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 독립 (8) >
"......폐하께서는 이 일을 결코 가볍게 넘기지 않으실 것이다.”
“나도 그래.”
이라올라가 생기 없는 눈동자를 내게 고정했다. 그녀의 불투명한 시선은 에사인인 내게조차 꺼림칙한 불쾌함을 불러일으켰다.
킬데인에게 되살아난 것도,
로켄에게 지배당한 것도,
군체의식에게 흡수당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녀의 본성이 뒤틀린 것만은 확실했다.
그녀는 투구를 다시 눌러쓰더니 자로 잰 듯 정확한 동작으로 뒤돌아섰다.
"또 뵙겠습니다, 황자님.”
이라올라가 저벅저벅 떠나갔다. 그녀가 모습을 감추자마자, 황자가 휘청거리며 병상에 몸을 기댔다.
“괜찮나?”
"대체 어쩌려는 거냐.”
우르가 헐떡이며 따지고 들었다.
"아버지가 당신에게 살 길을 열어주었지 않나. 와서 군신의 예를 취하라고. 나는 다시 돌아가더라도 황자 노릇을 하면 그만이지만, 당신에겐 물러설 곳이 없을 텐데.”
"저흰 어차피 황국하고 같이 가긴 글렀어요. 오빠가 엮이는 에사인마다 사이가 틀어지고 마니까요. 그러니 너무 부담 가지지 마셔요.”
소미가 우르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아니, 나를 디스한 것일지도.
"내 아버지를 상대할 계책이라도 있나.”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우리가 불리하기만 한 상황은 아니니까. 아까 그 여자가 수만 년의 역사 운운하던데, 일곱 권능 모가지가 짚단처럼 날아가던 시대는 지금이 처음 아니냐.”
"그렇긴 하다. 그래도......나는 아버지가 지는 장면을 상상할 수가 없다.”
"그게 세뇌의 힘이라는 거지. 네 아버지의 힘의 근원.”
에사인을 에사인으로 만드는 건 이미지, 즉 프레임이었다.
황제가 짜놓은 프레임은 이랬다. 이 세계에서 최강의 에사인은 자신이며, 대부분의 일은 굳이 나서지 않아도 자신을 보좌하는 강력한 에사인들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라고.
그러한 프레임은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고착화되었고, 황제에게 실재하는 것 이상의 힘을 쥐여주었다.
가령 내가 울토르의 뒤를 이어 네 번째 권능으로 등극한다고 치자.
사람들은 내게 딱 황제의 네 번째 수하에게 어울릴 만큼의 신앙심만을 바칠 것이다. 내가 셋째보다는 약하고, 다섯째보다는 강할거라 굳게 믿어 의심치 않겠지.
그래서는 결코 위로 올라설 수 없다.
틀 안에 의식을 가두는 것,
그것이 바로 프레임의 힘이었다.
때문에 황제를 상대하겠다는 건 수십억에 달하는 황국민 전체의 상식, 고정관념을 깨부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분명 버거운 상대라는 건 인정하지만, 이쪽 엔트리도 결코 만만치가 않았다. 중국 인구만 합쳐도 십오억이 너끈하니.
자그만 계기 하나만 만들어주면 된다.
황제가 무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아주 사소한 불신의 씨앗.
“제 의견도 들어보시겠어요?”
소미가 슬쩍 손을 들었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국에 전쟁 때문에 머물 곳을 잃은 사람들이 너무 많더라고요. 스트리아 성벽 밑은 난민들이 너무 많아서 군대가 지나가기 힘들 정도였어요. 대영주님 말씀으로는 일본하고 싸우면서 생겨난 난민도 어쩌지 못하고 있다는데, 서부에서 몰려온 사람들까지 감당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해요.”
중국군은 서부지대에서 초토화 작전을 펼쳤다. 마족은 포로를 잡지 않는다는 소문이 눈덩이처럼 퍼져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등졌다.
"게다가 하나의 중국의 지배에서 풀려난 사람들도 문제에요. 그분들은 문자 그대로 대륙 서쪽 끝에서 끌려온 데다가,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없을 만큼 정신이 오염되어 있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 분도 몇만이 넘는다고 하네요.”
“그렇다면 네 생각은...”
"우리가 그분들을 품는 거죠.”
소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크록이 귀엽긴 하지만, 한 종족만으로 인구를 채울 수는 없으니까요. 전쟁으로 터전을 잃은 난민들은 머물 집과 땅이 생겨서 좋고, 우리는 인구가 늘어서 좋고. 서로 윈윈이 아닐까요?”
"찬성한다.”
정기호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국은 인구가 지나치게 많다. 그 인구의 상당수는 천민이라 불리는 극빈계층에 머무르지. 종교적인 이유가 얽혀있어 황국에는 천민을 위로 끌어올리는 사회적인 장치가 전무하다. 그들은 심지어 신앙을 가지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해. 전쟁 때문에 터전을 잃은 사람들의 운명도 머지않아 그들과 같아질 것이다.”
난민을 수용해 덩치를 불리겠다는 발상.
체급을 키우는 게 절실한 이때에 단비가 되어줄 정책이었다.
게다가 이 정책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에게 기댈 곳이 되어주겠다는 소미의 소망과도 직결되었다.
어쩌면 그녀에게는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보다 이런 구휼사업이 명성을 높이는 데 더 큰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혹시 네 여동생과 얼굴 붉히게 되진 않으려나? 그쪽 인구를 빼갈지도 모르는데.”
“어차피 스트리아 밖에서 몰려온 자들이 대부분이다. 게다가 그들을 구제하지 못하는 종교적인 이유는 내 여동생이라고 해서 다를 게 없다.”
"좋아.”
나는 결심을 내렸다.
"난민을 받아보도록 하지. 이 건은 발안자인 소미에게 전적으로 맡겨보마.”
"당연하죠. 저 안 시켜줬으면 다 엎어버리고 서울로 돌아가려고 했잖아요.”
소미가 킥 웃으며 대답했다.
"참아다오, 네가 난동 부리면 말릴 사람도 없으니까.”
나는 그녀의 농담에 맞장구쳐주었다.
말릴 사람이 없는 건 맞는 소리다만.
"난민을 수용하실 생각이라면 말라붙이를 위한 특별대책을 세우셔야 할 겁니다.”
오르기가 조용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말라붙이?”
“주군께서도 상대해보셨던, 곤충형태의 종족입니다.”
기억났다. 아주 성가신 놈들이었지.
"주군께서 잘 모르시는 것도 이해합니다. 말라붙이는 서부대륙의 숲에 서식하는, 크록만큼이나 알려진 게 드문 종족입니다. 전투력이 굉장히 뛰어나지만, 지능이 극단적으로 낮습니다. 동족포식이 빈번히 일어날 정도로 포악하고, 사회성이 떨어져 무리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문헌에서는 여행자의 발목을 잡는 무서운 야수로 묘사되곤 했습니다.”
"그런 종족이 지금 패잔병이 되어 스트리아 벌판에 지천으로 깔려있다는 소리로군요.”
"네, 그렇습니다.”
“지능이 낮고, 동족포식에, 사회성 떨어지고..그런 분들은 주민으로 받아들이기 곤란하겠는데요?”
소미가 난감하다는 듯이 말했다. 오르기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만, 사정이 복잡합니다. 하나의 중국은 이 말라붙이라는 종족을 지배해 병사로서 부렸습니다. 야생동물이나 마찬가지인 종족이라 정신력도 허술할 수밖에 없어서, 손쉬운 먹잇감이었겠죠. 하지만 지금 군체의식의 지배에서 풀려난 개체는 완전히 다른 종족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어떻게요?”
"그들은 거대한 군집체와 정신을 공유했던 여파로 상당한 지능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공동체의식이 발아하여, 스트리아령 여기저기에 무리를 지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믿을 수 없군.”
듣고만 있던 황자가 홀린 듯한 목소리로 감탄했다.
다른 자들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르기는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자 얼굴을 옅게 붉히며 설명을 이어갔다.
"저도 대충 훑어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세한 연구를 해볼 만큼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으니까요. 확실한 건 지금 말라붙이 무리들이 스트리아의 허허벌판에서 생존을 위한 투쟁을 벌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도 되나요?”
"예."
"사람들이 다가서기 편한 외모를 가진 분들은 아니세요.”
소미는 정말로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우리가 세울 나라는 많은 종족이 더불어 살아가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동감이다.”
내가 소미의 말을 받았다.
"인종과 종족을 불문하고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 곧 반포될 헌법조문에 들어갈 구절이야. 수석마법사님은 그들이 정말로 수용 가능할 종족일지 더 알아봐주시죠. 주민으로서 적합하다고 판단된다면 소미하고 잘 협력하여 이곳에 그들을 위한 자리를 만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오르기가 멋들어진 동작으로 내게 경례했다. 그는 날이 갈수록 잘생긴 값을 하려는 중이었다.
“...본격적이로군.”
우르가 중얼거렸다.
"이렇게 살아왔기에 그런 힘을 얻게 된 건가? 이렇게까지 해야 에사인이 될 수 있다는 건가?”
"그래, 남 얘기가 아니니까 잘 보고 배워두라고.”
"내가 할 만한 일도 있나?”
“넌 우선 몸조리부터 하러 가야겠다.”
나는 붕대로 돌돌 감긴 그를 쳐다보며 혀를 찼다.
일단 몸이 낫고 나면 그가 해줄 일이 많았다.
오직 그만이 해줄 수 있는 일도 많았다.
영혼을 타인의 정신계로 침투시키는 마법.
우르의 고유마법을 활용해서 큰 사고를 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민을 흡수해 세를 불리겠다는 계획은 영토 최북단에 요새도시를 건설하는 프로젝트와 맞물려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우리에겐 넘쳐나는 게 땅이었다. 대한민국에서 들여온 각종 기계 덕에 개간 속도도 이전보다 훨씬 빨라졌다.
모자란 건 오직 하나, 머릿수.
스트리아 남단, 마족의 영토로 가면 집과 땅과 먹을 것을 나눠준다는 소문이 날마다 알음알음 퍼져나갔다.
국적을 바꿔도 상관이 없을 만큼 황국과 일곱 기둥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자들이 각지에서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입국 절차는 쾌속하기 짝이 없었다.
크록 사제들이 황국의 첩자나 도피처가 필요한 흉악범들을 진실의 추로 간단하게 가려냈으니.
오르기로부터도 낭보가 들어왔다.
말라붙이에 대한 적합판정이었다.
사업이 하나둘 착착 진행되고 있을 때, 나는 드디어 이네스를 위한 시간을 내었다.
이네스는 왕궁의 수많은 방 중 하나에 자리를 틀어 그곳을 마법수련을 위한 장소로 바꾸었다.
평생 암살자로 밥벌이를 하던 놈이 갑자기 마법으로 전공을 바꿨다는 것도 위화감이 드는 일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
도대체 어떤 인칭대명사를 써줘야 할지조차.
"라힐.”
자그만 소녀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녀의 손에는 책이 몇 권 들려있었다.
"로이.......네스.”
소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이네스라고 부르라던 건 너다.”
"그냥 로이네스라고 개명하는 건 어떠냐?”
“나는 이네스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전혀 양보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나도 저 육신에 다른 이름이 어울릴 것 같진 않았다.
"생각보다 훨씬 늦게 찾아왔군. 덕분에 나름대로 내 정체성에 대해 정리해볼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게.......정리가 되더냐?”
나는 여물지 않은 소녀의 몸을 아래위로 훑으며 반신반의하는 투로 물었다.
이네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나에 대해 알아가야 할 게 많다. 적어도 내가 뭘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걸 깨닫게 되었지. 지금은 네 덕에 다시 두 발로 세상을 걸어볼 수 있게 되었다는 걸 감사하고 싶다.”
“계약이었으니까.”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니 찾아왔겠지? 서부대륙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으며, 우리가 어떻게 힘을 얻었는지에 대하여.”
"그래.”
이네스가 고개를 까딱이며 책상 옆 소파를 가리켰다. 나는 소파에 앉아 그녀의 검은 눈동자를 마주 바라보았다.
"네가 먼저 알아둬야 할 것은, 군체를 이룬 의식이 우리가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뭐?”
"우리는 서부의 오지를 개척하며 수많은 미지의 신과 종족을 맞닥뜨렸다. 우리는 그들을 정복했으나, 곧 그 많은 의식을 하나의 방향성 안에 담아내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군체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의식 일부를 떼어내야만 했다. 개체수가 늘어난 벌이 분봉을 하듯이.”
"그렇다는 건...”
이네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서부 어딘가에 소화되지 않은 에사인이 더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울토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