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6
236화
* * *
“커헉!”
말론은 피를 토하며 천천히 아래를 내려다봤다.
영롱한 빛을 가진 쇠사슬이 온몸 구석구석을 죄여 오고 속박하고 있다.
손가락 하나 떼기조차, 아니 몸 어디에도 감각 같은 게 느껴지지를 않는다.
뉴 빌드에 속한 이후로 이런 무기력감을 느껴본 적이 있었던가?
죽을 거란 생각조차 못해봤다.
‘선지자께서조차 그를 막지 못하는가?’
고개를 돌릴 수 없으니 선지자가 어떻게 됐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다만, 고요한 것을 보니 선지자조차 반항 하지 못하고 당한 게 분명할 것이다.
점점 희미해지는 의식.
말론은 피를 흘리며 눈을 굴렸다.
하지만 웃음이 나온다.
저벅, 다가온 찬영이 물었다.
“왜 웃지?”
“……이것이 끝이라 생각하는 것 같아서 웃었다.”
“올드 원은 신이니까?”
찬영은 대답 없는 말론을 내려다보았다. 또 똑같은 대답이다.
“너희들은 늘, 위기에 봉착하면 같은 얘기들을 늘어놓는군. 멸망, 올드 원 등의 것들 말이야. 그래, 너희들 말대로 그럴지도 모르지. 반대의 상황이 될 지도 몰라. 그런데…….”
찬영이 말론의 턱을 잡아 치켜들었다.
내려다본 시선 끝에 말론의 눈동자가 보였다.
“그게, 뭐?”
말론이 인상을 찡그렸다.
“왜, 원했던 반응이 아닌가? 두려워하며 걱정할 줄 알았어?”
“쿨럭, 언젠가 그렇게 될 거다. 그러니 엎드려 경배해라. 선지자께 참회하고…….”
찬영은 대답 대신 말론을 들여다보았다.
놈은 두려워하고 있다.
‘네가 진짜 걱정하는 게 뭔지 알아볼까?’
“심연의 눈”
말론의 두려움이 담긴 생각들이 라디오처럼 들려왔다.
‘두렵다, 놈이 날 죽일 거야.’
‘설마 놈이 멸망을 막을까?
놈의 마음속에 의심의 싹이 트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놈은 애써 의심을 지우고 있었다.
‘되살아나 반드시 멸망 올드 원께서 약조한 다음 시대의 신인류가 되어야 할진데…….’
‘영원히 사는 선지자들이 되어야만 해. 그들이 알고 있는 ‘영원의 주문’을 알아야 리치가 될 수 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그들에게 충성했다면……! 신인류 중에서도 가장 최상위 신인류가 되었을 텐데!’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선지자께서는 다시 일어날 터. 이렇게 맥없이 당하진 않을 것이야.’
“신인류라……. 하긴, 이제껏 다른 녀석들과 다르게 넌 차원의 돌이 이식되어 있지 않았지.”
마음속을 들여다본 것 같은 질문에 말론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놈도 신인류에 대해 알고 있었던 건가?’
‘추측일 것이다. 나를 떠보려는 것이야.’
‘돌에는 여전히 위험이 많다는 걸 놈이 아는가?’
‘모른다. 놈은 그것까진 알지 못해.’
‘돌이 올드 원의 권능을 조금 끌어당기는 매개일 뿐, 그릇은 오로지 생명체여야 가능하다.’
‘설마 놈이 그걸 알까? 놈은 더욱 날뛸 거다. 가만, 그럼 놈이 선지자들이 리치를 택한 이유까지 안다는 얘기인데?’
‘육체를 뛰어넘은 초월적 존재인 리치가 되어야만 올드 원께 부여 받은 힘을 더 자유롭게 견디고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놈도 안다는 것인가?’
‘그럴 리가 없다. 선지자들께서는 자신들의 고귀함을 지키고자 영원의 주문을 믿는 자에게만 부여하셨어.’
‘이것마저도 알고 있는 자가 전무한 얘기다. 그런데 놈은 어떻게?’
“네가 얘기해 줬지.”
이제 자신은 많은 진실을 알고 있다.
‘남은 건 올드 원이 감춰진 목적만이 있을 뿐…….’
하지만 말론을 통해 그 본질적인 진실에 조금 다가가게 된 것 같다.
오래 전부터 들었던 ‘신인류.’
“너는 선지자들과 같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세상을 지배하고 싶었던 건가? 니들이 믿는 신의 힘을 빌리면 가능하니까?”
“네, 네놈이 어떻게?”
“멸망을 그토록 원하는 이유가 신념도 아닌, 그저 너희들의 욕심 때문이었다니…….”
말론은 입으로 피를 줄줄 흘리며 넋을 잃었다.
“왜, 올드 원이 너희들만 행성에 남겨 주겠다고 하던가? 모두를 노예처럼 쓰게 해 주겠다고?”
입도 벙긋 않는 말론의 생각이 계속 읽혀졌다.
‘놈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어떻게 된 것이지?’
‘설마, 놈도 본 것인가? 멸망이 오게 될 세상의 모습을…….’
‘잠깐……. 설마……?’
“네놈, 혹시 내 생각을 읽고 있는 것이냐?”
힘겹게 묻는 말론.
놈의 눈빛에 경악이 실려 있는 게 보인다.
“그래, 넌 네 의도와 상관없이 올드 원을 배신한 거지. 올드 원이 신이라면 네게 자신을 배신한 대가를 치르게 하지 않을까? 너에겐…….”
찬영은 말론의 온몸을 꿰뚫은 룸을 거둬들였다.
욕심으로 세상을 멸망까지 몰아넣을 준비가 된 미치광이를 쉽게 죽이고 싶지 않다.
“신인류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 가장 완벽한 벌이겠지.”
털썩!
수백의 쇠사슬에 몸을 지탱하고 있던 말론이 그 힘이 사라지자 바닥을 뒹굴었다.
“크아아! 크흐흑!”
제대로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 목청으로 울부짖는 말론.
“아니다, 그럴 리가 없어! 크흐흐! 크흐흐흑!”
미쳐버린 듯 울음과 실소를 뒤섞어 터트린 말론에게 찬영은 한 발 물러났다.
어차피 그는 죽어 갈 것이다.
“그 전까지……. 편히 죽지 마라.”
평생 해온 일들을 후회하게끔.
그 순간, 선지자를 꿰뚫고 있었던 쇠사슬들이 꿈틀거렸다.
‘죽은 게 아니었던 건가?’
말론과 달리 격렬한 반항을 했던 선지자.
그는 말론보다 훨씬 거센 반항 때문에 형체도 제대로 남지 않을 정도로 공격당했다.
‘한데 저건…….’
마치, 고치 같다.
말론과 대화 하는 사이 무슨 짓을 했는지 번데기처럼 고치 형태가 된 것이다.
이어서 들려오는 고치를 통해 들려오는 놈의 음성.
-네놈의 여유와 오만이 목숨을 앗아갈 것이다. 이 시간부로…….
푸욱!
동시에 고치에서 거뭇거뭇한 다리가 튀어나왔다.
덩달아 돌의 힘이 강하게 느껴졌다.
‘또 변이인가?’
이미 이전의 선지자를 상대해본 경험은 그의 변화를 금세 짐작하게 만들었다.
푸드득!
예상대로 껍질을 벗고 나오기 시작하는 보블.
서서히 등부터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그의 형체는 양옆에 수백 개의 거미 다리를 가진 지네였다.
쭉쭉 뻗어 제단 천장까지 솟아오르는 지네.
머리를 가득 메운 커다란 노란색 눈동자 1개가 섬뜩하게 찬영을 내려다보았다.
-주그 님의 권능에 대항하지 마라.
지네의 노란색 눈동자 안에서 보블의 얼굴이 삐죽 튀어나왔다.
하나 찬영은 그의 크기에 조금도 압도되지 않았다.
오히려, 놈을 향해 말했다.
“방금 한 얘기, 그대로 돌려주지. 저항해 봐야 비참할 거다.”
보블은 대답 대신 보랏빛 광선을 일으켰다.
콰콰!
단숨에 주변의 것을 빨아들이며 일직선으로 날아오는 광선.
찬영은 룸으로 방패를 만들어 광선에 대항했다.
‘음?’
그때 광선의 변화가 느껴졌다.
광선이 지난 자리 위로 끈적한 점액이 남은 것이다.
치이익!
하얀 연기를 일으키며 주변으로 퍼지는 독성.
여기에 끈적이는 점액들 안에서 손톱만한 거미들이 하나둘 모습을 비추기 시작했다.
-키에엑!
포스 알데바란의 헬멧 안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찬영의 시야로 조그만 거미들이 소리를 내며 거미줄을 쏘아 대기 시작했다.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수백, 수천 마리가 거미줄과 독성을 일으켜 찬영을 통째로 고치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크하하!
눈 깜짝할 새 이동이 불가능하게 되어 버린 찬영의 몸이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찬영을 보며 보블이 소리쳤다.
-멸망을 거역할 순 없는 법! 신의 뜻을 어긴 자에 대한 벌을 받을 때가 됐다, 사명!
찬영에게선 어떤 대답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보블은 더욱 의기양양해져 입안에서 녹색 점액들을 찬영의 전신 위로 쏟아냈다.
-끝이다, 사명.
포스 알데바란 곳곳에서 연기가 나온 건 바로 그때였다.
치이익!
수증기처럼 전신에서 솟아오른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라 단숨에 점액과 고치 등을 감싸 안아버린 것이다.
화르륵!
이어서 연기가 찰나 간 초고열로 타올랐다.
화르륵!
나선형으로 휘돌기 시작하는 화염 고리.
그 안에서 살아남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키에엑!
찬영을 괴롭혔던 손톱만한 거미들조차 도망갈 틈도 없이 전부, 형체를 잃고 녹아버렸다.
-네놈……. 어떻게 견딜 수 있었던 거지?
심연의 눈을 통해 보블의 생각들이 전해져 왔다.
‘주그 님의 증식의 권능을 놈이 견뎌 냈다는 것인가?’
‘놈이 인간을 초월해 신의 영역에 발을 디뎠다는 건가?’
‘그럴 리가 없다.’
끊임없는 부정 속에 빠진 놈의 생각들이었다.
들을 것도 없었다.
“신의 힘을 받아들인 건 너희들만이 아니야.”
자신 역시 잊힌 별들의 힘을 받아들인 존재.
아니, 오히려 그릇에 불과한 그들과는 다른 스스로의 의지로 성장해온 존재.
“그러니 데려와라.”
찬영의 눈동자에 황금빛 서기가 감돌았다.
“너희들의 주인을.”
화르륵!
단숨에 온몸이 불꽃으로 물든 찬영이 땅을 박찼다.
쐐액!
공격의 시작은 놈의 머리.
콰직!
녹색 점액이 튀어오르고, 움켜쥔 주먹을 들었다.
화르륵!
초고열로 타오르는 룸의 불씨.
쐐액!
그 순간 기형적으로 꺾인 보블의 꼬리가 날아왔다.
함께 쏟아지는 거센 풍압!
츠읏.
찬영이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게 아니라 어느새 꼬리 위를 유유히 걷고 있었던 것이다.
중력 따윈 가볍게 무시한 듯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꼬리 위를 걷던 찬영의 주먹이 다시 불타기 시작했다.
찬영은 주먹으로 그의 꼬리 한가운데를 내리찍었다.
단숨에 절단 나며 불타오르기 시작한 꼬리.
-크아악!
권능은 올드 원에게 빌린다 하더라도 모든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건 보블이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보블은 잘려 나간 몸통을 좌우로 움직이며, 다시 손톱만 한 거미들을 입안에서 토해냈다.
그러자 잘려 나간 꼬리로 기어 나온 거미들이 끊임없이 알을 낳으며, 거미의 거미가 또 다른 거미의 거미가 서로를 집어삼키고 몸을 키워 보블의 일부가 되어 갔다.
쿠쿠쿵!
금세 복원된 보블의 꼬리.
하나 크기는 아까보다 두 배는 커져 있었다.
‘이그는 재생을, 쥬그라는 놈은 스스로를 끊임없이 증식하는 건가?’
심지어 쥬그는 아까보다 훨씬 강해진 듯하다.
-크큭, 네놈도 결국 쥬그 님의 권능 앞에선 무기력해지나 보구나. 자, 날 더 베고 태워 봐라. 어차피 너의 모든 힘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 것이다.
다시 몸을 일으키며, 찬영을 내려다보는 보블.
찬영은 그 시선을 마주하며 찰나 간 지나간 전투가 떠올랐다.
놈의 말대로 재생이나 증식이나 둘 모두 까다로운 상대인 건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때와 다른 건, 그간의 경험으로 인해 새로운 차원의 능력이 생겼다는 것.
그렇게 매번 위험한 싸움을 통해 자신은 강해져 왔다.
녀석이 패배하는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놈이 증식하듯…….
‘나는 매순간 더 성장하니까.’
찬영은 불나방처럼 다시 달려드는 보블을 보며 조용히 두 손을 들어올렸다.
‘소멸.’
동시에 피어오르는 어마어마한 양의 인력.
달려들던 보블의 몸통이 좌우로 흔들리며 찬영의 손에 빠르게 이끌려 가기 시작했다.
-어, 어찌! 아, 안 돼!
점액을 뱉고 거미들을 증식해도 보블의 견고하던 몸통은 분열을 늦추지 못했다.
콰드득!
그것도 모자라 한순간에 찌그러져 가는 거대한 몸통.
보블이 신전 안에서 소멸되어 버린 건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였다.
아직 휘몰아치는 풍압과 그가 무너트린 흔적만이 보블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줄 뿐.
그렇게 완벽히 소멸된 상황을 보고나서야 찬영도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었다.
“후우……. 후우.”
놈이 가지고 있던 차원의 돌로 인해 룸이 또 다시 상승했다는 창이 연달아 뜬다.
끝인 것이다.
하지만…….
찬영은 움직이지 않고 잠시 홀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룸을 사용하는 초월적 존재가 된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
몸의 변화가 조금씩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 사라지고 있는 건가?”
찬영은 소멸의 사용과 함께 잠시 흐릿해졌던 손을 내려다보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베아트리체에게조차 이런 일에 대한 언급 같은 건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하긴, 그녀는 그저 전대 갓피스.
룸의 힘을 손에 넣고 사명으로 각성한 것은 오로지 자신뿐이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건 룸의 힘을 사용하는 존재가 하나 더 있다는 것.
‘판도라.’
그녀에게 조언을 구해서라도 이 현상을 해결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다면 룸의 힘을 사용하는 게, 앞으로 어려워질 테니까…….
찬영의 눈빛이 착잡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