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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67화 (67/205)

67화. < 건국 (8) >

주체가 굳이 일본일 필요가 없다니, 그건 애초에 일본이 주체라는 걸 가정하고 만들어진 개념일 텐데.

대체 그날 전투 후 어떤 의식의 변화를 거쳤기에 이런 말을 할 수 있는지가 궁금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정체불명의 에사인을 섬기고 있다는 것 말고는 그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이제 너희 왕을 에사인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은 포기한 거냐.”

“그는 그럴만한 재목이 아니었다. 입맛이 쓰지만, 인정하겠다.”

“하지만 너는 그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잖나. 네 신념이라는 게 달면 삼키고 쓰면 뱉을 만큼 가벼웠나.”

“나는.......”

그가 괴로운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감옥에서 풀려난 뒤 나는 본국으로 되돌아갔다. 당시에도 난 한 가닥의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 천황폐하는 신의 적자이며, 기꺼이 우리를 구원해주실 거라고 믿고 싶었다. 나는 본영으로 돌아가 내가 얻은 정보들을 낱낱이 보고했다. 킬데인의 피조물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고, 에사인을 향한 여정에 오른 자가 변방영지를 지키고 있으며, 그를 꺾지 못하는 한 우리의 패배는 필연적이라고.”

그의 정세판단은 정확했다.

“그들은 패배자의 변명은 사기만 떨어뜨릴 뿐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내게서 지휘권을 박탈해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나 개인은 어떻게 되어도 좋으나, 우리에겐 이뤄야 할 대의가 있었으니까. 나는 총리대신에게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천황 폐하께서 직접 적의 수괴를 치셔야만 한다고 간언했다.”

비극이 예감되었다. 정세판단은 정확했을지 몰라도, 그의 정치적인 소양은 정기호만큼이나 희박했다.

“물론 천황이 평범한 인간이라면 내 요청이 과하다고 여기겠지. 하지만 그가 공언한대로 신의 아들이라면 결코 놓칠 수 없는 호기가 찾아온 것이다. 그는 적의 수괴를 침으로서 만방에 위세를 떨치고, 에사인을 향한 여정을 크게 앞당길 수 있다.”

“뭐라고 하더냐?”

“날더러 배신자라더군.”

그가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나는 천황폐하의 신성성을 의심하였다하여 근신처분을 받았다. 대일본제국의 군인다운 정신무장이 덜 되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나는 도저히 그 처분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왜 그는 행동에 나서기를 두려워하는가? 친정이 부담스러웠다면 권능만이라도 보여줄 수 없었을까?”

깊은 번뇌가느껴졌다. 한때 목숨을 걸었던 신념이 통째로 부정당할 위기였으니, 그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절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 나는 그를 의심했다. 의심이 내 눈과 귀를 가려 보고 듣는 모든 걸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괴로움으로 몸부림을 치다가 근신처를 뛰쳐나와 황제의 어소에 잠입했다. 그때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언제까지 의심만을 품은 채 살아갈 수는 없었다. 진실을 두 눈으로 확인해야만했다.”

깡다구가 보통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황제가 머무는 궁에 쳐들어갈 정도로 대책이 없는 인간일 줄이야.

“거기서 뭘 봤지?”

“내가 본 건 나만큼이나 초라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한 사내였다. 마력이 있기는 했으나, 에사인을 입에 담을 재목은 결코 아니었지. 나는 분노하지 않았다, 그저 허망했을 뿐이었다. 어쩌면 나는 결국 일이 이렇게 되고 말거라는 걸 마음속으로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어소를 빠져나와 어디론가 무작정 달려갔다. 나는 길바닥에서 노숙하며 쓰레기로 끼니를 때웠다.”

일군을 이끌던 장수가 하루아침에 길바닥에 나앉다니.

쉬이 상상이 가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스트리아령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것만은 말해두고 싶다, 정기호라는 남자는 담배를 알더군.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많은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둘이 죽이 잘 맞았나보다.

하긴 두 사내가 풍기는 분위기가 묘하게 비슷한 면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겠어.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도 있긴 한데.”

“무엇이냐.”

“넌 나름대로 분별력이 있는 놈 같거든. 게다가 환생자이고, 강력한 술법을 다룰 줄도 알지. 그런데 어쩌다가 그런 철 지난 프로파간다에 넘어가게 된 거냐? 천황이 신의 아들이라는 소리, 진심으로 믿었던 사람이 너 말고 있기는 하냐?”

“환생자이기에 믿을 수밖에 없었다.”

“환생자이기에?”

나는 무심코 반문하다가, 그 의미를 깨닫고야 말았다.

“설마 일왕도 환생자라고?”

그가 음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이 전생에서 에신 템 황제의 일곱 번째 아들이었다고 주장했다. 신의 아들이 신성한 혈통으로 환생했다는 서사를 그려나갔던 셈이다.”

“......그럴듯하네.”

“그럴듯했지. 사실이 아니더라도 사실이라고 믿고 싶어질 만큼.”

“그럼 그건 그렇다고 치고, 지금부터는 뭘 해볼 생각이냐? 참고로 나는 네가 말한 그 대동아 어쩌구란 구상에는 관심이 없어. 나는 내 땅 하나 키우기도 벅차서.”

“당분간은 계시를 기다리며 널 지켜보고 싶다.”

“네가 섬기는 에사인이 누구기에?”

“균형.”

료헤이가 짤막하게 대꾸했다.

나는 그와 겨룰 때를 떠올렸다. 그는 내 응징의 일격을 몇 차례나 정면에서 받아 냈었다. 물리적으로, 마력적으로도 가능할 리가 없었던 퍼포먼스였다.

그는 아주 특별한 에사인을 따르는 자에게만 허락된 검술을 익힌 자였다. 제아무리 강한 공격을 받더라도 힘의 균형을 이뤄낸다는.

“균형의 에사인이.......이름이 뭐였더라.”

“균형은 균형일 뿐이다.”

“그래도 이름 정도는 있을 텐데.”

“정 이름이 필요하다면 그저 균형이라 불러라. 그분도 그걸 더 선호하시니. 균형은 기울어진 저울추를 맞추고, 무너진 질서를 되돌리는 작용을 한다. 대동아공영의 꿈이 꼭 일본을 거쳐서 이뤄지지 않아도 좋은 이유다.”

- 차후에는 서구 열강이 이룬 기존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나라들이 부상하게 된다. 한국이 그 중 하나가 아니어야 할 이유가 없지 않나?

그가 나를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도 다소 의아했었다. 제국주의에 경도된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유한 표현이다 싶었거든.

설마하니 그게 균형의 신도로서의 포부였을 줄이야.

“좋아, 마음대로 머물다 가라고. 나는 오는 사람 막지 않는 주의라.”

“하릴없이 밥만 축내고 싶진 않으니 적당한 보직을 줬으면 좋겠다.”

“본토에서는 네 직책이 뭐였지?”

“육상자위군 휘하 에신방면대 제1특수단 단장이다.”

...뭔지 알아먹질 못하겠네.

기깔나게 높은 직위라는 건 알겠다. 그는 나처럼 환생자 출신이라는 이력을 잘 살려 벼락출세한 인물인 듯했다.

“알겠다. 그렇다면 너는...”

나는 그에게 어울릴 직위를 고민해보았다.

크록 전사단엔 그를 편제할 수 없었다. 종이 다른 몸이시라.

그렇다고 해서 섬기는 에사인이 다른 자를 사제단에 넣을 수도 없고.

“너는 일병이다. 공화국 육군 휘하..특수전단 소속. 앞으로는 료헤이 일병이라고 부르마.”

“일병?”

“이병보다 높고, 상병보다는 낮은 직책이지.”

“전투병과로군. 받아들이겠다. 단, 본토의 군대가 적이라면 참전하지 않겠다.”

“편한 대로 해. 어차피 방금 만들어진 부대라 네게 지시할 지휘관도 없으니까.”

나는 료헤이와의 대화는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정기호에게 받은 편지를 펼쳐보였다.

편지에는 귀족적 필치로 쓰인 에신어 문장이 그득했다. 나는 정기호의 출신을 상기시켜주는 이런 자그만 소품들을 볼 때마다 새삼스레 놀라곤 했다. 곰 같은 외모와 도저히 매치가 되지 않는지라.

- 두 가지 전달사항이 있다.

편지는 지극히 정기호다운 화법으로 서두를 열었다.

- 첫째, 스트리아령 현지 동향이다. 영주들은 대회의를 열어 나를 대영주로 지목하고자 한다. 그러나 나는 대영주직에 관심이 없다. 원래도 없었으나 이곳에 머무르며 차츰 더 관심이 멀어지더군.

대영주직은 내 동생 이졸데에게 돌아가야만 한다. 동생은 나와 달리 아양을 떠는 자들의 앞에서 표정관리를 할 줄 알더라. 이런 종류의 일에 적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영주들을 설득해낼 방법이 궁하다. 네 머리라면 벌써 답을 찾아냈을 텐데.

동생과 나는 대회의에서 나를 살해한 범인을 밝히기로 합의를 보았다. 이 자리에 네가 나와줬으면 한다. 범인은 순순히 진실을 자백하지 않을 테고, 어쩌면 세력을 모아 판을 뒤집으려 들지도 모른다.

둘째, 서부전선의 동향이다. 울토르군이 서부전선을 또다시 한 차례 뒤로 물렸다는 소식이다. 열일곱 개의 도시가 추가로 함락되었다.

중국과 유톤 연합체의 군대가 서쪽에서 파죽지세로 들이닥치고 있다. 방랑자와 패잔병들의 입을 통해 심상치 않은 소문이 떠돈다. 소문이란 으레 부풀려지기 마련이나, 그들의 증언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은 울토르의 무적의 힘으로도 꺾을 수 없는 불멸의 군대를 보았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이다. 야마모토 료헤이라는 자에게 편지를 들려 보낸다. 그는 다루기 까다롭지만, 네 계획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인물이다. 이 편지가 무사히 전달되었다면 그를 신뢰해도 좋을 것이다.

편지는 여기까지였다.

서부전선이 많이 어려운 모양이었다. 서부전선이 무너진다면 스트리아령도 머지않았다.

나는 펜과 종이를 준비해 정기호에게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황국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오른 이상 더는 계획을 미룰 수가 없었다. 김오중 회장까지 설득해낸 마당이니, 국회에서 승인이 나건 말건 공화국 건설에 박차를 가할 때였다. 그러려면 포탈의 폭을 넓히는 게 급선무였다. 때문에 내 편지는 한 마디로 요약되었다.

- 마법사 좀 보내라.

포탈의 폭은 매우 민감한 외교적 사안이나, 영주들이 차기 대영주에게 환심을 사려 혈안이 되어있다는 점을 이용한다면 간단히 해결할 수 있을 문제였다.

“료헤이 일병.”

“불렀나.”

일병답지 않은 대답이 되돌아왔다.

나는 그에게 방금 쓴 편지를 대충 접어서 들려주었다. 그는 내가 접어놓은 편지를 굳이 펴더니, 모서리에 맞춰 다시 예쁘게 접었다.

“뭐하는 짓거리냐?”

“균형.”

그가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투로 대답했다.

나는 그의 초췌하고 너저분한 몰골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편지 균형을 따지기 전에 삶의 균형부터 찾으셔야 할 것 같은데.

“...그래, 어쨌든 정기호에게 잘 전해주기만 해다오. 내 이름을 대고 캠프 차량을 빌려서 가면 된다.”

“알겠다.”

“편지를 전달하거든 곧장 돌아와. 할 일이 많으니.”

당분간 정기호의 빈자리를 료헤이가 채우게 될 것이다. 새로 태어나는 크록들의 무술교관이 그가 맡게 될 첫 번째 임무이지 싶었다.

료헤이는 검을 챙긴 뒤 사무실을 떠났다.

“아직 어려운 단어가 많군요.”

구석에 서있던 이범영 과장이 아리까리한 표정으로 말했다.

“에신어 배우십니까?”

“네, 열풍이 불고 있죠. 익히기만 하면 승진은 따놓은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그는 지금껏 우리의 대화를 알아듣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 모양이었다.

“특별히 잘 들리는 말이 있었습니까?”

“료헤이 말고는 없었습니다.”

그가 민망하다는 듯이 고백했다. 나는 그와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아참, 과장님께서 말씀하신 외국인 입국문제.”

“예."

“저 사람, 일본인이 아닙니다. 에신에서 건너온 사람으로 간주하세요. 기록도 그렇게 하시고요."

“정말로 일본인이 아닙니까?”

“과거엔 그랬을지 몰라도, 이젠 확실하게 아니죠.”

“하지만 법적인 문제들이...”

“그런 절차상의 문제는 공화국 앞으로 달아두시면 됩니다.”

나는 이범영 과장의 어깨를 두들겨준 후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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