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가장 짙은 그림자 (6)
나는 홀로 남겨진 채 그가 한 말을 곱씹어보았다.
일곱 번째 권능이 죽었다는 건 세계를 떠받드는 일곱 기둥 중 하나가 무너졌다는 걸 의미했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더니, 황제의 치세가 위협받는 시대가 오게 될 줄이야.
“괜찮냐?”
정기호가 검을 다시 수납하며 물었다.
“그래, 아깐 고마웠다.”
울토르가 진심으로 전력을 다했으면 살아남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그는 에사인이 아닌 이상 결코 상대해선 안 될 자였다. 정기호는 그걸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거리낌 없이 걸었다.
말로 떠들기는 쉬우나 행동으로 보이기는 어렵다. 그는 말로만 명예를 앞세우는 남자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보였다.
“과장이신데 지켜드려야지.”
“내가 죽어야 네 자리가 나는 거 아니냐?”
“귀찮은 일은 질색이거든.”
그가 선글라스를 다시 꼈다. 그는 턱 끝으로 날개를 접은 채 다소곳이 서있는 엘리시아를 가리켰다.
“네 아가씨 기다린다. 가 봐.”
울토르와 이텐은 이미 회담장을 떠났다. 엘리시아만 내게 용무가 있다는 듯이 남아있었다. 그녀는 내가 다가가자 결심을 굳힌 듯 단호한 표정으로 입술을 열었다.
“너희 대사에게서 자매님의 기운이 느껴지더군. 그것도 아주 강력한.......나 따위는 흉내도 낼 수 없을 정도였다.”
“넌 부단장이잖아. 너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텐데.”
엘리시아는 고개를 작게 가로저었다.
“나는 단장님이 실종되는 바람에 얼결에 자매단을 맡게 된 뜨내기에 불과하다. 신분이 높지 않았더라면 부단장 자리도 어림없었다.”
“단장직이 공석이라고?”
“언제까지나 비워둘 순 없지만, 현재로서는 그렇다.”
강철의 자매단장쯤 되는 자가 실종상태라니.
어쩐지 이런 중요한 자리에 부단장이 왜 나왔나 싶었다.
“솔직히 말하마. 나는.......우리는 도움이 절실하다. 단장님이 떠나신 후로 자매단은 급격히 세가 기울고 있다. 우리라고 노력을 안 해본 게 아니지만, 그만큼 단장님의 빈 자리가 크다. 단장님은 자매단이 창설된 이후로 가장 위대한 전사셨다. 단지 강하기만 한 게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따를만한 분이셨지.”
그녀는 단장에 대한 추억을 떠올릴 때 우울해보였다. 무척 존경했던 인물임에 틀림없었다.
“난 너희를 돕고 있는 자매님께 사정을 털어놓고 도움을 구해볼 작정이다. 허락해주겠느냐.”
“내가 허락하고 말고 할 일이 아닌 것 같은데.”
“그만큼 절실하다는 의미다.”
“소개까지는 시켜주지. 다음은 네 몫이야.”
“이 신세를 꼭 갚으마.”
그녀의 초췌한 얼굴에 어렵사리 미소가 피었다 .
나는 그녀의 기분을 공감할 수 있었다. 원치 않았던 일이 책임감이란 이름으로 어깨를 짓누르는 기분. 과장을 달고 나면서부터 조금씩 실감이 났다. 총독 자리에 오르면 그때부터는 장난이 아니겠지.
“뜻대로 안 될 수도 있어. 너무 앞서나가지 마라고.”
지난번에 엘리시아를 봤을 때 소미의 반응이 썩 좋지 않았었다. 이번에도 그러지 말라는 보장이 없었다.
“자매님은 내 진심을 이해해주시리라 믿는다.”
엘리시아는 희망적이었다. 오데르의 형제들이 서로를 존중하듯이, 카둔의 자매들도 같은 신을 따른다는 데에서 오는 유대감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엘리시아와 함께 기지로 돌아왔다. 박병철은 정문을 통과하자마자 비서관들과 함께 조약의 세부사항을 짜기 위해 서류더미에 파묻혔다.
경호과장으로서 내 일은 일단락되었다. 나는 간단히 끼니를 때운 후 습관적으로 차수진의 연구실부터 들렀다.
그녀와 그녀의 연구팀은 크록과 관련된 연구성과를 연일 쏟아내는 중이었다. 크록의 힘으로 에사인에 오를 사람으로서 놓쳐서는 안 될 정보였다.
그런데 오늘따라 연구실 분위기가 흉흉했다. 차수진이 날 발견하자마자 바닥이 울리도록 쿵쿵거리며 다가왔다. 언제나 열정으로 충만했던 얼굴은 분노로 가득 차있었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박사님.”
“무슨 일 있죠. 지금 김신우 박사 때문에 돌아버리겠다니까요!”
“김신우 박사요?”
“왜 그 겁 많고 뺀질뺀질한 인간 있잖아요.”
“......아.”
술법을 가르쳐달라고 땡깡을 부리던 그 인간.
마주칠 일이 없어서 잊고 살았는데, 차수진과는 접촉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그 사람이 뭘 했기에 그러십니까?”
“글쎄, 그 인간이 제1저자 자리를 못 내놓겠다잖아요. 연구는 우리 팀이 다하고 있는데, 자기가 유일한 의학박사라는 이유로요. 이게 말이 되나요?”
“말이 안 되는군요.”
“당연하죠! 연구성과를 날로 먹겠다는 심보라니까요.”
“심히 안타깝지만,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도 알고 있어요. 그냥 하소연이나 드릴까 했죠. 마음 같아서는 볼펜으로 그 인간 이마를 콱 찍어버리고 싶은데, 저는 과장님처럼 검술을 배우지 않았거든요.”
그녀는 콧김을 씩씩 내뿜으며 분을 삭였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볼 때마다 신기했다. 내 주변엔 이렇게 감정표현이 솔직한 사람이 드물었다.
“에휴, 어쩌겠어요. 인복이 없는 내 탓이지. 연구결과를 들으러 오신 거죠?”
“예.”
“크록들이 드디어 원시적인 형태의 종교활동을 시작했어요. 흙으로 과장님의 모습을 본 딴 우상을 만들어서 절을 하더군요. 그냥 절만 하면 심심해할 것 같아서 노래도 가르쳐보는 중이에요.”
“제 우상에다가.......절을 하고 있다고요?”
“보시겠어요?”
차수진이 휴대폰으로 촬영한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거대한 크록 전사들이 어깨를 맞대고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는 와중에, 작달막한 크록이 의식을 이끄는 중이었다.
제법 구색을 갖추긴 했으나 저 흙덩어리를 내 우상이라고 봐야하는지는 의문이었다. 만든 솜씨가 너무나 조악해서 팔다리가 달려있다는 것을 빼곤 나와 아무런 공통점이 없었다.
“놀랍지 않으세요?”
“예, 무척이나.”
“더 놀라운 건 종교행사를 마친 크록은 일시적이지만 두뇌가 훨씬 활성화되고, 신체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다는 점이에요. 마치 약물이라도 주입한 것처럼요.”
종교적인 리더십이 크록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겪어봤었다. 평범한 크록과 나나 마그나크록이 이끄는 크록은 신체능력이 천지차이일 것이다.
“또 있어요. 이건 다른 팀이 진행중인 연구인데요. 아무래도 크록이 먹어치우는 고기가 감당이 안 될 것 같기도 하고 새로운 식량자원을 확보하는 차원도 겸해서, 현지의 동물들을 가축화하려고 시도중이예요.”
에신에도 물론 가축이 있다. 그러나 정글의 생태는 내게도 미지의 세계였다.
속령을 세운다면 크록 병사들을 천 단위, 어쩌면 만 단위까지도 굴리게 될 텐데, 그 많은 크록들이 먹어치울 식량을 좁은 포탈로 다 조달할 수는 없었다. 장기적으로는 현지에서 식량을 생산해내야만 했다.
“크록들을 놀리기만 할 순 없으니 경작지를 만들어서 농사를 지어보는 건 어떻습니까. 고기만 식량은 아닐 테니.”
“아, 정말 좋은 아이디어세요! 크록들이 야채를 좋아할 것 같진 않지만요.”
“야채는 우리가 먹으면 됩니다.”
“그러면 연구팀을 한 팀 더 만들어야겠네요. 조리사까지 포함해서.”
군인에게 농사를 짓게 하여 자급자족을 꾀한다. 이른바 둔전이라는 제도였다. 군인이란 직업이 점점 전문화되면서 사장된 방식이나, 물질적인 욕심이 없고 힘이 남아도는 크록이라면 문제가 될 게 없을 듯했다.
“더 도와드릴 게 있습니까?”
“있어요. 마그나크록의 피...”
“그건 안 됩니다.”
역시 방심할 수 없는 여자였다. 그녀는 마그나크록의 피를 섞어서 알비노 크록을 만들겠다는 야망을 포기하지 못한 듯했다. 하나에 꽂히면 무서울 정도로 집착하는 거, 저런 기질이 있기에 학자가 된 것일 테지만.
“안녕하세요, 박과장님.”
소미가 방문을 두들기며 인사했다. 그녀는 들어오라는 말을 하자마자 자연스레 외투를 벗어 벽에 걸어두었다.
나는 보던 책을 덮으며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최근 들어 기지를 자주 방문하는 듯했다. 아이돌 활동을 점차 내려놓고 있는 것임에 분명했다.
“회담은 잘 다녀오셨나요?”
“예, 오늘 복귀했습니다.”
“어땠어요, 제 찬트는.”
“대단했습니다. 장관님이 에사인 앞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으시더군요.”
“헤헤, 중요한 일이니까 기합을 잔뜩 넣었죠. 총독부를 세우냐 마느냐가 걸려있다고 들었거든요.”
“총독부는 세워질 것 같습니다. 누가 총독이 되느냐가 관건입니다.”
“장관님은 박과장님을 밀고 계시고요?”
“소문이 빠르네요.”
“장관님께 제 한 표도 더해드리겠다고 전해주세요.”
소미가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도 그녀를 따라 웃었다. 그녀는 오늘따라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분위기가 나쁘지 않은 듯하여 나는 넌지시 엘리시아 이야기를 얹어보았다.
“그나저나 지난번에 찾아왔던 강철의 자매단측 사람이 소미님을 뵙겠다고 또 찾아왔습니다.”
“저는 안 만난다고 했을 텐데요.”
“그래도 여기까지 찾아온 사람을 빈손으로 돌려보내긴 그렇잖습니까.”
“안 만날게요.”
소미가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방금 전까지 밝게 웃던 모습과는 백팔십도 바뀐 태도였다. 어떻게 사람이 한순간에 이렇게 바뀔 수 있나 싶을 정도로.
그녀는 아이돌이다. 찍은 광고가 헤아릴 수도 없고, 드라마도 여러 편 찍었다. 상황에 따라 가면을 바꿔 쓰는 것쯤은 그녀에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유독 엘리시아 얘기만 나오면 그녀는 가면을 쓰는 걸 잊어버렸다. 빈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던 숙련된 연기자가 당장에라도 깨질 것만 같은 사기그릇처럼 변해버린다.
“민감한 사정이 있다는 건 이해합니다.”
“......”
그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바닥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하지만 엘리시아는 우리가 죽은 후 수십 년 후의...”
“수십 년이 아니에요.”
그녀가 내 말을 가로막았다.
“여긴 우리가 죽은 직후의 세계라고요.”
그녀의 말투가 완전히 변해버렸다. 훨씬 무미건조하고, 공격적인.
나는 말투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다. 그녀의 말이 더 충격적이었다.
“죽은 직후란 말입니까?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박봉팔로 살아온 세월이 엄연히 버티고 있거늘, 그게 어떻게 가능하다는 건지 의문이었다.
설마 두 세계의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는 건가.
그러나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면 우리가 포탈을 통해 두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걸 설명할 수 없었다.
“나도 여러모로 생각해봤죠. 내가 내린 결론은 이거에요. 두 세계의 시간이 다르게 흘러가다가, 포탈로 연결된 순간부터 하나로 합쳐진 거라고.”
“증거가 있습니까?”
“물론이죠.”
소미가 차갑게 웃었다. 나는 방 안의 온도가 실제로 몇 도 내려가는 걸 느꼈다. 그녀가 뿜어내는 마력은 내가 일찍이 만났던 주술사들 중에서도 몇 손 안에 꼽힐 정도였다. 인간이 성취해낼 수 있는 극점에 다다랐다고 해도 좋았다.
“날 죽인 년이 뻔뻔하게 머리를 들고 다니는 걸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