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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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하나같이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말했다.

얘들아 그런 건 장래희망이라고 하는 거란다.

“저기.”

“응? 지연아 네 동생 왔어.”

“뭐?”

같은 별님반 명찰을 달고 있는 아이가 지연의 팔을 잡고 말했다.

그 아이의 말대로 문을 바라보니 정말 내 동생이 와 있었다.

유치원 버스를 탈 올 때도 한 마디도 안 건넸던 애가 왜 별님반에 와 있지?

아침의 난리 덕분에 자신을 낯설어하며 유치원 버스에서도 어물쩍하던 동생이 문 앞에 있는 것을 보고 지연이 의아한 표정을 했다.

제 동생의 뒤로 손을 흔들고 있는 제 사촌언니를 보고 앞뒤 사정을 알아챈 지연이 한숨을 쉬었다.

망할 놈의 집구석

“왜요.”

“아니, 지연아. 선생님이 지한이한테서 들었는데 지연이 너 엄마랑 싸웠다면서? 무슨 일 있었는지 걱정돼서 불렀어. 지한이도 그렇지?”

“네에.”

그녀의 말에 지연이 지한을 찌릿 째려봤다.

지연의 시선에 지한이 움츠러들었다.

무슨 일 있었는지 걱정되긴.

이미란이 뭐 때문에 아침에 난리를 피웠는지 물어보라고 해서 이러는 거면서.

따라온 동생도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동생의 잘못이 아니란 걸 알지만 저렇게 엄마며 언니며 이용당하는 꼴이라니.

멍청한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엄마랑 싸운 적 없는데요.”

“정말? 아침에 막 엄마한테 소리치고 그랬다면서.”

“엄마한테 소리친 적 없는데요?”

지연의 말에 그녀의 사촌언니 선희가 당황했다.

보통 선생님이 잘못에 대해 혼을 내면 잘못했다고 하거나 아무 말도 하지 않다고 하는데.

자신이 그런 적 없다고 나올 줄은 몰랐기에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화장실에서 거울 보고 깜짝 놀라서 소리 지르긴 했는데 그건 엄마한테 지른 게 아니잖아요.”

“어, 어. 그럼 왜 거울 보고 놀랐어?”

“거울에 귀신이 있는 줄 알고 놀랐어요.”

“아하. 그랬구나. 선생님도 어릴 때 화장실에서 귀신 본 줄 알고 깜짝 놀란 적 있어. 귀신이 아니라 곰팡이였지 뭐야.”

“그러니까 엄마한테도 굳이 걱정할 필요 없다고 전해줘요.”

지연의 말에 선희가 민망해했다.

엄마한테 전해 달라는 말이 꼭 갖다 일러바치라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 지한아 가자.”

“네, 누나.”

선희의 말에 대답하고 손을 잡는 동생을 보고 지연이 인상을 썼다.

바보야? 아님 멍청한 거야?

이렇게 아이들이 모인 공간에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그건 한 아이를 편애하지 않는 것.

아이들의 질투를 무시하지 마라.

집에서 다들 사랑과 관심을 받던 아이들이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 제일 힘들어 하는 것이

선생님이 나한테만 관심을 주지 않는 것이다.

그 때문에 모든 아이에게 골고루 관심을 주기 위해서 교사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가뜩이나 자신과 동생은 선생님이 사촌언니라 더욱 조심해야 할 입장이었다.

그런데 대놓고 누나라고 부르다니.

애들 사이에서 왕따 당하기 딱 좋다.

‘당하든가 말든가.’

지연이 등을 돌려 별님반으로 향했다.

* * *

유치원이 끝나고 버스에 탈 이들과 아닌 아이들이 갈렸다.

맞벌이 세대에 모든 아이들이 유치원 버스를 타고 떠나지 않는다.

유치원에 남아서 부모가 데리러 올 때까지 기다리는 아이들도 있다.

그중에서도 유치원 교사가 사촌인 우리들 같은 경우는 부모가 데리러 올 때까지 교사실에 남는다는 선택지가 더 있었다.

“그럼 지연이랑 지한이는 잠시 여기 있어. 선생님은 햇님반에 갔다 올게.”

“….”

“네.”

선희가 떠나고 교사실에 지연과 지한, 둘만 남았다.

지한이 힐끔거리며 지연을 봤다.

저렇게 보면 누가 모를 줄 아나.

할 말이 있으면 하든가, 거슬리게 뭐 하는 짓이야.

결국 참다못한 지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야.”

“응, 누나.”

“뭐 할 말 있냐?”

“아, 아니.”

그렇게 대답했지만 딱 봐도 뭔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 말을 듣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지연이 먼저 말했다.

“너 아까 왜 우리 반 왔냐.”

“선생님이 누나보러 가자고 해서.”

이 단순한 놈.

네가 그러니까 여기저기 끌려다니는 거다.

지연이 제 동생의 한심한 모습에 비웃음을 흘렸다.

“너 햇님반에서 선생님보고 누나라고 불러?”

“어, 응. 조금.”

“왜?”

“선희 누나잖아.”

“유치원에서는 선생님이라고 불러야지.”

“하지만 선희 누나가 가끔 누나라고 하는 걸.”

후우.

동생의 답도 없는 말에 지연이 교사실 천장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저놈이나 선생이나.

둘 다 똑같네.

그 모습을 보고 지한이 안절부절못하며 지연의 소매를 잡았다.

동생이 잡은 소매를 보고 슬쩍 인상을 쓴 지연이 지한의 손에서 소매를 살며시 빼냈다.

“왜.”

지연이 보인 거절의 몸짓에 지한이 시무룩해졌다.

“누나. 내가 뭐 잘못했어?”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누나가 날 싫어하는 거 같아서.”

하고 싶었던 말이 이거구나.

줄곧 안절부절못하던 놈이 기가 죽어 말하는 꼴을 보자 지연이 그렇게 추측했다.

지한의 말에 지연이 슬그머니 지한을 바라봤다.

풀이 죽은 머리꼭지가 보였다.

그나저나 이 새끼.

어떻게 알았지?

어린 애들은 감이 좋다고 하더니,

아예 바보 멍청이는 아닌 모양이군.

아무리 이 집과 연 끊고 탈출하기로 마음먹었어도, 뭣도 모르는 애가 시무룩하게 있는 것을 보는 건 마음이 편치 않다.

“지금의 널 싫어하는 건 아니야.”

내가 싫어하는 건 먼 미래의 너니까.

“진짜?”

“어, 진짜.”

“그럼 또 나랑 놀아 줄 거야?”

“…그래.”

하아. 난 또 왜 이런 멍청한 약속을 해 버린 거지.

지연이 턱을 괴고 지키지도 못할 말을 뱉은 자신을 탓했다.

“헤헷.”

뭣도 모르고 좋아하는 놈을 보니 한심해서 어이가 다 없을 지경이다.

물론 한심한 사람은 자신이었다.

자신은 더 이상 예전처럼 이 집의 노예로 부려 먹히지 않을 거다.

부모의 연을 끊을 거고,

남매의 연도 끊을 거다.

“누나, 좋아!”

“….”

천진난만하게 말하는 동생을 보였다.

나는 싫어.

그 말을 삼키며 짜증에 부글거리는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어차피 이 유치원 다닐 동안에는 싫어도 붙어 있어야 하니까,

당분간 의좋은 남매가 되어주지.

* * *

늦은 저녁 유치원에 우리를 데려온 이미란은 햄버거를 사 왔다.

오늘따라 더 늦게 온 그녀는 집에 가는 길에 대충 햄버거를 사 저녁으로 먹일 생각이었다.

“자, 밥 먹자.”

‘밥이 아니라 햄버거 먹자고 해야 하는 거 아님?’

종이봉투에서 어린이 세트를 꺼내는 지연의 얼굴로 불만이 가득했다.

지한은 어린이 세트에 딸려오는 장난감을 보고 기뻐했다.

“엄마 저녁 차릴 테니까 그거 먹고 있어.”

“네에.”

미란의 말에 지한이 대답했다.

지연은 자신들에게 햄버거를 먹이고 부엌으로 들어가는 미란을 보았다.

저녁으로 햄버거를 사 왔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또 저녁을 만드는 모습에 지연이 생각했다.

‘그놈 때문이군.’

이 집구석의 제일 답도 없는 놈.

그놈은 9시가 되었든, 10시가 되었든, 자신이 돌아왔을 때 저녁상이 차려져 있지 않으면 안 되는 답도 없는 꼰대였다.

지연이 돌아와서 제일 짜증났던 것이 이 집구석에서 독립할 때까지 또다시 그 지긋지긋한 지옥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하면서 아이들도 잘 키우는 멋진 나’ 자신에 도취된 이미란.

줏대 없이 이미란에게 휘둘리는 오지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집의 폭군 오형우.

바로 내 생물학적 아버지다.

오형우는 뱃일을 한다.

덕분에 새벽같이 일어나 바다에 가고 저녁 늦게 들어온다.

일찍 가서 늦게 오면 좋지 않냐고?

바로 그 늦게 오는 게 문제다.

바다 일은 3-4시 경에 끝나고, 바다에서 돌아와 내일을 위해서 이런저런 준비를 하는 것은 5-6시면 끝난다.

그런 오형우의 귀가시간은 늦은 저녁인 8시.

일이 끝나고 집에 들어올 때까지 오형우는 술집에서 동료들과 술을 마신다.

이쯤이면 다들 감이 오지 않는가?

오형우는 알코올 중독자에 술에 취했다 하면 폭력적으로 변하는 인물이다.

어린 시절 비상구 계단을 걸어 올라오는 오형우의 발자국 소리를 들을 때마다 집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어릴 때 오형우의 발소리는 귀신보다도 무서웠다.

“다 먹었으면 뒷정리는 너희들이 해.”

“응!”

이번에도 지한만 대답했다.

지연은 묵묵히 손을 움직여 햄버거를 감싼 종이랑 일회용 케첩 소스, 비닐 등을 종이봉투에 담았다.

쓰레기를 버리고 지연이 서둘러 지한을 데리고 욕실로 갔다.

“다 치웠으면 씻으러 가자.”

“누나 같이 씻어?”

“그 편이 더 빠르니까.”

오늘은 이미란이 늦게 데리러 와서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깨어있는 오형우를 보게 될 지도 몰랐다.

술 먹고 밥상 엎는 게 특기인 오형우의 옆에서 불똥 맞기 전에 일찍 들어가서 자는 편이 좋았다.

지연이 욕조에 물을 받았다.

“얼른 옷 벗고 화장실 문 앞에 던져 놔.”

콸콸콸-!

욕조에 물이 빠르게 차올랐다.

손을 넣어 온도를 가늠한 지연이 수도꼭지를 움직여 물 온도를 조절했다.

“너희들 혼자 씻을 수 있어?”

부엌에서 물 받는 소리를 듣고 미란이 외쳤다.

“네-!”

“혹시 못 하겠으면 엄마 불러!”

“네-!”

혹시라도 부를 일은 없을 거다.

욕조에 차오르는 물을 보고 지한을 넣은 소매를 걷었다.

같이 씻는다고 했지만 다 큰 처녀가 어린애랑 같이 욕조에 들어갈 순 없지.

지연이 손에 샴푸를 짰다.

* * *

와장창-!

잠들었던 지연이 무언가 깨지는 소리에 눈을 떴다.

어린애의 몸은 본능에 충실해 배부르게 먹고 따뜻한 물에 몸에 씻은 뒤 이불 속에 들어가니 그대로 잠에 빠졌다.

‘아 불면증 없는 몸 최고.’

지연이 멍하니 천장을 보면서 생각하고 있을 때, 또다시 방문 너머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쨍그랑-!

“반찬이 이게 뭐고?!”

아. 오형우의 목소리다.

술에 취해 발음이 불분명한 목소리지만,

이 목소리 다시 돌아온다고 해서 잊을 리가 없었다.

날카로운 소리는 분명 오형우가 집어 던진 그릇이겠지.

맨날 살림을 잘 사네 마네 하면서 그릇은 왜 깨 먹는지 모르겠다.

“밥상 위에 생선 하나 없는 게 말이 되나!?”

그놈의 생선.

배 타는 놈이 무슨 생선을 그리 찾아대는지.

오형우는 국이든 반찬이든 생선이 없으면 밥상을 엎었다.

“왜 상을 엎고 그래요?!”

“어데, 밖에서 일하고 온 남편한테 큰소리고!”

“왜요! 이런 걸로 말도 못 해요?”

“이기 어데 지금 남편한테 대꾸하노? 여자는 얌전히 집에서 살림이나 할 것이지!”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댄데 그런 소릴 해요?”

“조용히 안 하나?!”

퍼억.

“악! 지금 날 쳤어?!”

둔탁한 소리와 함께 미란의 화가 난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두 사람이 치고 박는지 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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