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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11화 (111/205)

111화. < 독립 (12) >

내가 이 위치가 되고 나니 알 수 있는 게 있다. 모든 에사인이 밤낮으로 생각하는 건 하나뿐이다.

어떻게 하면 영향력을 더 멀리 퍼뜨릴 수 있을까.

국제기구는 영리한 해결책이었다. 자영업이 모임 유무에 따라 매출 차이가 나듯이, 에사인도 가입된 조직의 크기에 따라 회원 확보가 유리해질 것이다. 게다가 조직 내에서 한 번 서열정리를 해두면 그게 두고두고 간다.

유엔을 보라고. 프랑스 정도는 내려올 법도 한데, 상임이사국 구성이 도무지 바뀌질 않잖아.

"그 해석은 너무 과하신 것 같습니다. 모든 회원국은 기본적으로 동등한 관계입니다.”

"정말로 동등하다면 상임이사 같은 걸 뽑을 필요도 없겠죠.”

"그래도 조직인 이상 대표성을 가지는 자리가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다만 어떤 기준으로 선정했는지는 알아뒤야지 않겠습니까.”

“기준은 국력입니다.”

헤인스가 쌀막하게 대답했다.

"독립국으로서의 국력입니까?”

"자세한 정보는 기밀사항입니다만, 인구나 경제력, 군사력 등을 종합적으로 놓고 봤을 때 우리가 회원국 중에서 가장 앞서있다고 자신 있게 말씀을 드립니다.”

그렇겠지.

미국에게서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면 국력이야 의심의 여지가 없다.

대한민국이 미국과 긴밀하게 협조하듯, 우리도 뉴 텍사스와 그런 관계를 맺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설령 그 관계가 황제와 일곱 권능처럼 주종이 명확한 사이라 할지어도, 콜린 무어란 자가 진정 사심 없이 세계평화에 이바지할 인물이라면 그의 여러 에사인 중 하나가 되는 걸 감수할 수도 있겠지.

문제는 정말로 그렇겠냐는 점이다.

"알겠습니다.”

나는 그에게 다분히 외교적인 미소를 지어주었다.

“긍정적으로 검토해보죠.”

"그러면 저는 답을 내리실 때까지 신세를 지겠습니다. 라힐 님께 꼭 확답을 받아오라는 말씀을 들었는지라, 하하.”

"그밖에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머무는 데 불편하신 점이라던가.”

"아니오, 없습니다. 아! 큰 건 아닙니다만.”

그가 허리를 돌리며 손을 휘두르는 시늉을 해보였다.

"여긴 아직 골프장이 없더군요. 대지도 널널하니 골프장부터 만들어보심이 어떻습니까.”

"고려하겠습니다.”

사절로 와서 골프 타령이라니, 역시 관료답다고 해야 하려나.

헤인스가 돌아갔다. 소미가 문을 단단히 닫은 뒤 내게 물었다.

"정말로 저 사람들하고 손잡아 보게요?”

"소미야.”

"네."

"손 안 잡으면 망해.”

"역시 그렇겠죠?”

소미가 귀엽게 웃었다.

물론 우리도 그렇게 만만하진 않다. 나나 소미가 작정하고 날뛴다면 미 의회나 펜타곤 정도는 날려버릴 수 있겠지.

그러나 어떤 병법서에서도 양면전쟁은 권장하고 있지 않다. 황국과 적대하는 입장에서 미국까지 적으로 돌린다면 패망은 불가피했다.

"그렇다고 해서 오빠가 너무 숙이고 들어가면 분한데요. 가뜩이나 에사인은 이미지가 전부인데요.”

"소미야, 그거 너도 포함이야.”

"알아요, 우리가 패키지라는 거.”

소미가 눈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전 세계적 규모의 팬덤을 납득하고도 남을 정도로 유혹적인 눈웃음이었다.

"생각해봤는데, 그쪽엔 정말로 에사인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 양반이 한 헛소리 때문에.”

“어떤 헛소리요?”

“투표니 민주주의 하는 게 너무 전형적인 미국식 사고잖아. 다른 나라에 쳐들어가서 지지고 볶은 다음 강제로 자기네 제도를 이식하겠다는 건데, 황국에 민주주의를 이식하겠다는 건 수십억 명이나 믿는 종교를 닦아 없애버리겠다는 말이나 마찬가지거든.”

"그러네요. 있는 종교를 없애는 건 쉽지 않죠. 반면 우리 황자님은 황제 위를 이어받을 명분이 충분하고요.”

"내 의문은 왜 뉴 텍사스가 에사인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결여된 전략을 떠벌리느냐는 거야.”

"정말로 미국엔 에사인이 없을까요?”

"그걸 지금부터 알아봐야지.”

나는 아길리를 돌아보았다.

“아길리 님, 크롱크에게 메시지를 보내주시겠습니까? 밥값을 할 때가 됐다고, 동부전선으로 정찰병을 보내 뉴 텍사스 진영을 살펴보고 오라고 전해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아길리가 기운차게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크롱크는 근래 광학장비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의 정찰부대를 통해 하루에도 어마어마한 양의 영상자료가 쏟아져 들어왔다. 없는 예산을 쥐어짜내 만든 부대이니만큼 활약이 기대가 되었다.

"영국하고 멕시코도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쪽은 북부전선이라던데, 아무리 크록의 위장술이 좋아도 대륙을 종단하는 건 힘들지 않을까.”

"하긴, 그러겠네요.”

“이래서 난민들 중에 인재가 있었으면 좋겠다 싶어. 바로 실전에 배치가 가능하도록.”

“아직 눈에 띄는 사람은 없는 거 같아요.”

“어땠니? 그동안 구휼사업을 해본 소감은.”

"인간불신이 생기고 있어요.”

소미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그동안 느낀 건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너무나도 간절하다는 거예요. 다른 사람을 아무렇잖게 짓밟아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요. 귀족들만 나쁜 것도 아니고, 천민이라고 마냥 착한 것도 아니었죠.”

"나가서 잠시 걸을래?”

“그래요.”

우리는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 사무실은 5층 목조건물의 꼭대기에 위치해 있었다. 건물을 이 높이까지 안정적으로 올릴 수 있다는 것에서 크록 목수들의 실력이 장족의 발전을 했음이 느껴졌다.

"아직도 꿈만 같아요, 이렇게 에신에서 밤바람을 맞고 있다는 게.”

소미가 난간에 몸을 기대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잠에 들 때마다 공연장으로 되돌아가는 꿈을 꿔요. 멤버들이 절 아무렇지 않게 반겨주다가, 갑자기 목이 쉴 것처럼 비명을 지르죠. 내 손에 피가 잔뜩 묻어 있거든요. 옷에도, 구두 굽에도.”

"나도 악몽을 꿔.”

"오빠도요?”

그녀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왜, 전직 암살자는 악몽 꾸면 안 되나?”

"아니.......완전 안 그럴 거 같은데.”

"요새는 안 꾸지.”

"비결이라도 있어요?”

나는 검지로 빙글 원을 그렸다.

"알잖아, 영혼은 돌고 돈다는 거. 죽은 사람도 곧 다른 곳으로 흘러들어갈 거라고 생각하면 편하더라. 환생자만 부릴 수 있는 여유지.”

"하긴 그러겠다. 우리 다 한 번씩 죽어봤죠.”

"그래도 두 번 죽는 건 사양하고 싶긴 해.”

"저 잘 하고 있는 거 맞죠?”

"뭘?"

소미가 턱 끝으로 건물 아래쪽을 가리켰다. 크록 전사들이 교대로 번을 서는 가운데, 천막촌 사람들은 자리에 누울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는 있거든요. 그래도 가끔 그런 의문이 들기는 해요. 나란 애가 뭐라고 남을 벌주고, 가르치려 드는지 모르겠다는."

"의외로 간단한 문제인데, 설명을 하려면 내 부끄러운 과거를 하나 까야 해.”

"해줘요. 오빠는 너무 자기 이야기 안 하더라.”

"처음으로 검술을 배웠을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니.”

소미는 대답 대신 눈썹만 치켜떴다.

"사람을 찔러보고 싶었어.”

그녀의 눈썹이 흠칫 떨렸다.

"내가 강해졌다는 걸 증명하려면 그것 말고는 길이 없었지. 어떻게든 싸우게 될 날만 손꼽아 기다렸지.”

"그야 오빠는 오데르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니까 윤리교육을 받지도 못했을 테고...”

"굳이 변호 안 해줘도 돼, 하여간 내 말의 요지는 이거야. 사람은 자기 힘에 쉽게 경도되더라는 거지. 복싱을 배우면 주먹이 괜히 근질거리고, 돈벼락을 맞으면 지갑이 헤퍼지고, 초월적인 권능을 얻게 되면 다른 사람 목숨이 파리처럼 보이기 시작하는 법이랄까.”

"적어도 내 눈앞에 파리는 없네요.”

소미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 그거면 된 거야. 넌 그렇게 강하면서도 아직도 네가 잘할 수 있을까 고민하잖아. 정말 글러먹은 놈들은 그런 고민 안 하거든.”

“이해가 됐어요.”

“그렇지?”

나는 그녀의 옆으로 가 난간에 몸을 기댔다.

“뉴 텍사스하고는 어떻게 할 거예요?”

"우선 일주일 정도 뜸을 들인 다음에, 세계정부에 가입할 의사가 있다고 밝혀야겠지.”

"만약 그쪽에 에사인이 있으면요?”

"적당히 협력하면서, 우리도 만만찮다는 걸 보여줘야지. 상임이사국 따로 있다고 해서 대한민국이 선진국 못 되진 않았으니까.”

"없으면?"

“없으면 뭐.......우리 세상 아니겠어?”

미국이 황국의 정신계 술법을 비난했다고 했지. 마침 우리 측에도 정신계 술법의 대가가 둘이나 있다.

하나의 중국의 정신세계 속으로 나를 집어넣었던 황자와, 군체의식의 모든 지식을 전수받은 이네스.

그 어떤 과학의 이기로도 정신계 술법은 막을 수 없다. 다짜고짜 핵무기부터 날리지 않는 이상은.

"이것만은 명심해야 해. 황위는 반드시 우르 황자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거.”

"동상이몽이네요.”

"민주주의는 이제 수명을 다했다고 봐.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지.”

"사이가 좋아 보이는군.”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기호가 투구를 옆구리에 낀 채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너 경고문 한번 살벌하더라.”

"경고문만 그런 게 아니다. 방금 형을 집행하고 오는 길이다.”

정기호도 난간에 몸을 기댔다. 그의 덩치가 난간 한 축을 차지하자 공간이 갑자기 협소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습관처럼 담배를 꼬나물더니, 저녁노을을 향해 연기를 떠나보냈다.

"다섯 놈. 죄목은 살인과 강간이다. 아직 공화국 형법은 완성되지 않았다만, 형 집행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그건 뭐였냐? 식사를 배급하다가 죽었다는 사람은.”

“아 그건...”

소미가 입을 열었다. 정기호가 그녀의 말을 덮어씌웠다.

"훈련된 전사였다. 난민으로 위장해 잠입했지. 순찰 중인 크록 장교를 노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피해는?”

"두 명. 그 후로도 산발적인 테러가 계속 벌어지는 중이다. 불을 지른다던가, 식량창고에 독을 뿌리는 식으로.”

"치졸한 수를 쓰는구만.”

"전쟁이잖나.”

정기호가 한 손가락으로 담뱃재를 툭툭 털더니,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더 치졸한 일도 있다.”

“뭔데?”

"얼마 전에 황국에서 사절이 찾아왔지 않나.”

"이라올라 님 말씀이시네요.”

소미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아직 이라올라에 대한 미련을 벗어던지지 못한 것 같았다.

"이름까진 모르겠고, 그자가 다녀간 후로 스트리아령 사정이 더럽게 꼬여가고 있다. 아무래도 황실은 이황자를 영웅시하는 스트리아 백성들이 눈꼴사나웠던 모양이다. 며칠 전에 동생에게 질서의 궁으로 출두하라고 소환명령이 떨어졌다. 그쪽에서도 보는 눈이 있으니 대영주를 어쩌진 못하겠지만, 상당한 고초를 겪게 되겠지.”

"전선을 위로 올려야겠군.”

"지금 우리의 적은 그니르와 로켄뿐이지만, 그런 행위를 하면 황국과 완전히 갈라서게 된다.”

"이미 갈라섰어. 지금은 존재감을 보여줘야 할 때다.”

나는 모종의 결심을 내렸다. 나는 정기호를 돌아보며 물었다.

"기엔 수성전 때, 오데르의 검과 연락했었다고 했지?”

"그래.”

정기호는 기엔 성을 수성하기 위해 내 형제들을 불러들였었다. 그때 형제들이 활약해주지 않았더라면 포병부대에 의해 민간인들이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그 연락망, 아직도 유효하냐?”

"네가 나보다 더 잘 알지 않냐?”

"일을 받아 나간 적은 있어도 의뢰를 한 적은 없어.”

"원한다면 말해라. 접선은 어렵지 않으니.”

"연락해다오.”

나는 그의 눈을 마주 바라보며 힘주어 말했다.

"오데르의 검을 소집할 때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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