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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08화 (108/205)

108화. < 독립 (9) >

"설마 그 미친 짓거리를 또 하라는 건 아니겠지.”

울토르의 힘을 흡수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남의 정신세계에 맨몸으로 뛰어드는 일을 다시 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들은 머지않아 완전한 의식의 통합을 이루어낼 것이다. 인류의 존속을 위협할 강대한 적이 탄생할지도 모른다.”

"골치 아프게 들리긴 하다만, 이 세계가 싸지르는 모든 똥을 내가 뒤치다꺼리해야하는 입장은 아닐 텐데.”

"우리에겐 동맹이 필요하다, 라힐.”

이네스의 검은 눈동자가 나를 탐색하듯 훑었다.

“죽여서 흡수하라는 게 아니다. 공통의 적을 가졌으니 힘을 합치자는 것이다.”

“확실히, 동맹이 늘어 나쁠 건 없지.”

나는 긍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독불장군처럼 혼자 설치다간 결말은 불을 보듯 삔했다.

사회주의 대국을 건설하겠답시고 날뛰던 군체와 별반 다르지 않은 최후를 맞이하겠지.

별개의 이야기지만, 이네스는 방금 ‘우리’라는 대명사를 나와 같은 의미로 사용했다. 사소하지만 담긴 함의는 결코 사소하지 않았다.

그녀는 군체의 파편이던 시절을 점점 떨쳐내고 점점 자신만의 자아를 확립해가는 듯했다.

"좋아, 다음은?”

"이것을 보아다오.”

이네스가 탁자 위에 올려둔 접시를 가리켰다. 안 그래도 방에 들어올 때부터 신경 쓰이던 접시였다.

접시에는 낯선 요리가 가득 담겨있었다. 양념에 재운, 푸른 껍질을 가진 고깃덩이였다.

"무슨 요리냐?”

"일단 먹어봐.”

“...그래.”

나는 포크로 고깃덩이를 찍어 한입 베어 물었다. 옛날 우티르와 함께 뭉쳐 다닐 때도 그가 요리담당이었다는 걸 떠올리며.

향이 나쁘지 않았다.

...맛도 나쁘지 않았다.

고소한 향기와 함께 육즙이 익은 과일 터지듯 풍부하게 배어나왔다. 입 안에서 사치스런 페스티벌이 벌어지는 것만 같았다.

"먹을 만한가?”

이네스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먹을만한 정도가 아닌데.”

"다행이군.”

"이게 대체 무슨 고기지?”

“가시모개 요리다."

“가시모개?”

“정착지 옆에 큰 강이 있더라. 그곳에서 잡아온 민물고기다. 수생족이 즐겨 먹는 어종이기도 하지.”

"아하...”

별안간 깨달음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럼 그냥 거기서 식량자원을 구해와도 되겠는데? 굳이 연구에 비싼 돈 들일 필요가 없었잖아.”

"너희 연구팀이 연구중인 뭍짐승들은 정글에서만 발견되는 고유종이다. 내가 알기로 현재까지 어떤 종족도 가축화에 성공하지 못한 종이다. 마리당 생산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프로젝트가 완료된다면 다른 나라에 손 벌릴 일이 없어질 것이다.”

“..어느 틈에 그런 걸 다 알아보고 다녔냐?”

“나는 생각한다.”

이네스가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흑단처럼 검은 머리카락을 목 뒤로 쓸어 넘기며.

"고로 존재한다는군.”

칸트였나, 데카르트였던가.

"사고훈련이라도 한다는 거냐?”

“그래. 내 머릿속에는 군체의식이 보유했던 모든 데이터가 남아있다. 하지만 내 정신력은 군체를 제어했던 초자아만큼 강하지 않기 때문에, 데이터를 해석하고 활용하는 걸 게을리 한다면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너 정말 괜찮은 거냐?”

새카만 눈동자가 나를 가만히 주시했다. 그녀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내게서 시선을 떼어놓지 않더니, 잠시 후 자그만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

"아직까지는.”

"탈이 날 거 같으면 숨기지 말고 말해. 이젠 너 하나 도와줄 힘은 되니까.”

"널 걱정시킬 정도는 아니다. 지금처럼 새로운 몸으로 새로운 기억을 계속 만들어나가면 된다.

“그럼 차라리 연구팀에 들어가는 건 어떠냐. 사고훈련이라면 원 없이 할 수 있겠는데.”

“그쪽은 나를 싫어할지도 모른다. 연공서열을 따지는 문화권에서는 발언자의 나이가 어릴수록 존중받기 힘든 경향이 있으니.”

“걱정마라, 연공서열이나 따질 사람은 애초에 이런 곳에 자원해서 오지도 않아.”

“하긴, 이곳은 네 나라로구나.”

이네스가 엷게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이상이다. 오전부터 피를 뽑았더니 피곤하다.”

"혹시 차수진 박사냐?”

"맞아. 수생족의 데이터가 필요하다고 해서 협조했지.”

"조심하는 게 좋아. 그 여자는 흡혈족이니까.”

"내가 알기로 흡혈족이라는 아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의 표정이 너무 진지한 바람에 실소가 절로 흘러나왔다.

"아무데나 주삿바늘 찌르고 다니면 그게 흡혈족이지, 뭐. 아무튼 몸 간수 잘해라. 탈 나면 말하라는 거, 잊지 말고.”

나는 이네스를 남겨두고 방을 빠져나왔다.

"아길리님.”

"예, 전하.”

다부진 여전사가 풍성한 금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다가왔다. 나는 그녀의 육감적으로 흔들리는 가슴에서 의식적으로 시선을 떼었다.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니건만, 저 다가트 특유의 복식만큼은 도저히 적응하지 못하겠다.

"나갈 준비를 합시다.”

"어디로 가십니까?”

"요새도시를 둘러봐야겠습니다.”

현재 공화국은 모든 역량을 요새도시를 건설하는 데 기울이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붐비던 수도는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텅 비고 말았다.

"참, 비공개 시찰로 해둡시다. 나팔 불면서 찾아가는 건 의미가 없으니.”

“투구를 가져오겠습니다.”

아길리가 투구를 가지러 떠났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상념에 젖었다.

요새도시 건설 프로젝트의 총책임자는 소미였다. 요새도시가 난민을 받아들이는 창구 역할도 하고 있기 때문에.

어련히 알아서 잘 하고 있겠으나, 최근 들려오는 소문이 심상지가 않았다. 살인, 강도, 강간 등 중대폭력범죄는 물론이거니와 방화나 폭발물 테러 등의 사보타지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근래 일어난 불은 수도에서도 그 연기를 관찰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아길리는 돌아올 땐 혼자가 아니었다. 넙대대한 주둥이를 가진 귀여운 크록이 그녀의 옆구리에 붙어있었다.

“이 친구는 누굽니까?”

“전하의 비밀스러운 외유를 발설하지 않을 충성스러운 운전병입니다.”

아길리가 크록의 반들반들한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교육을 받긴 했지만, 차를 실제로 몰아보는 건 처음이라고 하니 감안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누구나 초보일 때가 있죠.”

...하지만 그 초보가 내 운전병이어선 안 됐을지도.

덜커덕, 덜커덕.

지프차가 삐걱대며 정글 북부로 향했다. 차 프레임이 마차마냥 흔들리는 건 중간에 나무를 몇 차례 받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운전병은 서너 번 박아보고 나서는 감을 잡은 듯 같은 실수를 반복하진 않았다.

포장도로를 한 시간여 달리자, 슬슬 신축도시의 입구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시멘트 벽 위에 가시철조망을 올린 현대적인 초소였다.

"통행증.”

크록 초병이 가까이 다가와 창문을 두들기며 말했다.

운전병이 차창을 올린 뒤, 크록 초병에게 통행증을 보여주었다. 초병은 통행증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나와 아길리에게도 시선을 한 번씩 주었다.

"...좋아."

과묵하기 그지없는 초병이었다. 그는 뒷좌석에 내가 타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듯했다.

"지나가도 좋다. 이걸 확인한 후에.”

그는 통행증을 돌려주며, 총구 끝으로 초소 곁에 세워진 표지판을 가리켰다.

- 군사작전지역

- 무단으로 영내에 들어온 황국민을 발견할 시 즉시 가까운 부대에 신고할 것.

- 난민 신청자는 절대 지정된 지역을 벗어나지 말 것.

- 에신 공화국령을 허가 없이 침범하거나 점유할 경우 공화국 법에 의거해 추방조치될 것임.

- 에신 공화국 장군 정기호.

빨간 글씨로 경고문구가 큼직하게 프린트되어 있었다. 경고문구는 정기호가 장군 직함을 내세워야 할 정도로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걸 시사했다.

우리는 입구를 지나 도시 안쪽으로 쭈욱 들어갔다.

도시 안쪽은 거대한 천막촌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죽과 옷가지 따위를 엮어 만든 천막들이 여기저기 난잡하게 세워져있었다. 눈대중으로 훑어봐도 족히 수천 개는 넘을 것 같았다.

인부들은 전부 공사현장에 투입되었는지, 주변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인간, 그것도 황국에서 온 난민들이 대부분이었다.

"이쯤에서 내립시다.”

나는 아길리와 함께 지프차에서 빠져나왔다.

누구도 우리를 알아보지 못했다.

자동차가 신기했는지 시선이 조금 모여들긴 했다. 그러나 이미 공터 주변은 식량이나 건설자재 등을 나르는 트럭들로 포화상태였다.

“난민들 관리가 전혀 안 되고 있군요. 출입이 통제되지도 않는 것 같고...”

아길리가 부지불식간에 표정을 찡그리며 말했다. 고약한 악취가 사방에서 코를 찌를 듯이 풍겨왔다.

간이화장실이 군데군데 보이긴 했으나, 수가 턱없이 부족할뿐더러 오물을 처리할 하수처리시설도 미비했다.

게다가 태생이 천민인 자들은 위생관리란 개념 자체를 몰랐다.

그들은 황국에서 짐승처럼 방임되었고, 실제로 짐승과도 같은 대우를 받았다.

"역시, 5천명 가지고 통제가 가능할 리가 없지.”

"외곽에서는 지금도 난민이 끝없이 몰려들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소미가 고생하겠는걸.”

받자니 여력이 모자라고, 받지 않자니 원성을 듣는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디선가 박 깨지는 듯한 타격음이 났다.

한 건장한 사내가 검집으로 어린 소년의 머리를 매섭게 내려치고 있었다.

"이 더러운 천민새끼가!"

퍽, 퍽, 퍽.

사내의 손길에 살기가 담겨있었다. 그는 소년을 진심으로 때려죽일 생각이었다.

"네깟 것이 감히 내 옷에 손을 대!”

소년은 머리를 움켜쥔 채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그렇게 매가 그치기만을 기다리는 게 그가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자기보호조치였다.

벗겨진 머릿가죽에서 피가 튀었다. 메마른 바닥이 소년이 흘린 피로 축축하게 젖어갔다.

누구도 소년을 도와주지 않았다. 오히려 불똥이 자신에게 튈까 가슴을 졸일 뿐.

"주군.”

아길리가 도끼자루를 쥐며 나를 불렀다. 개입해도 되겠느냐는 물음이었다.

에사인의 보호조차 받지 못하는, 천하디 천한 불가촉천민.

사내의 팔 위에 수만 년에 달한다는 황국의 역사가 실려 있었다. 소년이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것도 그 수만 년의 역사였다.

나는 사내를 잠깐 쳐다보다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개입하시죠, 최대한 온건하게.”

아길리가 사내에게 저벅저벅 걸어갔다. 사내는 아길리가 다가서자 눈살을 찌푸렸다.

“...넌 또 뭐야?”

그러나 아까와 같은 패기가 담겨있진 않았다. 아길리의 육신에는 다가트의 용사임을 드러내는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무구는 다가트에게 직접 하사받은 것으로, 제아무리 눈이 어두운 사람이라도 무구를 휘감은 선연한 아우라를 무시하기란 힘든 노릇이었다.

나는 아길리가 그를 상대하는 동안, 그를 지나쳐 소년에게 다가섰다.

소년이 바닥에 엎드린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굳은 피와 모래먼지에 얼굴이 온통 뒤덮여 본래 외모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푸른 눈동자엔 숨길 수 없는 총기가 가득했다.

영혼의 빛.

저 빛이야말로 짐승과 인간을 구분 짓는 차이점이다.

소년은 입가에 묻은 피를 스윽 닦으며, 억눌린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십니까?”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지나가던 에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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