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 독립 (13) >
요새도시는 어수선한 와중에도 나날이 규모를 달리해갔다. 한 달 사이 약 5만 명에 달하는 난민이 수용되었고, 그 이상의 난민이 밖에서 차례를 기다렸다. 지금껏 받아들인 숫자만 해도 크록 전체 인구를 상회하는 어마어마한 인원이었다.
다만 난민은 어디까지나 난민일 수밖에 없는지라, 재사회화 과정을 끝내기 전엔 생산성을 기대할 수 없었다.
때문에 수도로부터 난민에게 직무교육을 시킬 부문별 전문가들이 긴급히 초빙되었다. 서울에서 아주 비싼 값에 모셔온 귀하신 분들이었다.
학교도 지었다. 병원도, 소방서도, 위락시설에도 손을 댔다. 할 일은 한가득인데 일손은 턱없이 모자랐다. 밤낮으로 일을 해도 필요한 수요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도시의 정비에 여념이 없을 무렵, 수도로부터 낭보가 들어왔다.
드디어 현지동물의 가축화에 성공했다는 소식이었다.
“조일 박사입니다. 그냥 조 박사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머리가 맨들맨들한 중년 남성이 굵직한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했다. 연구원 가운이 재킷처럼 느껴질 정도로 체격이 대단한 남자였다.
이 산적을 방불게 하는 험상궂은 자가 바로 가축화 프로젝트를 이끄는 연구팀의 팀장이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은요, 믿어주신 만큼 결과를 빠르게 만들어내지 못해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이게 그놈입니까?”
나는 축사 울타리 안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어 먹는 생물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예. 이름을 ‘큰머리소’라고 지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소를 두 배쯤 불려놓고, 머리만 다섯 배쯤 키워놓은 것 같은 비주얼이었다. 머리가 워낙 크다 보니 식사량도 장난이 아닐 것 같았다.
“크록에게 이 짐승의 이름을 물어보았습니다만, 그냥 고깃덩이라고 부른다는 말을 듣고 우리식으로 명명해보았습니다.”
"생긴 걸 보니 더 나은 이름을 떠올리기 어려울 것 같군요.”
"앞으로 이 큰머리소가 공화국의 식량을 책임지게 될 겁니다. 성장속도가 아주 빠르고, 육질이 좋습니다. 새끼도 한 번에 네댓 마리씩 낳으니 금방 숫자를 불릴 수 있으리라 예상됩니다.”
"단점은 없습니까?”
"가죽이 너무 두꺼워서 가공이 힘들다는 점, 야생성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에 난동을 부리기 시작하면 크록이 아니고서는 감당할 수 없다는 점 정도입니다.”
"성깔이 있군요.”
"그나마 유순한 개체만 골라 교잡을 하고 있습니다만, 유의미한 결과를 내려면 십여 세대는 더 지나야 할 것 같습니다.”
조일 박사는 큰머리소 외에도 몇 가지 동물을 더 보여주었다. 젖을 쌀 수 있는 동물, 가죽과 털을 생산하는 동물 등.
여전히 가축화가 진행 중인 동물도 많았다. 프로젝트가 모두 완료된 건 아니나, 가장 중요한 안건이었던 큰머리소의 연구성공을 알리기 위해 급히 나를 불렀다고 했다.
"현재 수도 외곽에 다섯 동의 축사가 지어지고 있습니다. 반년 내로 수도 인구의 절반을 먹일 수 있을 만큼의 육우를 확보하는 걸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덕분에 한숨 돌리겠군요.”
나는 진심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난민 규모가 예상을 너무 웃돌아서 현장이 압도되는 중이었다. 먹을 것만이라도 확보된다면 어떻게든 사람들을 붙여둘 수는 있다.
연구시설을 시찰한 뒤, 나는 포탈을 타고 곧장 방위도시로 이동했다. 도시 성벽에서 다음 스게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주군.”
오르기가 성벽 위에서 나를 맞이해주었다. 그는 이제 제법 대마법사다운 태가 났다.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마법사처럼 화려한 로브를 입진 않았으나, 망토처럼 두른 마력이 그 어떤 옷보다도 멋진 장식이 되어주었다.
"후, 바쁘네요.”
"죄송합니다. 일거리만 늘려드려서.”
오르기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는 어느덧 내게 이런 사교적인 농담도 건넬 수 있게 되었다.
"방위태세에 대한 논의를 하고 싶다고 하셨던가요?”
"예.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오르기가 앞서 걷는 동안, 나는 그의 조각 같은 옆얼굴만 쳐다보았다.
“이곳이 이틀 전에 완공된 망루입니다.”
그가 안내한 곳은 성벽 모서리에 솟은 망루였다. 커다란 돌을 층층이 쌓은 뒤, 틈새에 시멘트를 부운 단순한 구조물이었다.
약 닷새에 하나끌로 이런 망루가 올라갔다. 크록들의 무식한 힘 덕에 건물 짓는 속도만큼은 불가사의하리만치 빨랐다.
"영내에서 여전히 마법적인 테러가 산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주군께서 허락해주신다면 망루를 꼭짓점으로 삼는 대마법 방어진을 구축하고 싶습니다.”
"그런 거라면 당연히 허락을 드려야죠.”
황국의 모든 도시에는 대마법 방어진이 갖춰져 있다. 강력한 방어진은 자주포 포격마저도 상쇄가 가능하다는 게 지난번 전투에서 증명되었다.
"그런데 테러는 사람이 넘어오는 걸 막지 못하는 게 더 문제 아닌가요?”
"그 부분은 저희가 좀 더 경계에 만전을 기울이는 것으로...”
"아니면 국경에 장벽을 쌓아버리는 건 어때요? 방벽을 우회할 수 없도록 정글의 경계를 동서로 연결해버리는 거죠.”
"대단한 역사가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산과 인력의 난맥으로 지금으로서는 힘들 것 같기도 합니다.”
"예, 이건 장기 플랜이에요. 우선 도시별 방어벽부터 구축하는 걸로 하고, 장벽은 길게 보고 갑시다.”
나는 장벽에 꽂혔다.
고래로부터 왕들이 토건사업을 벌이다가 국력을 말아먹는 이유가 있다. 머리로는 무리이지 않을까 싶은데, 가슴은 크고 아름다운 걸 원했다.
"그 건은 어떻게 됐습니까? 마법사 양성계획.”
"주군께서 확인하셔야 할 현안이 두 가지 있습니다.”
"들어보죠.”
"첫째는 마법시료입니다. 마법시료는 마법을 수련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재료입니다만, 원료의 공급부터 생산까지 모든 사항이 황실에 의해 기밀에 부쳐졌습니다. 황국과의 무역이 취소된 지금으로서는 시료를 확보하는 게 불가능합니다.”
“...그건 큰 문제인데요.”
마법사를 키워내는 데 돈이 많이 든다는 얘기는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왜, 무엇 때문에 돈이 든다는 건지는 몰랐다.
"생산이 전혀 불가능한가요? 정글의 천연자원을 이용하더라도?”
"방법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연구를 해볼 순 있겠습니다만, 못해도 족히 수십 년이 걸릴 것 같습니다.”
"가만, 황실에서 기밀에 부쳤다고요?”
"그렇습니다.”
"우리 쪽에 황실 사람이 와있지 않습니까?”
"...죄송합니다, 황자님을 미처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오르기가 난처한 기색으로 말했다. 나는 웃으며 그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아직 우리 사람이라는 인식이 없어서 그렇지요. 가서 물어보세요.”
"예, 주군.”
그런 사람이 궁중에 여럿이었다. 황자가 너무 부담스러운 나머지 투명인간 취급하는 부류.
오르기는 아예 생각조차 못 했던 것 같지만.
"그러면 그 건은 황자와 대화를 나눠보시고, 두 번째는 뭡니까?”
"인재 수급에 난항을 겪는 중입니다. 우선 대부분의 크록은 조명래 원장님께서 개발하신 마법적성심사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게 MP 테스트였던가요?”
"그렇습니다. 보유한 MP가 100 미만이면 부적격으로 판단합니다.”
마법사가 될 수 있는 자질 기준이 100이라니.
아르세니오의 1406은 역시 괴랄한 수치였다.
"마력이 어떻게 계량화가 가능한 건지도 궁금하군요.”
"마침 원장님께 자세한 설명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원장님께서는 마력을 측정하기 위해 생명과학이란 학문을 활용하셨다고 합니다.”
"어떻게요?”
"마력은 우리의 생명력을 강화합니다. 그 점에 착안하여, 측정할 대상에게서 세포를 추출해 극한의 환경에 노출시킨 뒤,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남는지를 체크하면 상당한 개연을 가진 값이 나온다고 합니다.”
“아하.......”
“1MP는 마법적인 재능이 없는 지구인의 평균값입니다. 100MP는 평범한 지구인 100명분의 마력량인 셈입니다.”
드디어 의문이 풀렸다.
아르세니오, 완전 괴물이었잖아.
혼자 천사백 명분의 마력을 가지고 있다니.
"수석마법사님께서는 몇입니까?”
나는 문득 의문이 들어 그에게 물었다.
“1800이 조금 넘게 나왔습니다.”
그가 겸연쩍게 대답했다.
숫자는 전혀 겸손하지 못했으나.
물론 실전은 마력뿐만이 아니라 기술, 경험, 심리상태 등 다양한 요소로 결정지어진다. 만약 아르세니오와 오르기가 싸운다면 결과는 비등비등하리라 예측되었다.
"한데 크록이 100을 넘기지 못한다는 건 의문이로군요. 우리들 중 가장 강한 전력이 아니던가요.”
“아무도 통과하지 못했던 건 아닙니다. 백 명 중 한두 명꼴로 합격자가 나옵니다만, 합격자 중 누구도 마법사가 되길 원하지 않아 선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법사가 되길 싫어한다고요? 대체 뭣 때문에요?”
"송구하옵니다만...”
오르기가 내 눈치를 흘끗 살폈다.
“라힐님께서 검을 쓰신다는 이유 때문에 그렇습니다.”
.......납득했다.
자기 우상은 이따만 한 검으로 적을 도륙내는데, 비겁하게 뒤에서 마법이나 뿅뿅거리고 싶지 않다는 거지.
"별수 없이 난민 중에서 골라내야겠군요.”
"예, 현재는 난민을 중점적으로 테스트 중입니다. 지금까지 약 천여 명을 테스트했고, 적격자가 한 명 나왔습니다.”
"한 명이면 너무 적긴 하네요.”
"황국에서는 만 명당 한 명꼴이었습니다. 주군께서 지시하신 대로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은 결과 황국보다 더욱 넓은 인재풀을 활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그 한 명은 책임지고 키워봅시다.”
나와 오르기는 북벽으로 천천히 걸어서 이동했다. 도시 북문에서는 난민을 심사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사람이 정말 많군요.”
때마침 장벽을 쌓는 이야기를 해서 그런가.
꼬리에 꼬리를 문 난민의 행렬이 마치 장벽처럼 보였다.
수문병들은 그야말로 극한직업을 체험하고 있었다. 심사하고, 분류하고, 난동과 패악질을 받아주고, 때로는 칼을 들고 덤비는 돌발상황에도 대처해야만 했다.
"소문이 제법 퍼져서 서부대륙 끝자락에서부터 사람이 밀려들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 보입니다.”
알알이 들어찬 인파 한가운데에 그 희귀하다는 수생족이 보였다. 서부대륙 해안가에서 예까지 살길을 찾아온 자였다.
"정 장군님께서 오시는군요.”
정기호가 우리를 발견하고는 성벽 계단을 올라왔다. 그를 만나는 것도 방비태세를 점검하는 스케줄의 일부였다.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군.”
"다 된 연구에 사인만 하면 끝나는 거였으니까.”
"큰머리소라고 했던가? 맛이 꽤 괜찮았다.”
"뭐냐, 벌써 먹어본 거냐?”
"부하들이 뭘 먹을지 정도는 알아둬야지.”
정기호가 덤덤히 말하며 팔짱을 꼈다. 그는 여동생에게 대영주 자리를 물려준 후 부담스럽게도 나날이 성실해지는 중이었다.
"정기호, 성벽에다가 포를 올리고 싶은데 가능하겠냐.”
"무슨 포?”
"야포, 자주포, 대공포, 가능한 건 뭐든지.”
"못 올릴 건 없지.”
"벽에도 내장하는 건 어떠냐.”
"성벽 안에다 말이냐?”
"그래, 범선의 함포처럼. 성벽을 수도 궁성처럼 높이 쌓은 다음에, 층층이 대포를 박아두는 거지.”
황국의 주전력은 평지거인과 비익족이었다. 비익족에게는 대공포가, 평지거인에게는 직사포가 주효할 것이다.
"벽에 넣기 적당한 포가 있을지 모르겠다. 대한민국 국방부에 한번 문의를 해봐야겠군.”
"문의해봐. 괜찮은 물건이 있으면 잔뜩 사들이고.”
"대포면 충분한 거냐?”
"한 가지 더. 삼경그룹 계열사에 삼경정밀이라고 있다. 방산업체지. 여기에서 k-2 흑표전차를 생산한다.”
"탱크를 사겠다고?”
정기호의 표정이 미미하게 변했다.
“500억 달러 뒀다 뭣하냐.”
군비경쟁은 뉴 텍사스에서 먼저 시동을 걸었다. 나는 다음에 사절이 오면 탱크 퍼레이드라도 보여줄 작정이었다.
우리는 국방력을 강화하고, 모국 방산업체에 달러를 뿌려서 그쪽 내수도 진작시키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 아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