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 독립 (11) >
"만나보긴 해야지, 여기까지 왔다는데.”
꺼림칙하긴 했다. 에신에 진출한 문명국들과 하나같이 뒤끝이 좋지 않아서 그런가.
그러나 친선도모라는 말을 입에 올린 건 뉴 텍사스가 처음이었다. 시작이 다르다면 결말도 다를지도 몰랐다.
"자리를 만들어볼게요. 잠시만 기다려보세요.”
소미가 벌떡 일어나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아길리와 남아 그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아시는 나라 같습니다.”
아길리가 말문을 열었다.
“예. 저쪽 세계의 나라입니다.”
그녀도 포탈 너머에 거대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을 추가했다.
"저쪽 세계의 황국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경제적, 군사적으로 다른 나라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나라죠.”
"그러면 에사인도 있습니까?”
"에사인은 없습니다, 대신 에사인만큼이나 위험할지도 모르는 기술력을 가지고 있죠.”
"가급적 적대하지 말아야 할 상대로군요.”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미국이 선, 사회주의 국가는 악.
세상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미국도 황국 못지않게 암암리에 추악한 짓을 많이 벌여왔을 것이다.
오늘 이 자리가 그런 논의가 오가는 자리가 될 수도 있었다.
만약 그들이 내게 도의적으로 받아서는 안 될 요구를 해온다면, 황국과 미국을 동시에 적으로 돌릴 수는 없으니 불가피하게 수락을 해야만 한다면, 나도 사람 목숨 가지고 정치놀음이나 하는 위정자들과 다를 바 없어지는 게 아닐까?
달칵.
문이 열렸다.
소미가 먼저 들어왔다.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온 남자는 딱 봐도 서양인이었다. 탁한 금발에 높은 콧대, 푸른 눈, 핏줄이 비칠 정도로 얇은 피부.
키는 훤칠했고, 단정한 회색 정장에 파란 넥타이를 매었다. 프레스룸에서 브리핑이나 하고 있어야 할 관상이 목조 건물을 배경으로 서 있으니 굉장히 어색하게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라힐입니다.”
"콜턴 헤인스입니다.”
우리는 두 손을 마주 잡았다. 그는 지적인 모습과 달리 손등에 털이 수북했다. 서양인과 약수를 나눠보는 게 처음이라 감촉이 다른 게 이게 얼마 만에 나눠보는 악수인지.
"그래요,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헤인스 씨.”
"미안합니다, 나는 에신어를 하지 못합니다.”
그가 아주 어색한 에신어로 말했다. 나는 소미에게 어찌 된 영문인가 눈빛으로 물어보았다.
"영어밖에 못 쓰신대요.”
"통역사는 어디 두고? 그쪽엔 환생자가 없는 것도 아닐 텐데.”
"글쎄요. 외교부와 일하는 환생자는 없는 게 아닐까요?”
소미가 틀렸다. 이 사람들은 우리가 대한민국에서 파생된 나라라는 걸 알았다. 그러니 굳이 에신어 전문가를 데려오지 않아도 영어 하나로 통하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영어가 국제공용어가 맞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겠는데, 왜 나는 이게 기분 나쁘게 받아들여질까.
지구를 너무 오래 떠나있었나?
"그럼 곤란하겠는걸. 나는 영어가 젬병이라.”
"오빠한텐 내가 있잖아요. 다 옮겨줄 테니까 편히 말해요.”
소미가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소미는 전 세계를 무대로 삼아 활동했었지. 확실히 아이돌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아무튼 그녀 덕에 중간다리를 둔 대담이 성사되었다. 나는 소미를 통해 그에게 다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에신 공화국 대통령 라힐입니다.”
“콜턴 헤인스입니다. 뉴 텍사스 국가안보 보좌관을 맡고 있습니다.”
"실례지만 뉴 텍사스는 어떤 나라입니까? 미국의 52번째 주인가요?”
"그 질문을 많이들 하시더군요.”
헤인스가 이해한다는 듯이 사교적인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독립국입니다. 본디 미국의 52번째 주가 될 예정이었으나, 현 대통령이신 콜린 무어 님의 주도하에 따로 살림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연혁이 우리와 비슷하군요.”
속국으로 출발해 독립을 하다니, 그쪽 대통령인 콜린 무어라는 사람도 나 못지않게 야심이 넘치는 인물인 듯했다.
"근데 오빠. 콜린 무어, 혹시 그 사람은 아니겠죠?”
소미가 통역을 하다 말고 내게 소곤거렸다.
"누구?"
"콜린 무어 모르세요?”
"감도 안 온다.”
“오빠, 문화생활 너무 안 하신다. 설마 여름왕국도 안 봤어요?”
“그때는 일 때문에 바빴거든.”
일이 없을 때도 문화생활과 거리가 멀기는 했다.
"콜린 무어, 잘나가는 헐리웃 배우잖아요. 너무 안 늙어서 뱀파이어 소리 듣는 여자.”
그런 배우가 여럿 있다는 얘기는 들었다. 피부가 멀겋고 동안인 배우에게 공통으로 붙는 수식인 것 같았다.
어쨌거나 헐리웃 배우가 신생 독립국의 대통령일 리는 없으니, 나는 이쯤에서 본론으로 되돌아갔다.
“독립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내가 아는 미국은 어떤 경우에도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나라였다. 그리고 그걸 대의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데 아주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처음에는 반발이 심했습니다. 그러나 에신이란 땅이 가져다줄 기회와, 대통령 각하의 뛰어난 교섭술 덕에 반발은 금방 잦아들었습니다. 지금은 둘로 나뉘는 게 더 이득이라는 데 서로가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습니다.”
냄새가 났다. 콜린 무어는 결코 평범한 인간일 리가 없었다. 미국이 중국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할 리가 없으니, 그들을 대표하는 자 또한 하나의 중국보다 더 윗줄의 실력을 가진 인물이라고 봐야만 했다.
“어떤 일로 이 먼 길을 오시게 되셨는지 궁금하군요.”
"먼저 이 말씀부터 드리겠습니다. 저는 뉴 텍사스와 미합중국의 합치된 의견을 전해드리러 라힐님을 찾아왔습니다. 곧 에신 공화국뿐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본국에도 같은 제안이 들어갈 것입니다.”
헤인스가 양복 윗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그는 휴대폰에 저장해둔 문서를 참조해가며 말을 이어갔다.
"우리는 황국 인민의 낮은 인권과 황국이 남발하는 비윤리적인 정신계 술법에 대해 우려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황실에 다섯 차례의 경고서한을 보낸 바 있습니다만, 애석하게도 아무것도 바뀐 바가 없었습니다. 이에 우리는 자유주의 세계를 수호하고, 인간의 존엄과 기본권을 되돌리기 위해 분연히 일어났습니다.”
어라? 갑자기 왜 데자뷰가 느껴지지.
저 ‘비윤리적인 정신계 술법’을 ‘대량살상무기’로 바꾸면 딱 이라크 전쟁 재탕이 되겠는데.
"우리는 에신 공화국이 우리와 연대하여 남쪽에서 황국을 압박하기를 원합니다. 이미 영국과 멕시코가 우리의 대의에 함께하여 북쪽에서 공동전선을 형성했습니다. 향후에는 모든 자유주의 진영을 참전시켜 황국을 사방에서 둘러싸겠다는 게 우리가 구상한 대에신 포위망의 요체입니다.”
영국하고 멕시코는 북쪽에 가 있었군. 어쩐지 잠잠하다 싶었다.
"전쟁의 목표는 뭡니까?”
“황제를 폐위하고, 민중에게 황실의 권력을 할양하고, 투표권을 부여해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는 것입니다.”
“공동전선에 참여함으로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건 뭡니까?”
“500억 달러 규모의 무상 경제지원과, 그 이상의 차관입니다. 통상조약과 문호개방은 덤이겠군요.”
결국 돈이었다.
눈이 돌아갈 거액의 돈.
어차피 황국하고는 싸워야 하는 입장이다. 게다가 우리에겐 돈이 절실했다. 요새도시를 짓기로 한 후부터 돈이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들어갔다. 난민에게 국을 끓여주는 것도, 트럭 엔진을 돌릴 기름을 사는 것도 돈 없이는 되는 일이 없었다.
“솔깃하게 들리네요.”
소미가 한국어로 코멘트했다.
"이제 황제폐하랑은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됐잖아요? 어차피 싸워야 하는 거, 돈 받으면서 싸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요.”
"그렇긴 하다만, 저기도 돈이 썩어나서 뿌리는 건 아닐 거거든. 분명 이다음부터 골치 아픈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할 거다.”
높으신 분들끼리 만든 모든 역사적인 결정에는 이면계약이 존재했다.
이 이야기도 단순히 얼마를 줄 테니 파병해달라는 소리에 그칠 사안이 아닐 것이다.
"그게 답니까? 돈을 받고, 남쪽 전선을 밀어 올리면 되는 겁니까?”
"물론 몇 가지 사소한 합의점이 더 있긴 합니다. 공동전선의 연장선입니다만, 당사국끼리 군사적인 영역을 넘어서 더욱 끈끈하게 결속을 다져보자는 구상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죠.”
"우리는 에신 이후의 세상을 대비해야 합니다.”
"에신 이후의 세계요?”
헤인스가 두 손을 들더니, 각각 검지를 들어보였다.
"지구와 에신, 두 세계가.”
그의 검지가 중앙에서 교차되었다.
"이렇게 하나가 되는 세상 말입니다. 곧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다른 나라들도 포탈 너머의 세계와 마법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를 미리 대비해두지 않으면 큰 혼란이 야기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소미와 나눴던 이야기였다. 언제까지 에신이란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숨길 수 있겠느냐고.
"어떤 계획이 있으실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유엔을 설립하고자 합니다.”
"유엔이요?”
"알기 쉽게 유엔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저희는 에신의 모든 국가들을 하나로 아우르는 범세계적 국가기구를 구상중입니다. 아시다시피 미국, 영국, 대한민국, 베트남, 일본, 멕시코, 러시아 등 이미 많은 나라들이 에신에 와있습니다. 그들 중 어떤 나라들은 벌써 전쟁을 벌이기도 했죠.
그러나 외딴 세계에서 벌이는 무제한적인 확장과 무분별한 수탈, 반목만이 우리의 미래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연대해야 합니다. 함께 뜻을 같이해 자연재해, 전쟁, 기근 등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공동의 재앙에 대처해야 합니다.”
"그게 콜린 무어..대통령님의 바람입니까?”
"전 인류의 바람이겠죠.”
헤인스가 사람 좋게 웃었다.
"대단한 구상이로군요.”
나는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에신에다 세계정부를 수립하겠다니.
확실히 그쪽 대통령도 만만한 인물이 아니다. 외교적인 면에서는 우리를 한참 앞서갔다. 게다가 그쪽은 모국인 미합중국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으니, 명분도 서고 협상력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 혹시 에신의 유엔이라는 기구는 누가 운영하고 관리합니까? 유엔처럼 상임이사국을 두게 되나요?”
유엔은 미국, 중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다섯 개의 상임이사국이 입맛대로 휘두르는 기관이다.
다른 나라는 유엔에 상정되는 안건에 대해 저 다섯 개국의 십 분지 일만큼의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했다.
“역시 그걸 물어보실 줄 알았습니다. 아직 에신에 진출한 나라가 많지 않기 때문에, 우선 두 개의 상임이사국을 두고 운영을 해볼 계획입니다.”
"두 나라가 어딥니까?”
나는 물으면서도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뉴 텍사스와 영국의 속령인 모리스탄입니다.”
미국과 영국이 다 해처먹겠다는 소리네.
지구에서처럼.
헤인스의 말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에신 공화국은 첫 번째 회기 동안 비상임이사국 지위를 보장해드리겠습니다. 곧 전 세계 모든 나라들이 경쟁적으로 에신에 진출하게 될 겁니다. 그 전에 우리가 한 발이라도 더 앞서나가려면 상호 간 긴밀한 협력이 필수적이겠죠.”
이 양반아, 아까는 세계평화하고 인권 때문이라며.
"그리고, 이건 아직 논의단계에 있습니다만.”
헤인스가 은근하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장차 강력한 에사인을 보유하는 게 모든 국가의 제일과제가 될 겁니다. 국제기구를 선점해두면 우리가 다른 나라보다 훨씬 유리한 지형을 가져갑니다. 어떤 신앙을 지탄하고, 어떤 나라를 비난해야 하는지도 이사회에서 정하게 될 테니까요.”
이만하면 다 말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뉴 텍사스는 신세계의 미국이 되고자 한다. 혹은 신세계의 황국일지도.
"알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승낙하시는 겁니까?”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얼마든지요.”
"콜린 무어가 에사인입니까?”
헤인스의 표정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그가 사무실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진실된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그게 중요할까요?”
"중요합니다. 방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장차 강력한 에사인을 보유하는 게 모든 국가의 제일과제가 될 거라고.”
“...그렇죠.”
“그러니 묻는 겁니다. 만약 당신의 대통령이 에사인이라면, 이 제안은 나더러 콜린 무어의 일곱 권능이 되라는 소리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