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합니다, 원장님.”
“아니에요. 저도 모처럼 즐거운 시간이었답니다. 오늘 음방 간다고 했죠? 힘내요!”
“감사합니다.”
샵 직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지연이 방송국으로 이동했다.
SBC에 입성하자 사람들의 시선이 지연에게 집중됐다.
“와아.”
“….”
“신인가순가?”
“배우 아니야?”
지연이 지나갈 때마다 다들 한마디씩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은주 매니저가 작게 속삭였다.
“지연아 다들 널 보고 반한 거 같다. 어떡해!”
“언니. 아까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이 정도 주목받는 건 즐겨도 된다는 거지.”
자신이 받은 것처럼 가슴을 펴고 고개를 든 은주가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본인보다 더 좋아하는 모습에 지연이 작게 웃었다.
“은주 언니 귀엽네요.”
“내가? 귀엽다고?”
“네. 언니 귀여워요.”
“다 큰 어른한테 귀엽다고 하는 게 뭐야. 너도 참.”
말은 그렇게 하지만 몸을 꼬는 은주를 보아하니 기분 나쁜 것 같진 않았다.
화기애애하게 웃으며 대기실로 향하고 있을 때, 그들의 앞에 한 사람이 막아섰다.
“오지연 양, 맞죠?”
“?”
갑자기 앞을 막아선 사람에 모두 의아해할 때, 지연의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조영욱입니다. <인기무대> 가는 건가?”
건들거리는 양아치 인상의 남성이 가벼운 태도로 손을 내밀었다.
74. 홀리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조영욱을 보고 지연이 재빨리 인사했다.
“여기서 만나게 될 줄 몰랐네. 나 알지?”
“네. 조영욱 선배님.”
“하하. 맞아. 오늘 첫 데뷔무댄가?”
“맞아요.”
“긴장 많이 되겠네. 내가 대기실에서 긴장 푸는 법 가르쳐줄까?”
단답으로 대답했음에도 계속해서 말을 이어가는 조영욱을 보고 지연은 확신했다.
이 새끼가 지금 수작 부리는 거라고.
책잡히지 않을 정도로만 대답한 지연이 매니저 은주에게 눈빛을 보냈다.
“실례합니다. 지연이가 오늘 첫 무대라서요. 가서 인사도 시키고, 준비해야 할 게 많아서 먼저 가도 되겠습니까?”
“어딘지 알아요? 방송국 처음이면 잘 모를 텐데. 내가 안내해 줄게요.”
거머리 같은 새끼!
알아서 눈치껏 꺼지지 왜 계속 들러붙는 거야.
지연이 금이 가려는 얼굴을 억지로 버텼다.
같이 있던 은주 역시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애써 폈다.
“어? 오지연 양 맞죠?”
그때 구세주가 나타났다.
조영욱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를 제외한 이들의 얼굴이 활짝 폈다.
배가 튀어나온 중년의 남성이 지연에게 걸어왔다.
가발인지 아니면 원래 좋은 유전자를 타고 났는지 풍성한 머리칼이 3대7로 나뉘어져 있었다.
“오늘 출연한다고 들었는데 여기서 다 보게 될 줄은 몰랐네요. 나는 여기 예능국장 장상필입니다.”
“안녕하세요. 신인가수 지연입니다.”
“안녕하세요, 국장님. 신인가수 지연의 매니저 이은주입니다. 우리 애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하. 아니요. 제가 다 잘 부탁드려야죠. 우리 대스타가 될 가수 아닙니까.”
갑자기 나타나 방해하는 예능국장을 보고 조영욱이 잠시 인상을 찡그렸지만 곧 아무렇지 않게 국장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국장님!”
“이게 누구신가. 영욱 씨 아닙니까. 하하. 오랜만이죠? 제대했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제대하자마자 고향 같은 SBC에 한번 와 봤어요.”
“고향이라니. 역시 사람은 난 곳으로 돌아오기 마련이죠?”
“그런 것 같습니다.”
“아차! 이럴 게 아니지. 내가 바쁜 사람 붙잡고 있었구만. 지연 양. 내가 대기실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니요. 번거롭게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국장님. 제가 또 <인기무대>는 자주 들렀지 않습니까? 대신 길 안내 하겠습니다.”
“오랜만에 온 식구에게 그런 부탁을 할 순 없지. 내가 또 할 말도 있으니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부드럽게 영욱을 밀어낸 국장이 앞장서서 지연의 일행을 데리고 안내했다.
“쟤 괜찮네.”
조영욱이 매니저와 경호원에게 둘러싸여 국장과 함께 대기실로 향하는 지연의 뒤를 쳐다보며 말했다.
먹이를 노리는 하이에나처럼 그의 눈이 음습하게 빛났다.
* * *
멀어지는 와중에도 느껴지는 시선에 지연이 속으로 조영욱을 열심히 씹었다.
저런 개똥만도 못한 놈.
우와, 나 지금 13살인데 지금 날 노리는 거야?
아무리 무대에 맞춰서 화려하게 꾸몄어도 아직 초등학생 나인데 그런 날 저런 눈으로 본다고?
뉴스로 볼 때와 직접 당사자가 될 때와 차이가 크네.
당장이라도 저놈에게 가서 고자킥을 날려주고 싶어지는걸?
어떤 각도로 올려차면 한 번에 모든 구슬을 깨트릴 수 있을지 생각하던 지연에게 국장이 말을 걸었다.
“지연 양이 가수로 데뷔한다니. 역시 그 동생에 그 누나란 걸까요?”
“우리 지한이가 대단하기는 하죠.”
“남매가 사이가 좋다고 하더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네요. 오늘 첫 무댄데 동생은 응원하러 안 왔나요?”
그게 목적이군.
은근슬쩍 지한의 행방을 묻는 국장을 보면서 지연이 그의 속내를 짐작했다.
“오늘도 오려고 했는데 제가 막았어요. 음악방송 대기실은 엄청 바쁘다면서요? 정신없는데 혼자 두기도 좀 그렇고.”
“이런! 대기실이 많이 바쁘긴 하죠. 그래도 아쉽네요. 누나 첫 무댄데 함께 할 수 없다니.”
“대신 제가 조금 익숙해지면 한번 온다고 했어요.”
“그렇군요! 역시 사이가 좋네요!”
지연의 대답에 국장이 환한 얼굴로 웃었다.
지한이 데려오는 날 또 보겠구만.
엉덩이 무거운 예능국장을 로비에서 만난 것도 일부러겠지.
세상에 우연은 없으니까.
국장과 함께 대기실로 들어온 지연에게 시선이 집중됐다.
“국장님! 여긴 어쩐 일로?”
“아, 내가 로비를 지나가는데 말이야. 여기 신인가수 지연 양이 있지 뭐야? SBC는 처음인 거 같아서 대기실까지 안내해줬지.”
그러니까 그걸 왜 국장님이 하시는 건데요?
<인기무대> 스태프들은 하회탈처럼 웃고 있는 예능국장을 보면서 지연과 그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다 누군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모두의 시선이 소리를 낸 스태프에게 향했다.
“이번에 새로 데뷔하셨죠? 그, 오지한 팬미팅에서 노래했던!”
스태프가 지연의 정체를 유추할 단서를 흘렸다.
모두 지연의 동생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어쩐지 저 배불뚝이 국장님이 길 잃은 가수를 그냥 데려올 리가 없지.
“어이쿠! 국장님 대단하십니다. 하긴 신인들은 방송국에서 길을 잘 못 찾곤 하죠.”
“맞아. 이거 원 내가 또 그런 걸 그냥 지나치는 성격이 아니지 않나.”
“그…렇지요?”
차마 국장의 말에 태클을 걸 수 없던 메인PD가 어색하게 대답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한참을 여기 서 있어야 할 거 같은 예감에 지연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신인가수 지연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어, 어. 그래요. 대기실은 저쪽이고 문 앞에 이름 써 있을 거야.”
“넵! 감사합니다.”
지연이 다시 꾸벅 인사하고 대기실로 향했다.
그녀의 양옆에 붙은 매니저와 경호원이 빠르게 지연을 데리고 갔다.
국장이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어흠. 그럼 오늘도 수고해.”
“네, 국장님.”
국장이 뒷짐을 지고 사라졌다.
“하여간 저 양반도 참.”
“저렇게 해서라도 오지한 배우를 섭외하고 싶은 게 아니겠습니까.”
“누가 그걸 몰라서 그래. 그래도 너무 눈에 뻔히 보이는 짓을 하니까 그렇지. 지나가는 개도 우리 국장님 시커먼 마음을 알아차리겠다.”
“그래도 이제 막 데뷔한 신인인데 눈치 챘겠어요?”
“모르는 소리 하지 마. 오지한의 누나는 데뷔 때부터 모든 촬영장을 함께 따라다닌 베테랑이야. 그남그녀 촬영할 때 오지한 누나 도시락 안 먹어본 스태프가 없다고 했어.”
이미 현장경험이 있는 신인이라는 소리에 조연출이 눈을 크게 떴다.
가요계 외에는 소문이 어두운 조연출을 보고 메인 PD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너는 임마 곧 메인 달 놈이 그런 것도 몰라서 어떡해?”
“하지만 저는 가요계에 뼈를 묻을 거라서.”
“그걸 몰라?! 아무리 그래도 연예계 돌아가는 소식은 알아야 할 거 아니야? 어휴. 아무튼 오늘 쟤 신경 많이 써라. 탑엔터에서도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애니까.”
“오지한 누나를요?”
“그래. 오늘 우리 무대세트가 왜 다른 때보다 화려하다고 생각하는 거냐?”
“어, 음. 세트비가 늘어서?”
“으이구. 이 한심한 놈아. 탑엔터에서 손 쓴 거잖아. 우리 애 잘 봐 달라고.”
“아하!”
이 한심한 놈을 어쩌면 좋담.
가수가 좋아서, 노래가 좋아서 외길인생을 사는 놈이었다.
그만큼 다른 소속사의 접대나 그런 걸 안 받아서 옆에 데리고 있었는데 너무 순진한 것이 문제였다.
“어휴. 내 팔자야.”
언제 저놈을 키워서 써먹을지.
<인기무대> 메인 PD가 뒷목을 주무르며 세트를 점검하러 돌아갔다.
* * *
“어휴. 하필이면 방송국 도착하자마자 그놈을 만날 게 뭐니?”
“요주의 인물 확인했습니다.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경호원 언니.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에요. 저놈이 저래 봐도 가요계에서 짬밥 좀 먹은 녀석이라 쉽게 무시할 수 없어요.”
“동선을 겹치지 않게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되도록 그래야죠.”
은주와 지은이 가슴을 쓸어내리고 대책을 세웠다.
저 두 사람 은근히 잘 맞네.
좋아. 앞으로 은은 시스터즈라고 불러야지.
“아무튼 지연아 어디 혼자 다니지 말고. 조영욱은 특히! 아주 소문이 안 좋아. 가까이 하지 마.”
“알아요.”
“그래. 혹시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소리 지르고.”
“녹화 중일 때 그러면 어떡해요? 그때도 소리 질러요?”
“어, 응?”
“지르십시오. 제가 바로 가겠습니다.”
당황하는 은주를 대신해 지은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됐다. 이 사람들아.
지연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의상 입고 리허설 할 테니 준비하자. 그 전에 대기실 인사도 하러 가야해.”
“네에.”
은주가 지연의 헤어와 메이크업이 망가지지 않게 의상을 갈아입는 것을 도와줬다.
지연의 데뷔곡 의 컨셉은 상큼청순이다.
그에 맞게 지연의 당당하고 활기찬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는 의상을 준비했다.
하얀색 반팔에 남색 치마의 세일러복이다.
발랄한 여학생 같은 의상을 입은 지연이 어색하게 거울을 보았다.
교복컨셉이라니 여자 가수 데뷔곡 컨셉이 다 그렇지 뭐.
“자, 그러면 인사하러 갈까?”
“네.”
“항상 웃고, 항상 예의 바르게 알지?”
“네, 언니.”
“가자!”
대기실 인사는 연차가 높은 순부터 한단다.
“안녕하세요, 지연입니다.”
대기실에 지연이 인사하러 가자 대부분 화들짝 놀란 눈으로 손가락을 들었다.
방송계에 지한이가 워낙 유명인사라 그런지 아니면 사건 사고가 많았던 남매여서 그런지
지연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어어. 그!”
“반갑습니다.”
“오지한 누나!”
물론 반응이 좋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쟤가 걔야?”
“어. 오지한 누나.”
“동생 등에 업고 난리구만.”
“오지한 때문에 탑엔터에서도 쟤 밀어준단다. 얼굴은 반반하네.”
“실력은 모르지 오늘 라이브하면 다 들통날 텐데 어쩌나.”
“내버려둬.”
다 들린다.
왜 다들 상생할 줄 모르고 남을 깎아내리기 바쁠까?
가면 갈수록 아이돌들은 살아남기 힘들 거고, 노래만 잘해서는 버티기 힘들게 될 거다.
그러면 이렇게 남을 깎아내리지 말고 본인이 실력을 갈고닦아야 하는 거 아닌가?
‘어차피 오래가지도 못할 놈들이 떠드는 말 따윈 신경 쓰지 않는 게 좋겠지.’
나한테 뒷말했던 쟤는 나중가면 TV에 얼굴도 비추지 않았다.
대표곡도 딱히 없는 거 같고.
두고 보면 알겠지.
어차피 오래 살아남는 사람이 이기는 거니까.
* * *
방청석이 서서히 채워졌다.
오늘 출연하는 가수들의 특징상 소녀팬들이 많이 보였다.
“우리 오빠들 조금 더 활동해 줬으면 좋겠는데.”
“더 하고 싶어도 곡이 없잖아. 곡 좀 많이 내 주지.”
“신인이잖아. 어쩔 수 없지.”
“어쩜. 신인인데 어떻게 이렇게 노래를 잘 하지?”
“우리 오빠들 완전 실력파야.”
초중생으로 보이는 어린 소녀들의 말에 옆에 잠자코 있던 대학생이 코웃음을 쳤다.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벌써부터 아이돌 쫓아다니기나 하고 말이야.
가서 공부나 해 이것들아, 나중에 고생하지 말고.
지한의 팬카페 <플래닛>에서 ‘오씨남매012’ 라는 닉네임으로 활동 중인 공민지는 오늘 지연의 데뷔무대가 <인기무대>에서 열린다는 소식에 친구의 친구까지 동원해서 방청권 신청했다.
정작 자신이 당첨되는 바람에 쓸데없이 밥값만 나갔지만 아깝지 않았다.
“혹시…오씨남매012님?”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닉네임에 민지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그곳에서 낯설지 않은 얼굴이 보였다.
“지한사랑님?”
“맞아요! 세상에 여긴 어쩐 일이세요?”
“당연히 우리 지연이 응원하러 왔죠. 세상에 팬미팅 이후 처음 보는 거죠?”
“에이. 우리 게시판에서 봤잖아요? 오씨남매012님 글은 항상 잘 읽고 있어요.”
“저도 지한사랑님 팬아트 잘 보고 있어요. 어떻게 그렇게 잘 그리세요?”
“아. 제가 디자인과 지망하고 있거든요.”
“그럼 입시생이세요?”
“내년에 고3이에요. 그래서 올해 열심히 활동하려구요.”
“세상에. 내년에 수험생이라니. 그거 엄청 힘들죠.”
지한의 팬카페 회원들이 오랜만에 만나 인사를 나눴다.
그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 중에 지연의 팬인 사람들이 은근슬쩍 다가왔다.
“혹시 다들 지연이 응원하러 오신 건가요?”
“어머.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맞아요.”
“여기서 만나게 될 줄 몰랐어요.”
“저도요. 이럴 줄 알았으면 오늘 다 같이 오자고 미리 카페에 글이라도 올릴 걸 그랬어요.”
“앗! 우리 다음에는 그래요.”
<플래닛>의 회원이자 지연의 팬이기도 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 무리를 만들었다.
신인가수치고는 꽤 큰 무리에 옆에 있던 남자 아이돌 가수의 팬들이 경계하는 것이 보였다.
“어? 이제 시작하나 봐요.”
“우리 애들한테 폐 끼치지 말게 예의 있게 행동합시다. 야유 금지. 다른 가수들에게도 환호성과 박수. 그리고 지연이 오면 열렬한 환호성. 흥분해서 다치지 않게 주의해요, 알았죠?”
“네, 언니.”
“알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