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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176화 (175/556)

난 할 수 있어 176화

나라도 지방자치제가 활성화되었듯, 각 지점 실정에 맞춘 예산집행이 가능하도록 본사 차원에서 최대한 협조하자고 제안했다.

“문화센터 공간을 확장해서 부모가 장을 볼 때 아이가 안전하게 놀 수 있는 놀이방을 마련하도록 합시다. 이를 위한 인력도 추가로 채용하도록 합시다.”

이에 허운이 추가적으로 제안했다.

“놀이방은 물론이고 더 공격적인 투자가 이뤄져야 하지 않을까요? 신중한 투자도 좋지만,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이 이뤄져야 소비자들에게 더 강렬한 인상을 각인시키고 당장의 효과를 볼 수 있을 겁니다.”

“공격적인 투자라면?”

“키즈카페와 상설전시공간을 만들면 어떨까요? 6층 전체를 ‘아이와 함께하는’ 콘셉트에 전부 할애하는 겁니다.”

조심스러운 시선도 있었다.

허운과 같은 직급인 과장들 몇몇이 우려 섞인 의견을 내놨다.

“6층 매장을 전부 활용하는 건 도박수가 아닐까요?”

“반응을 봐서 점차 확대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에 허운이 반론을 폈다.

“때를 놓쳐선 안 됩니다. 언제까지 지점 단독의 과감한 투자가 가능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본사의 사인이 떨어졌을 때 밀어붙여야 합니다.”

대찬은 양쪽 의견을 경청했다.

양쪽 주장 모두 일리가 있었다.

자신의 의견을 모두 표출한 양쪽의 시선이 이제 대찬을 향했다.

결정을 내려달라는 뜻이었다.

어물거려선 안 된다.

고민할수록 우유부단해 보인다.

우유부단한 리더를 부하들은 신뢰하지 못한다.

대찬은 즉시 대답을 내놨다.

“상설전시공간은 유예하고, 키즈카페를 우선적으로 입점시키도록 하죠.”

그리고 그 대답에는 항상 설득력 있는 근거가 수반되어야만 했다.

논리적이지 않은 결정은 독단이고, 부하들은 독단에 필연적인 거부감을 느낀다.

대찬은 자신의 결정이 단순한 절충이 아니라 합리적인 판단이란 걸 그들에게 각인시킬 책무가 있었다.

“상설전시공간이 고객 유치에 도움은 될 겁니다. 하지만 집계가 되지 않습니다. 상설전시공간이 투자한 이상으로 고객을 끌어 모았다는 객관적인 자료를 얻기 힘듭니다.”

직원들은 대찬의 대답을 주시했다.

그는 물 흐르듯 말을 이었다.

“하지만 키즈카페는 직관적인 매출이 발생합니다. 거기에 더해서 POS기의 매출기록을 통해 키즈카페의 고객이 얼마나 매장고객으로 연동되는지 그 비율을 계산할 수 있습니다. 숫자를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숫자를 근거로 본사에 우리의 과감한 투자가 수익을 발생시켰다는 걸 납득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결정이 옳았다는 걸 증명하면, 차후 상설전시공간을 위한 예산 확보도 손쉽게 해낼 겁니다.”

대찬은 웃으면서 확실하게 말했다.

“제가 책임지고 해내겠습니다.”

직원들은 대찬의 결정에 딴죽을 걸지 않았다.

모두 납득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죠. 수고들 많으셨습니다.”

매장 6층은 가을학기가 끝나자마자 즉시 공사에 돌입했다.

새로 개설된 강좌에 적합한 구조로 문화센터가 리모델링에 들어갔고, 빈 공간에 놀이방과 키즈카페가 들어섰다.

상설전시공간을 염두에 둔 공간에는 우선적으로 영유아를 자녀로 둔 부모를 타깃으로 삼은 제품들의 진열대가 임시로 놓였다.

시일을 다소 늦춘 겨울학기가 개강할 때를 맞춰 공사가 완료되었다.

대찬은 평소 종일 매장 구석구석을 쏘다니며 동향을 주시했다.

하지만 공사가 완료된 이후로는 6층 붙박이가 되다시피 했다.

그는 과할 정도의 홍보비 지출을 결정했다.

전면 리뉴얼된 문화센터 강좌와 키즈카페를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그리고 문화센터 개강과 키즈카페 개점 첫날, 투자는 과실로 돌아왔다.

매장 6층을 예의 주시하던 대찬의 시야에, 아이의 손을 잡은 주부들로 6층 매장이 북적이는 광경이 들어왔다.

‘됐다.’

한참 그들의 행보를 살피던 대찬은 주먹을 움켜쥐며 점장실로 돌아왔다.

표성재 부점장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보고했다.

“문화센터 개강 첫날, 모든 강좌가 선착순으로 마감됐습니다. 키즈카페 반응도 상당히 좋습니다.”

“계속 이 기조가 유지되도록 노력해주십시오. 문화센터 강좌 만족도를 수시로 체크하고, 키즈카페 역시 매일 점검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점장님.”

“이게 다 부점장 아이디어로부터 시작됐습니다. 일단 첫날은 축하해도 될 것 같네요. 축하합니다, 부점장.”

“함께 자축할 일이죠. 축하드립니다, 점장님.”

표성재 부점장은 대찬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불의의 일격에 대찬은 잠깐 멈칫하다가 이내 풋, 웃음을 터트렸다.

둘은 한참을 격의 없는 웃음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2013년 1/4분기에는 수유점의 영업이익 순위가 오히려 하락했다.

영업이익의 상당부분을 다시 시설에 투자했기에 예상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매출의 꺾은선 그래프는 더욱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렸다.

두 달 후, 네 곳이 추가된 83개 필래마트 점포 중 수유점은 42위를 기록했다.

이제 어엿한 중위권 대열에 당당히 합류했다.

문화센터 리뉴얼과 키즈카페의 입점 효과를 톡톡히 누린 수유점은, 과감하게 아이를 위한 상설전시공간을 마련하겠다고 본사에 기획안을 제출했다.

실적이 분명했으니 본사에서도 이를 거스르지 않았다.

필래마트 수유점은 엄마, 아빠 맞춤 점포라는 정체성을 더욱 확고히 했다.

단순히 쇼핑공간이 아니라, 마음 놓고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복합문화·휴식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근방에 위치한 위마트, 업하우스, 필래마트, 대형마트 3사의 각축전 속에서 영유아 부모들의 마음을 필래마트가 확실히 휘어잡았다.

옛말 중에 가장 틀린 걸 꼽자면 아마 호사다마일 것이다.

좋은 일에는 마가 많이 낀다는 뜻이다.

필래마트 수유점은 이 고사의 좋은 반례가 되었다.

일이 잘되면 안 되던 일도 자연히 풀리기 마련이다.

매출이 급속도로 늘어나자 삐거덕거리던 필래마트 직원들의 조직력이 탄탄해졌다.

실무자 직원들은 늘어나는 인센티브에 일할 맛을 느꼈다.

처음 대찬에게 의구심과 반감을 품었던 관리자 직원들도 매장의 매출이 늘어나자 인센티브와 폭 넓은 승진기회를 확보하게 되면서 대찬의 우군으로 돌아섰다.

몇몇 직원은 다른 점포로 발령받을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반납했다.

순풍에 돛 단 듯 쾌진격하는 수유점에 머무르면서 자신의 실적을 더 인정받겠다는 뜻이었다.

전국 각지의 지점장들은 매달 정해진 날짜에 본사로 소환되었다.

김태준 사장이 주관하는 지점장 회의에 참석하기 위함이었다.

말이 좋아 지점장 회의지, 실상은 지점장 털기였다.

그 달 매출이 나오자마자 김태준 사장은 매출이 부진한 점포의 지점장을 앞에 세워놓고 온갖 치욕을 안겨주었다.

대찬이 수유점에 부임하기 직전의 지점장 역시 이 월례행사의 스트레스 때문에 원형탈모에 걸리고 사표를 냈다.

대찬은 다행히 이 서슬 퍼런 칼날에서 비껴날 수 있었다.

대신 수유점의 매출상승 덕분에 만년꼴찌로 전락한 가양점 점장이 된서리를 맞았다.

그 역시 수유점과 비슷한 처지였다.

근방에 위마트와 업하우스가 모두 출점한 각축장이었다.

김태준 사장은 가양점 점장을 세워놓고 얼굴에 똥물을 끼얹었다.

“가양점 출점한 지 다섯 해째입니다. 한두 해야 매출이 안 나와도 과도기려니 생각했어요. 근데 어째 날이 갈수록 처참합니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점장은 월급 받아가기 미안하지도 않아요?”

“…노력하겠습니다.”

“개나 소나 노력은 다 합니다. 점장 성실한 건 나도 잘 알아요. 난 차라리 점장이 불성실했으면 좋겠어. 그럼 노력 좀 하라고 다그치면 그만일 텐데 말이야.”

“…….”

“노력을 하면 할수록 매출은 떨어지니, 이건 순전히 점장의 무능이 원인 아닙니까? 빈둥거리는 놈한테는 매가 약이지만, 무능한 놈한테는 약도 없어요.”

가양점 점장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83개 점포의 점장들이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이를 테면 담임선생이 와서 칠판 앞에 세워놓고 네가 꼴찌다 하며 면박을 주는 것이었다.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너무나도 치욕스러웠다.

김태준 사장은 일말의 자비도 베풀지 않았다.

“가장 쓸모없는 직원이 당신 같은 사람입니다. 멍부라고 하죠. 멍청하고 부지런한. 차라리 당신 같은 축은 멍게가 낫습니다. 멍청하고 게으른 게 낫다고.”

“매출을 올릴 방법을 강구하겠습니다.”

가양점 점장의 목소리는 울음기에 축축이 젖어 있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회사원인 그도 지금의 치욕에는 도통 맥을 못 추렸다.

“걷는 놈 밑에 기는 놈 있다고, 몇 달 전만 해도 수유점이 가양점 밑에 있었습니다. 아주 눈 뜨고 보기 어려울 지경이었어요. 그런데 수유점은 지금 흑자행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도대체 수유점이 하는 걸 가양점은 왜 못하는 겁니까?”

대찬은 뜨끔했다.

모범적인 비교대상이 되는 건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시기와 질투를 한 몸에 받게 된다.

대찬은 죄인처럼 고개를 살짝 숙였다.

가양점 점장은 툭 치면 울듯이 눈가가 벌게졌다.

“다음 달까지 실적개선이 안 되면 각오해야 할 겁니다.”

사장의 엄포에 가양점 점장은 덜덜 떨었다.

김태준 사장은 가양점 이외에도 매출이 급락한 지점장들 서넛의 가슴을 후벼 파고 나서야 회의를 마쳤다.

회의를 마치고 매장으로 돌아가려는 대찬을 김태준 사장이 붙잡았다.

“어, 조대찬이, 나랑 점심이나 할까?”

“예, 좋습니다.”

“사시미나 한 점 하지. 시마아지하고 보탄에비 좋은 게 들어왔다더군.”

‘꼭 일식마니아들은 일본말로 부르더라.’

시마아지는 우리말로 줄무늬전갱이, 보탄에비는 도화새우였다.

대찬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벌써 입에 침이 고이네요.”

“술 한 잔 정돈 괜찮겠지? 자넨 말술이니 일하는 덴 끄떡없을 거 아냐.”

“사장님이 눈감아주신다면야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하긴 수유점에선 자네가 우두머리니까.”

식사를 하러 간 두 사람은 다다미를 깐 방으로 안내받았다.

김태준 사장은 앉자마자 술부터 따랐다.

대찬은 공손히 받고 공손히 따라주었다.

조용히 잔을 부딪치고 술로 목을 축인 김태준 사장이 말했다.

“오늘, 내가 너무 심했나?”

“약간 심하지 않으셨나 싶습니다.”

“자네까지 그렇게 말하면 섭섭해.”

“가재는 게 편이라고, 저도 같은 점장의 입장이니 잘잘못을 떠나 가양점 점장님 기분은 이해됩니다. 오늘 소주 좀 푸시겠죠.”

김태준 사장은 사시미 한 점을 소금에 찍어 먹으면서 싱겁게 웃었다.

“편을 들 거면 내 편을 들어야지.”

“물론 그렇습니다만, 심정적으론 그렇단 말씀입니다. 가양점 매출이 저조하니 오늘 일도 점장님이 감당할 일이죠.”

“다른 점장들도 조대찬 같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어.”

“저처럼 운 좋은 사람 나기가 쉽습니까, 어디.”

“자네 겸손은 들으면 들을수록 묘하게 자랑같이 들린단 말이지.”

“오해십니다.”

대찬은 웃으면서 김태준 사장의 잔에 술을 따라 입막음했다.

김태준 사장은 술을 마시고 회 몇 점으로 배를 채우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돌아오는 수요일에 코다(KODA) 정기회의가 있는데, 자네도 같이 가줬으면 해.”

코다는 한국유통경영협회의 영어약칭이었다.

위마트, 업하우스, 필래마트를 포함해 유수의 유통업체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일개 점장이 낄 자리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 하지만 자네는 일개 점장이 아니잖나. 서원웅 실장도 나랑 동행할 거야. 자네도 일개 점장에서 끝낼 커리어가 아니니까. 큰물도 맛봐야지.”

“데려가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대찬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대리 시절에는 제안이 들어와도 한사코 거절했지만, 이제는 커진 체급만큼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었다.

“최 비서가 자네 메일로 일정하고 장소 보내놓을 거야. 따로 연락 없어도 거기서 만나자고.”

“알겠습니다, 사장님.”

“용건은 끝났으니 밥이나 편하게 먹자고. 말 더 안 시킬 테니까. 자네도 말 걸지 마. 배고파.”

김태준 사장은 정말 남은 시간은 배를 채우는 데만 할애했다.

수요일이 되자 대찬은 통보받은 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했다.

KODA의 회장은 대형마트 3사의 대표이사가 번갈아가며 역임했다.

이번에는 업하우스의 대표가 회장을 맡고 있었다.

그렇기에 회의 역시 업하우스의 모기업 소유의 호텔에서 이뤄졌다.

이날 대찬은 필래마트의 점장이 아니라 김태준 사장의 수행원 자격으로 참석했다.

김태준 사장은 정해진 시간을 칼같이 맞춰 등장했다.

그가 보이자 대찬은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오, 일찍 왔군.”

대찬은 김태준 사장 뒤를 따르는 서원웅과도 눈인사를 했다.

매일 얼굴을 마주하던 서원웅을 오랜만에 보니 어색한 감정마저 들었다.

김태준 사장은 그들이 인사할 충분한 시간을 허락했다.

“자, 그럼 들어가지.”

“네, 사장님.”

김태준 사장은 두 젊은 직원을 거느리고 회의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회의장 안에서 만난 여러 기업들의 대표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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