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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114화 (113/556)

난 할 수 있어 114화

대찬의 말을 다 들은 사장은 언뜻언뜻 마른 웃음을 지었다.

“자네.”

“네, 사장님.”

“상상 이상으로 건방지군?”

대찬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세상에, 부사장을 제물로 삼으라니. 제정신인가?”

“무리가 되는 지점이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내가 이걸 받아들일 것 같은가?”

대찬은 공손하면서도 강단 있게 대답했다.

“외람되지만, 네, 받아들이실 것 같습니다.”

“어째서지?”

“부사장님의 가치가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말에 김태준 사장은 잠시 어안이 벙벙하다가 폭소했다.

“이봐! 아무리 박만섭이가 형편없어도 가치를 따지자면 자네의 백 곱절은 넘어! 어디서 그런 건방지고 해괴한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예, 물론 저보다야 그렇지요.”

“당연하지!”

“하지만 이 일로 직원 간의 갈등이 해소되고, 서원웅 대리까지 수면 위로 띄울 수 있다면, 그것에 비하자면 부사장님의 가치는 부사장님 앞의 저만큼이나 초라해지지 않습니까.”

“대체 뭘 믿고 그딴 흰소리를 자신 있게 지껄이는 건가?”

대찬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제 생각이 틀렸습니까?”

“그건 혼자서 좀 더 따져 봐야겠어.”

‘됐다.’

대찬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누가 들어도 헛소리였다.

게다가 그걸 지껄이는 자가 일개 대리다.

퇴짜를 맞을 거면 즉석에서 맞았을 것이다.

김태준 사장이 좀 더 따져 보겠다고 했으니, 이건 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대찬은 확신했다.

김태준 사장은 픽 웃으며 말했다.

“생각 자체는 되바라지지만 괜찮아. 제안자가 풋내기란 걸 빼면 고려해 봄 직해. 과감하고 파격적이야.”

“사장님께서 무엇을 결정하시든 그 판단이 옳을 것입니다.”

“당연히 그럴 걸세. 알았어. 나가 봐.”

대찬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직각으로 허리를 굽혔다.

“말단에게 오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김태준 사장은 나가라는 손짓으로 화답했다.

대찬에게는 눈도 맞춰 주지 않았다.

대찬은 침을 꼴깍 삼키며 사장실 밖으로 나갔다.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히 사장실 문을 닫았다.

대찬은 그 문에 살짝 몸을 기대며 고개를 젖혔다.

후우, 절로 깊은 한숨이 뿜어졌다.

다리에 힘이 풀려 대찬은 한동안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그런 자신을 비서가 빤히 바라봤다.

대찬의 시선이 그녀와 마주쳤다.

대찬은 민망하게 웃으며 반듯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종종걸음으로 사장실에서 서둘러 멀어졌다.

사장실에 혼자 남은 김태준 사장은 뒷짐을 지고 창밖을 바라봤다.

그는 묵묵히 대찬의 말을 곱씹었다.

그러다 피식 웃었다.

“건방진 새끼…….”

그렇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마냥 부정적이지만은 않았다.

며칠 뒤, 대찬은 김태준 사장에게서 이메일을 받았다.

내용은 짧았다.

-의견을 수용하겠음.

대찬은 그 짧은 문장에서 전율을 느꼈다.

며칠 뒤.

박만섭 부사장은 정례 임원회의 전 사장과 의견을 조율하기 위해 사장실을 찾았다.

매주 반복하는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예전과는 달리 사장실에는 손님이 찾아와 있었다.

“미스 최, 누구야?”

비서는 미스 최로 불리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하지만 비서이기에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그룹 본사 법무팀이 와 있습니다.”

“버, 법무팀?”

“네. 저는 사장님 심부름을 다녀와야 해서 잠깐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비서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떴다.

박만섭 부사장의 눈이 커졌다.

“꼭두새벽부터 법무팀이라니…….”

이례적인 일에 부사장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비서도 없겠다, 그는 슬금슬금 사장실 쪽에 귀를 가까이 가져갔다.

마침 사장실의 문도 살짝 열려 있었다.

김태준 사장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당연히 연봉 삭감은 필수야. 어떻게 그 많은 돈을 지불하나? 물에 빠진 거 건져 줬는데 그 정도 희생도 감수 못해?”

“저희가 합법적인 수단을 백방으로 알아보겠습니다.”

법무팀장의 깍듯한 목소리가 뒤따랐다.

“그래. 월드몰 그것들 아주 배가 불렀어, 배가 불렀다고.”

“재무부장 역시 과도한 인건비 지출에 대해서는 시정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연하지. 산수 문제잖나.”

‘월드몰 출신들 연봉을 깎겠다고……?’

박만섭 부사장의 귀가 쫑긋 섰다.

월드몰 직원에 대한 완전한 고용 승계는 필래마트의 중요 인수 조건이었다.

당연히 임금 유지 역시 고용 승계에 포함되었다.

“혹시 따로 지시할 사항은 없으십니까?”

“아, 이번에 월드몰 출신들 임금 조정하면서 늙은 사람들도 좀 손봤으면 하는데.”

“늙은 사람들이라뇨?”

“박만섭, 이동수.”

콕 집어 자신이 지목되자 박만섭 부사장의 몸이 휘청했다.

이동수는 박만섭 부사장의 한 기수 후배로, 부사장처럼 전보된 직원이었다.

필래유통과 자주 협업에 나서는 필래식품의 상무이사 출신이었다.

“그분들을요……?”

“괜찮을 거 같아서 데려왔더니 쓸모도 없이 밥만 축내. 회장님 생각도 같아. 같이 엮어서 정리할 방법을 찾아봐.”

“정말입니까?”

“내가 같은 말 반복하기 싫어하는 거 알잖나.”

김태준 사장은 분명한 의지를 표했다.

“알겠습니다.”

법무팀장의 순종적인 목소리가 따랐다.

박만섭은 아찔해졌다.

그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움직여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김태준 사장은 개인 컴퓨터에 비치는 CCTV 화면으로 박만섭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는 법무팀장을 마주 보며 웃었다.

박만섭은 한달음에 이동수에게 갔다.

이동수는 해외영업본부장을 맡고 있었다.

본부장이란 허울만 좋았다.

필래마트는 국내 영업에 이제 막 첫발을 뗀 참이었다.

해외영업본부장은 박만섭의 상생경영본부장 직함만큼이나 무가치했다.

“야, 동수야! 동수야!”

“부사장 체면이 있지, 왜 그렇게 경망스럽게 뛰어오세요.”

둘은 특별히 친밀한 관계는 아니었다.

그래도 같은 회사에서 오래 알고 지냈으니 격의는 없었다.

“큰일 났다! 우리 다 죽었어!”

“왜 그래요? 식은땀까지 다 흘리고?”

“김태준 사장이 우릴 자를 심산이야!”

“예에?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요?”

“월드몰 출신 직원들 임금 삭감하는 김에 우리까지 자를 모양이야! 내가 방금 사장실에서 법무팀장이랑 얘기하는 거 듣고 오는 길이야!”

그러자 이동수도 펄쩍 뛰었다.

“그, 그게 정말이에요? 아니, 월드몰 직원들 임금은 어떻게 깎는데? 완전한 고용 승계가 인수 조건이었는데?”

“지금 그게 중요해? 우리 모가지가 날아가게 생겼는데!”

“아이고, 아이고…….”

이동수도 앓는 소리를 냈다.

“이, 이를 어쩌나? 응? 이를 어째!”

“새, 생각을 좀 해 봅시다!”

둘은 직책만 높았지, 아무 실권이 없었다.

사장의 의지가 분명하다면 옷을 벗을 수밖에 없었다.

한참 고심하던 이동수 본부장이 박만섭 부사장에게 말했다.

“형님, 우리가 안 잘리려면 뭉쳐야 돼요!”

“우린 아무 힘도 없는데 우리 둘이 뭉쳐서 뭘 어째?”

“우리 둘이 말고!”

“그, 그럼?”

“월드몰 애들 임금도 삭감한다며. 걔네랑 한목소리를 내는 거지.”

이동수의 말에 박만섭의 눈이 빛났다.

“그거 쓸 만하겠네! 걔네들이 일제히 항의하면 사장도 백기 투항 할 테니까.”

“그렇지요.”

“조, 좋아. 그럼 자네가 월드몰 쪽 사람들 좀 만나야겠어.”

그 와중에 자기가 나서지 않고 이동수에게 떠넘겼다.

이동수는 피식 웃으면서도 박만섭의 청을 뿌리치진 않았다.

“알았어요. 그럼 내가 그쪽에다가 얘기를 흘리죠.”

박만섭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목젖은 심하게 꿈틀거렸다.

이동수를 통해 소문은 일파만파 퍼졌다.

자신의 밥벌이가 달린 문제였다.

월드몰 출신 직원들은 삽시간에 불안에 휩싸였다.

대찬이 소속된 전략기획실 역시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김영우 차장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이,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는 게 어디 있나!”

고고한 학처럼 굴던 김영우 차장도 임금 삭감 소식에 호들갑을 떨었다.

대찬은 그를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당장 파업해야 돼요!”

황경원 대리의 반응 역시 날카로웠다.

김산호, 오다혜 사원 역시 이 건에는 민감했다.

“진짜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말도 안 돼!”

홍은주 역시 말은 안 했지만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대찬은 그들의 반응을 가만히 관찰했다.

시일이 경과될수록 분위기는 점점 심각해졌다.

어떻게든 모종의 움직임을 보여야 한다는 주장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먼저 나서는 이는 없었다.

구조적으로 힘들었다.

월드몰 출신이 직원의 대다수였지만 대개 실무자였다.

임원급은 매우 적었다.

실무자급은 윗선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총대를 멨다가 완전히 찍히면 그것으로 회사 생활은 끝이다.

그렇기에 바닥 민심은 들끓었지만 수면 위로 튀어 오르지는 않았다.

팀원들의 불안과 걱정을 뒤로하고 대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경원 대리는 대찬의 뒷모습을 쏘아보며 말했다.

“조 대리는 완전 남의 일이네.”

그 말에 김영우 차장부터 홍은주까지, 대찬을 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대찬은 뒤통수에서 그 시선들이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는 건너편의 서원웅에게 갔다.

손가락으로 서원웅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어, 대찬아, 왜?”

대찬은 말없이 바깥쪽으로 검지를 흔들었다.

나오라는 뜻이었다.

비상구로 서원웅을 이끈 대찬은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했다.

그러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소문 들었지?”

“월드몰 출신 직원들 임금 조정한다는 거? 응, 들었어.”

“답답해 미치는 눈치지? 불안해 죽겠는데 총대 메지는 못하겠고.”

대찬의 물음에 서원웅은 얼굴을 구겼다.

“지금 고소하다는 거야? 너 심보 못되게 쓰면 안 돼.”

“누가 그렇대? 생사람 잡지 마.”

“그럼 그 얘긴 갑자기 왜 꺼내는데? 그렇게 능글맞게 웃으면서.”

대찬은 서원웅의 어깨를 잡고 그의 귀에 입을 가까이 가져갔다.

“네가 대신 총대 메라.”

“…뭐?”

뜬금없는 말에 서원웅의 얼굴이 더 구겨졌다.

그 역시 월드몰 출신들에 대한 악감정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을 위해서 총대를 메라니.

아무리 자신이 신뢰해 마지않는 대찬이라지만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대찬도 서원웅의 감정을 알고 있었다.

“네가 아니면 나설 사람이 없어.”

“왜 없어? 아니, 그 전에 내가 나설 주제가 못 되잖아. 난 일개 대리야. 너랑 다른 게 없어.”

“왜 다를 게 없어?”

“또 아버지를 들먹이려고 그러는 거야?”

서원웅은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럼에도 대찬의 표정은 편안했다.

“응. 또 회장님 들먹이려고 그런다, 왜.”

“그냥 평범하게 있고 싶어.”

그러자 대찬은 얼굴을 굳혔다.

“그럴 거였으면 필래 말고 다른 회사에 들어갔어야지.”

“…어?”

“네가 필래에 들어온 이상 너는 평범할 수 없어. 평범할 자격이 없어.”

대찬의 말에 서원웅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평범할 자격이 없다고……?”

“네가 속전속결로 대리가 된 건, 앞으로 마주할 특권들 중 극히 일부야. 앞으로 어마어마한 특권이 주어지겠지. 그리고 반대급부로 어마어마한 함정도 네 앞에 놓여 있어.”

“…….”

“너는 다른 직원들과 달라. 행동도 다르게 해야 돼. 어영부영 기회 못 잡으면 함정이 널 잡아먹을 거야.”

“하, 하지만……!”

서원웅의 말을 대찬은 싹둑 잘랐다.

“대신 제대로 기회를 틀어쥐면 남들이 누리지 못할 특권이 오롯이 네 몫이지.”

대찬의 뜬금없는 제안에 감정이 달아올랐던 서원웅은 이어지는 침착한 말에 감정을 가라앉혔다.

그는 대찬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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