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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35화 (135/205)

135화. < 욕망 (5) >

우리는 포탈을 통해 수도로 되돌아왔다. 나는 돌아오자마자 가져온 자료의 분석부터 의뢰했다.

이미 우리는 컴퓨터 전문가를 여럿 거느리고 있었다. 김형식 총리는 본인의 넓은 인맥을 유감없이 발휘해 행정부를 알음알음 채워가는 중이었다.

그가 영입한 인사들에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한국의 주류사회에 편입되진 못한, 그러나 실력과 야심만큼은 남다른 아웃사이더란 점이었다.

지금부터 내가 만나볼 김인재란 남자도 그런 사람이었다.

"아, 아, 안녕하십니까.”

덥수룩한 머리에 두꺼운 안경을 낀 사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대면한 지 오 초도 지나지 않았는데 관자놀이에서 땀이 흐르는 게 보일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일어서지 않으셔도 됩니다, 편하게 계시죠.”

김인재는 내 배려에 엉거주춤하게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근육이 얼마나 뭉쳐있던지 마치 로봇이 앉아있는 것만 같았다. 안색은 하얗게 질려 내가 조금만 큰 소리를 내도 자지러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인재는 심각한 말더듬이 증세로 언어장애 판정을 받았다. 그러고도 군대를 면제받지 못했다는 게 그의 비극이었다.

학창시절부터 지속적으로 받아온 따돌림은 군대라는 억눌린 사회 안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말더듬이 증세는 더욱 심해졌고, 불안장애 같은 정신병력까지 얻게 되었다.

결국 그는 사회의 일원이 되지 못했다.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삼십 중반에 이르기까지 방구석에서 나가지 않으며 조금씩 세상에 대한 증오를 키워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국정원 서버를 해킹하여 에신 프로젝트의 존재를 알아냈다.

그는 우리에게 먼저 접근해온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가 처음 우리측 담당자에게 보낸 메시지는 이랬다고 한다.

- 저를 이 지옥에서 해방시켜주십시오. 당신이 제 망상속 인물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주십시오.

나는 김인재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그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얇은 천을 사이에 두고 그의 불안정한 자아가 느껴졌다.

마치 니트로글리세린 같았다.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폭발해버릴 것만 같은.

"저는 당신의 능력에 전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습니다. 사소한 소통문제로 당신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가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뭔가를 말하려고 했으나, 곧 주저하며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제 친구가 준비한 선물이 당신에게 도움이 될 것 같군요.”

나는 마법이 부여된 작은 돌멩이를 그의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우리 진영에는 정신계 마법의 대가가 두 사람이 있다. 이황자 우르 게네발과 성전환 암살자, 이네스.

이 물건은 말더듬이가 어떤 증세인지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이네스에 의해 만들어졌다.

물건의 작용방식은 간단했다. 호랑이 앞에서도 탭댄스를 출 수 있을 만큼 사용자의 자신감을 크게 증진시켜 준다.

말더듬이의 여러 원인 중 심리적인 부분에 대한 해결책이었다.

"이건, 이건 대체.......”

"계속 품에 지니고 계시면 됩니다.”

그는 주저하며 돌멩이를 품에 넣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꺼풀을 한껏 치켜떴다.

"조금만 노력하시면 도구에 의지하지 않아도 곧잘 말을 하시게 될 겁니다. 뭐든 첫 걸음이 어려우니까요.”

“감사, 감사합니다.”

"제가 가져온 usb를 뜯어보셨다고 했는데, 유용한 내용이 있던가요?”

"이, 일단 원본 파일과 번역본을 교차로 보여드리겠습니다.”

김인재가 컴퓨터 화면에 자료를 띄워보였다. 그는 여전히 조금씩 말을 더듬었다. 그러나 분위기는 확실하게 편안해졌다.

나는 그와 함께 usb에 기록된 자료들을 훑어보았다. 경황이 없을 때 들고 나온 거라 쓸 만한 정보가 없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런 걱정이 무색하리만치 파일은 알짜배기 내용으로 가득했다.

임택이 혼돈의 전사라고 부른 존재를 미군은 '프로토타입’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인간이 혼돈의 마력에 노출됐을 때 일으키는 변화를 나이, 성별, 체질, 기질별로 데이터베이스화하려는 프로젝트를 추진중이었다.

그들이 한국에 약을 퍼뜨린 이유는 간단했다, 동양인 샘플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건 ‘알파 원’이라는 개체였다. 알파 원은 혼돈의 마력이 만들어내는 최강의 생명체로서, 겉보기로는 평범한 인간과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프로토타입보다 월등하게 강했으며, 지성과 이성을 유지했고, 다르마알과 언제든지 다이렉트로 소통하는 게 가능했다.

그들은 혼돈의 그릇이 되도록 점지 받은 운명이었다. 수많은 실험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알파 원의 자격을 인정받은 건 단 한 명에 불과했다.

아약.

에신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했던 마법사.

다르마알의 아바타라 여겨졌던 그 자가 바로 알파 원이었다.

“.......혹시나 해서 묻습니다만, 이 파일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신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보안을 무력화하자마자 총리님께 보고를 드리긴 했습니다만, 파일의 내용을 직접 보신 건 대통령님이 유일합니다.”

"잘하셨습니다. 이 건은 결코 외부에 새어나가선 안 됩니다.”

정리를 해보자.

혼돈의 에사인, 다르마알은 일곱 권능에 의해 지구로 쫓겨났다. 그는 복수를 하려 여러 나라 정부와 결탁해 포탈을 여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 작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뛰어난 하수인이 필요했고, 그가 손을 벌린 건 다름 아닌 욕망의 나브니였다.

결국 돌고 돌아 아약이라니.

나는 김인재를 뒤로하고 궁으로 되돌아왔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다르마알이 미국을 장악한 게 사실이라면 앞으로의 행보가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비마법적인 세계를 지배한다. 그들과 대립각을 세운다는 건 현실적으로 수많은 제약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다르마알과 붙어먹는다는 게 사실로 밝혀진 이상 손가락만 빨고 앉아있을 순 없게 되었다.

“여기 계셨군요.”

박이나 실장이 메인 홀로 향하는 내게 다가왔다.

"오늘은 공휴일 텐데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박이나 실장의 차림을 빠르게 스캔했다. 그녀는 매번 입던 여성용 정장이 아니었다. 산뜻한 병아리색 원피스 위에 레이스 달린 자켓을 걸쳤다. 공휴라는 걸 감안해도 그녀의 꾸밈새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느낌이 팍팍 전해져왔다. 소위 말하는 꾸밈노동에 들인 시간이 달랐다.

"그렇지만 중요한 소식들이 몇 가지 있어서 한국으로 가기 전에 챙겨드리려고 합니다. 먼저 평택 미군지기에 관한 보도관제입니다. 불이 났다는 걸 짤막하게 다룬 지역지 한두 군데 말고는 아무 곳에도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우르와 함께 미군의 비밀 연구소를 완전히 작살냈다. 특히 우르가 마지막으로 지른 불이 결정적이었다.

그 불을 끄려면 우르의 마법을 무효화하거나 방어할 수 있는 실력자가 필요할 테지만, 그곳에 그런 자는 없었다.

뼈아픈 손실일 것이다. 들인 돈도 돈이겠으나, 날아간 자료와 인적 자원들은 돈으로 환산할 수조차 없다.

"그리고 테일리시님 말씀입니다만...”

"거기서부터는 내가 직접 말할게.”

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지금쯤 한국에서 24시 밀착형 오디션을 촬영하고 있어야할 테일리시였다. 그녀는 밀랍인형처럼 차가운 낯빛을 한 채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 망쳤어, 내 실수 때문에.”

“망치다니?”

박이나 실장이 태블릿 pc로 포털 뉴스에 걸린 기사 하나를 보여주었다. 예의 무장공비 사건을 다룬 기사였다.

총격을 받아 벌집이 된 트럭과 널브러진 시신들.

그 사이를 장검을 쥔 채 거니는 테일리시가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긴 했으나, 저 실루엣에 저런 선명한 파란 머리는 다른 사람을 떠올릴 상상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이건 대체...”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헤드라인부터 이미 난리가 났다.

유명 아이돌지망생 T씨, 무장공비 침투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

소속사는 입장을 내지 않고 침묵하는 가운데 T씨는 현재 잠적한 것으로 알려져.

"성진기라고 굉장히 끈질긴 기자가 있습니다. 특종을 잡겠다는 욕심에 근처 CCTV 영상을 확보해서 터뜨린 모양입니다. 국정원 요원 보다도 현장에 빨리 와서 자료를 확보했다고 합니다.”

"이게 왜 당일이 아닌 지금 터졌을까요?”

"개인적으로는 성진기 기자가 영리했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너무나 믿기 힘든, 그러나 처음 벌어지는 일은 아닐 광경을 보았던 거죠. 정부가 어떻게든 무마에 나설 것이라 예측하고 이슈의 파괴력이 극대화될 시기를 기다렸다고 보입니다.”

“...환장하겠군요.”

"대한민국 정부에서 외교라인을 통해 비공식 회담을 요청해왔습니다. 대책을 강구해보자는 것 같습니다.”

테일리시를 오디션에서 우승시켜서 에신의 존재를 화려하게 알리겠다는 게 우리 계획이었다.

고작해야 기자 한 명 때문에 그 모든 계획이 시궁창에 처박히고 말았다.

그렇다고 그 기자를 탓하고 싶진 않다. 그는 그저 자기 직분에 충실했을 뿐이니.

"미안해.”

테일리시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땐 너무 화가 났어. 은하한테 화가 난 게 아니라 나 자신한테. 조금 더 잘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거든. 어떻게든 기분을 풀어야할 것 같아서 평소처럼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어.”

"네가 미안해할 일이 아니지. 네 일에 숟가락 얹으려고 한 내가 사과 받을 입장도 아니겠고.”

테일리시는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좋은 꿈을 꿨던 것 같아.”

“...테일리시.”

"친구도 사궈보고,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도 엿볼 수 있었네. 하지만 그 사람들의 말로 말하고, 그 사람들의 옷을 입고, 그 사람들이 하는 걸 흉내 내도 나는 역시 이방인일 수밖에 없겠더라.”

테일리시가 고개를 슬며시 들었다.

“걸스 토크라고 하잖아? 은하하고 카페에 앉아서 신상 옷 이야기나 하고 있으면 얼마나 지루하던지. 도대체 그런 행위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걸까? 나 같으면 그 시간에 검이라도 한 번 더 휘두를 텐데. 이 세상에는 정리해야 할 쓰레기가 넘쳐나잖아. 나라도 나서지 않으면 누가 그걸 치워주겠어.”

그녀는 포식자다. 어떤 껍질을 씌우건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춤과 노래를 배우는 걸 진심으로 즐겼었다. 그건 그녀조차 모르던 자신의 낯선 일면이었다.

“잘 됐지 뭐. 얼굴 다 팔렸으니 이젠 미련 없이 떠날 수 있겠다.”

그녀가 미련 없다는 듯이 손 터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녀가 거짓말을 한다는 건 굳이 권능을 쓰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박이나 실장에게 물어보았다.

"혹시 그 기사 반응이 어떻습니까?”

"댓글 말씀이실까요?”

"뭐든 좋습니다.”

박이나가 빠르게 기사 몇 개를 체크해보았다.

“CCTV 영상이 공개됐는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기 힘들다는 반응입니다. 아이돌을 지망하는 소녀가 어떻게 총을 든 무장병력을 상대로 그런 학살극을 벌일 수 있겠냐는군요. 불쾌한 조작이라며 테일리시님을 옹호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역시 그렇겠지. 상식선에서나 그동안 쌓아온 이미지로나.

하지만 너무 크게 이슈가 됐기 때문에 없던 일로 만들기는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그 독종이라는 기자가 CCTV 영상 하나만 패로 쥐었다고 장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죽일 만한 놈들을 잘 죽였다고 하는 과격한 의견도 제법 보입니다. 최근 대한민국의 경제나 치안사정이 불안정해진 탓에 외부인에 대한 험오정서가 고조된 영향으로 읽힙니다.”

"......차라리 그 루트로 가는 게 낫겠군요.”

"예?”

“대한민국 정부 이름으로 대국민 성명문을 냅시다. 실은 테일리시는 악의 조직을 소탕하기 위한 비밀요원이었다고요.”

두 여성이 뜨악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녀들의 시선을 뻔뻔하게 받아주었다.

숨기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숨기는 데 실패했다면, 그건 역설적으로 지금이 진실을 알리기에 적기라는 걸 말해준다.

게다가 모처럼 쌓은 인지도를 그냥 허공에 날리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깝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아이돌이 되긴 힘들어졌으니, 다크 히어로라도 노려봐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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