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망명자 (7)
나는 엘리시아에게 안긴 채 전장 위를 비행했다. 비익족의 품에 안겨보는 것도, 그런 채로 하늘을 날아보는 것도 처음 겪어보는 경험이었다.
전황은 혼돈 그 자체였다. 그러나 크록 장군들을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들은 불사의 육체를 방패삼아 거침없이 날뛰는 중이었다.
나는 착지할 장소를 유심히 살펴보다가, 갑자기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느낌에 휩싸였다.
뒷목이 으슬으슬해지고, 모든 일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을 거란 불길함.
내 시선은 미리 약속된 것처럼 전장의 한 지점으로 자연스레 움직였다. 한 사내가 아비규환의 지옥 속을 느긋하게 걷고 있었다. 누구도 그의 산보를 방해하려들지 않았다. 황군은 말할 것도 없고, 반쯤 미쳐버린 크록들조차 그를 마치 허수아비라도 되는 것처럼 취급했다.
“이쯤에서 내려줘.”
“장군은 조금 더 앞에 있다.”
“약속은 이행하겠어. 여기서부터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이쯤에서 헤어지자고.”
“잠깐, 방봉팔...!”
나는 그녀의 팔을 억지로 풀어 땅에 착지했다. 바닥에 손을 짚자마자 크록 병사들이 게거품을 물며 달려들었다.
종으로, 횡으로,
두 번 베니 세 놈이 나뒹굴었다. 역시 울토르처럼은 되지 않았다.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신성모독이었다.
나는 걸리적거리는 놈들을 가차없이 베어 넘기며 사내에게 다가갔다. 몇 놈을 더 넘기자 휑한 공터만이 나타났다. 여기서부터는 에사인의 전장이었다. 휘말리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잃을 수가 있었다.
“.......”
사내는 걸음을 멈추고 내게 눈길을 주었다. 나는 그의 눈이 아닌 발밑에 주목했다. 그는 그림자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데르의 신도는 그림자를 밟히는 걸 극도로 경계한 나머지 이렇듯 술법으로 수납하고 다니곤 했다.
그는 나와 같은 부류다.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오데르를 섬기는 진짜 암살자.
수만의 군대가 동원된 전장이다. 전장의 혼란은 살행을 실행하기에 최적의 판이었다. 암살자가 하나쯤 돌아다니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앞에 있는 건 철없는 귀족이나 오만한 장교 따위가 아니라 에사인이었다. 황제의 군대를 이끄는 자, 불패무적의 울토르!
대체 뭘 어쩌려는 거지?
전생의 동료를 다시 만났다는 반가움보다 당황스러움이 앞섰다. 이런 상황에서 재회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가 후드를 벗으며 얼굴을 드러냈다. 볼우물이 한 주먹 깊이나 되는 메마른 자였다.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죽고 난 뒤 수십 년의 시간이 흘렀다면 모르는 형제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날 알아보았군.”
그는 기척을 죽이는 술법을 부리고 있었다. 내게 식별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위기의식을 느낄 것이다.
“모를 리가 없지.”
나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눈앞에서 그림자를 수납해보였다. 술법을 시연하자마자 삭막하던 뺨에 함박웃음이 번져갔다.
“너는 내 형제로구나.”
그가 기쁨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하지만 처음 보는 얼굴이로군. 남방에서만 활동하는 형제인가?”
“그보다 더 멀리 있었어.”
“나는 젠이라고 한다. 네 이름은?”
“라힐.”
나는 그에게 전생의 이름을 들려주었다. 그는 내 과거의 연결고리였다. 현생의 이름은 그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오데르께서 널 보내셨나? 내가 미덥지 않아서 같이 임무를 수행하라 하시던가?”
뭐라고 대답해야하나.
그가 울토르를 노리고 온 건 확실했다. 마력으로 충만한 저 단검은 마그나크록의 송곳니와도 견줄 수 있는 무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를 말려야만했다. 이대로 울토르가 죽고 프로젝트가 뒤집어지는 꼴을 볼 순 없었다. 그러나 내겐 형제를 말릴 명분이 존재치 않았다. 그는 그저 의뢰를 받고 누군가를 죽이러 왔을 뿐이었다. 밥을 먹거나 숨을 쉬는 것처럼 당연한 일을 무슨 명분으로 말리겠냐고.
“임무 때문에 온 건 아니야.”
“내 귀는 열려있다네, 형제여.”
그는 여유가 있었다. 그 여유만큼 실력도 출중할 터였다.
“자세히 설명할 순 없지만, 사정상 황국의 도움이 필요한 입장이다. 한 번만 눈을 감아주면 안 되겠나.”
“뭘 눈감아달라는 말인가?”
“네 의뢰.”
그가 내 어깨너머를 흘끔 살펴보았다. 울토르와 마그나크록은 한 치의 방심도 용납되지 않는 생사결을 펼치는 중이었다. 그가 하고자하는 건 저 팽팽한 대결에 작은 변수를 만들어내는 게 전부였다. 그 다음은 상대가 알아서 할 것이기에.
“황국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네가 말이냐?”
“그래.”
“소식이 늦은 모양이로군. 네 행동은 가장 짙은 그림자의 의지에 어긋나고 있다.”
가장 짙은 그림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가장 짙은 그림자란 오데르의 수석암살자이자, 내가 사랑했던 사람을 가리키는 호칭이었다.
물론 그녀가 아직도 그 자리에 있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세월이 흘렀을 테고, 숱한 시련이 그녀를 가만히 두지 않았을 테니.
나는 그녀의 이름을 섣불리 입에 올리는 대신 이렇게 물었다.
“그 의지를 들려다오.”
“오데르의 자식들은 다르마알과 손을 잡는다는 게 가장 짙은 그림자를 위시한 우리 모두의 일치된 의견이다. 우리는 우리를 이용했던 위선자들을 몰아내고, 이 땅에 빛이 들지 않는 야만의 시대를 도래케 할 것이다.”
그가 팔을 뻗어 단검으로 울토르를 가리켰다.
“그 첫걸음이 일곱 권능의 죽음이다.”
오데르가 다르마알과 손을 잡다니.
포탈이 여기저기 열렸다는 것보다 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물론 심정적으로는 납득이 간다. 오데르의 자식들은 오랜 세월 탄압을 받아왔다. 암살자가 명함 파고 다닐 만큼 떳떳한 직업은 아니었으니까.
대표적인 두 흉신이 협력해서 세상을 쿵짝쿵짝하겠다는 것도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들이 시든 화단에 물이나 뿌리고 다니던 작자들은 아니었으니.
문제는 내가 이 사이코패스 집단의 일부였다는 점이다. 동료도, 스승도, 사모하던 여인도, 모시는 신마저도.
“형제여, 함께 위업을 달성하지 않겠나.”
그가 더없이 온화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는 내가 거절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조금도 고려하고 있지 않음에 분명했다.
나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옛 동료들은 더 이상 남의 손에 휘둘리기만 하는 도구가 아니었다. 그들은 주체적으로 운명을 결정했다. 불합리한 세계를 리셋시켜버리기로.
내가 가야하는 길이 그 길이 아님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나는 가장 짙은 그림자를 적대할 수 있을까? 방금 베어버린 크록처럼, 한때 동료였던 자들과 싸울 수 있나?
나는 도저히 나오지 않는 답을 그에게 전가하기로 했다.
“거절하겠다.”
“.......뭐?”
“부탁하지. 오늘만큼은 그냥 넘어가다오.”
두 에사인이 등을 훤히 드러낸 채 생사결을 벌이는 상황.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그가 목적을 달성하려면 나를 죽이거나 전투불능으로 만드는 수뿐이었다.
- 우리는 각자에게 신을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죽여서는 안 되는 대상이다.
나는 그가 덤비기를 바랐다. 그러기만 한다면 나도 미련 없이 방어권을 행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단지 전생의 인연일 뿐이라고. 뜻이 맞지 않으니 다음 이야기는 검으로서 써내려갈 수밖에 없다고.
함께 지샜던 밤들, 등을 맞대고 싸웠던 기억들, 희미한 잔불을 쪼이며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던 그 숱한 날들을 묻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는 내게 검을 들지 않았다.
“.......어쩔 수 없군.”
젠은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그는 일생에 다시 오지 않을 기회와 동료의 목숨 중 후자를 선택했다. 그에겐 당연할지 몰라도 내겐 뼈아픈 선택이었다.
그는 내 얼굴을 담아두려는 듯이 빤히 바라보다가, 후드를 깊게 덮어쓰며 말했다.
“라힐, 가장 짙은 그림자에게 네 안부를 전하도록 하마.”
“부디.”
그는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전선은 더 뒤로 후퇴하고 만 듯했다. 이젠 주변에서 황군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두 에사인의 주변을 제외하고는 오직 잿빛 비늘들만이 넘실대는 중이었다.
이제 와서 크록 무리를 뚫고 장군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는 건 수지가 맞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전진하기로 결심했다.
마그나크록에게로.
제정신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옛 동료와의 재회가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게 틀림없었다. 나는 허연 송곳니를 쥔 채 보무도 당당히 나아갔다.
반경 백 미터 지점에서부터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충격파가 덮쳐오기 시작했다. 양손검과 언월도가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파동이었다.
오십 미터 지점에서부터는 똑바로 걷는 게 불가능해졌다. 발파공사를 하듯 여기저기서 폭음과 흙모래가 난무했다.
삼십 미터 지점부터는 죽음을 각오할 용기가 필요했다. 너무나도 압도적인 사이즈라 언월도의 궤적을 알 수가 없었다. 오직 덮쳐오는 풍압으로 유추할 따름이었다.
송곳니를 쥔 채 나타난 나를 본 울토르의 반응은 이랬다.
“돌아가라, 네가 낄 곳이 아니다!”
돌아갈 거였으면 애초부터 오지도 않았겠지.
나는 울토르의 말을 무시하며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배경이 확확 바뀌었다. 아직 소미가 건 주술의 힘이 조금 남아있었다.
마그나크록은 거대한 덩치만큼이나 허점이 많았으나, 두텁고 견고한 비늘은 난공불락의 요새와도 같았다.
마그나크록은 그걸 믿고 방어를 도외시했다. 놈은 나란 미물에는 조금도 신경을 기울이지 않았다.
나는 검디검은 비늘을 붙들어 등반을 하듯 놈의 몸을 기어 올라갔다. 어떻게 그 덩치에 그런 민첩함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놈은 가끔 몸 전체를 뒤집거나 방향을 틀며 내 악력을 테스트했다.
나는 천신만고 끝에 놈의 머리 꼭대기에 오르는데 성공했다. 에사인의 두개골 위에서 내려다보는 경치란 비익족의 품과는 또 다른 각별함이 있었다. 흔들거림은 너울을 타는 듯했고, 쭉 뻗은 꼬리는 마치 활주로 같았다.
“후우.”
나는 놈의 정수리 위에 자리를 잡은 뒤 송곳니를 양손으로 꽉 쥐었다. 평범한 검이었더라면 마력이 밖으로 연기처럼 분출되었을 텐데, 송곳니는 스폰지처럼 마력을 주는대로 빨아들였다.
“이야아아아!”
나는 고함을 지르며 송곳니를 비늘 틈바구니로 힘껏 찔러 넣었다. 동시에 강대한 에사인의 주둥이에서 소름끼치는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 크아아아아아.......
놈이 고개를 세차게 젖혔다. 나는 송곳니를 구명줄삼아 한사코 매달렸다. 중력에 에사인의 완력을 더해 내팽개쳐지면 피떡이 될 게 뻔했다.
- 크르르르르....
울토르가 추가타격을 가한 모양인지 마그나크록의 몸부림이 더욱 심해졌다. 손에서 힘이 빠른 속도로 빠져나갔다. 설상가상으로 상처에서 뿜어져 나오는 선혈이 시야를 온통 가리는 중이었다.
못 버틴다.
나는 송곳니를 부둥켜안은 채 어디론가 훨훨 날아갔다. 에신으로 건너온 뒤 타의로 겪는 두 번째 비행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결말이 달랐다.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비익족 전사가 날 공중에서 낚아챘다.
“약속을 지켰더구나.”
눌러쓴 면갑 사이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