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174화
몇 날 며칠이 지나도 유산슬밥, 눈꽃치즈 돈가스, 임연수어 정식이 그대로 메뉴에 올라있었다.
귀동냥을 한 김산호가 대찬에게 슬쩍 말해주었다.
“직원들이 말하는 거 들었는데요, 푸드코트 사장님들이 점장님 말씀 안 들을 모양이에요. 새파란 점장이 뭘 아냐고 뒷담화를 했다데요.”
“새파랗고 자시고 맞는 말이면 바꿀 생각을 해야지, 참…….”
“어떻게 하실 거예요?”
“내가 강제로 뭘 어쩔 수는 없어. 그 사람들은 필래마트 소속이 아니고 개별사업자니까.”
“그럼 이대로 GG?”
대찬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며칠 후, 역시 최악의 유산슬밥을 파는 푸드코트에 누군가 등장했다.
“확실하게 컨설팅해주세요. 비용은 섭섭지 않게 쳐드리겠습니다.”
“돈은 필요 없다고 도대체 몇 번을 해야 알아들을래, 조 선생?”
황금루의 노근기였다.
대찬은 노근기를 수유점으로 초빙했다.
몇 년간의 유명세를 유지한 그는 제법 스타셰프의 풍모가 느껴졌다.
이따금 방송에도 출연했고, 황금루에는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인산인해였다.
노근기는 자신의 가게에서 일하는 직원 5명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대찬이 노근기를 부른 건 권위 때문이었다.
뭣도 모르는 새파란 놈이야 그렇다 치고, 얼굴이 널리 알려진 노근기한테까지 퉁을 놓겠느냐는 생각이었다.
그의 생각은 주효했다.
노근기가 등장하자 푸드코트 사장들은 긴장했다.
“아이고, 배고프다. 음식 좀 많이 시켜도 되지, 조 선생?”
“아무렴요.”
노근기는 푸드코트 4개 식당에서 메뉴를 3개씩 시켰다.
12개의 음식이 식탁에 놓였다.
“한입만.”
음식이 나오자마자 노근기는 12개의 음식을 전부 한입씩 맛봤다.
그것으로 테스트는 끝났다.
노근기는 중국집 사장에게 다가갔다.
“저기 사장님, 메뉴 좀 줄여야 하지 않겠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던 참입니다.”
‘뻔뻔하긴!’
대찬은 속으로 혀를 찼다.
노근기의 말은 바로 먹혔다.
중국집 사장은 물론이고, 다른 사업자들도 자발적으로 몰려와 수첩에 필기까지 했다.
대찬과 같은 말을 해도 노근기의 말에는 주술이라도 걸린 듯 푸드코트 사장들을 홀렸다.
노근기는 메뉴간소화 이외에도 자신의 노하우를 푸드코트 사장들에게 전수했다.
사장들은 고3처럼 공부했다.
노근기가 대찬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분들 계약 얼마나 남았지?”
“얼마나 남았습니까?”
대찬은 표성재 부점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 그게…….”
표성재 부점장은 즉답하지 못했다.
그는 세 차례 전화를 거친 다음에야 대답을 내놨다.
“내년 3월까집니다.”
힘겹게 대답을 받아낸 노근기가 대찬에게 말했다.
“조 선생, 만약 내 솔루션대로 안 하시면 이분들하고 재계약하지 마. 황금루 3호점 입점시킬 테니까.”
그 말에 푸드코트 사장들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대찬은 씩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사장님.”
노근기가 다녀간 다음 날부터 푸드코트는 임시 휴업에 돌입했다.
그리고 정확히 2주 후에 다시 오픈했다.
노근기가 제시한 해결책을 완벽하게 받아들였다.
메뉴도 간소화했고, 조리법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노근기가 동원되고 나서야 움직이는 사장들이 얄밉긴 했지만, 반가운 변화였다.
노근기의 도움으로 푸드코트는 환골탈태했다.
적어도 푸드코트가 마트 영업에 걸림돌이 되는 일은 없게 되었다.
“이번 달 점포별 매출 나왔네요.”
한태윤 과장이 인쇄물을 들고 서원웅에게 향했다.
본사 전략기획실에서는 그다지 눈여겨보지 않던 점포별 매출표를 학수고대했다.
대찬이 맡은 수유점의 성적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봅시다.”
서원웅은 보던 업무를 제쳐놓고 점포별 매출표에 시선을 고정했다.
누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전략기획실 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애인을 수유점으로 보내고 그 빈자리를 채운 오다혜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서원웅의 곁으로 왔다.
수유점의 지난달 매출 순위는 79개 점포 중 79위였다.
“어디 보자…….”
직원들의 시선은 당연히 맨 밑부터 향했다.
“79위… 가양점.”
서원웅이 말하자 전략기획실 직원들은 박수를 쳤다.
“일단은 탈꼴찌 성공!”
오다혜도 진심의 박수를 쳤다.
숫자를 더듬던 서원웅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가 멈춘 곳의 숫자는 70.
한 달 만에 아홉 계단을 껑충 뛰어 올라갔다.
한태윤 과장은 빙긋 웃었다.
“역시 조 과장, 아니 조 점장 실력 하나는 인정해줘야겠네.”
적자를 면치 못하던 영업이익 역시 근소하게나마 흑자로 전환되었다.
이 소식은 실시간으로 수유점에도 그대로 전달되었다.
“만세!”
허운과 김산호는 매출표를 확인하자마자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표성재 부점장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인센티브를 실무자들과 공유하게 된 관리자급 직원들은 내심 대찬을 미워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결과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표성재 부점장은 대찬에게 쭈뼛거리며 다가갔다.
“축하드립니다, 점장님.”
“축하한다고요?”
대찬은 빙긋 웃으면서 반문했다.
표성재 부점장은 자기가 또 말실수를 했나 싶어 안절부절못했다.
“죄, 죄송합니다.”
“아니, 그게 아니고요, 부점장도 축하받아야 할 사람이에요.”
“네?”
“꼴찌 탈출한 게 나 혼자 한 일이 아니잖아요. 부점장도 고생 많이 했어요. 같이 자축합시다.”
“아…….”
그제야 표성재 부점장의 표정이 밝아졌다.
“영업이익이 쥐똥만큼이지만 흑자로 전환됐으니 인센티브 들어갈 거예요. 전 직원한테 통장 확인하라고 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표성재 부점장은 사내 밴드에 급여통장을 확인하라는 글을 올렸다.
그와 동시에 대부분의 직원이 계좌를 확인했다.
“풋!”
수유점 곳곳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들의 통장에는 급여에 더해 인센티브가 2,542원씩 지급되었다.
그들은 적은 액수에 웃음이 나왔고, 그 적은 액수라도 약속을 지키는 점장 때문에 웃음이 나왔다.
대찬은 또 약속대로 자신의 급여에서 100만 원을 떼어 가장 우수한 직원에게 내주었다.
첫 번째 수혜자는 푸드코트의 중국집 사장이었다.
중국집 사장은 얼떨떨했다.
“이, 이걸 왜 저한테 주십니까?”
“이번 달 가장 잘해주신 분이니까요.”
“저는 필래마트 직원도 아닌데…….”
“한 가족이잖아요. 그래서, 안 받을 거예요? 100만 원인데?”
“아, 아닙니다! 받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찬은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도 열심히 잘해주세요.”
“옙! 열심히 하겠습니다!”
중국집 사장에게 자신의 월급을 지급한 대찬은 이를 전 직원에게 알렸다.
‘점장이 선정한 이번 달 우수가족은 푸드코트 중국관의 박장룡 님입니다. 전 직원에게 약속하였듯, 제 이번 달 급여에서 금 100만 원정을 지급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약속을 했으면 지키고, 지킨 바를 분명히 알릴 필요가 있었다.
법가를 대표하는 옛날 전국시대 진나라의 상앙은 법의 지엄함과 공명정대함을 알리기 위해 꾀를 냈다.
어느 날, 나무를 갖다놓고 이걸 옮기는 사람에게는 황금 10근을 준다고 했다.
터무니없는 조건에 사람들은 믿지 않았지만, 개중 하나가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나무를 옮겼다.
상앙은 정말 그에게 황금 10근을 내렸다.
그때부터 진나라의 백성은 법을 굳게 신뢰했다.
효시가 있어야만 제도는 힘을 얻는다.
대찬의 행동이 상앙에는 비기지 못해도 그와 유사한 효과는 낼 수 있었다.
필래마트 수유점 직원들은 자신의 수고가 헛것이 아니라 분명한 보상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머리로 알고,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꼈다.
그건 형태가 없어 당장 드러나진 않았지만, 매장이 발전할 수 있는 엄청난 원동력이었다.
2013년 1월.
대찬이 부임한 지 세 달이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수유점은 필래마트 79개 점포 중 매출 62위로 만년 꼴찌의 이름표를 완전히 뗐다.
대찬은 거침없이 광폭행보를 벌였다.
꼴찌탈출 정도로는 본사로 금의환향하기 민망했다.
수유점을 완전히 반석 위에 올려놔야만 했다.
이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고자 했다.
대찬은 표성재 부점장을 불렀다.
“문화센터 관련사항 브리핑 좀 준비해주실래요?”
“예, 알겠습니다.”
대찬은 부러 표성재 부점장을 콕 집어 지시했다.
대찬은 그가 부점장으로서 제대로 된 구실을 해주길 바랐다.
이 큰 점포를 점장 혼자서 끌고 가기엔 벅찼다.
당장 몇 달은 뼈를 갈아 넣어 어떻게든 끌고 왔다.
하지만 앞으로 언제까지 이럴 수 있을지 대찬 본인도 장담할 수 없었다.
대찬은 실무자들의 지지를 얻고 있었지만, 관리자들은 대찬을 지지하지 않았다.
다만,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럴 때 부드럽다 못해 물러터진 표성재 부점장이 대찬의 보완재가 돼준다면 파급력은 상상 이상일 것이다.
그렇기에 간절한 마음을 담아 표성재 부점장에게 계속해서 업무를 지시했다.
대찬과 몇 달째 일하고 있는 표성재 부점장도 더디지만 변하고 있었다.
대찬의 냉랭한 눈빛이 두려워 그의 업무스타일에 적응하는 편을 선택했다.
표성재 부점장은 전보다 훨씬 신속하고 정확하게 대찬의 요구를 이행했다.
“우리 점포의 문화센터 매출은 매우 좋지 않습니다.”
“숫자로 얘기해주세요.”
“예. 이번 가을학기의 경우 수강신청 단계에서 기초 수강인원을 채우지 못한 강좌가 20개 중 6개로, 30퍼센트에 달했습니다. 기초 수강인원을 채운 강좌도 평균 수강인원이 10명 안팎으로 매우 저조했습니다.”
“강사 인건비 빼면 남는 것도 없겠군요.”
“예. 매장 6층 공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에선 오히려 적자라고 봐야 합니다.”
“문화센터 카탈로그 좀 봅시다.”
표성재 부점장이 카탈로그를 건네주었다.
카탈로그를 훑어볼수록 대찬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사주팔자로 풀어보는 나의 미래, 요조숙녀가 되는 매직 꽃꽂이, 기초서예반, 신나는 트로트 노래교실, 교양인이 되는 플루트 연주법, 따뜻한 겨울나기 뜨개질 교실……. 이게 다 뭡니까?”
대찬은 제 입으로 발음하면서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예? 문제 있나요……?”
표성재 부점장은 뭐가 문제인지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대찬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문화센터 주 고객층은 주부들입니다. 사주팔자, 서예에 관심이나 있겠습니까? 꽃꽂이도 이제는 대중적인 취미가 아니죠. 요조숙녀란 말도 구식이고, 플루트나 뜨개질도 메인스트림은 아닙니다.”
“…….”
“이러니 잘될 리가 없죠.”
대찬은 카탈로그를 탁 접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겨울학기에는 강좌를 싹 물갈이해야겠습니다.”
“물갈이요……?”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을학기 강사들에게 전부 재계약 불가 통보하세요. 미리 해두세요. 그래야 그분들도 다음 일자리 알아볼 시간이 생기니까요.”
“그, 그래도 너무 매정하지 않습니까?”
“매정하다고요?”
“예……. 이분들은 저희 매장 개장할 때부터 함께해온 분들인데…….”
“부점장은 그래도 안면이 좀 있으니 매정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적자를 감수하면서 계속 끌고 갈 순 없습니다. 재계약 불가 통보해주세요.”
“…하, 하지만…….”
표성재 부점장은 어지간히도 마음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대찬은 그의 부드러운 성품을 인정하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부점장이 직접 하기 어려우면 제가 통보하겠습니다. 더 신경 쓰지 마십시오.”
대찬의 배려에도 표성재 부점장은 여전히 뒤 마려운 표정이었다.
인간적인 연민은 들었다.
하지만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지금 개설된 강좌들은 전혀 납득이 되지 않았다.
문화센터는 푸드코트와 함께 매장의 주요한 부대시설이었다.
문화센터는 문화센터로 끝나지 않는다.
단순히 강좌를 공급해 거기서 발생하는 수익은 편린에 불과하다.
문화센터의 수강생을 마트의 소비자로 유인해야만 한다.
현재 설치된 강좌는 전혀 그런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대찬은 직접 강사들을 점장실로 불렀다.
커피 한 잔씩을 대접하면서 그들에게 말했다.
“저희 매장은 이번에 문화센터 강좌를 전면 개편하려고 합니다. 저희 매장으로서도 내키지 않지만, 다음 겨울학기 강좌에는 여러분과 재계약할 수 없음을 말씀드립니다.”
“뭐라고요?”
강사들은 펄쩍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