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113화
“그래, 나한테 듣고 싶은 게 정확히 뭐야?”
“서청수 회장께서 박만섭 상무를 필래마트 부사장으로 발탁하신 이유요.”
“그게 자네한테 무슨 의미가 있지?”
“과장님 질문에 답할 이유가 저한테 없습니다.”
박 과장은 피식 웃고는 질린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듣고 힘이 빠질 수도 있는데. 박만섭 부사장은 그저 일종의 전리품일 뿐이야.”
“전리품이라뇨?”
“그냥 서청규 사장의 화나 돋울 심산으로 데려왔을 뿐, 별 의미가 없다는 뜻이야.”
박 과장의 말이 대찬에게는 허무하게 들릴뿐더러 이해도 잘 되지 않았다.
“회장님이 왜 굳이 그렇게…….”
“서청규 사장을 놀리려고. 뭐, 이유가 그것만은 아니지만.”
“그럼 무슨 이유가 또 있습니까?”
“박만섭 부사장이 유통에서 상무가 된 것도 거의 막차를 탄 거란 말이야. 그럼 그 양반 정년이 얼마나 남았겠어?”
“모르긴 몰라도 얼마 안 남았겠죠.”
“그래. 부사장으로서도 길어야 2년이야. 회장님한테 대단한 이득이 안 되겠지?”
“네.”
“지금 그 양반 보직도 아마 별거 없을걸?”
“상생경영본부장입니다. 거느린 부서도 별로 없고, 쥐고 있는 권력도 거의 없다고 봐야죠.”
“그래, 그냥 껍데기야. 그런 박만섭 부사장을 굳이 데려온 건 아마 2가지 이유 때문일 거야.”
“그 이유가 뭘까요?”
“첫째, 김태준 사장의 카리스마를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것. 유약한 2인자를 두면 김태준 사장이 돋보이니까.”
“뭐, 그럴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별로 대단한 이유는 아니네요. 두 번째는요?”
“서원웅을 위해 자리를 만들어 놓는 거지.”
서원웅의 이름이 박 과장의 입에서 나오자 대찬의 귀가 쫑긋 섰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박만섭 부사장이 지금 등기이사지?”
“네.”
“서원웅이 나중에 등기이사 될 걸 대비해서 박만섭 부사장이 자리 덥혀 놓고 있는 거야.”
“자리를 덥혀 놓다뇨?”
“나중에 등기이사로 선임하면서 정원까지 늘려 버리면 제 새끼만 예뻐한다고 시샘이나 뒷말이 따를 테니까.”
“그럼 상생경영본부장도……?”
“서원웅을 위해 만들어 놓은 자리야. 나중에 힘만 조금 실어 주면 좋은 이미지 만들기에 적합한 자리거든. 상생, 얼마나 좋은 단어야?”
박 과장의 말을 듣고 나서야 대찬은 수긍했다.
다 늙어 빠진 임원 하나를 데려와 이 정도면 알차게 써먹는 셈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당장 내친다 해도 아쉬울 것 없는 존재였다.
대찬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만 들어가겠습니다.”
“참 나, 깨끗하게 살아야겠군. 모처럼 정시 퇴근 해서 좋아했더니만 벌써 9시가 넘었잖아.”
박 과장은 대찬을 따라 일어나면서 툴툴거렸다.
대찬은 웃으면서 박 과장에게 말했다.
“앞으로는 더 연락드릴 일 없을 겁니다.”
“제발 그래 주게. 나를 호구 잡으려다가는 자네도 다칠 거야. 선을 지켜 줬으면 줬겠군.”
“물론입니다.”
박 과장은 서둘러 자리를 떴다.
대찬은 박 과장의 차가 멀어지는 걸 한동안 바라보다가 택시를 잡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왔을 땐, 식어 가는 치킨과 대찬의 침대를 멋대로 점유하고 드르렁 코를 고는 허운이 그를 반겨 주었다.
대찬은 다른 방으로 가 피곤한 몸을 누였다.
몸은 피곤했는데 뇌리에서 무수한 생각이 교차하는 터, 대찬은 한참을 뒤척이다 겨우 잠들었다.
“박만섭 부사장은 내쳐도 좋다고 생각할 거야, 김태준 사장이…….”
대찬은 잠에 취한 와중에도 그렇게 중얼거렸다.
박 과장을 만나고 왔지만 여전히 확신이 없는 자신을 위한 자기최면이었다.
대찬은 아침 일찍 일어나 오랫동안 뜨거운 물에 샤워를 했다.
대충 걸치고 갔던 정장도 오늘만큼은 잘 다렸다.
머리 모양에도 신경을 썼다.
욕실에서 한참 들려오는 드라이어 소리 때문에 깊은 잠에 빠졌던 허운도 눈을 떴다.
“뭐야… 너 어디 선 보러 가냐?”
“형도 얼른 준비해. 출근해야지.”
대찬은 허운을 위해 욕실을 비워 주고 부엌에서 간단히 아침을 차렸다.
구운 식빵에 땅콩버터를 발라 우유와 같이 먹고, 입가심으로 사과 1개를 썰어 허운과 나눠 먹었다.
대찬의 얼굴에는 계속 긴장이 감돌았다.
긴장이 가시기에는 집에서 직장까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출근해서 오전 업무를 보고 있으니, 사내 메신저로 박만섭 부사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사장님께서 오늘 오전에 시간이 난다 하시네. 직원 대표로 조대찬 대리가 드릴 말씀이 있다고 했으니 부르면 올라오게.
대찬은 연락을 받고 심호흡했다.
그러고는 부사장의 무딘 배짱을 속으로 실컷 욕했다.
대찬은 푹 숨을 내쉬며 홍은주에게 말했다.
“은주 씨, 담배 한 대 피우고 올게요. 혹시 나 찾는 전화 오면 휴대폰으로 연락 좀 부탁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홍은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찬은 미소를 지어 감사를 표하곤 옥상으로 올라갔다.
황 대리의 시선이 그의 뒷모습을 따라갔다.
대찬이 사라지자 중얼거렸다.
“졸라 후까시 잡네.”
팀원들은 황 대리를 흘끔 바라보고는 다시 일에 집중했다.
대찬이 옥상에 올라가니 마침 허운이 있었다.
그가 대찬에게 알은체를 했다.
대찬도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허운은 대찬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네가 고양이 목에 방울 달러 간다며?”
“어떻게 알았대.”
“송 과장님이 슬쩍 귀띔해 주시던데.”
“송 과장님, 이제 남의 일이다, 이거지.”
“어제 자리 비운 것도 관련 있는 거야?”
“응.”
허운은 대찬의 어깨를 꽉꽉 주물렀다.
“넌 똑소리 나니까 사장님 앞에서도 주눅 안 들 거야.”
“형도 이게 맞는 일이라고 생각해?”
“야, 이렇게라도 해야지, 안 그러면 답답해서 회사 어떻게 다니냐.”
“그렇단 말이지.”
대찬은 허운 역시 건의서에 당당히 서명한 일원이란 걸 깨달았다.
논쟁은 무의미했다.
“사장님한테 잘 말해 줘. 기대한다.”
“노력할게.”
대찬은 건조하게 대답하고 피우던 담배를 마저 피웠다.
그때 홍은주에게서 전화가 왔다.
“조 대리님, 부사장님께서 전화하셨는데요. 지금 사장실로 오시라고…….”
일개 대리를 부사장이, 그것도 사장실로 부르는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었다.
그렇기에 그걸 알리는 홍은주의 목소리도 다소 떨렸다.
“네, 알겠습니다.”
대찬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는 담배를 비벼 끄고 사장실로 내려갔다.
그러면서 향수처럼 뿌리는 구강 청결제로 담배 냄새를 지우는 걸 잊지 않았다.
그의 손에는 부사장이 건네준 의견서와 서명부가 들려 있지 않았다.
구강 청결도 잊지 않는 그였으니 단순히 까먹은 건 아니었다.
일부러 지참하지 않았다.
사장실 앞에 이르자 비서가 사장실에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 전략기획실 조대찬 대리입니다.”
“들어오라고 해.”
응낙을 받은 비서는 그를 사장실 안으로 인도했다.
“들어가시죠.”
대찬은 비서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안으로 발을 디뎠다.
무거워진 공기에 대찬은 침을 꼴깍 삼켰다.
안에는 김태준 사장과 박만섭 부사장이 앉아 있었다.
긴장이 가득한 대찬의 얼굴을 보고 박만섭 부사장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대찬은 수직으로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사장님, 전략기획실 조대찬 대리입니다.”
대찬의 인사를 김태준 사장은 건성으로 받았다.
“어, 앉아요.”
“감사합니다.”
대찬은 앉아서 다리를 꼭 모았다.
박만섭 부사장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김태준 사장에게 말했다.
“그럼 저는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부사장의 엉덩이는 이미 허공에 떠 있었다.
사장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을 받은 부사장은 부리나케 사장실을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대찬은 그런 부사장의 뒷모습을 흘끔 봤다.
‘고맙다, 제 발로 나가 줘서.’
대찬의 시선은 다시 정면을 향했다.
이제 대찬과 김태준 사장 단둘만 남았다.
사장실의 위압적인 인테리어마저 대찬에게 부담이었다.
김태준 사장은 매서운 눈초리를 그에게 보냈다.
“자네가 나한테 할 말이 있다던데.”
“예, 그렇습니다.”
“결재 라인이란 게 있질 않나? 대리가 사장을 바로 찾아오는 경우는 드물 텐데, 매우. 혹시 인수 건에서 지루박 좀 췄다고 나랑 맞먹으려는 건가?”
김태준 사장은 월드몰 인수 과정에서 서청수 회장을 움직인 사람이 대찬인 걸 알고 있었다.
서청수 회장이 일러 준 건 아니지만 들려준 정보를 짜 맞춰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대찬은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아닙니다.”
“그럼 뭐지?”
잔뜩 불편함이 낀 목소리였다.
대찬은 최대한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개인적인 용건이 아닙니다. 전보된 직원들의 공통된 의견을 저를 통해 말씀드리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 역시 절차에 따를 수 있었지.”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걸 알면 빨리 말하게.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사장의 목소리는 내내 불친절했다.
대찬은 소파 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김태준 사장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전보된 직원들이 작금의 상황에 대해 불만이 많은 것 같습니다.”
“나한테 하소연을 하러 온 건가?”
“직원들이 제게 원하는 건 그겁니다. 하지만 저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공동으로 작성한 의견서도, 서명부도 지참하지 않았습니다.”
사장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왜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장은 대찬의 말을 잠시 곱씹고는 피식 웃었다.
“그럼 자네한테 그걸 대체할 묘안이라도 있단 말인가?”
“묘안이라고 자신할 순 없습니다만, 제 의견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장은 깍지를 꼈다.
“건방지군. 자기주장 때문에 동료들의 요청을 묵살하다니.”
“건방지게 비친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살얼음판 걷는 심정입니다.”
“표정만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데?”
“속내를 표정에 드러내면 사장님께 얼마나 꼴같잖게 보일지 압니다. 그래서 최대한 표정을 단속하는 중입니다.”
김태준 사장은 싱겁게 웃었다.
“자네 의견이 그럴듯하다면 용납하겠지만, 형편없다면 자네 회사 생활이 앞으로 고달파질 걸세.”
“각오하고 있습니다.”
“나는 건방진 데다 무능한 놈은 딱 질색이야.”
“그런 사람을 누가 내켜하겠습니까.”
시종 냉담한 반응에 대찬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자네가 회장님의 아들인 서원웅 대리와 막역하단 건 내 알고 있네. 하지만 그게 만병통치약은 아니야. 착각하진 않았으면 좋겠군.”
“도리어 독약이 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대찬은 만몽이 했던 말을 상기했다.
가신의 덩치가 커져서 그 그늘이 주군을 가리는 꼴을 견디지 못하는 위인.
그러다 보니 사장은 대찬 자신을 필연적으로 못마땅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대찬은 그 근원적인 악감정을 해명해야 했다.
대찬의 대답이 김태준 사장은 흥미로웠다.
그는 희미한 웃음을 띠었다.
“좋아. 참을성 있게 들어 주지.”
“감사합니다.”
“말해 보게.”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전보된 직원들과 구 월드몰 출신 직원들 사이에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건 사실입니다.”
“나도 보고는 받고 있네.”
“이 상황을 타개할 필요성은 분명합니다.”
“타개해야지.”
“하지만 둘의 화합은 윗선에서 강요한다고 이뤄지는 게 아닙니다.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네.”
“연극을 좀 했으면 합니다.”
“…연극?”
사장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대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개 2년 차 사원이 드릴 만한 말씀은 아닌 줄 압니다. 하지만 한번 듣고 고려해 주셨으면 합니다.”
사장은 묵묵히 대찬을 바라보다가 대답을 내놨다.
“해 보게. 단, 신중해야 할 거야.”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신중할 단계는 넘은 것 같습니다. 저는 의견을 말씀드릴 뿐입니다. 처분에 대한 건 온전히 사장님께 내놓겠습니다.”
김태준 사장은 피식 웃으며 들을 준비를 했다.
대찬은 최대한 조리 있고 간결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김태준 사장은 어떤 지점에선 고개를 끄덕였고, 어떤 지점에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마다 대찬의 신경이 곤두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