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전생을 기억한다-36화 (36/205)

36화. 가장 짙은 그림자 (9)

“알겠습니다. 이 건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나는 장관에게 확약을 주었다.

외교의 실패가 전쟁이라고들 하지.

정치의 실패는 암살이다. 나는 내부의 적을 제거하는 작업에 상당한 커리어를 들이밀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 스스로도 프론트라인에 서서 적들을 베어 넘기는 것보다 음습한 음모에 발을 담그는 걸 더 선호하기도 했다.

예전과 달라진 게 한 가지 있다면 내 포지션이었다. 그때는 암살자는 도구일 뿐이라는 방패막이가 존재했으나, 지금 나는 일개 부서를 책임지는 위치였다. 이 건은 게임의 당사자가 된 입장에서는 처음 치러보는 싸움이 될 것이다.

“일단 이게 내가 가진 정보 전부일세. 아마 누락된 내용이 많을 거야. 외교부가 이런 일까지 나서는 걸 국정원장이 좋아하지 않거든.”

박병철이 내게 얇은 서류철을 하나 넘겨주었다.

“더 도와줄 게 있으면 뭐든지 말해주게. 내 직분이 허락하는 한까지는 힘을 써볼 테니.”

“감사합니다, 지금은 이만하면 된 것 같습니다.”

나는 그에게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 에신 프로젝트에 관한 여론 특이동향 보고

서류철의 제목은 이랬다. 국가에서 모종의 프로젝트가 진행중이라는 이야기가 특정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암암리에 퍼져나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특히 추적이 어려운 인터넷 메신저에서는 프로젝트에 참여중인 인원이 퍼뜨린 것이 확실한 유출사진도 떠돌아다녔다.

아마존은 명함도 못 내밀 울창한 정글을 개척중인 특전사 장병들, 듣도 보도 못한 기기묘묘한 짐승들.

결정적인 건 소미와 엘리시아였다. 대한민국에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탑아이돌과 날개를 가진 비익족이 에신을 배경으로 돌아다니는 모습이었다. 사진을 올린 사람은 이것이 이세계가 존재한다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주장중이었다.

그 글에 달린 댓글은 단 두 개,

- 응, 뽀샵.

- 홍보글 그켬

놀라우리만치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조회수는 십여 회에 불과했고, 그 절반은 유출된 사진을 보고 식은땀을 흘렸을 국정원 직원으로 추정되었다.

이걸 정보과잉 시대의 긍정적 작용이라고 불러야하나.

조회수가 높게 나왔던 커뮤니티도 한둘 있기는 했다. 사진이 예쁘다고 퍼간다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글쓴이가 이세계의 존재를 진지하게 주장하는 순간부터 댓글란은 난장판으로 변했다. 글쓴이의 정신상태를 조롱하는 내용이 다수를, 아픈 분 같은데 그만 괴롭히라는 의견이 나머지를 차지했다.

결론적으로 배신자는 여론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라 의도였다.

이 자는 프로젝트를 흔들고자 한다. 동기는 모르겠으나, 최소한 비밀유지서약을 내다버린 것만큼은 확실했다. 사진으로 목적달성을 하지 못했다면 다음은 동영상을 찍어서 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포탈을 드나들 때 영상장치에 대해 엄격한 검열을 하긴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열 사람이 도둑 한 명을 막지 못하는 법이었다.

서류는 마지막으로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 리스트와 그 사유에 대해 간략히 써두었다. 돌풍 작전을 함께했던 대부분의 인원들이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가운데, 내 이름도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했다.

박봉팔

외교통상부 이세계협력과 경호과장

출신성분과 사상, 이념이 불확실한 환생자

능력에 비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여길 가능성

“......”

이 리스트를 작성한 사람은 독심술사가 틀림없다. 내 출신성분과 사상은 그야말로 불순 그 자체였으므로.

과장 주제에 총독자리를 노리고 있으니 야심도 터무니없다고 봐야지.

나는 호기심이 돋아 몇몇 인물을 더 확인해보았다.

진소미

걸그룹 투시즌의 멤버

연예인, 셀럽 특성상 보안의식이 부족할 수 있음

공무에 대한 소명의식 부족 가능성

뭐, 틀린 말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소미라는 사람을 개인적으로 전혀 모른다는 가정하에.

내가 구할 수 있는 정보는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대부분의 리스트가 수박 겉핥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장관 말마따나 핵심적인 내용은 모두 걸러낸 듯했다.

나는 서류를 챙겨서 건물 밖으로 나왔다. 글자는 충분히 봤으니 이젠 현장검증에 나설 차례였다.

소미와 엘리시아는 진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인물들이 아니었다. 엘리시아는 더욱이 그렇다. 사진이 찍힌 앵글과 그림자길이를 따져보면 배신자가 그날 몇 시에 어느 장소에 서있었는지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문을 막 나섰을 때였다. 난데없이 불쾌한 감각이 엄습해왔다.

축축한 손이 뒷덜미를 잡아당기는 듯한,

등골이 욱신거리고 소름이 돋아나는,

바야흐로 암살자의 직감이 날카롭게 곤두서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방책의 왼쪽 방향을 쳐다보았다. 시선이 닿자마자 거짓말처럼 방책에서 거센 불길이 치솟았다. 불길은 메마른 방책 위를 성난 들소처럼 내달렸다.

“불이야!”

근무중이던 초병이 기겁하며 초소에서 뛰쳐나왔다. 초병은 소화기 노즐을 허겁지겁 풀었으나, 소화기 가지고 어찌해볼 사태가 아니었다.

“탄약!”

나는 초병에게 다급히 소리쳤다.

“탄약을 옮겨야합니다!”

고속유탄기관총에 탄약이 적재되어 있었다. 탄약고에는 곡사포나 박격포탄도 즐비했다. 불길은 가연성 물질과 닿기 전인데도 미친 듯한 속도로 몸집을 불리는 중이었다. 반면 진지는 화재에 대한 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강은 멀었고, 물이라고는 비가 올 때 채워둔 급수탱크 몇 개가 전부였다.

“정기호!”

나는 허겁지겁 달려가는 정기호를 큰 소리로 불러 세웠다. 그는 얼마나 급하게 뛰쳐나왔는지 걸친 옷이라고는 팬티 한 장이 전부였다.

“느낌이 좋지 않아. 아무래도 마법적인 불 같다.”

“내 생각도 그렇다.”

정기호는 숨을 한 차례 돌리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새카만 연기가 하늘을 뒤덮는 와중에 사람들은 불길을 잡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중이었다.

“불은 미끼일거다. 양동으로 흔드는 게 목적이겠지. 정기호 너는.......”

나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주요한 경호대상을 스캔했다.

“차수진 박사한테 가라. 몸을 던져서라도 연구팀을 지켜.”

“너는?”

“나는 장관님께 간다.”

이 순간 가장 중요한 인물이 누군가는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검을 들고 장관의 사무실로 달음박질쳤다.

모든 사람들이 불이 난 쪽으로 몰리고 있는 탓에 길이 텅 비다시피 했다. 나는 머지않아 길가에 쓰러진 크록 전사를 한 마리 발견했다. 크록 전사는 손에 쥔 소총을 격발해보지도 못한 채 머리통이 날아가 있었다. 절단면이 어찌나 깔끔한지 자를 대고 도려낸 듯했다.

크록 전사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완전한 성체가 된 전사는 권총탄을 유효사거리 내에서 무마시킬 만큼 두꺼운 가죽을 지녔다.

게다가 이들은 나와 정기호가 직접 훈련시킨 크록들이었다. 실전배치가 된 개체는 무술에 대한 조예도 갖췄다고 봐야했다. 이들을 반응조차 하지 못할 속도로 일도양단을 내려면 최소한 나 정도의 실력자가 와야만 했다.

나는 시신을 내버려두고 걸음을 재촉했다. 길을 따라 다른 피해자들도 발견되었다. 모두 목과 몸통이 깨끗이 절단된 사람들이었다. 새로운 시체를 발견할 때마다 내 가슴은 납덩이처럼 무거워져만 갔다.

“장관님, 계십니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나는 문짝을 힘으로 뜯어내며 사무실 안으로 난입했다.

사무실 안엔 아무도 없었다. 비서로 추측되는 시체 몇 구만 나뒹굴 뿐이었다.

“......”

또 소름이 돋아났다.

이번에는 훨씬 느낌이 강했다.

불길함의 근원이 근처에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검을 발검해 다짜고짜 벽을 쪼개버렸다. 둘러갈 시간조차 촉박했다. 쪼개진 벽이 스르르 무너지며 나조차도 몰랐던 밀실이 드러났다. 장관은 그곳에 있었다. 무릎이 꿇려진 채, 두려움에 떨면서.

“겨, 경호과장......”

나는 장관이 나를 애타게 부르는 소리를 한 귀로 흘려들었다. 그에게 정신을 분산시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칠흑처럼 까만 로브를 입고,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검을 든 여성이 그의 앞에 서있었다. 여성은 나를 돌아보았으나, 후드 안이 너무 어두워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숨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저 그림자를 짙게 만들어 후드 안이 어둠으로 가득 찬 것처럼 보여줄 뿐이었다. 세월 저편에 묻어두었던 기억 한 조각이 벼락처럼 떠올랐다.

- 인간을 죽이는 건 상상력이다. 거창한 술법을 쓸 필요가 없지.

가장 짙은 그림자,

우르술라.

오데르의 검을 이끄는 리더이자, 내가 사모했던 여인.

수십 년이란 시간이 흘렀건만 그녀는 방금 헤어졌던 것처럼 조금도 변함이 없어보였다.

나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어놓지 못했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언젠가 그녀와 재회하게 될 거라는 건 알았지만, 이런 식의 만남은 원치 않았다.

“라힐.”

혀를 굴리듯 느긋한 발음.

“그런 이름의 남자를 알고 있나?”

“왜 죽였습니까?”

내가 되물었다. 멍청한 질문이었다고 후회하며.

그녀가 후드를 벗었다. 타오르는 듯한 빨간 머리카락이 아래로 풀어헤쳐졌다. 나는 그 색이 아름답다고 생각했으나, 정작 그녀는 살행을 나설 때 눈에 너무 띈다며 자기 머리색을 싫어했었다.

“넌 나를 아는가보군.”

그녀가 재미있다는 듯이 눈을 반짝였다.

“그저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싶었다. 원활한 협조를 끌어내기 위해 다소간 공포심을 자극할 필요가 있었지. 아는 자가 있었다면 미안하게 됐다.”

그녀가 생긋 웃으며 사과했다.

표정, 대사, 몸짓.

그녀는 완성된 암살자였다. 그녀가 전달하는 모든 신호가 게임의 연장선이었다. 게임에 말려들어 흥분하거나 주의를 흩뜨린다면 맞이하게 될 건 죽음밖에 없었다.

“라힐이라는 남자가 너희 무리와 함께하고 있을 거라던데. 눈에 띄는 놈이니 떠올리기 그리 어렵지 않을 거다. 키는 딱 너 정도에 다소 둔하게 생겼다고나 할까. 재능이 나쁘지 않아서 키우는 맛이 있었지.”

“라힐은 죽었습니다.”

우르술라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변함없이 무심한 표정이었으나, 나는 그녀가 화를 낼 때 드러내는 미묘한 변화를 포착했다.

“네가 왜 그걸 확신할까?”

“직접 봤습니다. 진창에 처박혀 비참하게 죽었죠.”

“...알려줘서 고맙구나.”

그녀의 미소가 눈이 부셨다. 저건 날 죽이겠다는 신호였다. 나는 두말하지 않고 검을 뽑았다.

쩌어엉.

숙소 유리창이 검압을 견디지 못하고 동시에 터져나갔다. 깨진 유리와 석고보드 조각이 난무하는 가운데, 나는 검으로 상단을 막은 채 하염없이 뒤로 물러났다.

도대체 얼마 만에 받아보는 일격인지.

손을 제대로 들어올리기 힘들었다. 팔 근육이 갈라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어영부영 댈 틈이 없었다. 나는 자세를 고쳐 잡으며 두 번째 공격을 대비했다. 그녀의 진정한 무서움은 연환격에 있었다.

“너는.......”

그녀는 더 공격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나를 향해 상체를 숙였다. 뭔가가 떠오를 듯 말 듯 하다는 표정이었다.

“설마 네가 라힐일까?”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내가 화를 낼 걸 미리 아는 건 그놈뿐이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나를 기억한다는 사실이 차마 표현하기 두려운 기쁨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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