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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23화 (23/205)

23화. 망명자 (6)

어째서 황제의 군대가 이 타이밍에?

너무나 시의적절한 타이밍이었다.

드는 의문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나, 가장 큰 의문은 이것이다. 누가 왔는가하는.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에사인은 일곱 명이었다. 그들을 가리켜 황제의 일곱 권능이라 불렀다.

수천 년 전 마그나크록이 황제의 군대를 전멸시켰을 땐 그들 중 누구도 참전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다를 게 확실했다. 제아무리 황제의 군대가 강하다고 해도, 에사인은 에사인으로 상대하는 게 최선이었다.

나는 관망하기 좋은 지점에 터를 잡고 섰다. 아직 양쪽 군대는 대치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광분한 크록 군대는 적을 눈앞에 둔 것만으로도 통제가 불가능할 지경에 치달았다.

- 돌겨어어억!

한 남자의 우렁찬 외침이 북소리를 뚫고 들려왔다. 어느 쪽이 먼저였는가는 알기 힘들었다. 두 군대는 거의 동시에 내달리기 시작해 서로를 향해 무자비하게 부딪혔다. 마법사들이 소환한 뇌광이 여기저기서 번뜩였고, 거인과 야수는 물 만난 고기처럼 적들을 찢어발겼다.

나는 수천수만의 생명이 명멸하는 전장 속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는 전사를 보았다. 그는 기둥 같은 양손검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며 적진 한가운데에 문자 그대로 고속도로를 뚫는 중이었다.

저건 설마.......

쌍안경이 잡아내는 시야 안에 잘린 몸통들만이 그득했다. 흡사 죽음이 인간의 몸을 빌어 현신한 듯했다. 크록들이 악다구니를 쓰며 사내에게 엉겨들었으나, 덤벼드는 속도보다 죽어나가는 속도가 더 빨랐다.

양손검, 무적자,

두 키워드의 조합으로 만들 수 있는 에사인은 단 한 명뿐이었다.

대장군 울토르.

일곱 권능 중 네 번째에 위치한 자였다. 정기호가 쓰는 검술을 창안한 자이기도 했다. 그가 상징하는 관념은 ‘무적’이었다. 그는 어떤 무기와 마법으로도 해칠 수 없는 불패무적의 존재였다.

울토르가 노리는 건 마그나크록의 목이었다. 나는 울토르의 패배를 감히 상상할 수 없었으나, 마그나크록도 불멸의 존재이긴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두 에사인이 전투에 돌입했다. 이때는 천지자연마저도 숨을 죽이고 다가올 일격에 대비했다.

쩌어어어엉.

마그나크록의 일격은 자연재해를 방불케 했다. 놈이 언월도로 땅을 내리찍자 전장의 지형이 바뀌었다. 애꿎게 휘말린 병사들이 몇십 미터나 튀어올라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울토르는 제자리에 버티고 서서 마그나크록의 공격을 받아내었다. 마그나크록의 공격은 그를 분노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나는 손에 땀을 쥐고 두 초월적인 존재의 대결을 지켜보았다. 쉽게 승부가 갈릴 것 같진 않았다.

그러나 두 에사인이 팽팽한 대결을 펼치는 동안, 황제의 군대는 수많은 시신을 흩뿌리며 전선을 뒤로 물리고 있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전장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개별 병사들의 무력으로 따질 것 같으면 황제 쪽이 우위였다. 적어도 황군에는 못 먹고 굶주린 병사는 없었다. 그러나 차이를 만들어내는 건 언제나 그렇듯이 소수의 강자였다.

- 우리는 마그나크록의 육신을 나눠받았으니, 마그나크록의 불멸성을 공유한다.

크록의 장군들은 마그나크록과 같은 불멸자였다. 그들은 창칼에 누더기가 되어가면서도 기어이 황제군의 핵심 간부들을 살해해냈다. 내가 카룩카르에게 당했을 때와 비슷한 사태가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중이었다.

결심을 내려야할 때였다. 이대로 황군이 무너지도록 둘 순 없었다.

마침 내겐 마그나크록의 송곳니가 있었다. 주술사를 암살할 때 필요할지 몰라 가져온 물건이었다.

펄럭.

난데없이 머리 위에서 활개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익족 전사 한 명이 고속으로 날아와 절벽 위에 착지했다.

나는 검을 빼들어 그를 경계했다. 찬란한 황금빛 갑주를 입고, 메이스와 사각방패로 견고하게 무장한 여전사였다.

강철의 자매단에 비익족 전사가 있는지는 처음 알았다. 태생이 음습한 놈이라 정규군과는 거리가 멀었는지라.

그녀는 바닥에 쓰러진 알비노 주술사의 시체를 흘끔 일견했다. 그녀도 나와 마찬가지로 주술사를 노리고 찾아온 듯했다.

급박한 상황과 별개로 나로서는 무척 감회가 깊은 순간이었다. 그녀는 내가 전생한 후 최초로 만나는 황국인이었다.

“네가 죽인 게냐?”

쌀쌀한 목소리.

나는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녀는 불쾌한 심경을 드러내듯 한 쌍의 날개를 거세게 펄럭였다.

“혼돈의 하수인이 왜 우릴 돕는 것이냐?”

또 나왔다, 혼돈의 하수인.

알비노 주술사가 날 지칭했던 말이었다. 처음엔 그러려니 했는데, 진영을 달리하는 인물에게서도 같은 말을 들으니 간과할 수가 없었다.

“왜 날 혼돈의 하수인이라고 부르지?”

“이상한 걸 묻는군. 누가 봐도 넌 혼돈의 하수인이지 않느냐.”

그녀가 메이스의 뭉툭한 끝으로 날 가리켰다.

“바느질한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기이한 옷, 용도를 짐작할 수 없는 이상한 도구, 이질적인 용모와 말씨, 이렇듯 모든 정황이 명확하거늘. 너는 혼돈의 다르마알이 이 세계에 불러들인 마족이 아니더냐?”

날더러 혼돈의 다르마알이 불러들인.......마족이라고?

도무지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대화였다. 일단 마족 운운은 제쳐두고, 바느질한 흔적이 없는 옷과 용도불명의 도구란 문명의 이기를 표현하는 것 같다. 아무래도 그녀는 나 같은 현대인을 처음 보는 게 아닌 듯했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 포탈을 넘은 날부터 지금껏 우리가 만난 것이라고는 두 발로 걷는 도마뱀뿐이었다.

“혹시 포탈을 넘어온 사람들이 우리 말고 또 있나?”

“사람이 아니라 마족이겠지.”

“어쨌거나.”

“같은 패거리들이니 너희가 더 잘 알 것 아니냐.”

그녀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녀는 마족이라는 자들과 감정이 좋지 않은 듯했다. 나는 칼끝으로 주술사의 시체를 가리켰다.

“이놈 목숨값이라 치고 대답해다오. 난 네가 말한 ‘패거리’에 대해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거든.”

“흐음.......”

그녀가 내게 다섯 걸음 안쪽까지 다가섰다. 검의 간격 안인 동시에 메이스의 간격 안이기도 했다. 그녀는 내게 허리를 굽히며 냄새를 맡듯 코를 킁킁거렸다.

“네게 자매님의 흔적이 느껴지는군.”

그녀는 소미가 걸어준 강화술법을 감지한 듯했다.

“상당한 고위의.......하지만 어째서 자매님이 혼돈의 하수인 따위에게 술법을 쓰신 거지?”

“그 하수인이 네 자매님과 같은 편이니까.”

“이럴 리가 없는데.......”

그녀는 혼란에 빠진 듯했다. 술법의 강력함이란 술사의 신실함을 증명해주었다. 그녀는 나는 부정할 수 있어도, 소미까지 부정하진 못하는 것이다.

그녀는 한참 고민한 끝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연이 닿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자매님이 네 편에 서있다면 악인이 아니라고 믿겠다.”

“믿어도 좋아.”

“너흰 어느 날부터 우리 세계 곳곳에 열린 포탈을 통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르마알의 하수인을 자처하면서 말이지. 너희는 듣도 보도 못한 도구와 문물을 앞세워 이 땅에 혼돈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세계 곳곳에 포탈이 열렸다고?”

“그렇다.”

이번엔 내가 혼란에 빠질 차례였다. 포탈이 하나가 아니었다는 건 발밑에서 벌어지는 전쟁만큼이나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 내게 굴종하라. 나를 주인으로서 섬겨라. 그리하면 두 발 달린 짐승들 중에선 널 능가할 존재가 없게 될 것이다.

아약은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회유하려들었다. 사실 거절할 이유가 달리 없는 제안이었다. 힘이 전부인 세상에서, 엄청난 힘을 공짜로 부여해주겠다는데 그걸 왜 거절하겠냐고.

그녀의 말대로 포탈이 여러 곳에서 열렸다면, 다르마알은 대한민국 말고 다른 나라에서도 같은 제안을 하고 다녔다는 소리가 된다.

우리는 다르마알의 아바타를 죽여 버렸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순조로운 협력이 이뤄졌을 가능성도 있었다.

혼돈의 신도로 거듭나 이세계를 듣도 보도 못한 문명의 힘으로 쑥대밭을 만들어버리는 거지.

“울토르님이 마그나크록의 땅을 정벌하러 오신 것도 너희와 무관하지 않다. 하나 돌아가는 모양새가 썩 좋지만은 않은 것 같구나.”

울토르와 마그나크록은 여전히 승부를 내지 못하는 중이었다. 대장군이 적 에사인에게 발목이 묶인 탓에 전술적으로 후퇴를 해야 할 시점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무의미한 사상자가 속출하는 중이었다.

“장군들이 죽지 않는 것 때문이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승은 적의 장수들이 불사신이라는 걸 말해주지 않았다. 과거 우리가 패배했던 전쟁에 생존자가 없었기 때문이지. 어쩌면 이 전쟁도 그렇게 끝날지도 모르겠구나.”

“원한다면 내가 도울 수 있어.”

“네가 어떻게 말이냐?”

그녀가 불신이 어린 어조로 되물었다. 투구를 쓰고 있어서 표정까지는 읽지 못했지만, 목소리만으로도 놀란 감정이 충분히 전달되어왔다.

“나는 불사신을 죽일 수 있거든.”

“우리가 못하는 걸 네가 가능할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밑져야 본전이잖아. 그냥 지던가, 한 번 믿어보던가.”

“.......네가 순수한 의도로 우릴 도울 거라고도 생각지 않는다.”

의심이 많은 처자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부연해주었다.

“물론 조건이 있지. 우린 황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러 포탈을 건너왔어. 내 도움이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갈 관계에 반영이 되었으면 하는데, 어때?”

“그건 나의 권한을 벗어난 일이군.”

그녀가 주저하며 말했다.

“하지만 정말로 불사신을 쓰러뜨려준다면 울토르님께 네 공을 적극적으로 상신해보겠다.”

“그 정도 가지고는 안 돼.”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가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난 정말로 권한이 없다. 외교는 나 같은 일개 전사의 일이 아니다.”

“시끄럽고, 내가 목을 걸었으니 너도 최소한 직은 걸어.”

“.......”

그녀의 머뭇거림은 길지 않았다. 일분일초가 아쉬운 상황이었다. 그녀는 방패를 내려놓은 뒤 두 손으로 투구를 벗었다. 땀에 젖은 금색 머리카락이 실타래처럼 늘어지며, 가려져있던 의지견정한 눈빛이 드러났다.

“나 강철의 자매단 부단장 엘리시아는 너희와 우리가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갈 수 있도록 최대한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혹여 네가 내 노력이 미진하다고 여길시 모든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나겠다.”

부단장이셨군.

부단장정도면 소미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을 확률이 높았다.

“잘 부탁한다, 엘리시아. 난 박봉팔이라고 한다.”

“박봉......?”

“뒷발음까지 확실히 해줘. 안 그러면 이상한 뜻이 돼버리니까.”

“방봉팔.......”

이름을 가르치는 건 포기하는 게 나을 것 같다. 한국인이 듣기에도 어려운 이름이라.

어쨌거나 계약은 성립되었다. 나는 엘리시아에게 손바닥을 까딱였다.

“자, 가자고.”

그녀도 눈치가 있었다. 그녀는 투구를 다시 쓰고, 내 상체를 한 팔로 감싸며 힘껏 날개짓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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