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06화 (106/205)

106화. < 독립 (7) >

"좋다, 어차피 황자님의 상태를 눈으로 확인해볼 필요도 있으니.”

카룩카이가 크록 정예병들을 이끌고 황자를 데리러 떠나갔다. 그동안 나는 이라올라라는 자를 좀 더 관찰해보았다.

이라올라는 갑옷의 틈바구니에서 검은 연기를 흘리며 우두커니 서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아르세니오처럼 다른 사람의 영혼이 씌인 것 같진 않았다.

- 나는 이 땅의 주인이자 유일하신 황제폐하를 섬기는 자다.

돌이켜보면 그녀의 소갯말이 독특했다.

당연히 모든 황국신민은 황제폐하를 섬기겠지. 하지만 타인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는 으레 자신과 연관된 고위귀족이나 에사인의 이름 부터 밝히기 마련이었다.

- 나는 카둔의 종이자 강철의 자매단 단장 이라올라다.

그녀는 이렇게 소개를 했어야한다. 전사단 단장씩이 되는 인물이 모시는 에사인의 이름을 빼놓을 수 있냐는 거지.

"이라올라님.”

소미가 이라올라를 조용히 불렀다. 마음 같아서는 뜯어말리고 싶었다. 그녀가 느꼈던 불길한 예감이 이것이다 싶었기에.

"혹시 카둔의 신전에서...”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군.”

이라올라가 그녀의 말을 날카롭게 잘랐다.

"다시는 내 앞에서 그런 나약한 에사인의 이름을 거론하지 마라.”

"하지만 이라올라님께서는 카둔의 성도가 아니신가요?”

"잊은 과거다.”

이라올라는 자신이 카둔을 섬겼다는 걸 인정했다.

지금은 황제의 수하라는 것까지.

일곱 권능에 대해서는 많은 것이 알려져 있지만, 황제가 구체적으로 어떤 힘을 지녔으며 어떤 조직을 휘하에 두었는지는 상당부분 미스테리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황제가 역사의 전면에 나서야할 만큼 대륙 정세가 역동적이었던 때가 가깝게 잡아도 장장 천 년 전이었다.

당시 황제가 어떤 인물인지 기억하는 자는 모조리 늙어죽었다. 남겨진 기록은 모조리 빛이 바랜 채 구석진 서고에 처박혀버렸고.

황제의 직속수하임을 자처하는 자가 또다시 나타났다는 건 두 가지를 의미했다.

지금이 천 년 전에 버금가는 환란의 시대라는 것.

칩거는 말뿐이고, 황제가 이면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

"네, 그래 보이네요.”

소미가 한 걸음 물러섰다.

납득한 것 같진 않았으나.

대전 입구가 소란스러워졌다. 카룩카이와 크록 정예병들이 황자를 데리고 돌아왔다.

황자는 아직 거동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는 병상에 꼼짝없이 누워 링거를 꽂은 채, 크록 간호사를 좌우로 둘 대동했다.

드르르......

병상이 거칠게 깎아낸 대전 돌바닥을 지나치느라 쉼 없이 덜커덕거렸다.

“살살 밀어라, 자식들아.”

보다 못한 정기호가 훈수를 두었다. 병상은 곧 이라올라에게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위치에 멈춰 섰다.

"이황자님을 뵙습니다.”

이라올라가 무릎을 꿇으며 예를 표했다.

"......."

우르가 힘겹게 고개를 들어올렸다. 전신에 붕대를 칭칭 감아두었기 때문에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오직 그의 눈과 입뿐이었다.

나는 그를 너무 이르게 불러낸 게 아닌가 싶었다. 조명래 원장으로부터 절대안정을 취해야 할 시기라고 들었기도 하고, 그의 상태가 실제로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없는 자리에서 그의 운명을 왈가왈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멋지군.”

우르의 목소리가 기대 이상으로 듣기 좋았다. 신벌을 받은 직후에는 성대가 타들어가 쉰 소리밖에 내지 못했었다.

"이곳이 당신의 성인가?”

우르가 내게 물었다. 이라올라를 깔끔하게 무시하며.

“그래.”

“투박하지만 그만큼의 기상이 느껴진다. 어떤 면모로는 질서의 궁에 견줄 수도 있을 것 같다.”

“너 눈도 다쳤었냐?”

그가 피식 웃었다. 나도 그를 따라 지그시 미소를 지었다.

반면 이라올라의 안색은 먹구름처럼 흐려지는 중이었다. 그녀는 무릎을 펴고 자리에서 일어나, 질책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황자님, 가면을 쓰지 않으셨군요.”

"얼굴은 잘 가리고 있지 않나.”

"그 말씀도 드리려고 했습니다. 몸을 감은 그 천들...무척 볼썽사나운 모습을 하고 계십니다. 황자께서는 폐하의 뜻이 어떠한지 헤아리지 못하셨습니까?”

“잘 헤아리고 있다. 날 필요 없는 놈이라고 정의하셨더군.”

“황자께서는...”

"가서 전해라. 아버지가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나도 아버지를 버릴 뿐이라고.”

우르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라올라는 눈썹 하나 까딱 않았다.

"황자께서는 그분을 버리지 못하십니다. 그분께서 주신 것이 황자님의 전부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 몰골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내겐 더 이상 가면 따위가 필요 없다. 너희가 신성하다고 여기는 형상 전부가 타서 녹아버렸기 때문에.”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황자님의 피도, 살도, 뼈도, 마력도, 무엇하나 폐하께 비롯하지 않은 게 없지요.”

“날더러 죽으라는 소리냐?”

"뿐만이 아닙니다. 무엇을 먹는지, 무엇을 입는지, 어떤 교육을 받는지, 타인의 의지를 자신의 의지 아래 둘 수 있는지, 지금껏 당연하게 누려온 삶의 모든 것이 위대한 핏줄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황자께 당연하기만 한 그것들이 다른 이들에겐 그렇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계시겠지요.”

나는 이쯤에서 끼어들 수도 있었으나, 황자의 대답이 궁금했다.

이라올라가 구사하는 재수 없는 화법.

얼마 전까지 황자도 쓰던 화법이었다. 그 또한 자신이 선택받은 자라고 굳건히 믿었다. 양심의 가책 없이 타인의 운명을 마음껏 주물렀다.

그가 정말로 한평생 옷처럼 두르고 살았던 특혜를 내던지고, 지고무상의 존재와 반목할 수 있을까?

"나를 일으켜다오.’’

황자가 크록 간호사들에게 청했다. 그는 모두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병상 팔걸이에 의지해 두 다리로 섰다.

"후우.”

그는 잠시 후 팔걸이를 쥐었던 손을 놓았다.

자리가 이런 자리가 아니었더라면 박수라도 쳤어야 할 순간이었다.

조명래 원장은 임상치료가 성공할 경우 아르세니오보다 황자의 회복이 더 빠를 것이라 장담했었다.

그러나 황자의 회복세는 원장의 예측보다도 훨씬 빨랐다. 타고난 마력이 만능 재생세포와 결합하여 신체의 회복력을 수백 배로 끌어 올렸기 때문이다. 원장이 추측하는 그의 MP는 아르세니오의 세 배, 약 4천이 넘었다.

황자가 이라올라와 마주 섰다. 황자도 제법 키가 큰 편이었으나, 이라올라는 2미터에 달하는 거인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올려 이라올라와 눈을 마주한 뒤, 납득했다는 듯한 투로 중얼거렸다.

"너는 아버지의 근위전사로군.”

"그렇습니다.”

"네가 떠드는 그런 말을 평생 귀가 따갑도록 듣고 자랐다. 나는 실제로 나 자신이 아버지를 제외한 누구보다도 우월하다고 여겼다. 지고한 축복을 타고났기 때문에, 나 자신을 내세울 수 없다는 건 사소한 불편함이라고 생각했다.”

"사실입니다.”

“눈을 다친 건 내가 아니라 너였구나.”

황자가 미소를 지었다.

"주변을 둘러봐라. 네 눈에는 내가 이 자들보다 우월한 것 같아 보이나? 이들이 나처럼 위대한 핏줄을 타고나지 못했다고 불행해하는 것 같나?”

"물론 저들은 황자님의 핏줄을 부러워합니다. 말로만 표현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런 음험한 기질 또한 천출들의 특징입니다.”

"핏줄 타령 좀 집어치워라.”

"사실이 그러합니다. 황자께서는 위대한...”

"위대하다는 수식은 핏줄이 아니라 내 이름 앞에 붙어야해!”

황자가 두 주먹을 쥐며 벽력같은 노성을 질렀다. 서슬 퍼런 호통에 붕대가 뜯어져 나가 아직 여물지 않은 하관이 드러나고 말았다.

황자는 붕대가 뜯어진 걸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이라올라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말했다.

"진실을 얘기해주마. 지고한 핏줄 따위가 없어도 사람은 얼마든지 위대해질 수 있다. 지난 수천 년간 그게 가능하지 않았던 게 너희들 때문이라는 걸 내가 모를 것 같나? 너희가 왜 에사인이 될 가능성을 가진 자들을 두고 보지 못하는지 내가 모를 것 같나. 너희들은 그게 세상의 질서에 이바지한다고 생각하겠지? 천만에. 너희들은 세상을 갉아먹는 좀벌레다. 역병이다!”

"세상의 질서란 위대하신 분에 의해 그것이 질서라고 정해졌기 때문입니다.”

이라올라는 황자가 흥분할수록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황자께서는 잠시 착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눈앞의 야만인들이 구가하는 자유가 영원할 것이라고. 황자님 또한 주어진 의무에서 벗어나 그런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으리라고. 누구나 그렇습니다. 자기 눈앞에 있는 것밖에 보지 못하죠. 그러나 진실은 그 너머에 있습니다.”

"무엇이 진실이냐?”

"수만 년에 달하는 황국의 역사 속에서, 그런 자들이 모조리 죽어 사라졌다는 게 진실입니다.”

이라올라가 보랏빛 입술에 살기를 가득 띄웠다.

"황제폐하의 뜻을 거스르는 야만인들이 세운 나라가 지금까지 몇 개였을까요? 지금껏 몇 명이나 되는 자들이 스스로 관을 쓰며 왕을 참칭했을 것 같습니까? 그렇게 세워졌던 왕국 중에서,”

이라올라는 그 대목에서 잠깐 말을 끊더니, 나와 소미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 ‘신생 공화국’보다 강한 나라는 몇 개였을 것 같습니까.”

끝을 모를 시체걸이들.

왕관을 쓴 부패의 전령들.

과거 이 땅 어디선가 나와 같은 싸움을 벌였던 자들이었다.

과연 나라고 그런 운명을 맞이하지 말란 법이 없었다.

"그럼 네게 묻겠다. 수만 년에 달한다는 황국의 역사 속에서, 황제위가 몇 번이나 바뀌었나."

"......황자께서 물으신 그 질문은 신성모독입니다.”

"대답해라.”

“당연히 한 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황제께서는 영원불멸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수만 년에 달하는 황국의 역사 속에서 자기 이름을 남긴 황족은 몇 명이나 되나.”

"그건 황자께서 하시기 나름입니다.”

"나는 역사를 물었다.”

"......."

이라올라의 입이 처음으로 다물렸다.

황자는 그런 그녀를 올려다보며 차분히 말했다.

“가서 아버지께 전해라. 나 우르 게네발에게는 위대해질 자유로움이 필요하다고."

"저는 황자님을 모시고 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나는 대답을 했을 텐데.”

"그렇다면 어디에 머무시렵니까? 어디를 기반으로 삼아 위대해지시렵니까? 황제폐하의 진노를 사면서까지 황자님을 받아줄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상관없다, 홀로 서는 게 우선이다.”

표정이 사뭇 비장했다. 황자는 아버지에게서 독립하기로 결심했을 뿐만이 아니라, 혈혈단신으로 에사인이 되기 위한 여정을 떠날 각오까지 마친 것 같았다.

“꿈이 크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주제에.”

정기호가 끼어들었다.

"내 몸은 곧 회복된다. 아르세니오만 낫는다면...”

"그때는 빚을 갚아야지.”

"무슨 빚 말이냐?”

"네 목숨값.”

황자가 정기호의 뻔뻔한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참고로 이 나라의 주인은 빚을 노동력으로 환산하는 걸 선호한다.”

"...너는 나를 안고 가겠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는 거냐?”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고통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오르기가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의 표정은 당사자인 황자보다도 더 비장했다. 그는 뛰어난 재능을 타고났다는 이유만으로 수십 년간 바보행세를 해야만 했다.

그는 황자의 아픔을 공감하는 걸 넘어서서, 주군인 내가 황자를 거두기만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었다.

"해볼만한 싸움입니다. 다가트께서 기뻐하시겠습니다.”

아길리가 양손도끼를 바로 잡으며 오르기를 거들었다. 그녀는 험난한 전투를 떠올렸는지 본인이 다가트가 된 것처럼 기뻐하는 중이었다.

"듣다보니 황자님 아빠라는 분, 집착이 좀 심하지 않나요? 낳아준 고마움은 알겠는데, 낳아줬다고 해서 자식이 부모의 소유물인 건

아니잖아요. 뜻을 조금 거슬렀다고 몸을 그을려버리다니....소름끼쳐요.”

"폐하의 뜻을 함부로 들먹이지 마라, 하찮은 것아!”

"당신네 폐하가 얼마나 잘났는지는 모르겠는데, 별 볼일 없는 아빠라는 것만큼은 자신하네요.”

소미가 가장 고단수였다. 그녀는 이라올라의 면전에서 황제를 직접 디스함으로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들었지?”

나는 왕좌에 앉은 채 이라올라를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마음 약한 사람이라, 부하들의 청을 거절할 수가 없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