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가장 짙은 그림자 (8)
“그리고 고마워요.”
소미가 작게 속삭이며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분위기로 보아 그녀는 아직 할 말이 남은 것 같았다.
“오빠라고 불러도 될까요?”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우리가 만나온 기간과 나눈 일들을 돌이켜보면 진작 말을 놓았어야 정상이긴 했다. 그러나 내겐 첫 의뢰의 임팩트가 워낙 컸다. 암살자라는 직업 특성상 업무적으로 관계된 사람과 사적으로 엮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괜찮습, 아니, 괜찮아.”
소미가 왼손으로 입을 가렸다. 웃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너무 어색하게 들리는 거 알죠?”
“하하...”
“혹시 이런 상상 해봤어요? 우리가 전생에서 만났더라면 어땠을까하는.”
“재미없었을 거야. 그땐 완전히 삭막했으니까.”
“괜찮아요. 지금도 만만찮게 삭막하니까요.”
그녀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는지는 처음 알았다. 한 발자국 더 다가선 그녀는 아이돌이라는 포장지에 싸여있을 때보다 훨씬 매혹적이었다.
“전 알아보지도 못했을 걸요. 꾀죄죄하고 말수도 없고, 세상 불행 혼자 다 떠안은 것처럼 항상 죽상이었죠.”
“네가 꾀죄죄한 모습은 상상이 안 가는데.”
“말도 마세요. 사진이라도 남아있으면 저 은퇴해야 해요.”
결국 아약이 부분적으로는 옳았다. 소미에게 부끄러운 과거가 있을 거라는 거.
그녀가 천민 출신이었다는 건 무덤까지 가져가야할 비밀이었다. 그 사실을 털어놓은 것만으로도 그녀는 내게 자신의 약점을 쥐어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저 이제 준비가 된 거 같아요, 오빠 덕분에.”
그녀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무슨 준비?”
“그 여자를 만날 준비요.”
소미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의 눈동자에선 조금의 흔들림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엘리시아는 귀빈이나 정부요인을 접대하기 위해 마련된 게스트룸에 머물렀다. 진지 내에서 가장 호사스러운 시설이었다.
“아, 너였군.”
엘리시아는 소파에 앉아 날개깃을 다듬는 중이었다. 그녀는 나를 흘긋 쳐다보더니, 이내 소미를 발견하고는 넌지시 물었다.
“자매님이신가?”
“안녕하세요, 소미라고 해요.”
소미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마르밀 가문의 장녀이자 강철의 자매단 부단장 엘리시아라고 한다. 실례지만 카둔 교단에서 어떤 직책을 맡았었는지 말해주실 수 있을까? 출신 가문이 어떻게 되는지도 알고 싶군.”
“저는 평단원이었어요. 출신 가문이라고 할 만한 건 없고, 환생 후에는 대한민국을 위해 일하고 있죠.”
“...평단원이었다고? 납득이 가지 않는구나. 난 네가 최소한 고위사제급은 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신분과 능력이 항상 매치되는 건 아니니까요.”
“그런가. 뭐, 상관없다. 부단장으로서 명령하지, 즉시 원대복귀하도록. 이번 생에서는 네 능력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도록 하마.”
역시 이러려고 만나자고 한 거였군.
스카웃 제의는 놀랍지 않았다. 몇 차례나 어려운 사정을 어필하긴 했으니.
관건은 소미가 어떻게 반응하느냐다. 소미는 이미 자신이 평단원 출신이었다며 밑밥을 깔아두었다. 이 대화가 어디로 흘러갈지 나는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자매단이 많이 힘든 상황인가요? 저 한 명을 데리러 여기까지 오신 거면.”
“거짓말은 않으마. 널 기다리는 시련이 결코 평탄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가문과 이름을 걸고, 그 몇 배의 부와 명예를 거머쥐게 되리라 약속한다.”
“단장님의 빈자리가 큰가보네요.”
“그분이 계셨더라면 상황이 훨씬 나았겠지. 하지만 언제까지 없는 사람만을 쳐다볼 수는 없잖느냐.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살 길을 찾아야한다.”
내막을 모르고 들으면 평범하기 그지없는 대화였다. 그러나 내막을 알면 이렇게 무서운 자리도 없었다.
지금껏 순진하게만 느껴졌던 엘리시아는 알고 보니 닳고 닳은 귀족 아가씨였고, 그런 그녀를 슬쩍슬쩍 떠보는 소미도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이쯤에서 나는 인정해야만했다. 아무리 암살자로서 경험을 쌓았어도 여자 속마음을 읽는 건 불가능하다고.
“저라도 도움이 된다면 도와드리는 게 도리겠죠.”
“그래주겠느냐?”
“어디까지나 제 능력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신다면.”
“물론이다. 평민이라고 했지? 네 특출함을 감안한다면 오백인장 자리까지는 내줄 수 있겠군.”
“단장직을 주세요.”
“......뭐?”
“단장직을 주세요.”
소미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했던 말을 반복했다. 한 글자 한 글자를 씹어 먹을 듯이 또박또박 발음하며.
엘리시아의 얼굴이 급격히 붉어졌다. 그녀는 모욕감을 느낀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미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천것이 분수를 모르는구나. 내세울만한 가문도 없는 주제에 감히 단장 자리를 넘봐?”
“아직 별로 안 급하신가 봐요.”
소미의 목소리도 급속도로 싸늘해졌다. 그녀는 왼손을 들어 올리는가 싶더니, 손가락 끝으로 응접실의 문을 가리켰다. 동시에 문짝이 굉음과 함께 바깥으로 떨어져 나갔다. 알고 대처하는 게 불가능해보일 정도로 발동속도가 빠른 기술이었다.
“가세요.”
그녀가 명령했다.
“다음에 오실 때는 제가 먼저 부탁하지 않겠어요.”
“.......”
엘리시아가 소미를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러나 행동으로 뭘 어쩌지는 못했다. 소미는 에사인을 향한 여정에 오른 존재였다. 굳이 대보지 않아도 길고 짧음의 격차가 너무나 명백했다.
“네 이름을 기억해두겠다, 소미.”
엘리시아가 게스트룸을 박차고 나갔다. 곧 비익족 특유의 활갯짓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떨어져나간 문짝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저건 내가 해명해야할 몫 같았다.
“죄송해요. 좀 더 참으려고 했는데.”
소미가 두 손을 모으며 내게 사과했다.
“아니, 내 생각보단 훨씬 잘 참더라.”
“돌아오겠죠? 그 여자.”
“모르지. 하지만 자매단은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선봉에 서야 하잖아. 강력한 리더가 없으면 오래 못 버틸 것 같긴 하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소미가 배시시 웃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던가.
소미는 일부러 엘리시아를 도발하고, 그녀가 머리를 숙이고 돌아올 길을 열어두었다. 그러나 평민에게 고개를 숙인다는 건 엘리시아의 사회적인 지위, 명예, 신념에 반하는 행동이었다. 소미는 내가 건의한 복수의 방법론중 상책에 해당하는, 상대의 구성성분을 분해하는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다음날 오후 무렵에 나는 박병철 장관의 호출을 받았다. 그는 진지 내에 마련된 사무실을 외교부 청사 안에 있는 사무실과 거의 흡사하게 꾸며두었다. 책장 사이사이 끼워둔 주류의 종류가 동일할 정도였다.
“한 잔 하겠나?”
그는 이번에도 내게 위스키를 권했다.
“한 잔만 하겠습니다.”
그는 잔을 단숨에 비워낸 뒤 내게 두꺼운 서류뭉치를 건넸다.
“조약의 세항일세. 저쪽이 전폭적으로 협력하고 있어서 거의 원안 그대로 갈 것 같아. 총독 노릇 하려면 사소한 내역까지 꿰고 있어야할 걸세.”
“알겠습니다.”
“그 얘기는 들었나? 두 번째 전초기지.”
“아직 못 들었습니다.”
“그러면 자네가 처음으로 듣게 되겠군.”
박병철이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두 번째 전초기지가 지어집니까?”
“아직 조약이 발효되진 않았지만, 우리가 먼저 행동에 나선다고 해서 손가락질 할 사람이 아무도 없지 않나. 그래서 본격적으로 영토를 넓혀보자는 이야기야.”
“괜찮겠습니까?”
“책임은 내가 지겠네. 다스릴 땅이 없는데 총독이 되어서 뭣하나? 땅부터 내고 자리를 만들어야지.”
호쾌한 양반이었다. 장관의 직권을 아득히 넘어선 결단이었으나, 그의 말마따나 여기엔 우리의 행동을 감시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일단 이게 우리측 사람들이 만든 지도라네.”
그가 책상 위에 널찍한 지도를 펼쳐보였다. 나도 지휘통제실에서 여러 차례 봤던 지도였다. 정찰조가 매일매일 업데이트하고 있기 때문에 볼 때마다 모양이 달라져있었다.
“그리고 여기.”
그가 지도의 중간지점부터 북쪽을 향해 볼펜으로 선을 그었다.
“울토르 장군의 본대가 떠나간 길일세. 이 위쪽에 못해도 삼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보급할 수 있는 취락이 있다고 추정해봄직 하네.”
“이 길을 따라 도로를 깔아야겠군요.”
“정답일세. 도로를 내면 그때부터는 정말 많은 일들이 가능해지겠지. 당면한 과제는 벌채야. 여기 나무들이 꽤 억세다고 들었네만, 자네를 따르는 크록들을 부리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거라고 믿네.”
“지시를 내려두겠습니다.”
“또 하나, 현장 작업자들이 길이 너무 좁다고 아우성이야. 포탈의 폭을 더 넓히는 수가 없겠나?”
“포탈을 다루는 건 마법의 영역입니다. 황군엔 실력있는 마법사들이 많습니다만, 순순히 협조해주진 않을 겁니다.”
포탈 폭을 넓히자는 건 일본이 명나라를 치게 길을 열어달라던 것과 다를 바 없는 요구사항이었다. 황국은 포탈에서 들어오는 게 무역품이 될지 탱크가 될지 확신할 수 없는 이상 결코 우리 편의를 봐주지 않을 것이다.
“그럼 어쩔 수 없겠군.”
박병철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건은 넘어가고, 자네가 경호과장으로 머물 날도 머지않았을 테니 한 가지 부탁을 더 해봄세. 누군가가 인터넷을 통해 정착지와 관련된 정보를 퍼뜨리는 중이라는 첩보가 입수됐네. 낯부끄러운 일이지만, 우리 내부에 비밀유지서약을 깬 배신자가 있어. 국정원에서 뒤를 쫓는 중이긴 한데 나는 가급적 조용하게 처리하고 싶은 마음이라네.”
“용의자가 나왔습니까?”
“지금으로서는 에신과 서울을 활발하게 오가는 인물이라는 것뿐일세. 그 조건만으로도 백 명이 넘는 리스트가 만들어지지. 어떤가, 백여 명의 사람들에게 수사력을 할애하는 것보다 자네의 술법이 훨씬 간단한 해결책이 되지 않겠나?”
“확답은 못 드립니다.”
나는 장관의 책상 위에 잔을 올려놓았다.
“하지만 제 전문분야는 맞군요.”
언제고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이 많은 인원들을 모두 입단속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문제는 배신의 성격이었다. 단순히 입이 근질거려서, 혹은 관심을 받고 싶어서 그랬던 건지, 아니면 금전적인 대가를 노리고 다른 조직과 결탁한 건지.
“자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차악과 최악의 시나리오를 말해주겠네.”
“차악은 야당쪽 끄나풀이라는 게 아니겠습니까?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서 장관님을 낙마시키려는 거죠.”
“......자네도 많이 늘었구만.”
박병철이 호탕하게 웃었다.
인간의 권력욕을 결코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 야당에겐 아직 다양한 옵션이 남아있었다. 박병철을 제거한다면 정치를 잘 모르는 나를 조종할 수 있을 거라 착각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면 최악도 알아보겠나?”
“다른 나라의 끄나풀일 경우겠죠. 그들이 다르마알과 협조중이라면 우리가 어떤 상태인지 진작 들어서 알고 있었을 테니까요.”
“그렇다네. 그 시나리오 때문에 자네가 도와줬으면 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