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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112화 (111/556)

난 할 수 있어 112화

부사장실을 나오자마자 송희근 과장이 여전히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채로 대찬을 야단쳤다.

“조 대리! 이게 무슨 짓이야! 부사장님은 회사 넘버 투야. 자네는 넘버 몇쯤 될 거 같아?”

“죄송합니다, 과장님. 하지만…….”

송희근 과장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물론 부사장님 하는 말씀이야 가증스럽지. 그렇다고 거기다 대고 일개 대리가 땍땍거리는 게 말이나 돼?”

“과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전적으로 제 잘못입니다. 앞으로는 더 유의하겠습니다.”

“앞으로나마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야! 아무리 부사장이 실권도 없고 정년을 앞둔 자리라지만 이래서야 원……!”

송희근 과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찬을 앞서 걸어갔다.

대찬은 허공을 보며 참았던 한숨을 쉬고, 송희근 과장의 뒤를 따랐다.

자리로 돌아오니 부사장에게서 메일이 와 있었다.

-제목 : 전보 직원 일동 의견서

첨부파일 : 의견서_최종.hwp

의견서 보낼 테니 사장님께 잘 말씀드리길 바람.

자리는 내가 마련해 보도록 할 것.

건투를 빎. 이상. / 박만섭 필래마트 부사장

대찬은 속으로 분을 삭였다.

‘빛의 속도로 똥을 넘기시는군.’

답답한 마음이 담배를 불렀다.

그 메일을 송희근 과장도 전달 받았다.

얼굴이 사색이 된 건 당연했다.

송희근 과장이 대찬을 비상구로 불러냈다.

“어쩔 거야?”

“어쩌겠습니까. 한다고 했으니 사장님께 말씀드려야죠.”

“말이야 쉽지!”

“제가 저지른 일이니 제가 수습하겠습니다.”

대찬의 말에 송희근 과장의 귀가 쫑긋 섰다.

그러면서도 내색하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썼다.

“수, 수습하다니, 어떻게?”

“사장님과의 일정에 배석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그럼……!”

“제가 단독으로 사장님을 뵙고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송희근 과장은 침만 삼켰다.

대찬의 말은 그의 입장에서 더없이 반가웠지만, 그렇다고 면전에서 바로 땡큐를 외칠 정도로 몰염치한 사람은 아니었다.

대찬은 그를 배려하여 한 번 더 말했다.

“그래야 제 마음도 더 편해집니다. 그렇게 해 주십시오, 과장님.”

“그, 그럴까, 그럼…….”

“예. 고양이 목에 방울 걸러 가는 생쥐는 한 마리면 족하니까요.”

송희근 과장은 멋쩍게 웃으면서도 정해진 바를 무르지는 않았다.

그의 한결 가벼워진 표정이 대찬에게도 차라리 좋았다.

어찌 되었든 그와는 여러 해 몸을 부대껴야 하는 사이였다.

괜한 원한은 사지 않는 편이 좋았다.

대찬은 김태준 사장의 호출을 기다리며, 그 앞에서 뭐라 말해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했다.

그러던 차에 담배 피우러 갔던 김영우 차장이 돌아와서 사람들 다 들리도록 중얼거렸다.

“에이, 사람들 성질머리하고는…….”

“왜 그러세요?”

황경원 대리가 김영우 차장에게 물었다.

그러자 김영우 차장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담배 피우러 갔는데 저기 마케팅팀 사람들끼리 거의 주먹다짐할 기세로 싸우더라고.”

“무슨 일인데 회사에서 그렇게 험하게 싸워요?”

“필래에서 전보된 직원들이 우리 월드몰 사람들한테 쌓인 게 많나 봐.”

김영우 차장은 그렇게 말하면서 대찬 쪽을 흘끔 바라봤다.

‘우리 월드몰 사람들’이란 말에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황 대리의 시선도 자연 대찬에게 향했다.

물론 우호적인 눈빛은 아니었다.

황경원 대리는 흘끔흘끔 대찬을 의식하며 말했다.

“뭐가 쌓여요? 우리가 뭘 했다고? 어이가 없네.”

“뭐, 우리가 터줏대감님들 대접을 안 해 드려서 그런가 봐.”

“터줏대감님은 무슨. 피차 월급쟁이들끼리.”

황 대리는 껄렁하게 웃었다.

김영우 차장은 적당히 눙쳤다.

“사람마다 느끼는 건 다르니까.”

“그래요? 그럼 조 대리는 어떻게 느껴? 우리가 막 대접해 줬으면 좋겠어?”

황 대리는 대찬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다혈질 같았으면 바로 들이박을 정도로 얄미운 표정과 목소리였다.

물론 대찬은 다혈질이 아니었다.

“대접 안 바랍니다.”

“그렇지? 조 대리는 냉철하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니까.”

비꼬는 투였다.

황 대리는 그렇게 말하며 나머지 전보된 직원들을 냉철하지 못하고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집단으로 둔갑시켰다.

대찬은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조 대리, 그쪽 사람들 피해의식 있어? 이해하려고 해도 참 이해가 안 된단 말이야.”

“그쪽 사람들이라는 말씀이 참 낯서네요.”

대찬이 딱딱하게 받아치자 간이 작은 황 대리의 어깨가 움찔했다.

“아, 뭐 편의상 그런 거지, 편의상.”

“피해의식 그런 거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지 모르겠어. 일이 너무 편해서 그런가.”

황경원 대리가 자꾸 대찬의 심기를 건드렸다.

대찬의 관자놀이가 꿈틀거렸다.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대찬은 물었다.

“일이 편하세요?”

“으, 으응?”

“저희는 안 편해서요. 업무 처리 매뉴얼이 월드몰 방식으로 이뤄져서 캐치업 하기 어렵거든요. 저도 퇴근하고 매일 공부하고 있습니다.”

“아…….”

“그런 거 갖고 투정하고 싶진 않지만, 일이 편해서 딴 생각 한다는 식으로 말씀하시면 좀 섭섭하네요.”

“아니 뭐, 웃자고 한 얘기를 다큐로 받나…….”

대찬의 냉랭한 반응에 황경원 대리는 침을 꼴깍 삼켰다.

먼저 포문을 열었던 김영우 차장은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대찬은 그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다시 업무에 몰두했다.

황경원 대리는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대찬은 업무를 보며 자판을 두드리면서도 생각은 자꾸 콩밭으로 갔다.

‘문제가 어지간히 심각하긴 하네. 구 월드몰 직원들까지 저렇게 아우성을 칠 정도면.’

대찬의 시름이 깊어졌다.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던 손가락도 어느새 멈췄다.

중간에 멈춘 커서가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듯 계속 깜빡거렸지만, 대찬은 한참 동안이나 콩밭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렇게 무수한 고뇌 끝에 대찬은 한 가지 방법을 생각했다.

‘하지만 이 방법을 써먹으려면…….’

전제 조건이 필요했다.

‘김태준 사장에게, 서청수 회장에게, 그리고 이 회사에 박만섭 부사장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인물인가.’

그걸 알아야만 했다.

‘훗날까지 쓸모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 계획은 물거품이야. 만일 당장 폐기해도 좋은 사람이라면 걸어 볼 만해.’

박만섭 부사장은 필래유통에서 상무까지 지낸 인물이다.

평사원으로 입사한 사람이 임원이 되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그가 상무까지 올라간 건 필래유통의 주인인 서청규 사장의 눈에 들었기 때문일 터.

‘그렇다면 박만섭은 서청규의 사람이야.’

그런데 서청수 회장은 그런 박만섭을 필래마트로 전보시켜 부사장으로 삼았다.

‘왜지?’

도대체 박만섭에게 무슨 가치가 있기에 그에게 부사장 자리를 선뜻 내준 걸까.

도저히 써먹을 가망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속단은 금물이었다.

가장 빠른 방법은 김태준 사장이나 서청수 회장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런 일로 서청수 회장에게 사사롭게 전화를 걸 위치도 아니었고, 김태준 사장은 어쨌거나 이 일에 국한해서는 협상 상대였다.

‘어떻게든 혼자 힘으로 알아내야 해.’

대찬의 속이 복잡했다.

복잡한 속은 표정으로 드러났다.

“뽀이! 뭐가 그렇게 심각해?”

퇴근하는 길에 허운이 대찬을 붙잡았다.

“어, 형.”

“왜 세상 고민은 다 혼자 짊어진 것처럼 심각하냐구.”

“형이 제대로 봤네. 세상 고민은 나 혼자 다 짊어졌어.”

“뭐?”

대찬은 허운을 물끄러미 보다가 그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형, 나랑 맥주 한잔하자. 우리 집에서.”

“뭐? 나야 땡큐긴 하지만, 갑자기?”

“맥주에 갑자기가 어딨어. 땡기면 먹는 거지.”

대찬은 허운을 집으로 들였다.

그가 쥐포 2마리를 구워 가져오자 허운이 툴툴거렸다.

“커스 맥주도 짜증나는데 안주가 겨우 쥐포야? 나 배고파!”

“치킨 시켜 놨으니까 이거나 일단 물고 있어.”

“역시, 센스 있어.”

허운을 쥐포로 입막음을 한 대찬이 말했다.

“형, 인사팀에 박 과장 있잖아.”

“내가 우리 회사 인사팀까지 어떻게 알아? 정신 차리라구, 뽀이.”

“아니, 우리 회사 말고. 필래유통.”

“아, 네가 나 똥개 훈련시킨 날 주말에 집 찾아왔다고 호되게 혼내던 양반?”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 그 사람은 왜?”

“혹시 번호 알아?”

“어… 아마……?”

“알려 줘.”

그러던 차에 마침 주문한 치킨이 도착했다.

허운에게서 번호를 받은 대찬은 베란다로 나가면서 허운에게 말했다.

“그 치킨 다 형 거니까 마음껏 뜯고 있어.”

“뭐? 너는 안 먹어?”

“응. 아마 그럴 시간이 없을걸.”

“시간이라니?”

대찬은 어리둥절한 허운을 등지고 베란다의 문을 닫았다.

그리고 필래유통 인사팀의 박 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 번의 신호음 뒤에 박 과장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과장님. 저 필래마트의 조대찬 대리라고 합니다.”

“조 대리……? 누구더라?”

“일전에 주말에 불쑥 찾아뵈었다가 호되게 가르침 받았던 그…….”

“아아, 그 조 대리! 이봐, 친하지도 않은 상사한테 불쑥 전화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야. 문자를 남겼어야지.”

“죄송합니다. 급히 여쭤볼 일이 있어서.”

“나한테? 무슨 용건으로?”

“오늘 잠깐 뵐 수 있겠습니까? 잠깐이면 됩니다.”

대찬에게 시간은 금쪽같았다.

김태준 사장의 호출이 언제 떨어질지 모른다.

최대한 빨리 정보를 얻어야만 했다.

박 과장은 당연히 황당하다는 반응이었다.

“뭐? 이 시간에? 내가 왜 자네를 만나야 하지?”

“만나 주셔야만 할 겁니다.”

박 과장은 기막히다는 듯 웃었다.

“이봐, 뭐 잘못 먹었어?”

“시간 내주실 이유가 하등 없다고 생각하시죠.”

“알면서 그러는 건, 지금 나 놀리나?”

“이유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지금 이 통화 녹음되고 있어. 허튼소리 했다가는 당장 자네 모가지부터 날릴 거야.”

“예. 아마 그 녹음 파일 전화 끊자마자 지우시게 될 겁니다. 서청규 사장 장학금 부정 수급에 동조하셨죠?”

“뭐, 뭐라고……!”

“제가 과장님 찾아뵌 날 직접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사실이니까 부인하지 마십시오.”

이미 서청수 회장과 서청규 사장 사이에 해결된 일이었지만, 서청규 사장이 그런 부분을 직원들에게 친절히 설명했을 리 없다.

박 과장은 그저 지나가는 일로만 여기고 있을 것이다.

“…….”

“과장님 댁과 제가 사는 일산, 딱 그 중간에서 만나죠. 주소는 보내 드리겠습니다.”

“…알았어.”

“혹시 제가 부정 수급 사실을 알고 있다고 동지들과 머리 맞댈 생각은 마십시오. 제가 사실을 알게 만든 장본인은 다름 아닌 박 과장님이시니까요. 말 퍼트리셔 봤자 과장님은 원망만 사게 되실 겁니다.”

“알았다고.”

“회장님까지 알고 계십니다.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마시길 바랍니다.”

대찬은 서청수 회장까지 팔아 박 과장의 입막음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대찬은 베란다 난간에 몸을 의지하고 한숨을 쉬었다.

“휴우.”

팔자에도 없는 협박까지 하다니, 대찬은 짜증이 돋아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그는 도로 방으로 돌아와 맥주 한 잔을 시원하게 비우고 외투를 입었다.

그걸 본 허운이 순진한 눈을 깜빡였다.

“어디 가?”

“잠깐 일이 생겨서. TV 보면서 먹고 있어. 금방 다녀올게.”

대찬의 폼이 평소보다 심각했다.

허운은 더 묻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찬은 택시를 잡아타고 박 과장과의 약속 장소로 향했다.

카페도 아니고 남들 눈을 피해 지하의 허름한 다방에서 둘은 만났다.

늙은 사내 하나가 늙은 마담을 붙들고 월남전의 무용담을 떠들어 대는, 비밀얘기를 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박 과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자네 취향 한번 독특하군. 이런 칙칙한 다방을 다 고르고.”

“어차피 잠깐이면 되니까요.”

“용건이 뭐야?”

“박만섭 부사장님 말입니다, 회장님께선 왜 그분을 부사장에 앉혔을까요? 유통에서 상무까지 지냈으면 서청규 사장님 사람 아닙니까?”

“내가 높으신 분의 곡절을 어찌 아나?”

“왜 그러십니까. 인사팀에서 잔뼈가 굵으시고, 사장님이 부정 수급까지 턱 맡길 정도로 아끼시는 분이잖습니까. 모르실 리가요.”

“정말 몰라.”

“원하는 대답을 못 얻으면 이 건 터트리고 저도 폭사하렵니다. 전 그래도 친구 아버지가 회장님이니 죽지야 않겠지만, 과장님은 쇠고랑 차요.”

“개자식.”

“좋은 스타트네요.”

박 과장은 피로한 얼굴을 손바닥으로 비비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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