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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37화 (137/205)

137화. < 욕망 (7) >

여기서부터 흥미진진한 대목이다. 나는 불꽃쇼 정도로 기자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지 않았다. 빛을 발하는 것 정도야 지구의 기술력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니까. 그래서 나는 우르에게 한 가지 특별한 마법을 주문했다.

환상희.

정신계 마법의 전문가들이 말하기를, 가장 많이 조작하는 정신은 바로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한다. 자기 정신은 손 뻗으면 닿는 거리에 있기 때문에.

그래서 개발된 게 가벼운 즐거움을 주는 유희용 마법이었다.

환상희는 인간의 내밀한 욕망을 환영의 형태로 보여준다. 그것은 사람에 따라 민망한 성적 판타지일 수도 있고, 실없는 바보짓일 수도 있다.

“어.......어라?”

불꽃에 휘감겼던 기자들이 맹한 소리를 내었다. 눈을 황급히 가리거나 허둥지둥 팔을 휘젓기도 했다.

나는 그들이 어떤 환영을 보는지 모른다.

어쨌건 꽤나 낯부끄러운 것들이겠지.

만족스러운 것일지도.

마법의 지속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들이 정신을 차렸을 땐 단상 위에 테일리시가 올라와 있었다.

테일리시는 가죽갑옷을 입고 장검을 찼다. 방송으로만 그녀를 접했을 사람들에겐 굉장히 낯설 차림이었다.

"이어서 여러분께 에신 공화국에서 파견된 에이전트를 소개드리겠습니다. 테일리시라는 예명으로 널리 알려진 분입니다.”

김의호 대통령은 그녀를 대중 앞에 소개했다. 그녀는 대통령의 공인을 받아 어둠 속에서 암약하는 정의의 사자가 되었다.

테일리시는 우르처럼 요란한 쇼를 보이지 않았다. 그저 마력을 아낌없이 개방해 전신에서 푸른 아우라를 뿜어냈을 뿐이었다.

기자들의 반응은 이때 최고조에 달했다. 대통령이 등장했을 때보다 몇 배나 많은 플래시가 터졌다.

살인면허를 받은 아이돌 지망생.

마법이라 불리는 초능력은 양념이다.

사상 최대의 특종이 그들의 손가락 끝에서 조리되고 있었다.

담화문 발표가 끝나자 질의시간이 주어졌다. 수백여 명의 기자들이 엉덩이를 들며 팔이 떨어져 나갈 기세로 손을 쳐들었다. 그 광경이 흡사 좀비 아포칼립스의 한 장면을 연상시켰다.

"문광일보 조정기입니다!”

"서울신문 박기홍입니다!”

"저쪽 기자분, 질문하세요.”

이십대 후반의 젊은 기자가 김의호에게 지목받았다. 그는 뺨을 한껏 붉힌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통령께서 에신 공화국이 현실세계가 아닌 이차원에 존재한다고 하셨는데, 저희도 그곳에 가볼 수 있는 것인지요. 만약 가볼 수 있다면 출입 요건이 어떻게 되는지, 드나드는 방식은 어떤 것인지도 알고 싶습니다.”

"그건 내가 대답하겠다.”

우르가 한 발 앞서 나섰다. 그는 대통령도 안하는 반말을 일삼는데도 전혀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에겐 지고무상의 핏줄을 타고난 자 특유의 카리스마가 있었다. 다소 어색한 발음이 외려 매력적으로 들리게 할 만큼 무서운 재능이었다.

"공화국은 대한민국 외교부의 승인을 얻은 자에 한해서 제한적으로 영내출입을 허용하고 있다. 향후에는 관광이나 경제적인 사유 등 민간 차원의 교류도 확대해나갈 예정이다. 출입방식은 현재로서는 기밀이니 양해 바란다.”

그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다시 질문이 빗발쳤다. 이번에는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노기자가 지목되었다.

그는 한국에서 가장 많은 판매부수를 자랑하는 유구한 신문사의 대기자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헛기침을 한 차례 하더니, 다소 겸연쩍어하며 물었다.

"저희도 마법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회견장이 한순간에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그는 모든 이가 가슴에 품었던 열망을 밖으로 꺼내놓았다.

사람들의 시선은 이제 우르에게로 향했다.

"마법의 비전은 오직 재능을 가진 자에 한해 허락된다.”

우르가 팔짱을 낀 채 여유작작한 태도로 말했다.

“게다가 너희는 아직 마법사를 키워낼 만한 노하우도 인프라도 갖추지 못했지. 때문에 우리는 너희가 마법사를 스스로 양성해낼 수 있도록 김의호 대통령과 기술협정을 맺었다. 말해두지만 마법사 한 명이 가지는 전략적 가치는 그 어떤 무기 이상이다. 대통령이 일관되게 보여준 우의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결코 비전의 지식을 공유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르는 협의한대로 김의호를 의도적으로 띄워주었다. 그가 남은 임기 동안 국정을 이끌어갈 힘을 얻을 수 있도록.

"다음 질문 받겠습니다.”

김의호가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풋풋한 여기자를 지목했다.

“먼데이 서울의 황유라입니다. 저는 테일리시 님께 질문 드리겠습니다. 혹시 앞으로도 연예계 활동을 이어나갈 계획이 있으신지요? JSY 엔터테인먼트와 계약은 여전히 유효한지도 답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녀는 연예신문의 기자였다. 어떻게 연예지 기자가 청와대 프레스센터 출입증을 지녔는지는 모르겠다. 오늘 테일리시가 나온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무리수를 둔 것임에 틀림없다.

테일리시가 김의호로부터 마이크를 넘겨받았다. 나는 그녀와는 사전에 짜둔 바가 전혀 없었다.

지금부터 그녀가 할 말은 오롯이 그녀 자신의 목소리라는 것.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게 되었죠.”

테일리시가 처연히 웃었다.

“이 자리를 빌어서 팀원들에게도 미안하다고 말해야겠네요. 나 때문에 많이 혼란스러울 테니까요. 말도 없이 빠져나가서 연습 스케줄도 영망이 됐을 테고. 나는 잊어주고 다시 꿈에 매진했으면 좋겠어요. 밖에서 열심히 응원할 테니.”

그녀는 가슴에 손을 얹고 허리를 숙였다. 그러고는 더 이상 질문을 받고 싶지 않았는지 VIP 전용 통로를 통해 나가버렸다.

질의시간은 이후로도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나는 정부 관계자인 척 기자들의 틈바구니에 섞여 회견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여기 모인 사람들이 모두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지구인인 건 아니었다. 기자 중에서 두엇, 경호원 중에서 한 명.

불길한 주술적인 내음을 풍기는 자들이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의 동향을 감시하기 위해 심어진 첩자가 분명했다.

나는 그들이 정보를 마음껏 얻어가도록 내버려 두기로 했다.

주인에게 돌아가서 큰 소리로 외치는 게 좋을 거야.

대한민국이 누구의 비호를 받게 됐는지.

나중에도 내 눈에 띈다면 그땐 죽여 달라는 뜻이겠지.

길고 긴 회견이 끝났다. 기자들은 정부 관계자들이 빠져나가고 난 다음에도 프레스룸에 남아 손가락에 불이 붙도록 자판을 두들겼다.

나도 청와대를 슬슬 빠져나왔다. 정원을 걷고 있노라니 흰머리를 짧게 깎은 다부진 사내가 성큼 다가왔다.

"우티르."

전생의 동료였던 우티르는 대한민국에 파견된 암살단원을 이끄는 역을 맡았다.

산자부 장관을 통해 일자리를 주선받도록 한 후 그와 가지는 첫 만남이었다. 이국 생활은 처음이었을 텐데, 그간 어떻게 지냈을지 궁금했다.

모쪼록 테일리시처럼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었다면 좋았겠다만.

"야이 자식아, 마침 잘 만났다.”

그는 내 멱살을 다짜고짜 움켜쥐었다.

"왜, 왜 그래?"

"말도 제대로 안 해주고 이런 엿 같은 곳에 날 버리고 떠나?”

"...추천받은 일자리가 마음에 안 들었냐?”

“너도 와서 하루 종일 감자만 깎아봐라. 이젠 동그란 것만 봐도 신물이 올라올 지경이다.”

그가 멱살을 풀어주며 땅에 침을 퉤 뱉었다. 나는 불현듯 떠오르는 게 있어서 그에게 물었다.

"너 설마 청와대 직원식당에 취직됐냐?”

"그래, 인마.”

"야, 그만하면 좋은 직장이야. 그거 하겠다고 사람들이 수백 명 줄을 섰는데.”

나는 그가 앞치마를 두른 채 감자를 깎는 장면이 상상돼서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건 시든 야채처럼 약해빠진 여기 인간들 얘기고. 내 입장에서 생각해봐라, 평생 칼밥 먹고 살아온 놈이 채소 나부랭이나 썰면서 잔소리나 듣고 있다니까? 심정이 어떻겠냐? 오죽했으면 내가 한국어를 욕부터 배웠겠냐? 네 얼굴을 봐서 참고 있는 거지 아니었으면 그냥 확…!"

"나는 십 년간 그러고 살았어.”

그는 내 한 마디에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툭 치며 격려했다.

"말 배울 때까지만 고생해라. 언어하고 문화 익히는 데엔 현장에서 일하는 것만큼 빠른 방법도 없으니까. 뭐, 정 못해먹겠으면 때려치워도 아무 소리 안하겠다만.”

"됐어. 네가 십 년 했으면 난 십오 년도 할 수 있어.”

"아니, 그렇게까지는 안 해도 되는데.”

“한다, 두고 보라고.”

그는 왔을 때보다 더 힘찬 걸음걸이로 돌아갔다. 그가 그냥 가는 바람에 나는 그에게 들려줄 중요한 이야기를 묵혀둘 수밖에 없었다.

나는 바람을 쐰 후 청와대 본관으로 돌아갔다. 김의호 대통령이 현관에서 나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어찌 잘 되었는지 모르겠군요.”

그가 소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잘해주셨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지지율도 많이 오르셨을 것 같습니다.”

"다 라힐님 덕분입니다.”

우리는 덕담을 나누며 인왕실로 향했다. 인왕실 테이블에는 이미 다과와 음료 등의 디저트가 세팅되어 있었다.

우리는 자리에 앉은 뒤 언론의 반응을 체크하기 위해 TV를 켜보았다.

“......난리가 났군요.”

예상보다 반향이 더했다. 어느 정도인가하면 동시간대 방영되는 모든 프로그램이 편성취소되고, 모조리 뉴스로 대체되었을 지경이었다.

김의호가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하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내보내는 채널, 무늬만 전문가들을 불러다놓고 마법과 술법에 대해 논하는 채널, 심지어는 무당에게 자문을 구하는 채널도 보였다.

회견에 참석했던 기자들은 데스크에 앉아 열띤 목소리로 자신이 체험한 마법에 대해 설명했다.

정신계 마법을 선보이기로 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현대인은 눈으로 보이는 건 뭐든지 의심하기 마련이거든.

"다만 중국과 일본의 반응이 걱정됩니다. 말씀드렸다시피 그들은 귀국과 손을 잡은 걸 탐탁찮아할 겁니다.”

"대한민국 대신 십자가를 대신 지겠다는 약속은 유효합니다. 이다음부터는 저희가 맡겠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소개는 마쳤으니, 이젠 에신이 어떤 곳인지 보여줄 차례겠죠."

고작해야 마법 좀 맛본 것 가지고 이렇게들 호들갑이다.

분명 우르가 보여줄 게 많이 남았다고 경고했을 텐데.

“...한 번 더 난리가 나겠군요.”

기자들이 포탈을 통과했을 때부터가 이야기의 클라이막스였다. 공화국의 근간인 크록을 보지 않고서는 공화국을 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참, 이거 받으시죠.”

나는 품에서 usb를 꺼내 대통령에게 건넸다.

“다음 스탭이 담긴 usb입니다.”

"무엇인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평택 미군 기지의 벙커 안을 촬영한 영상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을 잡아다 인체실험을 하는 장면이 담겨있죠. 저는 기자들을 에신으로 불러다가 우리가 가진 힘을 과시해볼 작정입니다. 아주 넋을 빼놓을 요량이에요. 대통령께서는 그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 미군기지 문제를 공론화하셔야합니다.”

"그러면 미국이...”

"미국이 먼저 신의를 저버렸습니다, 아시다시피.”

김의호도 미국과 함께하기 힘들어졌다는 걸 알고 있다. 그들이 용서받지 못할 일을 저질렀다는 것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설이는 것이다. 개국 이래 최대의 맹방을 저버리자는 건 어마어마한 정치적 부담을 져야하는 일이었다.

"시대가 바뀌고 있습니다. 바짝 정신 차리시고 역사의 키를 쥐어야합니다.”

“제가 뭘 해야겠습니까?”

"주한미군을 철수시키세요. 그 자리에 공화국이 대한민국을 위한 마법청을 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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