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 꼴 자알 돌아간다.’
이미란은 키는 작았지만 체구가 좋았다. 그녀의 성격상 오형우가 때린다고 해서 얌전히 맞고 있지 않았다.
오형우는 뱃일을 하는 사람이라 일 근육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술에 취했으니 주먹을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겠지.
결국 막상막하로 싸울 것이다.
“우응.”
얇은 방문 너머로 싸우는 소리가 들리자 잘 자고 있던 지한이 깊은 잠에서 일어나려는 듯이 투정부렸다.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움직이는 지한을 보았다.
“지금 일어나봤자 좋은 꼴 못 본다. 얌전히 자라.”
자신에게나 좋은 구경거리겠지만 5살짜리 어린애에게 부모가 싸우는 모습이란 더할 나위 없는 공포겠지.
옛날의 나도 그랬으니까.
지연이 지한의 가슴 위로 손을 얹어 토닥였다.
밖에서의 소란을 듣지 못하게 지연이 이불을 목까지 덮고 다른 손으로 귀를 막아 주었다.
이 소란이 가실 때까지,
지한이 다시 깊은 잠에 빠질 때까지
‘어린 아이는 좋은 꿈 꿔야지.’
지연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선택
다음 날 아침 쓰레받기 위에 깨진 유리 조각이 담여 있는 것을 본 지연은 강렬한 욕구가 치솟았다.
‘소설에 나온 다른 회귀자들 같은 능력은 안 바라니까. 그냥 무사히 이 집에서 빠져나가게 해 주세요.’
자신을 돌려보낸 신에게 양심이 있다면 이 정도는 들어주겠지.
“얼른 먹어. 곧 버스 오겠다.”
엉망인 부엌 때문에 대충 만든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선 두 사람은 미란의 뒤를 따랐다.
어젯밤 시끄럽게 싸우더니 얼룩덜룩한 얼굴을 한 미란을 지연이 한심하게 바라봤다.
‘왜 저러고 사는지 모르겠네,’
차라리 이혼을 하는 게 이 여사의 미래에도 도움이 되고 우리 미래에도 도움이 될 텐데.
어차피 서로 필요에 의해서 결혼한 사이고, 약 10년 후 이혼하게 될 건데 조금 더 일찍 하면 안 되나?
“아, 버스 왔다.”
“지연이, 지한이 안녕하세요.”
“너희들 모두 오늘도 선생님 말 잘 들어야 한다.”
“네.”
“….”
지연이 지한의 손을 잡고 버스에 올라탔다.
* * *
이 망할 집구석에서 어떻게 벗어날까.
지연이 심각한 얼굴로 하얀 스케치북을 노려봤다.
주식?
그런 건 재벌가 막둥이나 망나니로 살았던 이들이나 가능한 거다.
어린 나이에 주식으로 성공하려면 그걸 처리할 돈과 사람, 배경이 필요했다.
나 같은 서민은 돈도 사람도 빽도 없으니까 패스.
로또?
난 왜 로또 번호를 외우지 않았나.
외웠다고 하더라도 이 집안에서라면 가진 걸 전부 뺏기고도 모자랐다.
이 방법도 패스.
공부?
지금부터 공부하면 초등학교 졸업하기 전까지 수능 볼 자신 있다.
하지만 대학을 가서 독립한다고 해도 미성년자로는 알바하기 힘드니까 패스.
“하아…. 난 왜 돌아왔는데 아무런 능력도 없는 거냐.”
지연이 스케치북을 쳐다봤다.
<목표는 독립>
하나. 공부를 한다.
둘. 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패스한다.
셋. 대학 가서 집에서 멀어진다.
넷. 아르바이트를 한다.
다섯. 50%는 생활비. 30%는 저축. 20%는 투자한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대학 들어간 이후 독립하는 게 최선인가.”
주식 한다고 해서 내가 크게 일확천금을 노리는 건 아니다. 그쪽으로는 1도 관심도 없고.
다만 미래를 알고 있는데 어떤 게 잘되는지 알고 있는 걸 안 써 먹는 건 아깝지 않은가?
돌아오기 전까지 잘나가던 곳의 주식 좀 사고, 부동산도 사 놔야지.
많은 건 안 바란다. 집 하나만 사자.
“차라리 회귀가 아니라 환생을 했으면 더 좋았을 걸.”
그것이 지연의 뜻대로 되는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연은 자신이 잘못된 선택지를 눌렀다며 괴로워했다.
“일단 용돈을 열심히 모으고, 저축을. 아니야, 이 집안은 곧 파산하니까 통장에 돈을 두는 건 위험해. 현금으로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돈을 어디다 숨겨 놓지?”
장기 플랜을 짜며 지연이 중얼중얼 했다.
먹구름이 낀 얼굴로 스케치북을 보고 있는 지연의 뒤로 지한이 다가왔다.
“누나! 놀이터 가자.”
“하아….”
일요일인데 좀 쉬자.
내가 그때 왜 그런 약속을 했지.
후회할 줄 알면서도 무심코 뱉고 말았던 약속에 지연이 눈물을 삼켰다.
애라고 봐 주는 게 아니었는데.
“그래, 가자 가.”
지연이 스케치북을 매트리스 밑에 고이 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기 싫은 발걸음을 질질 끌며 내려간 놀이터에는 아이들이 바글바글했다.
이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다른 아파트 사는 아이들도 있는 것 같았다.
하긴 이 시대에 놀이터란 아이들의 모임 장소나 마찬가지였다.
PC가 가정마다 있던 시기도 아니고 문구점 앞에는 초등학교 형, 누나들이 점령하고 있을 테니 놀이터밖에 없겠지.
“누나! 시소타자.”
“그래. 그래.”
지연은 멍멍이처럼 들러붙는 지한을 보고 시소로 끌려갔다.
이놈. 귀찮아 죽겠다.
이렇게 치대는 걸 보니 정말 대형견이 따로 없었다.
‘그러고 보니 94년생 개띠였지.’
엄마도 개띠. 동생도 개띠.
하하. 개판이네.
지연은 머리를 비우고 얌전히 발을 굴려 시소를 탔다.
무념무상으로 맞은편에서 즐거워하는 지한의 얼굴만 보고 있을 때, 지한의 옆으로 한 무리의 아이들이 다가왔다.
“야, 나와.”
“…나?”
“그래. 이번엔 우리가 시소 탈거야.”
지연은 얌전히 시소를 타고 있던 자신을 둘러싼 아이들을 보았다.
“702호 형이다.”
“초등학생 오빠야.”
아이들의 시선이 시소로 몰렸다.
정말 신기한 게 이 시대만 해도 아이들은 누가 어디에 살고 몇 학년인지 알음알음 알고 있었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삭막한 2020년대와는 달랐다.
“옆에 다른 시소도 있잖아.”
“옆에 시소는 노란 색이잖아. 마음에 안 들어. 이 시소 탈래.”
그래봤자 노란색이냐, 파란색이냐의 차이다.
이 어린놈의 새끼들이 행패를 다 부리네?
겨우 초등학교에 들어갔다고 유세를 부리는 아이들을 보고 지연의 안에 있던 30살 꼰대가 꿈틀했다.
“싫어.”
“누, 누나.”
형들의 기세에 지연의 옆에 쪼르르 다가온 지한이 깜짝 놀랐다.
지켜보고 있던 아이들도 지연의 대답에 놀라 숨을 죽였다.
조금 전까지 아이들의 목소리로 떠들썩하던 놀이터에 침묵이 맴돌았다.
“싫, 싫다고?”
싫다는 대답이 나올 거라고 예상치도 못한 초등학생이 에러가 난 컴퓨터처럼 버벅거렸다.
“옆에 다른 시소가 있는데 달라는 건 물건을 뺏는 행동이야. 동생들의 물건을 뺏는 건 나쁜 행동이야. 나쁜 사람 말은 들으면 안 돼.”
어떠냐, 내 삼단논법이.
이렇게 다른 아이들이 보고 있는 데서 ‘나쁜’ 행동을 한 초등학생의 얼굴이 벌게졌다.
“이익! 너 내려와!”
그래 쉽게 수긍 안 할 줄 알았다.
얼굴이 빨개진 아이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아이를 보고 지연이 시소에서 내려왔다.
“그래. 내려왔어. 왜 때리게?”
때려봐. 때려봐.
여기에 있는 눈이 몇 갠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고작해야 초등학교 들어간 아이가 나쁜 행동을 잘도 하겠다.
‘나쁜’ 행동을 하면 안 된 다는 건 어린 아이들에게 절대 지켜야 하는 규칙이나 다름없었다.
유치원이나 집에서 어른들이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며 입이 마르도록 말한다.
그 어른들의 말을 어기는 것은 아이들에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지연의 예상과 다른 일이 있다면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초등학생 아이는 ‘나쁜’ 행동을 하면 안 된다는 것보다 자신의 무너진 자존심이 더 소중했다는 것이다.
“너어! 고작 유치원생 주제에!”
퍼억
“누나!”
“허업! 도, 동철아.”
“밀었어.”
“초등학생이 밀었어.”
엉덩방아를 찧은 지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하!
내 나이 서른 먹고.
초등학교 애새끼한테 다 밀려보네.
하하하하하하하하.
벌떡
“이 어린놈의 시키가 감히 날 밀어?”
지연이 눈이 돌아가 자신을 민 초등학생한테 달려들었다.
오냐, 오늘 계급장 떼고 둘 중 하나 죽을 때까지 싸워보자!
“헉! 싸운다!”
“싸움 났어.”
“엄마아-!”
놀이터가 아수라장이 됐다.
아이들의 목소리에 아파트 복도 너머로 어른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 * *
“누나 괜찮아?”
“어.”
몸에 모래 조금 묻은 거 빼고는 뭐 하나도 다치지 않았는데.
어른을 얕보지 마라.
“근데 누나 대단하다. 초등학생 형을 상대로 이겼어.”
“야, 나도 내년에는 초등학생이야.”
“누나 대단해.”
지한이 대단하다는 눈빛으로 지연을 쳐다봤다.
싫어하긴 하지만 제 동생의 눈빛에 지연이 으쓱해졌다.
“뭐, 이것쯤이야.”
“너희들 어서 안 들어와!?”
움찔.
복도로 뛰어나온 이 여사는 아수라장이 된 놀이터를 보고 내려오기는커녕 잔뜩 화가 나 집으로 올라오라고 외치고 들어갔다.
집으로 가는 길이 저승길처럼 보였다.
아 씁.
또 맞겠네.
이 집의 좆같은 점을 대라면 손이 백 개가 있어도 모자랐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제일 좆같은 건 고무호스로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집집마다 체벌의 도구는 다양하겠지만 이 집의 체벌도구는 빗자루를 거쳐 고무호스까지 왔다.
고무가 탄력이 얼마나 좋던지 살에 착 감기는 것이 아주 그냥 주옥같았다.
“누나아….”
지한 또한 고무호스가 생각났는지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야, 넌 무조건 잘못했다고 해.”
“으, 응.”
“왜 싸웠냐고 하면 초등학생이 잘못했다고 하고.”
“응.”
“그리고 싸운 건 누나라고 해.”
“어?”
지연의 말에 지한이 누나를 쳐다봤다.
“맞잖아. 초딩이랑 싸운 건 나니까. 넌 빠져있어.”
“그치만.”
“씁.”
“아, 알았어.”
이 여사처럼 쓰읍 하는 소리를 내자 동생이 기가 죽어 대답했다.
어린애한테 씁 같은 뱀 소리 내긴 싫었지만 어쩌겠냐.
그래도 어른인 내가 매 맞는 게 더 낫지 않겠어?
지연이 먼저 현관을 들어갔다.
그 뒤를 지한이 따랐다.
현관으로 들어가자 아니나 다를까, 잔뜩 화가 난 이 여사가 허리에 손을 얹고 두 사람을 나무랐다.
“너희들! 누가 나가서 싸우래. 늬들이 깡패야 뭐야?”
우리가 깡패는 아니긴 하지만 싸움이라면 보고 배운 게 있지.
맨날 애들 앞에서 남편이랑 싸우는 이 여사가 할 말은 아닌데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지연은 입을 꾹 닫았다.
괜히 나서서 안 그래도 맞을 매, 더 맞을 수는 없으니까.
“지연이 너 요새 왜 그래. 어디 가서 나쁜 짓 배우고 왔어!”
23년 뒤에서요.
아! 물론 쌈박질하는 건 이 여사랑 오 씨 보고 배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