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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175화 (174/556)

난 할 수 있어 175화

그도 그럴 것이 개점 이후 지금껏 문화센터 강좌에는 아무런 변동도 없었다.

자연히 겨울학기에도 마찬가지의 강좌가 이어지리라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죄송합니다. 앞당겨 말씀드리는 게 저희가 해드릴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입니다.”

“이러시면 안 되죠, 진짜.”

꽃꽂이 강사가 허리춤에 손을 얹고 항의했다.

대찬은 차분히 대응했다.

“답답하신 마음은 이해가 갑니다만, 재계약은 양쪽 모두 의사가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강사님이 겨울학기에 강의하지 않겠다고 하셨더라도 저희는 받아들였을 겁니다.”

“그건 그쪽이 대기업이니까 그렇죠. 저희는 생계가 걸렸어요.”

“다른 매장에서 필요하다고 하는 경우, 그쪽과 계약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저희 매장에서는 어렵습니다.”

그러자 플루트 강사가 말했다.

“저희는 이미 부점장님하고 얘기가 다 돼 있는 상탠데요?”

“무슨 얘기 말입니까?”

“문화센터는 부점장님이 처음부터 담당한다고, 한 번 강좌가 설치되면 보직이 바뀌지 않는 이상 강좌를 보장해주겠다고요.”

대찬은 미간을 좁혔다.

“이 매장의 모든 것에 대한 최종결정권은 점장이 갖고 있습니다. 부점장이 함부로 호언장담할 일이 아닙니다.”

“아, 그런데 부점장님이 그러셨다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부점장한테만 잘 보이면 되는 줄 알고 팔자에도 없는 생일도 챙기고, 명절선물까지 주고 그랬다니까요?”

“…….”

두통이 도졌다.

성질 급한 꽃꽂이 강사가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우린 억울해서 이대로 못 물러나요! 부점장하고 삼자대면하게 해줘요!”

“삼자대면해봤자 달라지는 거 없습니다. 저는 결정을 바꿀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부점장과의 감정은 사적 영역이니 따로 해소하시죠.”

“진짜 젊은 사람이 정 뚝뚝 떨어지는 소리만 하네!”

대찬은 직각으로 허리를 숙였다.

“마음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결정은 번복할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점장이 그렇다는데 강사들도 더 할 말이 없었다.

아예 평생직장으로 삼아왔다면 머리띠 질끈 매고 ‘필래마트는 각성하라! 필래마트는 강사 생존권 보장하라!’ 시위라도 했을 거다.

하지만 이미 그들은 수유점 말고도 다른 곳에 출강하고 있었다.

재계약 불가 통보는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생계에 치명적이진 않았다.

“아휴! 부점장만 믿은 내가 등신이지!”

꽃꽂이 강사는 가슴을 쾅쾅 치며 점장실을 박차고 나갔다.

싸움닭이 싸움을 포기하자 나머지는 자연스레 전의를 상실했다.

야구선수의 FA계약처럼 몇 년 단위로 근무를 보장받았으면 모를까, 재계약 의사가 없다는 필래 측 통보에 맞설 법적, 논리적 근거가 없었다.

그들의 일제 퇴장으로 사태는 진정되었다.

통보 이후 그들이 남은 학기를 성실하게 마칠지, 혹은 엉망진창으로 난장을 쳐놓을지는 순전히 그들의 몫이었다.

대찬의 머릿속에는 강사들의 항의보다 더 큰 문제가 자리 잡았다.

“부점장, 부점장, 이 인간을 어떻게 하면 좋아…….”

대찬은 두통 때문에 머리를 잡고 한동안 분을 삭였다.

평정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그는 관리자 직원들의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부점장 오라고 해요.”

대찬은 전화를 끊고 혼자서 각오를 다졌다.

“화내지 말자, 화내지 말자, 화내지 말자…….”

그 각오는 표성재 부점장의 퍼그처럼 우울한 얼굴을 보자 즉각 파기되었다.

“부점장! 강사들에게 멋대로 재계약을 약속했다는 게 사실입니까!”

“…예……. 문화센터는 개점 때부터 쭉 제가 맡아서 해와서…….”

“그 대가로 강사들이 주는 선물 넙죽넙죽 잘 받아 드셨고요.”

“그, 그건…….”

“대가성이 인정되면 금품이든 현물이든 징계감인 거, 알고 계시죠?”

표성재 부점장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선물이란 게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었습니다. 정말이에요.”

“전혀 핀트를 잘못 잡고 계신데요, 대단하든 아니든 뒷구멍으로 받을 거 받아가면서 제 구실 못하는 문화센터를 방치한 것만으로도 부점장은 할 말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도 공연히 혈압 올리기 싫습니다, 정말로.”

대찬은 이제 더 꾸짖고 싶지도 않았다.

대찬이 수유점 점장으로 부임한 이래 표성재 부점장은 건건이 자질 부족을 드러냈다.

표성재 부점장의 찌그러진 꼬락서니를 보고 싶지 않아 시선을 회피했다.

표성재 부점장은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런 말이 없었다.

대찬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부점장.”

“…예, 점장님.”

“부점장이 나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죄송합니다. 다 제 불찰입니다.”

“불찰 정도가 아닙니다. 눈 뜨고 봐줄 수가 없습니다.”

“…….”

“나를 모욕하는 건 얼마든지 참습니다. 하지만 이건 회사에 손해를 끼치는 일입니다. 차원이 다릅니다.”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처분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이번엔 표성재 부점장도 구제받을 길이 없다는 걸 예감한 듯, 모든 걸 체념한 표정이었다.

대찬은 찜찜한 눈초리로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번 일은 덮겠습니다.”

“예?”

징계위원회에 회부될 것이라 예상하던 표성재 부점장은 눈을 크게 뜨며 대찬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부점장은 오늘부로 완전히 다른 퍼포먼스를 보여줘야 할 거예요.”

“예, 그러겠습니다!”

“말로 가볍게 퉁치고 넘어갈 생각 마십시오. 무죄방면이 아니라 집행유예입니다.”

“예, 점장님!”

“처절할 정도의 열정을 보여주세요. 믿겠습니다.”

표성재 부점장은 허리를 직각으로 꺾었다.

흡사 조직의 보스에게 예의를 차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를 점장실 밖으로 물리치고 대찬은 깊은 들숨을 마셨다.

마음 같아서는 표성재 부점장을 당장이라도 내치고 싶었다.

기계는 고쳐 써도 사람은 고쳐 쓸 수 없다는 말을 깊이 신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대찬은 표성재 부점장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대찬의 아량이 하해와 같은 까닭이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미 최선태 과장을 울릉도 지사로 발령 내버렸다.

칼로 두부 자르듯 간단히 결단한 듯 보였지만, 이는 대찬에게도 상당한 부담이 따랐다.

표성재 부점장의 과오는 빼도 박도 못할 중징계감이었다.

그러나 이미 최선태 과장을 쳐낸 대찬이 표성재 부점장마저 내친다면, 관리자 직원들의 인심을 완전히 잃을 염려가 있었다.

관리자 직원들과의 유기적인 협동이 없으면 점포가 잘 돌아갈 리 만무했다.

대찬이 최선태 과장을 쳐낸 건 점포 운영의 확실한 주도권을 잡기 위함이지, 그들과 전면전을 벌이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표성재 부점장의 과오를 알고도 묵인하는 쪽을 택했다.

“그래도 고쳐지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 뽑은 칼로 내리치는 수밖에.”

만약 엄중한 경고가 있었음에도 표성재 부점장이 환골탈태하지 않는다면, 대찬도 부담을 감수하고 그를 쳐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표성재 부점장은 대찬의 엄포가 허장성세라고 여길 것이다.

그럼 점점 더 방자해지고, 그 오만방자함은 다른 관리자 직원들에게까지 옮을 것이다.

상하관계가 곰팡이처럼 손 쓸 틈 없이 붕괴될 것이다.

그럼 대찬의 커리어도 그것으로 끝장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다음 날, 대찬은 여느 때처럼 출근했다.

하지만 마음은 조급했다.

표성재 부점장의 태도에 온 신경이 집중됐다.

모두가 여느 때처럼 인사하는 와중에 표성재 부점장이 대찬에게 다가왔다.

그의 표정이 비장했다.

“점장님,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네. 점장실로 오십시오.”

‘보고? 무슨 보고.’

덤덤한 겉과 달리 속은 불안했다.

점장실로 들어온 표성재 부점장이 책상에 서류를 내려놓았다.

“이게 뭡니까?”

“어제 퇴근하고 나서 고민해봤습니다. 겨울학기 문화센터 강좌로 해볼 만한 걸 꼽아봤습니다.”

“그래요?”

대찬은 웃으면서 서류를 검토했다.

표성재 부점장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대찬의 반응을 예의 주시했다.

대찬은 천천히 서류를 읽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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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성재 부점장의 서류는 이런 식의 제안들이 제법 촘촘한 얼개를 갖고 죽 적혀 있었다.

일목요연하진 않았지만 노력의 흔적이 돋보였다.

꽃꽂이, 사주팔자 등보다는 문화센터에 적합한 구성이었다.

“으음…….”

대찬이 입술을 우물거리자 표성재 부점장의 입이 바짝 말랐다.

“많이 부족하죠? 예, 부족할 겁니다……. 죄송합니다.”

“아직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

서류는 A4용지 10장 분량이었다.

하룻밤 사이 해내기에는 적잖은 분량이었다.

표성재 부점장의 눈두덩에 그늘진 다크서클이 간밤의 노력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마음에 확 와닿지는 않았다.

대찬은 볼펜으로 서류를 톡톡 건드리면서 한동안 고심했다.

‘가구제작은 여자들이 통상적으로 흥미 붙일 분야는 아니고… 아기 옷은 꾸준히 문화센터에 나와야 만들 수 있을 텐데 개근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 베이커리는 괜찮긴 한데 2퍼센트 부족해.’

대찬은 계속 고심했다.

그가 침묵하는 일분일초가 표성재 부점장은 견디기 어려운 부담이었다.

대찬은 홀로 골몰하느라 표성재 부점장을 잠시 잊었다.

‘아기… 베이커리…….’

“아!”

대찬이 책상을 탁 쳤다.

채워지지 않던 2퍼센트가 채워졌다.

“죄, 죄송합니다!”

대찬이 소리를 지르자 표성재 부점장은 반사적으로 죄송합니다를 외쳤다.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뭐가 죄송해요?”

“제 보고서가 너무 부족해서…….”

“아뇨, 잘했습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정말 노력 많이 해주셨어요. 고맙습니다.”

“그, 그렇습니까?”

표성재 부점장의 얼굴이 조금은 밝아졌다.

“네. 그런데 어딘가 개운치 않은 구석이 있었는데 방금 그게 해소됐어요.”

“어떻게 말입니까?”

“아이와 함께하는 문화센터.”

“아이와 함께, 말입니까?”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자녀가 있는데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는 부모는 애만 혼자 두고 장보기가 힘들거든요. 그래서 아이를 같이 데리고 오기 마련입니다.”

“네, 그렇죠.”

“문화센터 강좌를 성인이 아니라 아이에게 초점을 맞추는 겁니다. 아이와 함께할 수 있으면 뭐든 좋습니다. 베이커리도, 요리교실도, 운동도, 영어노래도요.”

“아…….”

표성재 부점장도 그제야 감을 잡았다.

“장도 보고 더불어 아이들과 유익한 시간도 보낼 수 있다면, 충분히 강점이 있습니다.”

“점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테마를 그쪽으로 잡고 아이와 함께하는 강좌를 여러 개 신설하도록 하죠.”

“예, 점장님.”

대찬은 표성재 부점장을 향해 빙긋 웃었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괜찮은 전략이 나왔어요.”

“점장님 아이디어이지 않습니까.”

“아뇨. 부점장의 성의 있는 보고서가 아니면 생각해내지 못했을 겁니다. 이건 순전히 부점장 공입니다.”

“가, 감사합니다.”

표성재 부점장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대찬은 웃으면서 대꾸했다.

“제가 더 고맙습니다, 부점장.”

표성재 부점장은 점장실을 나오자마자 얼굴을 발그레 붉혔다.

그러고는 뭉클한 표정으로 손을 꼭 쥐었다 폈다.

“나한테 고맙다고 했어…….”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표성재 부점장이 점장실을 나올 때마다 허운과 마주쳤다.

허운은 싱글싱글 웃으면서 표성재 부점장에게 말을 걸었다.

표성재 부점장은 어흠, 헛기침을 하면서 낯빛을 단속했다.

“좋기는요.”

그는 짧게 말하고는 종종걸음으로 허운을 지나쳐 갔다.

허운은 뒤돌아 그의 뒷모습을 보며 웃었다.

“걸음걸이부터가 명랑해졌는데, 뭘.”

대찬은 표성재 부점장과 논의한 일을 그대로 밀어붙였다.

아이와 함께하는 베이커리교실, 영어노래교실, 요가교실이 신설되었다.

표성재 부점장의 보고서에서 쓸 만한 강좌들도 추가되었다.

대찬이 굳이 그의 보고서에서 물색한 건 표성재 부점장의 기를 살려주기 위함이었다.

노력에는 합당한 찬사를 보내줘야만 했다.

대찬은 ‘아이와 함께하는’ 콘셉트를 문화센터는 물론 매장 전체에 적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발생한 영업이익의 상당부분을 시설 투자를 위한 예산으로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서원웅의 전략기획실이 대찬의 뒤를 확실히 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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