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 건국 (7) >
김오중 회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내가 강하게 나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듯했다.
“총독대행께서도 한 가지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군요.”
“뭡니까?”
“내가 알기로 그 공동체는 아직 경제적인 자립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는데 어찌 실질적 지배를 한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가령 불미스러운 일로 본국과의 교류가 끊어진다면 달리 대안이 있겠느냐는 겁니다.”
나는 마음속에서 김오중 회장의 위협레벨을 한 단계 상향했다.
기재부가 압력을 행사해온 사정은 극비사항이었다. 프로젝트에 깊이 관여한 박병철 장관조차 내막을 몰랐었다.
김오중 회장도 나와 똑같은 생각으로 회담에 임하는 게 분명했다. 그는 오늘 모임이 금력과 마력이 주도권을 두고 다투는 자리가 될 거라고 예견하고 송곳니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중이었다.
“대안이 왜 없겠습니까. 이런 자리도 대안마련의 일환이 아니겠습니까?”
“내 솔직히 말씀드리리다.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온 건 대한민국 행정부 산하의 에신 총독령과 거래하기 위해서입니다. 박봉팔씨가 구상하는 공화국이니 연방정부니 하는 건 나는 찬성하지 않아요. 그런 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으셨다는 겁니다. 사람이란 모름지기 자기 분수를 알아야하는 법입니다.”
“회장님께서 많이 급하신가보군요.”
"내가 왜 급하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협상 초장부터 가진 패를 다 보여주실 리가 없지요. 추측컨대 회장님께서는 제게 시간이 더 허락된다면 에신이 완전히 통제불능 상태가 되리라 보시고 무리수를 두시는 듯합니다. 그런데 그 방식이 너무 고루하지 않습니까? 정치인에게 돈을 찔러 넣거나, 정부부처에 압력을 행사하거나.”
“근거 없는 망언입니다!”
“당장 사죄하시오!”
그의 측근들이 고성을 지르며 항의했다.
“총독대행께 언행을 주의하세요!”
박이나 보좌관이 지지 않고 외쳤다. 그녀는 팔이 안으로 굽는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는 중이었다.
김오중 회장은 의외로 침착했다. 그는 손을 들어 측근들을 진정시켰다.
그에게는 아직 믿는 구석이 있는 듯했다. 나도 그가 아무런 장치도 없이 내게 도전해올 것이라 생각지 않았다.
“요샛말로는 흙수저라고 하지요? 변변찮은 집안에서 태어나 일평생 변변찮게 살다 가는 자들. 그러나 총독대행께서는 그런 자들과 다르게 손에 자그마한 권력을 쥐고 태어나셨죠, 전생을 기억한다는 작고 놀라운 이점 말입니다.”
“본론으로 넘어가시죠.”
김우중 회장이 손가락을 튕겨 신호를 보냈다. 즉시 그의 곁에 앉았던 자들 중 네 명의 남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자 셋, 여자가 하나.
모두 잘 쳐줘야 서른 전후의 젊은 자들이었다.
“이 친구들의 공통점을 알아보시겠습니까?”
“...글쎄요.”
“네 명 모두 총독대행과 같은 환생자입니다. 아 그리고, 왼쪽 친구는 암살자 이력이 있다고 합니다. 운명이란 참 재미나지 않습니까, 누구처럼 행운이 따라줬다면 국가원수도 노려봄직했을 텐데.”
김오중 회장이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나는 그가 데려온 자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들이 환생자라는 건 맞을 듯했다, 모두 눈치 채기 힘들 정도로 미약한 마력을 품고 있었다.
넷 다 간신히 전사라고 부를 수 있는 수준이나, 그나마 암살자로 불린 자가 쓸만했다. 그가 아마 이 조촐한 집단의 리더일 듯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정보가 퍼져나갔을까?
대한민국 정부는 아직도 마력이나 술법의 개념을 잘 모르고 있음에 틀림없다.
특히 에사인이란 고지식하고 보수적인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었다.
인격신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기존의 모든 종교가, 세계관이, 모래알처럼 산산이 무너져 내릴 것이기에, 이것만큼은 타협을 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이런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지고 말았다.
어중이떠중이 환생자 네 명으로 반신을 어떻게 해보겠다는.
“이봐.”
나는 환생자들을 불렀다. 정확히는 리더격인 암살자를.
그가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기세로는 지지 않겠다는 것 같았다.
“암살자였다던데, 오데르의 신도였냐?”
“그렇다면 어쩔...”
그가 갑자기 무릎을 감싸며 나동그라졌다. 발목이 어느 틈에 반대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크으으...으아아악!”
그는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목청껏 비명을 질러대었다. 그 지조 없는 비명만으로도 그는 형제가 될 자격이 없는 자였다.
“언행을 조심해라. 내게 거짓말을 하면 벌을 받게 되니.”
나는 남겨진 세 명에게 경고했다.
그들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에신 출신이라면 자신만의 규칙을 소유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었을 것이다.
“계속할 테냐?”
그들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럼 사라져라.”
그들은 김오중 회장과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둘 중 누구의 말을 들어야할지 재보는 듯했다.
결론은 오래지 않아 나왔다. 그들은 쓰러진 동료를 들쳐 업고 회담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저, 저것들이.. 내가 준 돈이 얼만데...”
김오중 회장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돈으로 목숨을 살 순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돈이라면...”
그는 쉽게 납득할 수 없다는 듯했다.
“여전히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우시다면 방금 회장님을 위해 목소리 높이던 사람들더러 물어보시죠. 지금도 내게 대들 수 있겠느냐고.”
나는 그의 측근들을 쳐다보며 그를 채근했다.
“어서요.”
김오중 회장은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의 얼굴에 점차 패색이 떠오르고 있었다.
“회장님의 권력은 사회적인 합의를 통해 부여된 것입니다. 당장 오늘 이 순간부터 대한민국 사람 전원이 돈의 가치를 무효화하기로 결정한다면, 회장님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중년의 남성일 뿐이지요. 하지만 마력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력을 가진 자는 누구의 합의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금력은 마력을 이길 수 없다.
그것이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
“하지만 그렇다면...나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가?”
그가 넋이 나간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가 설명을 해달라는 듯이, 공허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제가 상생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른 사람이 가진 걸 뺏을 수도 있었고, 제 회사를 세운 후 경쟁자들을 짓밟아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택한 건 외교부 주관으로 투자설명회를 여는 거였죠.”
“총독대행께서는 선의가 있다고 칩시다. 그러나 모든 환생자가 상생을 원하는 건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더욱이 저와 한 배를 타셔야하는 것이지요. 저는 이 나라에서 가장 강한 환생자입니다. 저를 뒷배로 삼아 시대에 편승하셔야합니다.”
“......시간을 주시오. 생각을 정리해볼 테니.”
그가 침울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어쩌면 인생에서 처음일지도 모르는 좌절감을 맛보는 중이었다.
“질문이 더 있으십니까?”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적막한 분위기가 흡사 장례식장을 방불케 했다.
“그러면 투자설명회는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폐회를 선언하며 단상에서 내려왔다.
“고생하셨어요.”
박이나 보좌관이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아까 한 차례 소리를 지른 탓인지 두 뺨에 홍조가 가득했다.
나는 그녀와 함께 집무실로 돌아가려다가 한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붉은 조끼에 작업복을 입은 장년의 남성이었다.
그는 내 앞에 서자마자 다짜고짜 손을 내밀었다. 그는 나의 손을 맞잡으며 열띤 목소리로 말했다.
“성원목재 김상신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는 목재수입업체 사장으로서, 오늘 투자설명회에 참석한 인물 중에서 가장 인지도가 낮은 인물이었다. 나도 하마터면 그의 존재를 잊을 뻔했다.
“아까 그 재수 없는 놈을 제대로 먹이시던데, 십 년 묵은 체증이 시원하게 내려앉더군요, 하하하. 참, 저는 총독대행님의 제안에 적극 찬성합니다. 뭐든지 주기만 하시면 멋지게 팔아 보이겠습니다.”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그와 굳은 악수를 나누었다. 그는 의미 없는 공치사를 잔뜩 늘어놓은 뒤 간신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가 떠나자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찾아왔다.
이범영 과장이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옷깃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단정한 모습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총독대행님.”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신 것 같네요.”
“예, 외국인 입국 문제로 상담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건 외교부가 할 일이 아닙니까?”
나는 집무실만 외교부에 뒀을 뿐, 더 이상 외교부 소속이 아니었다. 외교부에 적을 뒀을 때도 그런 일은 내 업무가 아니었다.
“방금 일본인 한 명이 입국을 해왔습니다. 총독대행님을 만나 뵈려는 목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요?”
“포탈을 통해 들어왔다는 게 문제입니다.”
나는 이범영 과장과 함께 청사 지하층에 마련된 한 사무실로 안내되었다. 방문자는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내내 온갖 잡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뜻하지도 않았던 인물의 등장이었기 때문에.
이범영 과장이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사무실은 외부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없도록 블라인드가 두껍게 쳐져있었다.
“들어와.”
에신어였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뱀파이어처럼 창백한 낯빛을 가진 사내가 철제 의자 위에 앉아있었다.
그는 무척 초췌해보였다. 한동안 다듬지 못했는지 턱수염이 거뭇거뭇했고, 허름한 와이셔츠는 위에서부터 단추 세 개가 날아가 보이지 않았다.
고풍스러운 일본식 장검이 허리춤에 매달려 바닥으로 늘어져있었다. 그가 내 이름을 대지 않았더라면 검은 통관되지 못했을 것이다.
야마모토 료헤이.
일왕을 위해 싸우다가 포로가 되었던 자였다. 정기호에게 처분을 맡겼던 게 내가 기억하는 그의 마지막이었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
그는 손을 내밀어 내게 편지 한 장을 건네주었다. 종이 재질이 에신에서 만들어진 것임에 분명했다.
“정기호가 네게 보내는 메시지다.”
오직 나만이 확인이 가능하도록 주술적 처리가 된 편지였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다시 추궁했다.
“어쩐 일이냐고 물었는데.”
“대일본제국의 재건을 꿈꾸던 무사가 왜 편지나 나르고 있는지를 묻는 것인가?”
“정확하네.”
“모르겠다면 답이 되겠나?”
“전혀.”
“흐음......"
료헤이가 수염이 까슬까슬한 턱을 쓰다듬었다. 그는 예전보다 훨씬 눈빛이 맑아져있었다.
“네가 날더러 생각하는 건 나같은 놈의 몫이 아니라고 했었지.”
“그랬던가.”
“그러나 나는 왜 내가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 분석을 해야만 했다. 마침 잡힌 몸이라 시간은 넉넉했다. 결론만 간단히 말하자면, 나는 아직 대동아공영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의자를 하나 당겨서 료헤이의 가까이에 앉았다.
그가 나와 다시 싸워보자고 포탈을 건넜을 것 같진 않았다. 그랬다면 정기호가 그를 전령으로 삼지도 않았겠지.
료헤이는 신중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대동아공영이란 동아시아 국가들이 하나가 되어 번영과 평화를 누리자는 이념이다. 그 꿈은 아직도 유효하다. 두 에사인이 함께한다면 동아시아는 얼마든지 서구열강을 압도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 길이 간단히 정해지더군. 주체가 굳이 일본일 필요가 없었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