 서로 조심스럽게 의견을 나누었다. 특종이 예고되었으나, 어떤 내용일지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었다.

잠시 후 오르기, 우르가 관계자 전용의 문을 통해 입장했다. 프레스룸이 벌집을 쑤셔놓은 듯 시끌벅적해지기 시작했다.

오르기와 우르는 이런 자리보다 패션쇼의 모델에 더 어울릴 사내들이었다.

젊고 잘생긴 데다 이국적인 복식을 차려입은 그들은 단숨에 회장에 모인 모든 사람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대체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서유럽 쪽 대사가 아닐까요?”

외교통이라는 기자들이 입방아를 찧었다.

이어서 박병철 외무부장관과 김의호 대통령이 등장했다.

찰칵, 찰칵.

플래시 세례가 소낙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김의호는 굳은 표정으로 걸어와 단상 위에 섰다.

마지막까지 그와 의견을 모으기 어려웠던 건 과연 이 타이밍에 대한민국이 나서는 게 옳겠느냐는 점이었다.

에신에 관한 비밀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나라들이 눈물겨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대한민국의 행보는 자칫하면 다른 나라들의 공적이 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었다.

때문에 우리는 며칠에 걸쳐 담화문 내용을 세밀하게 조정했다.

첫째, 우발적인 사건으로 인해 비밀요원의 정체를 불가피하게 밝힐 수밖에 없었다는 점.

둘째로는 이 모든 게 대한민국을 암중에서 공격해온 제 3국의 책임이라는 점.

성명을 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확실하게 들어 잡음이 나올 소지를 원천봉쇄하겠다는 계획이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이 자리에서 대한민국에 드리운 그늘과, 국민의 대표된 자로서 그 점을 감출 수밖에 없었던 괴로움을 소상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시작되었다. 기자들은 무표정하게 대통령의 말을 노트북으로 옮겼다. 플래시 터지는 소리, 키보드를 두들기는 소리가 부산히 들려왔다.

“...하여 당시에는 그 사건이 북한의 소행이라고 밝힐 수밖에 없었으나, 이는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하겠습니다. 저는 먼저 북한의 최고지도자에게 온당치 못한 비판이 쏠렸던 점을 사과드리고자 하며...”

김의호는 스무 페이지에 달하는 담화문을 높낮이 없는 톤으로 읽어나갔다. 발표가 계속될수록 기자들의 표정이 시시각각 달라졌다.

마침내 마법과 술법을 언급하는 대목에 다다르자, 기자들은 이 내용을 계속 받아써야 할지, 아니면 지지율이 바닥을 뚫고 들어간 대통령의 망언을 가로막을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대통령님, 신국일보 김유라입니다. 질문 있습니다!”

"대통령님, 그 말씀이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입장이 맞습니까?”

질의시간은 발표가 끝난 뒤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기자들은 발표 중간에 벌떡 일어나 목소리를 높였다. 마이크를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목소리는 그들이 질러대는 외침에 묻혀 들리지조차 않았다.

우르가 나선 게 그때였다.

그는 김의호의 곁으로 성큼 다가가, 무수한 카메라의 마사지를 받는 와중에 왼손에서 푸른 불꽃을 일으켰다.

"부, 불이다!”

푸른 불꽃이 삽시간에 동심원처럼 퍼져나가 프레스룸 전체를 휩쓸었다. 사람들은 놀라서 허둥지둥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실화가 번지지는 않았다. 우르가 일으킨 불은 형체를 가지지 않은, 일종의 정신계 마법이었다.

"진정해라.”

우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보여줄 것이 많이 남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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