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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자동보상-235화 (235/248)

# 235

235화

* * *

“라르 님, 머지않아 여왕께서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그 때까지만 버티면 됩니다!”

브루파가 외쳤다.

스피릿에 견디느라 머리가 새하얗게 세어 버린 라르는 대답 대신 깊게 숨을 들이 내쉬었다.

사실 이젠 이렇게 서 있는 것마저도 힘든 상태.

스피릿 소울을 소환하고자 함께 모였던 샤먼들 모두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을 정도였으니…….

“브루파, 나는 걱정 말게나. 나의 죽음은 아직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네.”

“부디 그렇게 되길 바라지만…….”

상황이 좋진 않다.

샤먼들이 소환한 스피릿 소울이 신전의 제단에 깔려 있긴 하나 안까지 밀려든 적들의 병력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키에엑!

네 발 달린 무면의 몬스터들이 끊임없이 발톱을 세워 달려들고, 그 뒤에선 암흑 마력이 깃든 마법들이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쾅! 쾅!

오랜 세월 토르잔 왕국의 용사들이었던 영혼들의 형태를 띤, 스피릿 소울들이 어김없이 전사들의 앞을 가로막아 줬다.

새하얀 수백의 영혼 전사들은 어떤 전사들보다 용맹하고, 명예롭게 제단을 지켰다.

하지만 드넓은 신전 안으로 밀려든 적들의 숫자는 그야말로 끝이 보이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

“뭘 하려는 것이냐……?”

적의 대열 뒤에서 3m에 이르는 보랏빛 돌을 짊어지고 오는 적들이 보였다.

* * *

“빨리 움직여라! 시간이 없다!”

말론은 차원의 돌을 줄에 묶어 짊어지고 가는 교도들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꽤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제법 반항을 한단 말이지.’

아직도 앞을 가로막고 있는 스피릿 소울 때문이다.

“네놈들을 전부 소멸시켜 주지.”

어차피 원하는 건 저들이 지키고 있는 향로일 뿐, 놈들도 자신들의 목숨보다 그걸 더 원하진 않을 것이다.

“차원의 돌을 응축시켜라!”

적당한 자리에 돌을 세우게 한 말론은 곧바로 폭발 준비에 들어갔다.

그 후 난전에 이르는 계단 위로 검은 연기가 되어 날아올랐다.

쐐액!

시야에 브루파의 모습이 보일 때쯤 말론이 연기 사이로 얼굴을 드러내며 외쳤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이곳은 폭발할 것이다! 문을 막아버릴 테니, 너희는 흔적도 남지 않고 저 향로와 함께 사라지겠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쓸데없는 반항은 그만하고 너희들이 가진 향로를 내놓아라!”

브루파는 우두커니 선 채 라르를 바라보았다.

“라르 님.”

“나의 뜻은 이미 알 것일세. 아니 그런가, 브루파?”

주름진 얼굴로 미소 짓는 그녀에게 브루파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옆에 세워 둔 두 자루의 창 중 한 자루를 으스러지도록 고쳐 쥔 브루파.

대답은 이걸로 충분했다.

쐐액!

허공에 떠 있는 말론을 향해 브루파의 창이 날아갔다.

빠르게 반으로 흩어지며 창을 피해 낸 말론.

그의 눈빛에 분노가 일렁였다.

“목숨을 살려 주겠다는데, 기꺼이 죽으려고 용을 쓰는구나!”

“닥쳐라! 오랜 세월 수호해 온 신전의 것은 단 하나도 네놈들에게 내줄 수 없다!”

결연한 브루파.

말론도 더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다시 대열 후미로 돌아가 차원의 돌 곁에 착지했다.

저벅.

“충전은 끝났느냐?”

이어서 말론이 다른 교도에게 물었다.

기다렸다는 듯 교도가 말론의 앞에 검은색 세이버를 내밀었다.

“마음에 드는군.”

팔등에 착용하는 초승달 형태의 세이버의 칼날은 그의 팔꿈치를 넘어 길게 뻗어 있었다.

힐끗 매끈한 날을 쳐다본 말론은 세이버 한가운데에 박힌 차원의 돌을 바라보았다.

사실 이 세이버는 검은 별의 제작을 보며 감명 받아 따로 제작해온 아티팩트였다.

크기만 봐도 검은 별과 동일한 파괴력을 낼 순 없지만, 한 가운데 박힌 차원의 돌에서 쏘아지는 광선은 검은 별의 위력을 어느 정도 구현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도 남김없이 죽여 주마.”

말론이 이를 갈며 스피릿 소울들에게 다가갔다.

* * *

같은 시각, 찬영은 고민에 휩싸였다.

‘놈은 내가 향로를 재생시킬 줄 알았던 거야.’

하지만 말이 안 된다.

향로가 왕관 조각을 결합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건 자신 또한 방금 전 안 사실이다.

‘그런데 놈들 역시 알고 있다고……?’

의구심이 흐르는 찬영의 시선에 보블이 입가에 묘한 미소를 보였다.

“네놈 눈을 보니 꽤나 놀란 모양이구나.”

“향로가 복원될 거라는 걸 어떻게 안 거지?”

“그것이 복원되었나? 흐음, 그럼 정령왕의 불꽃이 돌아온 것도 모두 네놈의 짓이었던 거군. 말론 말대로 아주 거슬리는 놈이로구나.”

오히려 되묻는 보블.

그로 인해 찬영은 보블이 방금 신전 안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걸 눈치챘다.

그렇다면 결국 그들이 향로를 탈취한 건 모든 걸 예상하고 행동한 게 아니라는 거다.

“그저 시기가 절묘했던 거야. 너희는 하필 내가 이곳에 있을 줄 예상 못 했던 거지. 내가 너희를 방해한다는 것도 확실한 시기를 몰랐을 거고……. 마침 예언 중에 향로에 관한 얘기가 있어 훔치려 했던 것이었을 뿐!”

듣고 있던 보블의 미소가 짙어졌다.

“맞다. 이미 오래 전부터 토르잔의 내분과 향로 탈취 계획은 계속 진행되었던 일이니라. 그러니…….”

보블의 눈이 보랏빛으로 번쩍였다.

“종말의 운명을 받아들여라.”

이어서 검은 연기가 되어 날아오는 보블.

‘날 이곳에 붙잡아 두려는 거야!’

사태 파악이 끝난 녀석에겐 그것이 가장 최선의 선택일 것이다.

그들의 계획이었던 내분은 이뤄지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 이상의 일을 하려 들 테니까…….

‘내 일을 방해하기 위해서나 혹은 토르잔을 분열시키기 위해서라도 불꽃을 복원될 향로를 가져가려 들겠지.’

찬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곳에서 자신을 제외하고 보블을 막아낼 수 있는 이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최대한 빠르게 놈을 벤다고 한들…….

‘오래 상대하고 있어선 안 돼.’

찬영의 머릿속이 금세 복잡해졌다.

‘방법은 하나야. 단번에 해결해 버리는 것.’

찬영은 쇄도하는 보블의 칼날을 공중에서 빠르게 회피하며 힐끗 아래를 내려다봤다.

몬스터와 엉킨 전장.

하지만 세 부족의 연합 부대는 예상 이상으로 서로 협조해가며 전열을 버텨내고 있었다.

이곳은 이들에게 맡기면 된다.

‘그럼 남은 건…….’

찬영의 시선이 다시 보블을 향했다.

쐐액!

보랏빛 검광을 쏟아내는 보블이 소리쳤다.

“전대 갓피스들처럼 네놈 역시도 멸망 속에 무기력해질 것이다. 여신마저 도망친 땅이 아니냐?”

그 순간 찬영이 보블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지잉!

다시 나타난 건 보블의 가슴 앞.

찬영이 손에 룸을 담아 검은 연기를 낚아챘다.

“어림없다, 사명.”

보블은 찬영의 손을 유유히 피해 가려 했다.

한데.

‘움직여지지 않는다?’

보블은 눈을 부릅떴다.

연기가 찬영의 손에 머무른 채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멈칫거린 그 순간.

찬영이 보블의 검은 연기를 자신의 앞으로 잡아당겼다.

“허업!”

저항하지 못하고 끌려온 보블.

“그럴 일 없어. 무력해지는 건 네가 될 테니까…….”

보블이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오물거리던 그 때.

그의 눈앞으로 엘리야의 날개가 펼쳐졌다.

“따로 지킬 수 없다면, 같이 모이게 해 주지. 네가 저들에게 그랬던 것과 같이…….”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보블은 찬영과 함께 번쩍 빛을 내며 전장에서 사라졌다.

목적지는 향로.

그 위였다.

* * *

“그러게, 네놈들 목숨은 놔두고 간다고 했을 때 나를 말리지 말았어야지.”

계단을 걸어 올라오며 말론이 향로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다 왔구나.’

말론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스쳤다.

“어림없다!”

하지만 그 앞을 가로 막은 건 피투성이가 된 브루파.

희미한 눈을 애써 다잡으며 쥐고 있는 창을 말론에게 겨눈 그는 입에서도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나뿐이다.’

더 이상 브루파를 지켜 주던 스피릿 소울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론이 나선 후부터 팽팽하던 전황이 기울어졌고, 기어코 스피릿 소울의 전열이 뚫린 것이다.

“희생은 치를 만큼 치렀다.”

말론이 자신의 등 뒤를 돌아봤다.

그가 몰고 온 몬스터, 뉴 빌드 교도 들의 시신들이 한 가득 쌓여 있었다.

“저 시체 위에 네놈 시체 하나 더 쌓인다고 달라질 건 없을 터!”

“우습군. 이제 와서 자비라도 베푼다는 것이냐?”

“설마.”

싸늘하게 웃은 말론이 단숨에 검은 연기가 되어 브루파를 향해 날아갔다.

브루파도 사력을 다해 스피릿을 일으켰다.

함께 있던 전사들이 모두 전멸한 마당.

‘힘을 전부 소진한 샤먼들과 향로를 지킬 이는 오로지 나밖에 없다.’

이 순간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향로를 가져가려거든 나를 넘어서야 할 것이다!”

“오냐.”

그리고 둘의 무기가 부딪쳤다.

빠각!

동시에 말론의 세이버에 의해 부러진 브루파의 창.

이어서 브루파의 눈앞으로 말론의 세이버가 날아오는 건 눈 깜짝할 새였다.

‘이대로 빼앗기는가?’

통탄스러웠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브루파는 날아오는 세이버를 끝까지 노려봤다.

말론은 그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는 눈빛을 보니 일전의 그놈과 그 무리들의 자꾸 떠오른다.

하지만 저 눈동자도 이제 곧 힘을 잃을 터.

말론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스쳤다.

그때.

번쩍!

그들의 한가운데 빛이 퍼지며 말론의 세이버가 찰나 간 멈칫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뒤로 나뒹굴며 피해 낸 브루파.

그는 눈을 부릅떴다.

이 빛은 익숙하다.

“설마……!”

예상이 맞았다.

엘리야의 날개를 펼친 찬영이 광휘 아래, 은백색의 슈트를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쾅!

하지만 그가 착지하면서 또 다른 검은 연기가 반대편으로 날아올랐다.

빠르게 선회하며 말론의 곁에 착지한 보블.

“선지자께서 이곳에 어찌……!”

당황한 말론.

계획은 이게 아니었기에 그의 혼란스러움은 극에 달했다.

“어, 어떻게 되신 것인지요?”

와락 인상을 쓴 선지자가 찬영을 노려보며 말했다.

“놈이 나를 이리로 끌고 왔다.”

말론이 탄식했다.

“또 네놈이구나.”

신성 왕국에서도 번번이, 그리고 토르잔까지……!

놈만 봐도 속이 분노로 들끓는 말론이었다.

“구면이니 인사는 생략하지.”

나직이 입을 연 찬영은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는 브루파를 쳐다보았다.

“괜찮습니까?”

“물론이오. 다행히 향로는…….”

“네, 여전히 제자리에 있는 것 같군요. 다른 건 운이 나빴지만…….”

찬영이 주변에 쓰러져 있는 아즈렉 전사들을 바라보았다.

‘조금만 더 빨리 왔더라면, 그들까지 구할 수 있었을 텐데.’

매번 겪는 순간이지만 늘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이젠 조금도 혼란스럽지 않다.

그들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뭘 해야 할지 아니까.

‘그들이 지키려던 것.’

찬영의 시선이 말론과 브루파를 향했다.

“이제 내게 맡겨요.”

그들을 노려본 채 브루파에게 말했다.

브루파는 그 한 마디를 듣는 순간 묘한 기대감이 생겼다.

어느새 그의 말 한 마디에 위안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겠소.”

브루파는 더 대답하지 않고 걸어 나가는 찬영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 때, 말론이 외쳤다.

“조금 있으면 여긴 폭발할 것이다. 우릴 상대하며 저들까지 지키진 못할 터인데?”

옆에 있던 보블이 동조하듯 서늘하게 웃었다.

하나 돌아온 반응은 그들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내가 말했을 텐데, 너희들이 한곳에 모여 있는 편이 훨씬…….”

찬영의 눈동자가 하얗게 물들었다.

“쉽다고 말이야.”

그 순간 엘리야의 날개가 다시 불꽃처럼 치솟으며, 입고 있던 사명의 슈트에서 하얀 빛이 휘몰아쳤다.

쐐액!

이어서 사명에서 솟아오른 새하얗고 투명한 쇠사슬.

그 쇠사슬은 순식간에 향로를 감싸 안았고.

다른 쇠사슬은 쓰러져 있는 샤먼들과 부족 전사들을 향했다.

눈 깜짝할 새 거미줄처럼 펼쳐진 쇠사슬.

쾅! 쾅! 쾅!

룸의 힘엔 상상력이 포함된다.

그 말은 곧, 의지가 깃들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것.

“적어도 이 공간 안에서는 내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못 지킬 게 없고…….”

쾅, 쾅, 쾅!

그 사이 말론과 브루파가 쏟아낸 암흑 마력들이 쇠사슬에 부딪치며 전부 무효화가 됐다.

쐐액!

또 다시 날아간 수백 개의 쇠사슬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쇠사슬을 피해 가던 둘을 단숨에 붙잡아 낚아챘다.

그들은 찬영의 권능 아래, 어떤 것도 할 수 없이 무기력해졌다.

“너희들이 원하는 건 단 하나도 할 수 없을 거다.”

쇠사슬 수백 개가 또 다시 수천 개로 분열되어 칼날처럼 둘의 신체를 파고들었다.

콰지지직!

그게 연기든, 암흑 마력이든 아무 상관없었다.

완벽한 파괴.

이 순간 지켜보던 브루파는 입을 벌렸다.

경악이란 단어로도 표현이 되지 않는다.

“……신?”

그렇게 중얼거릴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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