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수수한 옷차림인데도
분명 쌀화환만 늘어진 길일 텐데도
잘난 남매는 이곳을 영화제 시상식장으로 만들어버렸다.
레드 카펫을 걷는 것처럼 팬들의 함성과 카메라 플래시를 받으며 걸어오는 지연은 여유롭게 손을 흔들어 주었고, 지한은 오늘 하루 누나의 매니저 겸 경호원이라도 된 것처럼 옆에서 지연을 에스코트하고 있었다.
지진이라도 날 것 같은 커다란 함성에 기자들과 팬들은 어째서 다른 출연진들이 먼저 들어갔는지 납득했다.
‘저 둘 사이에 끼어들 자신이 없었겠지.’
드라마에 출연하지도 않았으면서 다른 배우들을 압도하는 존재감.
그러면서도 지연을 돋보이게 한 발 뒤로 물러나 있는 배려.
그 덕분에 보석이라도 된 것처럼 빛 속에서 화려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지연을 보면서 기자들과 팬들은 정신없이 손을 움직였다.
“어우. 함성이 여기까지 다 들리네.”
“먼저 들어가길 잘했죠?”
함성이 얼마나 컸으면 건물이 다 떨리는 것 같았다.
종방연이 준비되어 있는 홀로 올라가기 위해서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던 배우들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보이지 않는 남매를 떠올리면서 약한 소리를 했다.
드라마를 하면서 자신들도 A급 반열에 들어섰다고 생각했는데 하늘 위에는 더 큰 하늘이 있었다.
띵-
“아, 엘리베이터 왔다. 우리 먼저 올라갈까? 아님 기다릴까?”
“저기 있는 걸 보니까 금방 빠져나올 수 있을 것 같진 않은데요?”
“그래도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요?”
“연지 누나 말이 맞아요. 우리가 먼저 갔다고 서운해하면 어떡해요.”
“아, 저는, 그, 기다리겠습니다.”
한마디씩 말하는 배우들을 보면서 승우가 상황을 정리했다.
“괜찮아 괜찮아. 그런 걸로 삐질 애들도 아니고 회사에서도 이런 상황을 예상해서 마지막으로 입장 순서를 정한 거니까. 자자 걱정 말고 우리 먼저 올라가자.”
“역시 이럴 줄 알고 그렇게 정한 거겠죠?”
“그럴 거야. 회사에서 이런 상황을 예상 못 할 리 없지. 아니면 왜 같은 회산데도 우빈이 너랑 나는 같이 입장시키고 쟤들은 따로 입장시켰겠냐?”
“그렇겠죠?”
“그래그래. 자 어서 올라가자.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겠다.”
승우가 걱정하는 병아리 배우들을 이끌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 * *
“휴우. 겨우 나왔다.”
끈질긴 기자들의 요청에 겨우 벗어난 지연이 이마의 땀을 훔치는 시늉을 했다.
“그러게. 기자들도 참. 나한테는 왜 질문하는 거야?”
“그걸 말할 거면 드라마 촬영도 안 하는데 여기까지 온 네가 문제 아닐까?”
“내가 뭐? 누나가 촬영하는 거 계속 봐도 된다고 했잖아.”
“그건 촬영이잖아.”
“내일 따라간다고 할 때 된다고 한 사람이 누구더라?”
“그것도 내일 촬영 스케줄이 있을 때 한 말이고.”
“아 몰라. 어쨌든 누나가 된다고 해서 온 거야.”
지한이 귀를 막으며 ‘안 들려요’를 시전했다.
도망치는 동생의 모습에 지연이 눈을 가늘게 떴지만 어쩌겠는가.
저래도 내 동생인 것을.
원래 서로 방송 모니터링해 주기도 했고, 드라마 할 때마다 같이 보기도 했으니까 그런 거라고 생각해야지.
예전에야 미성년자라서 영훈 오빠나 은주 언니가 대신했지만 성인이 된 기념으로 한 번 참석해 보기로 했다.
‘다들 참석하는데 나만 안 한다고 했으면 유 PD님이랑 최 작가님 울었을지도.’
쿠크다스보다 연약하고 유리보다 약한 그들의 멘탈을 생각하면 가능성 있다.
“자, 누나. 어서 가자고. 모두가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어.”
“주인공은 무슨. 그렇게 따지면 한서진 씨는 벌써 들어갔는걸.”
“원래 마지막에 나타나는 자가 주인공인 법이야.”
“어디에 나오는 법이야.”
지연이 입은 투덜거렸지만 얌전히 동생의 손에 끌려갔다.
KTX를 타고 지나가면서 봐도 범상치 않은 외모에 왁자지껄하게 있던 배우들과 제작진들이 남매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지연 씨다.”
“오지한도 있어.”
“여기예요!”
“이쪽으로 와!”
얼굴이 불콰한 게 벌써 한잔한 것 같았다.
아니 아직 드라마 시작도 안 했는데?
홀 한쪽에 커다랗게 걸려있는 스크린에는 아직 광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프닝도 안 했는데 이미 취한 것 같은 사람들을 보고 남매들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칠 뻔했다.
종방연이란 원래 음주한 채로 보는 건가?
이런 자리에 대한 경험이 없는 남매가 멀뚱히 서서 눈만 깜빡이고 있을 때 승우가 그들을 구해줬다.
“여기야!”
“형!”
“오빠!”
어찌나 반가웠던지 안 그래도 빛나던 남매의 얼굴이 더 환해졌다.
후다닥 달려온 남매의 앞에 놓인 잔에 오렌지 주스를 채워줬다.
“너흰 술보다 이게 더 좋지?”
“역시 승우 형.”
“오빠 제가 사랑한다고 말했던가요?”
“하하하하하. 농담으로도 그런 말 하지 마렴. 나 애도 있어.”
처음 만났을 때는 군대 나온 지 얼마 안 된 총각이었는데 이제는 어엿한 3살 아이 아빠였다.
승우 아저씨 결혼식 때 축가 부르던 게 기억나네.
그때 승우 아저씨는 턱시도 입고 지한이랑 같이 춤췄다.
재밌었지.
“그런데 우리 술 안 먹어도 돼요?”
“누가 너희한테 술을 먹여.”
“앗. 그럼 저도 안 먹어야 합니까?”
“우빈아 너는 다 컸잖니.”
옆에서 듣고 있던 우빈이 흔들리는 동공을 한 채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승우는 웃는 얼굴로 그의 잔을 채워줬다.
동공지진강도가 더 세진 것 같은데
우빈 씨 술 잘 못 마시나?
“그런데 오빠. 나도 이제 다 컸는데.”
“그래. 다 컸지. 하. 그때 그 꼬맹이들이 언제 이렇게 컸는지.”
승우가 훌쩍 큰 아이들이 모습을 번갈아 보더니 훌쩍하며 눈물을 닦는 시늉을 했다.
“형 놀리지 말고.”
“지연아 나도 네가 다 큰 거 안다. 그런데 술은 안 마실 수 있으면 안 마시는 게 좋아. 너희들 그거 때문에 그동안 종방연에 안 왔었잖니.”
“응. 우리가 끼면 어색해하니까.”
“누가 애들 앞에서 술 마시고 개 되는 걸 보여주고 싶어 하겠냐.”
특히 이쪽에는 술 마시면 진상이 되는 사람들이 꽤 많아서.
팔불출인 공 사장이 애들을 그런 자리에 보낼 리가 없었다.
“누나 이제 시작한다.”
“정말이네.”
지한이의 말에 같은 테이블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스크린으로 향했다.
하나둘씩 드라마가 시작한 걸 알았는지 떠들썩하던 홀도 차츰 조용해졌다.
“광고 오지게 많이 붙었더니 드디어 시작하네.”
“캬. 우리 오프닝 볼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정말 잘 만들었네.”
“유 PD님이 확실히 영상미가 좋긴 해요.”
“그래그래. 그건 맞지.”
KBC 드라마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선명한 색감과 감각적인 배치였다.
그 덕에 SBC나 MBS 드라마가 아니냐고 오해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다들 생방송을 달리면서 ‘내호생’이 KBC드라마라는 것을 인지했다.
드라마는 지난화에서 검을 마주하던 대군과 이혜의 모습을 비추며 시작했다.
곧이어 두 사람이 날카롭게 검을 부딪쳤다.
챙, 챙!
“그래. 네 손을 보고 알았지. 너도 몸을 단련했구나.”
“궁에서 절 단련하지 않으면 어찌 될지는 뻔하니까요.”
“하하하하하. 너도 나와 같은 피를 이은 놈이었지!”
대군이 유쾌하게 웃으며 검을 휘둘렀다.
“이제 그만 포기하시지요.”
“포기? 뭘 포기하란 거냐.”
“이제 형님께 남은 패는 없습니다.”
이혜의 말에 대군이 조용히 눈알을 굴렸다.
좌를 보나 우를 보나 보이는 것은 쓰러진 역도 무리뿐이었다.
자신이 오랜 시간 공들여 키운 흑운대원들도 붉은 웅덩이 속에 몸을 누이고 있었다.
“그래. 결국 끝까지 패를 숨긴 놈이 이기는 거지. 이 궁은 그런 곳이었어.”
대군의 말에 담긴 감정이 무엇인지 왕은 알 수 없었다.
그것이 마지막에 와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아쉬움이었는지.
아니면 손에 쥐지 못한 것에 대한 허망함이었는지.
자신은 형님이 아니기에 알 수 없었다.
“칼…내려놓으시죠.”
혜의 말에 대군이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잠시 대치하던 그는 이윽고 검을 들었다.
“이것이 마지막이라면.”
그렇게 말하며 대군이 왕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의 검은 왕에게 닿지 못하고 그의 눈앞에서 멈춰 섰다.
대군의 몸을 검과 창이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다.
“커헉!”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
대군이 피가 스며들어 붉어진 흰자위를 움직여 이혜를 쳐다보았다.
“왜…왜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이신 겁니까.”
친동생의 말에 대군이 눈을 감았다.
어찌 말할 수 있을까.
부모가 먼저 자식을 죽이려 했다고.
나는 그저 날 지키기 위해서 그랬을 뿐이라고.
날 절에 보낸 건 핑계였다.
그곳에서 자신은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도대체 그깟 놈들을 죽인 게 뭐라고 친자식을 이렇게 감금한단 말인가.
이게 그들이 말하는 부모의 정이라면 이딴 것 다 때려치우라고 하고 싶었다.
“원래 네 자리는 내 것이었다.”
“…그걸 정하는 건 형님이 아닙니다.”
“크흑. 그래. 이것도 다 빌어먹을 하늘의 뜻이란 말이지.”
대군이 흐려지는 눈으로 힘겹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네가 지옥에서 살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동생에게 뱉은 말은 저주(咀呪)였다.
왕은 피를 쏟아내며 끝내 고개를 떨구는 제 혈육을 최후를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끝까지 지켜보았다.
드디어 원수를 갚았다.
나라에 드리운 암운을 걷어냈다.
그런데 그 혀끝은 왜 이리 쓴지.
하지만 이것이 왕이 짊어져야 하는 일이겠지.
어지러운 마음을 다스린 왕이 팔을 들었다.
“반역도를 전부 물리쳤다!”
와아아아아아!
왕이 선언하자 승자들이 소리쳤다.
나라를 좀먹었던 암덩어리를 도려내는 순간이었다.
“와하하하하!”
“멋지다!”
“그거지!”
지켜보고 있던 출연진들도 취기가 올라 덩달아 소리쳤다.
스포츠 경기를 보듯이 ‘이혜 이겨라, 대군 이겨라’라고 외치기도 했다.
“형 이기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네요.”
“그러게.”
“크흐. 그게 다 이 몸의 카리스마 때문이 아니겠냐.”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우빈아…취했니?”
우빈이 살짝 풀린 눈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평소에 어색해하면서 말도 제대로 못 하던 걸 생각하면 저건 취한 거다.
취하면 팩트 폭격기가 되다니.
되도록 옆에서 누군가가 꼭 붙어있어야 할 것 같은 술버릇이다.
무심코 던진 팩트, 누군가에겐 크리티컬이 될 수 있습니다.
왠지 공익광고 같은 문구가 떠올랐다.
139. 발리에서 생긴 일 (1)
우빈의 팩트 공격에 잠시 침울하게 술을 홀짝이던 승우가 지연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헹! 이제 네 차례야!”
“뭐가 제 차례라는 거예요?”
“이다음이 네가 현대로 돌아가는 씬이란 거지.”
“그게 왜요?”
“스태프들이 너는 뭐라고 하는지 두고 보자!”
“누구랑 싸우는 것도 아닌데 스태프들이 뭐라고 할 게 있을까요?”
“그건 모르는 일이지.”
자기만 ‘죽어라!’라는 소리를 들었던 게 억울했던 모양이다.
3살 된 딸도 있으면서 하는 짓이라고는 초등학생도 안 할 것 같은 짓이다.
남매가 결혼했으면서도 아직 철이 덜 든 것 같은 승우를 보며 잠자코 오렌지 주스만 홀짝 삼켰다.
살아남은 반역도를 처벌하고, 잔당을 끝까지 색출하면서 왕과 재희의 시간은 점점 짧아졌다.
만월이 뜨는 밤.
재희는 왕이 찾아준 검을 들고 올 때 입었던 청바지에 티를 입을 채 왕의 정원에 서 있었다.
‘검에 자네가 말한 한자가 없어서 확인하는 데 애를 먹었다네.’
형태도, 검집도, 손잡이도 전부 같은데 왜 그 문자는 없었을까.
재희가 검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검을 찾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왕이 지니고 있던 검이니까.
처음 재희가 검에 대해 묘사할 때 의미심장하게 웃었던 것이 다 이유가 있던 것이었다.
“도대체 너는 왜 날 이곳에 보낸 거야.”
혼란스러웠다.
차라리 멍청하게 왕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오는 놈 다 무찌르는 게 마음이 편했다.
검신에 비친 달을 보던 재희의 눈에 서서히 빛을 내는 검이 보였다.
달빛을 머금은 검신에 서서히 선이 그어졌다.
선은 이윽고 한 문자를 완성했다.
戀(그리워할 연)
“이제 갈 때란 건가.”
여기 와서 자신이 한 일을 떠올린 재희가 아련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왕을, 이혜를 살리는 걸 바랐던 거야? 왜?”
재희는 이날이 오기를 바랐으면서 바라지 않았다.
떠나기에는 그녀의 마음속에 이혜라는 사람이 너무 큰 흔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자신을 위해서 아버지의 역모의 증거를 가져온 김신유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린 숲에서 친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아픔을 털어놓았던 이혜에 대한 애정.
부스럭
가까이에서 들린 소리에 재희가 황급히 몸을 돌려 검을 겨누었다.
“이제 가는 건가.”
“전하.”
한창 바쁘게 업무를 보고 있어야 할 사람이었다.
그가 선대 운검과 당대 운검 모두를 데리고 재희에게 다가왔다.
“이대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건가.”
“나는 21세기 사람이니까…여긴 내가 살아갈 곳이 아니니까요.”
재희의 말에 이혜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한숨을 쉬듯 왕이 입을 열었다.
“그래. 보내줘야 하는 거겠지.”
이혜의 말에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그래도…그래도 내가 가지 말라고 하면 어떻게 할 건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