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망명자 (5)
나는 보고를 위해 황승연 중사를 돌려보내고 홀로 적진을 향해 나아갔다.
크록 군대는 지금도 시시각각 불어나고 있었다.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행군하는 놈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병력의 질도 점점 정예화되었다. 작고 날렵한 암살형 개체들, 중장갑을 입은 방패병들, 다른 놈들보다 몸집이 확연히 크고 비늘이 까만 엘리트 보병도 엿보였다. 엘리트 보병 중에서도 유달리 풍채가 좋은 놈들은 악어를 타고 있기도 했다.
놈들은 전혀 주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며, 종교적인 열정에 취해 한목소리로 쉼 없이 외쳐댔다.
“마그나크록! 마그나크록!”
나는 서서히 불안해졌다. 지금껏 오는 길에 만난 놈들만 합쳐도 삼사백 마리를 훌쩍 넘었다. 이런 무리들이 순례자의 행렬처럼 팔방에서 끝없이 모여들고 있었다.
반면 아군은 잘 쳐줘야 백여 명 남짓이었다. 포탈 반대편에서 청사를 방어중인 예비대를 싹 긁어모아도 이백 명을 넘기지 못했다. 탱크 백 대를 갖다놓아도 이길까말까 한한데, 보병 이백 가지고는 싸움이 될 턱이 없었다.
슬슬 본진이 육안으로도 보이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엄청난 병력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쌍안경이 필요가 없었다. 시야가 닿는 모든 곳이 전부 크록들이었으니까.
“마그나크록! 마그나크록!”
고막에서 피가 날 것 같았다. 그야말로 산이 떠나갈 듯한 함성이었다. 온 천지에 마그나크록을 부르짖는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적당한 나무를 찾아 몸부터 숨겼다. 굳이 몸을 숨기지 않아도 아무도 모를 것 같긴 했다. 말라비틀어진 잡졸들부터 악어 고삐를 쥔 장군들까지, 모든 크록들이 게거품을 물며 열광하는 중이었다.
이게 정상인가?
나는 속으로 자문해보았다.
처음 봤던 크록들은 이 정도까지 광신적이진 않았었다. 그때 그놈들은 전황이 불리하다고 내빼기까지 했었다.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에 분명했다. 유추해볼 수 있는 건 종교적인 리더십이었다. 피어오르는 연기는 제사장이 크록들을 고양시키기 위해 치르는 의식일지도 몰랐다.
쿵, 쿵, 쿵, 쿵........
전사들이 함성에 맞춰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드넓은 들판이 지진이 일어난 듯 흔들거렸다. 흥분한 악어기수는 창으로 다른 크록을 꿰어 입에 처넣었고, 중장보병들은 걸리적거리는 놈들을 방패 모서리로 찍어댔다.
자세히 살펴보면 작고 약한 놈들만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는 중이었다. 잡졸들은 무기력하게 당하면서도, 동료가 먹히거나 맞아죽을 때마다 발작적으로 환성을 질렀다.
계속 가야하나?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주술사 한 명을 죽인다고 해서 바뀔 전황이 아니었다. 왜 그렇게 열심히 비를 뿌려대는지는 모르겠으나, 놈들은 이미 우리를 쓸어버릴 병력을 모으고도 남았다.
나는 잡념을 털어버렸다. 살행에 나선 이상 나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생각은 타겟을 제거하고 나서 해도 늦지 않았다.
주술사는 절벽 위, 나무를 쌓아 만든 제단에 있는 듯했다. 나는 그림자에 스며들어 절벽 아래까지 손쉽게 접근했다. 나는 절벽을 오르기 전에 무선 이어폰을 끼고 휴대폰의 음악 재생 버튼을 눌렀다.
- ........
소미의 솔로곡이 재생되었다. 귀머거리나 마찬가지인 상태라 가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대신 강렬한 비트만이 살아남아 뇌리에 스며들었다. 소미는 목적에 충실하기 위해 자기 노래를 락버전으로 리믹스한 듯했다.
잠깐, 이거........
나는 당황해서 그만 술법을 풀 뻔했다. 노래를 듣기 시작하자마자 하복부에서부터 뜨거운 기운이 화산처럼 분출하기 시작했다. 마력이 주체를 할 수 없을 만큼 넘쳐났다. 광기에 휩싸인 크록들처럼, 나도 당장 뭐라도 때려 부숴야만 할 것 같았다.
나는 개구리처럼 절벽 위로 튀어 올라갔다. 평소 같으면 엄두도 못 낼 높이였다. 오랜 세월 칼밥을 먹으며 별의 별 일을 다 겪어보았으나, 이렇게까지 강력한 강화술법은 처음이었다.
올라와서 보니 제단이라고 생각했던 건 그냥 나무쪼가리를 쌓아둔 것에 불과했고, 연기는 쌓아둔 쪼가리들 중 하나가 뿜어내고 있었다.
나는 우선 주변부터 살폈다. 이곳은 본대 위에 솟아난 섬 같은 장소였다. 자그만 체구의 크록 한 마리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알비노 증후군이라도 있는 것처럼 비늘이 온통 흰 크록이었다.
놈이 높은 지위를 가진 인물임엔 틀림없는 듯했지만, 여길 지킬 정도로 이성이 남아있는 크록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웬 놈이냐?”
알비노 크록이 내게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남길 말은?”
나는 조용히 물으며 놈의 가슴팍에 검을 겨누었다. 앙상한 쇄골 위로 뼈 목걸이가 찰랑대고 있었다.
“.......”
놈은 눈알을 굴리며 나를 요모조모 뜯어보았다. 비늘색의 짙기에 따라 힘이 강해진다는 게 사실이라면, 이 알비노 크록은 갓난아기보다 약해야만했다.
“그때 그 핏덩이로군.”
놈이 아는 척을 했다. 내가 안면을 튼 크록 주술사라고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림자를 매개로 살의를 쏘아 보냈던 놈.
“그래, 넌 곧 핏덩이가 될 테고.”
나는 놈에게서 무술을 수련한 흔적을 전혀 찾아내지 못했다. 주술사라고 해서 모두 나나 소미처럼 체술에 능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고 해야 했다.
“혼돈의 하수인이여, 이미 늦었다.”
“뭐?”
나는 늦었다는 말보다 혼돈의 하수인이라는 말이 더 신경 쓰였다. 혼돈이란 다르마알의 상징이었기에.
“위대한 분께서 네 비루한 군대를 짓밟기 위해 친히 강림하셨다.”
크록의 눈이 가늘어졌다. 웃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놈이 두 손을 모아 술법을 구동하려하자, 나는 재빨리 달려들어 놈의 목에 검을 찔러 넣었다.
“꾸륵.......꾸르륵.......”
놈은 털썩 무릎을 꿇더니, 구멍난 성대로 기괴하게 웃으며 숨을 다했다.
나는 놈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찝찝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위대한 분이라고?
장군? 아니면 대장군인가?
카룩카이에게 크록의 직제에 대해 물어보고 왔어야하나?
생각을 채 정리하지 못한 시점이었다. 묵직한 발소리가 대지를 강타했다.
쿠웅.......
먹먹한 고함이 들판 전체를 가득 메우고 있는데도, 그 발자국 소리만큼은 따로 떨어뜨려놓은 듯이 선명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차마 표현하기 두려운 이 중량감. 악어에 올라탄 기수들조차 이 정도 중량감은 아니었다.
나는 절벽 가장자리로 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것을 발견하는 순간 아랫배에서 끌어올린 듯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미친......”
그 존재가 지닌 위용은 거대하다는 말로 형용하기가 불가능했다. 결코 움직일 수 없는 것, 움직여선 안 되는 것, 산이나 언덕에 생명이 깃든다면 바로 저런 모습일 듯했다.
그것은 악어의 시조신이었다. 전신을 휘감은 비늘은 흑요석을 벼린 듯이 새카맸고, 송곳니는 하나하나가 창칼과도 같았다. 다물린 주둥이의 틈바구니로 감히 농도를 가늠할 수 없는 짙은 마력이 연기처럼 흘러나왔다.
마그나크록.
에사인의 진신이 틀림없었다.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압도되는 듯했다. 다르마알의 아바타에 지나지 않았던 아약과는 비교를 불허했다.
“마그나크록! 마그나크록!”
크록들이 광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종교적인 리더십이란 바로 그들의 신을 가리켰다. 그들은 창조주가 굽어보는 아래 불굴의 군대로 거듭나고 있었다.
어째서 신화 속에서나 머물러있어야 할 괴물이 현신하게 된 건가.
고민하고 있을 새가 없다. 어서 돌아가 이 사실을 알려야만했다. 당장 진지를 철수하고, 청사를 폐쇄하고, 대통령령으로 서울시내에 병력을 동원해야만했다.
하지만 병력을 동원한다고 해서 에사인을 막을 수가 있나?
포탈이 좁아 마그나크록까진 넘어오지 못한다고 쳐도, 불사신인 장군들은 충분히 진입이 가능할 것이다.
서울시내에서 걸어 다니는 악어 떼와 시가전을 벌이는 상상을 하자니 눈앞이 암담해진다.
부우우우.......
좌절감에 휩싸여있을 때였다. 문득 뱃고동 같은 뿔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소리가 들려온 곳을 쳐다보았다.
크록의 무리가 끝나는 곳, 지평선과 닿아있는 지점에서부터 밀물처럼 새로운 물결이 밀려왔다. 연마된 무기와 강철로 벼린 갑옷의 물결이었다.
이어서 숲이 살아있는 듯이 흔들리더니, 날개를 가진 비익족들이 끝도 없이 날아올랐다. 흡사 메뚜기 떼를 보는 것만 같았다. 비행체의 수가 어찌나 많은지 하늘의 해를 가릴 정도였다.
.......믿을 수가 없었다.
크록의 군대에 버금가는 엄청난 군단이었다. 비익족뿐만이 아니라 수인족, 전투마차, 심지어 거인들까지 편제되어 있었다.
나는 쌍안경을 쥔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창자를 끊어내는 듯한 날카로운 합창이 대지 위를 내달렸다. 합창은 크록들이 만들어내는 무질서한 소음을 몰아내며, 세상을 오직 자신들만의 소리로 채워 넣었다. 나는 노랫가락 속에서 에신 고어로 된 경구를 또렷하게 알아들었다.
- 영원불사의 황제를 찬미하라.
종족 연합군의 최전선에 황금빛 띠가 나타났다. 일곱 권능을 상징하는 깃발이 라인을 따라 높게 치솟았다.
금빛 갑옷과 위맹한 찬트는 강철의 자매단의 상징이었다. 한때 소미가 몸담았을 것이라 유력하게 추정되는 집단이었다.
나는 뺨이라도 꼬집어보고 싶은 기분이었다. 크록들은 우리 때문에 집결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그들은 수천 년의 세월이 흘러 다시금 황제의 침략을 받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