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가장 짙은 그림자 (5)
처음엔 잘못 들었나 싶었다. 너무나 친숙하지만, 여기 있어서는 안 될 국가들의 이름이 비익족 여전사의 입에서 줄줄이 나열되었다. 나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 그녀에게 다시 확인을 요청했다.
“엘리시아, 한 번만 더 불러줘. 뉴 텍사스부터.”
“뉴 텍사스, 일본, 중국, 영국, 멕시코, 러시아, 베트남, 이상이다.”
“......”
포탈이 하나가 아니라는 정보는 이미 입수했었다. 그러나 막상 나라이름을 듣게 되자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라고?”
박병철도 나와 반응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 나라들은 단독으로도 우리나라보다 군사력이 강한 나라들이야. 게다가 미국은 우리의 맹방이지 않나. 아니, 그보다도 대체 몇 개의 나라와 전쟁중이라는 건가?”
“하나, 둘.......총 13개국이로군요.”
“...그건 말이 안 되는 숫자일세.”
13면 전쟁.
2차 세계대전의 주역이었던 히틀러가 고작 2면 전쟁도 두려워하여 결단을 내리지 못했던 걸 돌이켜보면, 이게 얼마나 비현실적인 판도인지 알 수 있다.
“아무래도 우리가 성급했던 것 같군. 전쟁으로 망해가는 나라와 친교를 맺을 수는 없어. 차라리 미국이나 영국과 연대를 하는 게 낫지 않겠나.”
“방금 언급된 국가들은 다르마알의 유혹에 넘어갔을 확률이 높습니다. 혼돈의 하수인과 손을 잡겠다는 건 세상을 파멸로 몰아가는 데 일조하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많은 나라와 싸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세상이 파멸하기 전에 우리 스스로를 파멸시키고 말 걸세.”
“전쟁에 참여해달라는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불가침조약만을 원한다고 분명히 밝혔으니까요.”
“미국과 중국이라지 않나. 외교적 노선을 달리하는 것만으로도 먹고 사는 데에 지장이 생길 걸세. 애당초 왜 망해가는 나라와 굳이 친선을 맺어야만 한단 말인가? 리스크를 감수할 이유가 없지 않겠나?”
박병철은 황국의 멸망을 기정사실화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들이 패배하는 모습을 그리기 어려웠다.
황국은 신들이 현현하여 군림하는 올림푸스였다. 세계를 떠받치는 일곱 기둥이 수호하는 나라.
탱크와 미사일로 이탈리아반도를 점령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우스나 포세이돈과 겨루겠다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장관님의 카운터파트인 울토르는 무적을 상징하는 자입니다. 지금까지 싸워서 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무적이라는 게 아니라,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울토르는 싸우면 지지 않는다는 법칙이 자연계에 아로새겨져있기 때문입니다. 자연질서를 바꾸지 못하는 한 우리는 울토르를 쓰러뜨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강하더라도 그는 검을 휘둘러서 싸우는 전사가 아닌가. 전사가 제아무리 뛰어나다한들 국가단위의 총력전을 뒤집을 순 없다고 보네.”
“다른 권능들은 어떻습니까? 그들도 총력전에 영향을 미칠 수 없을 것 같으십니까?”
“.......”
장관은 내가 올렸던 보고서를 돌이켜보는 듯했다.
“다섯 번째는 확실히 위협적일 것 같긴 하군.”
역병지기 오림.
그는 인격신이 아니었다, 역병이라는 이름의 재앙 그 자체였다. 그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인구를 조절하거나, 황제의 권위를 일깨우려는 목적으로 병마가 되어 나타났다. 그와 싸워서 이기겠다는 건 만병을 통치하겠다는 것만큼이나 허황된 소리였다.
“세 번째.......세 번째도 확실히.”
로켄, 꿈의 지배자.
그는 오직 꿈속에서만 거주한다. 그는 황제의 형상을 하고 우리의 꿈 안으로 걸어 들어온다. 용사라 불리는 자들이 그렇게 탄생하곤 했다.
때로는 누군가를 벌할 목적으로 악몽을 현실로 데려오기도 했다. 이성의 끝자락, 망상과 몽상이 모두 그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는 싸워서 이길 수 없는 존재였기에, 무적이라는 울토르보다 상위에 자리매김했다.
“알겠네, 황국이 강하다는 것까지는 인정하지.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하는 건 승패가 아니야. 왜 우리가 전통적인 우방들을 등지면서까지 황국과 친선관계를 맺어야한다는 건가?”
“장관님께서도 들어서 아시겠지만, 다르마알이라는 존재가 저를 직접 회유하려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랬었지.”
- 내게 굴종하라. 나를 주인으로서 섬겨라. 그리하면 두 발 달린 짐승들 중에선 널 능가할 존재가 없게 될 것이다. 일곱 대신이 네게 머리를 조아리고, 네 자손들이 대륙의 이빨부터 꼬리까지 퍼져나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다르마알은 내게 일곱 권능을 능가하는 힘을 약속했다. 술법에 조금만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누구라도 넘어갈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그런 약속을 받은 게 에신1과 직원들 중에서 저 혼자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는 끝까지 아약이라는 껍질을 연기했습니다. 저는 그런 일이 다른 나라에서도 동일하게 발생했을 거라고 추측합니다. 그는 국가별로 단 한 명, 판도를 바꿀 능력이 있는 자에게만 세상을 나눠주겠다고 말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대단한 보상은 함부로 뿌릴만한 성질이 못 되니까요.”
“일리가 있군. 그래서?”
“그렇다면 미국이나 영국, 일본 등 민주적인 국가들은 지도층의 총의로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선출직 공무원에게 전쟁이 얼마나 큰 부담인지는 장관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그들이 한 타락한 인간의 욕망에 휘둘리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주술은 의사결정을 하는 소수의 인간부터 노린다는 건가...”
“예, 일전에 말씀드렸듯이.”
장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네. 그렇다면 오히려 그들을 무찌르는 게 그 나라를 정상화하는 과정이라고 비칠 수도 있겠군.”
“어디까지나 가설이긴 합니다. 그러나 언급된 나라중에 자신들이 전쟁중이라고 공공연히 밝힌 나라는 한 군데도 없는 걸로 압니다. 저희는 고작해야 이계에 진입했다는 사실만을 비밀로 하고 있지만, 전쟁을 비밀로 한다는 건 그야말로 엄청난 일 아니겠습니까? 못해도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을 텐데, 그 많은 연루된 사람들이 하나같이 입을 다물고 있다는 건 매우 부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쪽엔 이미 자유의지라는 게 남아있지 않을 수도 있겠어.”
“그렇습니다.”
“자네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에게 대의가 있겠군. 문제는 미국일세. 미국이 끼어있는 이상 국회가 조약을 비준해줄 리가 없다네. 한미동맹을 신성시하는 자들이 국회에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나? 자네가 어떤 그럴듯한 이유를 댄다고 한들 미국이 들어간 이상 이 건은 물 건너갔다고 봐야해.”
“아직 연방정부가 개입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뉴 텍사스란 이름이 애매하기 그지없었다. 텍사스 주를 통해 넘어온 미국의 속령이라는 것인지, 연방정부를 배제한 주정부 단독이라는 것인지.
“그걸 확실히 해야 할 것 같아. 주정부가 혼자 폭주하고 있다면 연방정부는 당연히 달가워하지 않을 테니. 그 경우엔 우리가 미국의 호의를 살 수도 있겠지. 사정을 알려준다거나, 협동작전을 전개한다는 식으로 말일세.”
“그렇죠.”
“확실한 게 아무것도 없으니 지금으로서는 선을 넘지 않는 게 현명해. 장군께 말씀드리게. 우리는 당신들처럼 큰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그 나라들을 전부 적대시한다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대신 후방에서 힘을 키우며 무기와 물자를 조달해드리겠다고.”
“알겠습니다.”
울토르는 팔짱을 낀 채 내 말을 묵묵히 들었다. 그는 대놓고 간을 보겠다는 우리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기분 나빠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결정이 어려웠나보군.”
“예, 여러모로.”
“방봉팔이라고 했던가.”
“박.......방이 맞습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수긍했다. 이쪽 사람들과 대화할 때는 그냥 전생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며.
“넌 내가 왜 이곳에 내려왔는지 알겠나? 있는 것이라고는 크록뿐인 정글로?”
“......모르겠습니다.”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생각해 보니 그것도 미스테리였다. 황국은 무려 13개 국가와 전쟁을 치르는 중이다. 이런 엄중한 상황에서 군을 이끄는 대장군이, 전선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남부 밀림까지 내려온다고? 단지 수천 년의 원수를 갚기 위해? 미치지 않은 이상 기용될 리가 없는 작전이었다.
“아바르.”
그가 짤막하게 말했다. 그것만으로 모든 게 설명되었다.
아바르는 두 번째 권능이었다. 그녀가 관장하는 건 운명.
그녀에 대해서는 많은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녀가 치우치지 않는 운명을 수호하며, 사제들을 통해 계시를 내린다는 것 말고는.
“남부로 내려가면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군. 그래서 서부전선을 뒤로 물리고 내려왔지. 처음에는 오랜 숙적을 쓰러뜨릴 기회가 찾아온 게 아닌가 싶었는데.”
그가 크록 전사들을 흘끔거렸다.
“길들여진 크록을 보게 될 줄이야.”
“.......”
역시 그는 전사의 에사인이 맞다. 크록의 무한한 가능성을 알아보다니.
“대사에게 말해다오. 마지막 조건을 변경하겠다고. 외교적인 입장은 바꾸지 않아도 좋다. 대신 물자만큼은 확실하게 받아내겠다.”
파격이었다.
우리는 가지고 온 모든 요구를 관철시켰고, 황국의 요구는 최대한 무마해냈다. 외교라는 걸 전혀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대단한 성과가 틀림없었다.
“박과장.”
박병철이 흥분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이로서 총독까지 절반은 왔다고 보게.”
에이, 또 오바하시네.
어쨌거나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나는 그와 뜨거운 악수를 한 차례 나누었다.
“방봉팔, 따라와라.”
울토르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나를 불렀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천막 귀퉁이로 데려갔다.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지금부터 하는 말은 통역할 필요가 없다.”
“알겠습니...”
갑자기 무시무시한 살기가 엄습해왔다. 그가 별안간 주먹으로 내 복부를 후려쳤다. 마치 전봇대로 얻어맞은 듯한, 너무나도 묵직한 일격이었다.
“크윽...!”
나는 이를 악물며 밀려나지 않도록 다리에 힘을 주었다. 검을 뽑아들 생각은 감히 하지도 못했다. 검집으로 막고 있는 게 고작이었다.
그는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주먹을 회수했다.
“역시 너는 오데르의 검이었군.”
나는 그제야 내 발이 그의 그림자를 밟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찰나에 술법을 시전한 건 그저 암살자의 본능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제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 새끼 암살자가 맞다구요! 제가 진 게 아니라 그 놈이 비열한 겁니다!”
이텐이 고자질을 했던 모양이었다. 이렇게 되면 내 입장이 곤란해진다. 오데르가 다르마알과 손잡았다는 게 알려져 있을 테니.
“대체 무슨 일입니까?”
박병철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정기호는 그런 박병철의 뒷덜미를 잡아 힘으로 돌려세웠다. 정기호는 등에 찬 대검을 뽑아 울토르에게 겨누며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
“죽던가, 해명하던가.”
“......”
놈은 자기가 울토르의 검법을 배운, 황군 장교출신이라는 것마저 잊은 모양이었다. 에사인을 협박할 정도면 정신이 나갔다고 봐도 무방했다.
“방봉팔, 네겐 신세를 졌었지. 우의의 표시로 경고를 하나 하마.”
“......알겠습니다.”
“가급적 우리들 앞에서 술법을 쓰지 마라. 네 형제들이 일곱 번째 권능을 죽인 게 알려진다면, 황국을 돌아다니기 쉽지 않게 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