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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09화 (109/205)

109화. < 독립 (10) >

소년이 입을 큼직하게 벌렸다. 눈은 커지다 못해 쑥 빠져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손가락을 들어 발설하지 말라는 제스처를 보낸 뒤, 그의 몸을 한 팔로 일으켰다.

깃털처럼 가벼운 몸이었다. 손가락으로 쇄골의 형태를 또렷이 느낄 정도로 영양상태가 심각했다.

"밥을 제대로 안 주나?”

"아닙니다. 아주 친절하신 분이 우리 모두가 먹을 수 있을 만큼 나눠주십니다.”

"그런데 왜?”

"나눠 받은 몫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힘이 남아도는 놈들이 범인이겠군.”

여기서도 인력부족이 문제였다. 건물 짓기도 바쁜 마당인데, 난민들 목구멍으로 먹을 게 넘어가는지 관리감독까지 하는 건 무리였다.

“이걸 써라.”

나는 안주머니에서 약병을 꺼내 소년에게 넘겨주었다. 피는 어느덧 멎었으나, 얼굴에 난 상처엔 흉터가 질 것 같았다.

소년은 약병 속에 담긴 액체를 신주단지 모시듯이 조심스럽게 짜냈다. 천지간에 널린 게 몸달래풀이라지만, 엑기스를 우려낸 약은 화폐로 거래되는 물건이다. 천민에게는 쉽게 접할 수 없는 물건일 것이다.

"내겐 권리가 있다!”

사내가 난데없이 아길리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너희에게 내 생득권에 걸맞은 거창한 걸 주문하지 않았어, 어차피 이런 후진 곳에서 호사를 누릴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나는 그저 사람답게 등을 누이고 쉴 장소와 제대로 된 음식을 달라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비를 피할 지붕은커녕 야외에서 천것들의 분뇨와 함께 뒹굴라니, 게다가 천것들이 먹는 것과 같은 음식을 먹으라니, 세상 어느 나라가 손님을 이따위로 대접한다는 말이냐?”

타당한 지적이었다. 수십 세기 동안 계층구조가 바뀌지 않은 세계다. 귀족과 천민을 동일하게 취급한다는 건 그들에겐 있을 수 없는 모욕일 터.

"여긴 너희나라가 아니다. 우리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돌아가라.”

아길리는 내 주문대로 온건하게 대응하는 중이었다. 도끼자루를 만지작거리는 건 아마도 다가트에게 하사받은 무기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그런 것이겠지.

“정책이라는 말만으로는 납득할 수가 없다. 소문대로 이 나라에 에사인이 있다면 천민 따위가 아니라 우리부터 챙겨야하는 게 아닌 가?”

"옳소! 에사인은 무슨 얼어 죽을, 천것들이나 챙기는 나라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

다른 자들이 그에게 호응했다. 역시나 복식부터가 남다른 무리들이었다.

천민은 신앙을 가질 수 없다. 그게 황제와 일곱 권능이 만든 세상이었다.

영악하기 그지없단 말이지.

계급을 갈라두면 사람들은 현실의 불합리함에 눈을 돌리게 된다. 자신보다 비참한 자들을 위안거리로 삼게 되거든.

“저 자를 어떻게 하면 좋겠니?”

나는 소년에게 물었다.

"무엇이건 네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주마. 죽여 달라면 죽여주겠다. 저 남자의 모든 소유물을 뺏어서 네게 줄 수도 있다. 뭐든 말만 해 보거라.”

"그냥...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면 안 될까요?”

소년이 큰 눈을 끔뻑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왜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거니?”

“그런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으니까요.”

이 자리에 막시무스가 있었더라면 호통을 질렀을지도 모르겠다. 감히 위대하신 분의 권능을 의심하는 거냐며.

돌이켜보면 소미도 그랬다. 그녀는 포탈이 열리면 에사인 때문에 지구가 멸망해버릴지도 모른다고 우려했었다.

천민에게 에사인이란 귀족들, 전사들, 압제자들에게 불가사의한 힘을 쥐어주어 체제를 공고하게 하는, 악마나 다름없을 존재였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

소년이 내 시선을 회피했다. 그게 대답이나 마찬가지였다. 좌절한 자의 눈빛이 이토록 맑을 수는 없었다. 절망하는 자가 저 앙상한 다리로 백여 킬로미터나 되는 대장정을 감행할 리도 없다. 음식을 공짜로 나눠준다고 했건, 집과 땅을 쪼개준다고 했건,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구호가 소년의 가슴에 불을 지핀 게 틀림없었다.

"너는 거짓말에 익숙하지 않구나.”

"아, 아니에요, 저는…”

소년은 입을 다물려다가, 웅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냥 믿기 힘든 이야기들을 들었어요.”

"어떤?”

“정글이 시작되는 곳으로 가면 서쪽에서 온 흉신을 무찌른 영웅들이 세운 나라가 있다고. 그곳에는 신분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누구나 집과 땅을 가질 수 있다고요.”

소문 한 번 제대로네.

"그리고 영웅들 중에 진소미라는 분이 계신다고 들었어요. 마족의 왕인 라힐님의 첫 번째 아내 되시는 분이요. 비익족보다도 아름답고, 평지거인보다도 강하고, 무엇보다도 우리 같은 사람들도 믿는 게 허락된 분이라고 하셨어요. 죽을 때 죽더라도 그런 분을 따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구나.”

그러면 그렇지. 한 다리 건널 때마다 삼천포로 빠져줘야 소문이지.

첫 번째 부인이라니, 누가 들으면 두 번째 부인도 있는 줄 알겠다.

“이상한가요? 역시 그럴 리가 없는 건가요?”

“아냐. 네 말이 맞다. 진소미님이 대단한 분이긴 해.”

그러나 차마 소년이 고이 간직해온 희망을 짓밟을 순 없었다. 부디 마족의 왕만은 줄임말로 불러주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었다.

"아저씨는 누구신가요? 정말로 에사인이 맞으세요?”

"저런, 아직 모르는구나.”

나는 소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 나라에선 거짓말을 하면 큰일 난단다.”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섰다. 일순간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되었다.

"아길리님, 그만하면 기회를 충분히 줬습니다. 그 자의 신병을 확보하세요. 공화국 법에 따라 사람을 죽이려고 든 죗값을 치르게 될 겁니다.”

"사람? 사람이라고?”

귀족 사내가 반발했다. 나는 그의 항의를 한 귀로 듣고 흘리며, 모여든 군중의 틈바구니를 향해 물었다.

“그래야지 않습니까, 진소미님?”

사람들이 다급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소년은 진소미란 이름을 듣자 앞으로 뛰쳐나가려다가, 다리를 부여잡고 그만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그러고도 몸을 비틀어 한사코 고개를 들었다.

허름한 로브를 입은 소녀가 시선 끝에 자리해있었다. 누더기를 기워 만든 로브에는 에신어로 경구가 수놓아져있었다.

- 인간이 절망하는 곳에는 어떠한 신도 살 수 없다.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매우 시의적절한 표현이었다.

“...저분이 진소미?”

“정말인가?”

사람들이 숙덕거리며 귓속말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들이 반신반의하는 데엔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저 여자는 우리에게 먹을 걸 나눠주던 사람인데...”

귀족 사내가 혼란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진소미님이 맞습니다. 저는 알 수 있어요!”

갑자기 바닥에 쓰러진 소년이 소리쳤다. 소년의 눈에는 희망도 절망도 아닌, 쏟아질 듯한 환희가 담겨있었다.

스르륵.

소녀가 후드를 벗었다. 눈처럼 하얀 머리카락이 나풀거리며 드러났다. 이윽고는 빛나는 아우라가 그녀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왔다. 누더기 따위로는 억누를 수 없을 전율적인 존재감이 광장을 집어삼켰다.

귀족 사내는 완전히 패닉하고 말았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에사인의 존재를 의심했다는 사실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그는 안절부절 못 하다가, 소미가 열 걸음 안짝까지 다가오자 털썩 무릎을 꿇고 말았다.

“너는 운이 나쁘구나.”

소미가 그를 일별하며 차갑게 말했다.

"너를 엄하게 벌해서 신성 에신 공화국에서는 모든 이가 법 앞에 평등함을 알리는 본보기로 삼아야겠다.”

거대한 크록 전사들이 군중을 헤집으며 나타났다. 전사들은 좌우에서 그의 어깨를 붙잡아 어디론가 질질 끌고 갔다. 그는 완전히 넋이 나가 끌려가면서도 벌린 입을 다물지조차 못했다.

소미는 조금 더 다가와 쓰러진 소년의 곁에 자리를 잡았다. 일순간 그녀의 손에서 눈부신 광채가 뻗어 나왔다. 광채는 소년의 몸을 휘감은 뒤 그의 상처와 함께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저럴 수가.......”

사람들이 일제히 숨을 죽였다.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치유술법이란 이 세계의 관념을 근간부터 혼드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렴풋이 그녀의 술법이 복잡한 전제조건을 요구한다는 걸 감지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소년은 그녀가 원하는 조건에 정확히 일치하는 인물이었다.

"일어나렴.”

소미가 소년의 손을 잡아 몸을 일으켰다. 그는 너무 가슴이 벅차올라 고맙다는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가 말하려는 모든 문장이 어절 단위로 분해되었다.

“가, 감사, 합니다…!”

“고마워하지 않아도 된단다.”

소미는 그에게 미소를 지어준 후,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러분은 신성 에신 공화국에 와계십니다. 저희의 법을 존중해주지 않으신다면 저희도 여러분을 존중해드릴 수 없습니다.”

끌려가고 싶지 않다면 알아서 기라는 말을 저렇게 상큼하게 할 수도 있군.

"지내시기 불편하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이곳은 여러분이 살던 고향이 아닌데다가, 허허벌판 위에 이제 막 토대를 다지는 단계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조금만 인내심을 가지고 도와주신다면, 머지않아 세상 어디보다 멋진 삶의 터전이 되리라 약속드립니다.”

그녀가 구석에 모인 귀족들을 향해 물었다.

"아직도 지붕이 있는 집을 원하시나요?”

귀족들이 도둑이 제 발 저리듯 몸을 움찔거렸다.

"그렇다면 가서 망치를 쥐세요. 기술이 없다면 자재를 나르셔도 됩니다. 저희 목수들도 일을 시작한 지 일 년이 지나지 않았습니다. 시작은 허드렛일부터였죠.”

그녀가 생글 웃었다. 저 웃음이 누군가에게 저렇게 부담스러울 수도 있구나 싶었다.

"저도 일을 하러 가도 되나요?”

소년이 물었다. 소미는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넌 일단 뭐라도 먹여야겠는걸.”

사건이 일단락되었다. 사람들은 소미의 말을 따라 각자 할 일을 찾아 떠났고, 주린 난민들을 위한 특별 배급이 실시되었다.

천민들은 삼삼오오 둘러앉아 먹을 것을 나누며 소미에 대한 기대와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여기에 오직 에사인만 볼 수 있는 특별한 정경이 있었다.

엎드린 채 경배를 올리는 노인, 젖먹이 아기를 달래는 여인, 볼우물이 터지도록 먹을 것 입에 쑤셔넣은 아이, 광장에 모인 수많은 마음들이 덩어리져 거대한 파도를 이루었다. 소미는 잠깐 사이에 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야 말았다.

이래서 에사인을 향한 여정이 쇼라는 건가? 이걸 노리고 이 많은 사람들과 한 명 한 명 접촉했다는 건가?

소란이 얼추 진정되고 나자, 나는 아길리와 함께 소미를 따라 사무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소미는 건물 안에 들어서자마자 의자 위에 걸터앉으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으으, 완전 엉망이었죠? 그쵸?”

"아니, 뭐가?”

소미가 고개를 홱 쳐들며 검지로 자기 눈두덩이를 가리켰다.

"완전 쌩얼에, 다크서클에, 교과서 읽는 듯한 그 말투요. 오빠가 너무 갑자기 지목해서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고요.”

"내 눈엔 전혀 안 이상하던데.”

"안 이상하기는요, 불이 난 뒤로 닷새 동안 잠을 못 잤는걸요. 아무래도 오빠하고 원수진 에사인 중 한 명이 여길 가만히 두면 안되겠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그래서 밥을 나눠주고 있었던 거니? 범인 색출하려고?”

"어쩌겠어요. 오빠네 성도들이 못 잡아내는걸.”

소미의 입이 한 치나 튀어나왔다.

“내 성도가 못 잡아낸다면 설마 진실의 추에 면역인 늠들인가.”

"아니에요. 그런 예외는 군체 하나면 충분하죠. 스파이는 야밤에 몰래 숨어 들어와요. 정식 루트로 들어온 게 아니니 검문을 할 수가 없죠.”

"쉬엄쉬엄 해. 밥 나누는 것 정도는 부하들에게 맡겨도 되잖아.”

"그러다가 두 명이 죽었거든요.”

소미가 시무룩하게 말하며 두 손으로 무릎을 감쌌다. 의자에 앉기만 하면 자동으로 나오는 자세인 것 같았다.

“나만 좀 더 고생하면 돼요. 곧 오빠처럼 잠 안 자고도 버틸 수 있게 될 테니까.”

“좋은 소식은 없어?”

“있죠, 소문을 듣고 모여든 게 불청객만이 아니더라고요.”

"누가 왔는데?”

"미국요.”

"미국? 내가 아는 그 미국?”

"네."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 마디 덧붙였다.

"아닐 수도 있어요. 자기가 뉴 텍사스에서 왔다고 해달라던데.”

뉴 텍사스.

기억난다, 황국과 전쟁중인 국가 리스트에서 혼자만 튀던 이름이었다. 다른 모든 나라는 기존에 존재하던 국명이었다면, 그 이름은 미국의 새로운 주정부인지, 완전히 독립해나간 국가인지 애매했었다.

"그 양반들이 무슨 일로?”

"글쎄요, 말로는 친선도모라고 하던데요. 일단 만나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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