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가장 짙은 그림자 (7)
날 죽인 년.
맥락상 엘리시아 말고는 다른 여자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소미는 카둔의 고위사제였다. 엘리시아가 카둔의 사제를 죽였다고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못 믿으시겠나보네요.”
“그런 건 아닙니다만...”
“이해해요. 그 여자도 절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저는 전생에서 천민이었어요, 아무것도 아니었죠.”
“천민이었다고요?”
“상상이 안 가시죠?”
소미가 킥 소리를 내며 웃었다.
천민이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계층을 가리켰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가축, 어떨 때는 가축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다. 그들은 심지어 에사인을 섬기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신앙을 가지게 되면 힘을 얻어 신분의 벽을 허물어뜨릴 수 있기 때문에.
“하지만 소미님은 카둔의 술법을 쓰시지 않습니까?”
“여기가 닫힌 세계라고 말씀드린 거, 기억하시나요.”
“예.”
“저는 동전 몇 푼에 카둔의 신전으로 팔려갔어요. 어리고 반반하다는 이유로 조금 더 받았죠. 더럽고, 냄새나고, 끼니때마다 밥을 먹여줘야 한다는 이유로 몇 푼 까였구요. 부엌데기 노릇은 쉽지 않았어요. 일 자체도 고됐지만, 귀족들의 장난을 받아주는 게 가장 힘들었죠.”
그녀가 짤막하게만 언급한 귀족들의 장난이란 그들에게만 장난인, 도저히 장난이라고 부를 수 없는 가학적인 놀이문화였다.
물론 사회적으로는 터부시되었다. 상위계급의 체면이 손상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법으로 명문화되어있지 않는 이상은 근절되기 힘든 문화였다.
“이라올라님은 그런 저를 유일하게 아껴주시는 분이셨어요. 그분은 제가 부당한 취급을 받지 않도록 보호해주시고, 공부를 할 기회도 마련해주셨어요. 저를 카둔 교단에 들이신 것도 그분이에요.”
이라올라.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다. 형제들이 꼽았던 암살목록에서 최상단에 위치한 이름 중 하나였다.
엘리시아가 말한 실종되었다던 단장이 바로 그녀일 것이다.
“어느 날 한 무리의 귀족들이 신전에 들렀어요. 먹자판을 벌여놓고 여흥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저를 불렀죠. 손님의 흥을 돋우는 건 제 일이 아니었지만, 아시잖아요. 거절할 수 없다는 거.”
소미의 눈매가 부르르 떨렸다. 호흡은 거칠어졌고, 조절되지 않은 마력이 너울처럼 넘실대었다.
“힘들면 말씀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그녀는 모든 환생자들의 역린에 다가서고 있었다. 죽음 직전의 상황에.
그녀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괜찮아요. 이미 지난 일이니까. 그 사람들은 제 앞에서 이라올라님을 암살할 음모를 거리낌 없이 떠들어댔어요. 그러더니 한 사람이 절 가리키며 물었죠. 이 계집애가 우리 얘기를 다 듣지 않았냐. 다른 사람들은 개의치 않아했어요. 어차피 천민이니 아무도 제 말을 믿어주지 않을 거라고요. 맞는 말 아니겠어요. 저는 그들이 절 무시하기를, 이 난데없는 불행이 지나가기를 카둔께 간절히 빌었어요.”
“기도가 통하지 않았나봅니다.”
“한 여자가 저를 알아봤거든요. 절더러 이라올라님의 애완동물이라고 부르더군요.”
그녀가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한 시간쯤 걸렸을 거예요. 제 숨이 끊어지기까지 걸린 시간이. 생각해보세요. 거기 모인 사람들 중에서 전사가 아닌 사람들이 없었어요. 장난처럼 휘두른 팔에 맞아도 저는 어디 한 군데는 부러지는 거죠. 저를 최대한 오래도록 살려두는 게 그들의 놀이였어요.”
“......”
나는 감히 그녀의 고통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날 때부터 오데르의 자식이었다. 나는 귀족이 아니었으나, 선택받은 존재인 건 마찬가지였다.
“다시 태어나고 나서 제게 처음 든 생각이 뭐였는지 아시겠나요?”
“복수입니까?”
“아니요.”
그녀가 빠르게 부정했다.
“일단 카둔께 감사했죠. 제게 두 번째 기회가 주어졌다면 그건 분명 카둔님의 은총이 함께했기 때문일 테니까요. 다음으로 든 생각은 이거였어요. 저는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걸리적거린다는 이유로 하찮게 치워지는 삶은 다시는 살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저는 과장님이나 정팀장님과는 달리 전생에서 가져온 능력이 아무것도 없었죠. 그래서 이를 악물고 노력해야만했어요. 발가락이 부르트고, 목이 쉬어서 소리가 나오지 않게 될 때까지.”
- 소미는 투시즌의 비주얼 멤버다. 다른 멤버에 비해 춤이나 노래는 다소 처져.
이상민의 평가가 떠올랐다. 그 짤막한 한줄평 안에 한 소녀의 전생과 현생을 아우르는 역정이 담겨있었다.
“신기한 건 제가 아이돌로 성공할수록 더 강한 힘을 다루게 되었다는 거죠. 저는 처음엔 그것마저도 카둔의 은총이라고 생각했지만, 곧 제가 에사인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죠. 수백만 명의 의지를 하나로 모으면서 저는 정말로 하찮은 사람이 아니게 된 거예요.”
그녀의 힘의 비밀이 이것이었다.
나는 고작 수십 마리밖에 배양하지 못한 크록들이 전부였으나, 그녀는 전 세계 곳곳에 존재하는 팬들을 양분으로 삼았다. 어떻게 팬덤의 힘을 자신만의 것으로 돌렸는지는 의문이었다.
그때 나눠줬던 굿즈에 단서가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종교적인 상징을 사인인 것처럼 위장해 회사가 파는 파생상품에 교묘하게 끼워 넣었었다.
“엘리시아는 소미님의 죽음에 어떤 역할을 했던 겁니까?”
민감한 질문인 걸 알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엘리시아는 울토르의 부관이었다. 동시에 황국을 대표하는 전사단 중 하나를 이끄는 리더이기도 했다. 그런 인물과 트러블이 생긴다면 양국관계가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절더러 애완동물이라고 한 여자요.”
“아.......”
“얼마 전이었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내 앞에 나타난 그년을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년이 나한테 했던 것처럼 나도 그년을 치워버려도 되지 않을까? 가능한 한 비참하게, 다시 태어나서도 날 두려워하도록.”
강한 원념이 느껴졌다. 본디 증오란 세월이 흐름에 따라 희석되기 마련이었다. 전생에서 받았던 수많은 청부들을 돌이켜봐도, 이 정도로 깊은 원념을 품은 사람은 흔치 않았었다.
“하지만 저는 참았어요. 과장님께 미안하잖아요. 같이 고생해준 우리 직원들한테도 미안하고. 나 하나 때문에 프로젝트가 통째로 날아가면 미안해서 어떻게 고개를 들고 살겠어요. 우리 멤버들, 사장님, 매니저, 부모님, 팬 여러분께도 미안하겠죠. 미안할 사람이 참 많기도 하네요, 그죠? 전생에선 아무리 빌어도 나타나지 않던 사람들이 현생에는 왜 이렇게 많은 걸까요?”
그녀가 내게 물었다. 나는 무어라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미안해요.”
그녀가 내게 사과했다.
그녀의 몸에서 마력이 회오리처럼 분출되었다. 바닥이 쪼개지며 석고보드가 맹렬하게 위로 솟구쳤다. 나는 옆으로 물러서며 잽싸게 그녀의 그림자를 밟았다.
“......”
그녀가 젖은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주술력만 따질 것 같으면 그녀는 얼마든지 날 밀쳐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미안할 일은 처음부터 하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막지 마세요.”
“막으려는 게 아닙니다. 제겐 그럴 권리가 없잖습니까.”
“그러면 왜 이러시나요?”
“제가 묻고 싶은 건 이겁니다. 왜 최고의 암살자를 곁에 두고 직접 손을 더럽히려 하십니까. 지난번 서비스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습니까? 아니면 제 단가가 너무 높았던 걸까요?”
소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이런 전개는 예측하지 못했다는 듯했다.
“이래봬도 제가 복수 전문가입니다. 암살업의 절반이 복수와 관련되어있죠. 전문가로서 조언을 드립니다만 단순히 타겟만을 살해하는 건 하책중의 하책입니다.”
“......그러면 뭐가 상책인가요.”
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머뭇거리게 한 것만으로도 반절의 성공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설명을 이어갔다.
“중책부터 말씀드립니다. 타겟을 살해하지 않는 게 중책입니다. 대신 타겟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죽이는 겁니다. 인기가 높은 상품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타겟에겐 통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상책은요?”
“상책은 타겟을 이루고 있는 모든 구성성분을 분해하는 겁니다. 사회적인 지위, 명예, 신념 등을 부숴버려 살아도 산 게 아닌 것처럼 만드는 거죠.”
소미가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었다.
“과장님은 총독이 되고 싶어 하시잖아요. 협정이 깨질까봐 절 막으시려는 게 아니었나요?”
“그러는 소미님은 개인적 복수와 프로젝트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제게 답을 구하시고 계시고요.”
“......”
그녀는 부인하지 않았다. 추측컨대 그녀는 엘리시아를 죽일 마음이 없었을 것이다. 그랬을 것 같았으면 엘리시아를 먼저 박살내버린 뒤 내게 찾아왔겠지.
“저는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복수도 물론 하셔야합니다. 그러나 그 복수는 하찮아서는 안 됩니다, 오래 별러 왔던 만큼 화려해야 해요. 저는 그 사람들을 고발해서 심판의 전당에 세우면 어떨까합니다.”
“아......”
소미가 감탄했다. 에신의 법정은 결코 그른 판단을 하지 않았다. 심판자의 권능이 작용하기 때문에.
“가끔 복수가 허무하다고 떠드는 사람들이 있던데, 그거 다 너무 쉽게 죽여서 그렇습니다. 빨리 죽여 봤자 아무런 득이 없어요. 살아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봐야죠. 물론 귀족에게 천민을 죽인 죗값을 물을 순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소미님이 아니라 이라올라를 죽인 것 때문에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
“상관없어요, 그건.”
“둘째는 소미님의 죽음이 다분히 구조적인 문제라는 점입니다. 저는 이 건이 개인적인 복수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억울하게 죽는 사람들이 나오지 않도록 에신 사회에 근본적인 변혁을 이끌어내야 합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저희가 내정간섭을 할 순 없잖아요?”
“가능한 길이 딱 한 가지 있습니다.”
“어떻게요?”
“소미님이 가난한 자들의 에사인이 되시면 됩니다.”
소미가 입을 크게 벌렸다.
“소미님은 언젠가 에사인이 되실 겁니다. 그때 선택을 하세요. 모든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서겠다고. 소미님의 신전에서는 누구도 신앙을 버리라고 강요할 수 없고, 누구도 가난하다는 이유로 핍박받지 않게 되겠죠.”
“.......할게요.”
그녀가 입술을 꾹 다물며 대답했다. 결연한 의지로 가득한, 발가락이 부르트고 목이 쉬었을 때 지었을지 몰랐을 표정이었다.
내가 배운 바로는 지난 천 년 동안엔 새로 에사인에 등극한 자가 없었다. 괜히 이 세계가 닫힌 세계 소리를 듣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라면 정말로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