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
내일 아닌 오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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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의 ‘New scope Records’ 본사 건물 앞.
어제 늦은 오후 뉴욕 숙소에 도착해 잠을 자며 겨우 시차에 적응한 멤버들은 오전 일찍부터 옷을 챙겨 입고 본사 앞에 모였다.
이번 미국행에는 앨범제작팀 심준 팀장과 팬-마케팅 이대형 팀장, 오백호 실장과 구철민 등이 동행했다.
거기에 조애니 기획운영팀 부장까지 함께였다.
뉴스코프 레코드는 세계 1위의 미국 음악 시장을 쥐고 흔드는 ‘뮤직 유니버스’ 산하의 레이블 중 하나였다.
뮤직 유니버스는 방송국을 포함한 라디오 채널, 인터넷 음악 채널, 음반 레이블 등 그야말로 음악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회사 중 하나였다.
유니버스가 소유한 수십 개의 레이블 중에서도 뉴스코프 레코드는 최근 가장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 레이블이었다.
트렌드를 앞서가는 가장 팝다운 팝을 선보이겠다는 게 뉴스코프 레코드의 비전이었다.
그런 비전을 가지고 레이디 나나와 레나 델 레이, 제럴 윌리엄스 등을 연이어 성공시키며 뉴스코프 레코드는 특색 있고 보컬이 뛰어난 가수들을 쓸어 모으기 시작했다. 기존 가수들의 영입뿐 아니라 신인 가수의 발굴과 데뷔에도 힘썼는데 그중 LIL이야말로 단연 돋보이는 성과였다.
LIL은 작년의 메가 히트급 성공으로 뉴스코프 레코드의 얼굴로 곧장 내세워졌다.
모회사의 탄탄한 자본을 기초로 한 뉴스코프 레코드의 운영방침과 기획력은 본받아 마땅했다.
대형기획사는 물론이고 세계 시장을 꿈꾸는 힛 엔터테인먼트로서는 어떻게든 배우고 싶은 선진의 운영방식이었다.
기획운영팀의 조애니 부장은 LIL의 콜라보 앨범 작업 성사로 본계약을 진행할 담당자로서 자리에 참가하게 된 것이었다. 외부의 자문 변호사도 함께였다.
이미 계약서 검토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심준 팀장이나 이대형 팀장이 해도 크게 상관없는 사인이었지만, 조애니 부장은 뉴스코프 레코드사의 운영방식을 배울 좋은 기회라 여겨 직접 비행기에 올랐다.
계약을 진행하면서 담당자 접대를 하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얻을 것이 많을 게 분명했다.
뉴스코프 레코드사 또한 함께 작업하게 될 이들에게 홍보와 배려 차원에서 케이케이에게도 본사 견학을 제안했다.
조애니 부장과 이대형 팀장은 계약을 위해 담당부서 회의실로 들어가고, 케이케이와 심준 팀장, 오백호 실장은 뉴스코프 레코드사 건물 내부를 구경했다.
건물 내부에는 마치 박물관처럼 역대 뉴스코프 레코드사에서 발매한 음반들을 모아 놓은 전시관이 존재했다.
유니서브 소속 레이블 중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뉴스코프 레코드사에서 낸 음반만 모아 놓아도 미국 팝 문화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수준이었다.
모두 입을 벌리고 전시된 재킷들을 보았다.
“마, 제미넴 앨범도 있다.”
정윤기가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힙합이라는 음악 장르는 흑인들에게서 나온 문화인만큼 백인들이 끼어들기는 힘든 장르인 것이 분명했다. 보통 차별하는 입장에 있는 백인들에게 있어서는 특수한 장르였다. 그러한 미국의 분위기 속에서 제미넴은 놀라운 실력으로 공고했던 주류 힙합 시장에 균열을 냈다.
처음에는 백인이 힙합 정신을 어떻게 살릴 수 있겠냐고 인정하지 않던 이들도 결국엔 제미넴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제미넴은 힙합을 하는 정윤기나 김원에게도 당연히 많은 영향을 준 래퍼였다.
정윤기와 김원이 제미넴의 앨범 앞에서 이 음반이 더 좋았다, 아니다 이 음반이 명반이다 논쟁을 펼치고 있을 때 안형서는 레이디 나나의 음반 앞에 서 있었다.
“진짜 한 명만 있다고 해도 대단한데 이 가수들이 다 있다니······.”
도욱도 전체적으로 전시관을 둘러보며 대단하다는 생각을 여러 번했다.
‘언젠가 이 음반들 옆에 나란히 놓일 수 있는 정도의 음반을 만들 수 있다면 좋겠지.’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안내하던 담당자가 이제 곧 LIL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원이 담당자의 말을 해석해주자 멤버들은 음반에서 눈을 뗐다.
이제 눈앞의 명곡들로 가득한 음반보다도 곧 만나 보게 될 LIL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었다.
멤버들과 심준 팀장, 오백호 실장은 LIL을 만나러 가기 위해 본사 건물을 벗어나 LIL의 전용 스튜디오로 향했다.
LIL의 전용 스튜디오는 본사 건물에서 차로 15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고, 뉴스코프 레코드사에서는 케이케이를 위해 리무진과 기사를 제공했다.
리무진은 센트럴 파크를 지나 LIL의 스튜디오로 향했다. 한가로운 오후 시간이었음에도 뉴욕 중심부의 교통 체증으로 인해 멤버들이 탄 리무진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멤버들에게는 천천히 가는 것이 더 좋았다. 창문 밖으로 펼쳐진 빌딩숲을 보며 긴장감을 식혔다.
“So, this is······.”
회색의 건물 앞에 리무진이 멈춰 섰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케이케이 멤버들을 확인한 경비원이 고개를 까딱였다. 뉴스코프 본사에서부터 함께 온 뉴스코프 직원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곧바로 스튜디오 문이 보였다. 김원은 스튜디오 문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영어로 중얼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접객용 테이블 앞 소파에 앉아 있던 LIL이 일어서며 멤버들을 반겼다.
“Hi, guys. Welcome to my studio. Come in, come in!”
멤버들은 LIL의 환영을 받으며 얼떨결에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섰다.
“이렇게 직접 보니까 더 어려 보이잖아?”
인사를 나누며 건넨 LIL의 농담에 케이케이 멤버들이 어색한 웃음으로 응수했다.
“오, 원! 정말 만나고 싶었어요.”
LIL은 김원과 악수를 나누면서는 정말 만나고 싶었다는 말로 반가움을 특별히 강조했다. 그나마 영어에 익숙해서 긴장도 덜한 김원은 가벼운 포옹으로 대응했다.
김원이 LIL에게 작업실 초대에 대한 감사 인사를 전하자 LIL이 ‘No’를 외치며 고개를 저었다.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운 건 나예요. 도욱, 아름다운 곡 만들어줘서 고마워요. 이번 작업이 정말 기대돼요.”
도욱이라는 이름의 발음을 어려워 하긴 했지만, 꽤 정확하게 도욱의 이름을 발음하며 LIL이 자연스럽게 김원의 옆에 있던 도욱에게 인사했다.
도욱은 조금 경직된 채로 LIL의 인사를 받았다.
LIL은 웃으며 자신의 옆에 있던 이를 소개했다. 프로듀서인 Dan wilson이었다. 댄 윌슨은 덥수룩하게 자라난 턱수염이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댄 윌슨이 도욱에게 손을 내밀었다. 댄 윌슨이 손을 내민 건 케이케이 멤버 도욱이 아닌 작곡가 도욱에게 내민 것이었다.
그는 LIL의 데뷔 이후 모든 앨범을 프로듀싱한 능력자였다. 동시에 이번 콜라보 앨범의 총 프로듀서이기도 했다.
“LIL의 말대로 무척이나 아름다운 곡을 썼더군요. 이번 앨범에 실리면 좋은 반응을 얻을 겁니다. 유일하게 편안한 곡이거든요. 듣기에도, 부르기에도. 그렇기 때문에 당신의 곡을 선택한 것이기도 합니다.”
말 그대로였다.
LIL이 자신이 생각했던 스타일의 곡이 아니었던 도욱의 곡을 받고 고민하고 있을 때, LIL의 생각을 바꾼 건 댄 윌슨이었다.
댄 윌슨은 도욱의 곡을 받아보았을 때, 도욱이 가수가 아닌 프로듀서였던 입장에서 작곡의 방향을 결정하고 진행했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렸다.
동시에 LIL에게는 도전적인 장르를 선택함으로써 케이케이도 돋보일 방법을 모색한 것이었다.
‘여러모로 영리하군.’
생각하며 댄 윌슨은 LIL을 설득했다. 한 곡 정도 힘을 뺀 보컬을 사용해 보는 것은 절대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될 것이었다.
댄 윌슨의 말에 도욱이 답했다.
“아. 감사합니다. 편곡 방향을 잘 제시해주셔서······.”
곡이 LIL의 앨범에 실리기로 결정된 뒤, 도욱은 LIL보다도 댄 윌슨과 더 많은 메일을 주고받았었다. 댄 윌슨이 제시한 편곡 방향에 맞춰 도욱은 전체적인 사운드를 조절했다.
댄 윌슨과 같은 신진 거장과 함께 작업할 수 있다는 것 또한 LIL과의 작업에 따라오는 무한한 기회였다.
도욱이 한국말로 김원에게 말했다.
“뒤에 까는 악기 하나만 추가했을 뿐인데 곡이 완전히 살아난 기분이었어요. 숨겨진 1인치를 찾아낸 기분이랄까. 그런 점이 너무 좋았다고 말하고 싶은데······.”
영어로 빠르게 긴 얘기를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도욱은 김원에게 말했고, 김원은 역시나 유창한 영어로 도욱의 말을 통역해주었다.
웬만한 전문 통역사가 붙는 것보다 김원이 더 좋은 통역사가 되어줄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일단 김원 자체가 음악 용어뿐 아니라 케이케이의 음악을 잘 알고 있었고, 도욱과도 오래 작업해왔기 때문에 작곡가인 도욱의 생각을 잘 표현할 수 있었다.
거기에 김원은 언어적 센스가 남달랐다. LIL에게는 적당한 슬랭을 섞어가며 친근하게 말했고, 직원들을 비롯해 좀 더 격식을 갖춰야 할 초면의 인물들에게는 고급 영어를 사용했다.
김원이 통역해준 말을 들은 댄 윌슨이 어깨를 으쓱하며 그것이 자신이 하는 일이라고 답변했다.
이후에 댄 윌슨의 옆에 있던 옅은 갈색 머리의 여자와 여자의 연인과도 도욱은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은 도욱인 쓴 곡에 가사를 붙일 작사가 커플이었다.
작사가 커플 역시 도욱에게 곡의 멜로디가 너무나 아름답다며 ‘Beautiful’을 연발했다.
도욱의 곡은 작사가 커플을 통해 우주의 연인을 모티프로 한 노래가 되었다.
서로 먼 행성에 살며 메시지를 통해 사랑을 나눈다는 내용이었다. 그들이 보낸 수많은 메시지들이 우주에서 별이 된다는 가사는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인사를 나눈 후 심준 팀장과 멤버들, LIL, 댄 윌슨과 작사가 커플은 녹음실로 향했다.
녹음실에는 최소 경력 십 년 이상의 베테랑 엔지니어들이 녹음을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녹음실 장비를 보며 도욱은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자본의 클래스가 다르다는 게 이런 거구나······.’
도욱은 고사양 스펙의 믹싱 기계를 보며 한 번만 사용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저절로 침이 삼켜졌다. 마이튜브 영상으로만 본 적 있던 믹싱 기계였다.
녹음실 마이크부터도 최고급이었다.
LIL과의 작업을 ‘영광스럽다’고 표현하긴 했지만, 와 닿지 않던 것들이 피부에 와 닿고 있었다.
‘이곳에서 내 곡을 녹음할 수 있다!’
도욱은 눈을 빛냈다.
LIL이나 프로듀서인 댄 윌슨이 여유롭게 스케줄을 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늘 하루 동안 녹음을 끝마칠 예정이었다.
LIL은 자신만만하게 녹음실 안으로 들어섰다.
녹음 첫 타자가 LIL이었다. LIL이 자신의 파트를 먼저 녹음한 후, 이후 단체 파트를 녹음할 예정이었다. 다른 멤버들의 녹음은 사실 LIL이 굳이 자리를 지킬 이유는 없었다.
목을 푼 LIL이 곧 녹음을 시작해도 좋다는 사인을 보내왔다.
다른 멤버들은 녹음실 뒤편의 대기 소파에서 녹음실 상황을 지켜보았다.
댄 윌슨은 작곡가인 도욱에게 자신의 옆자리를 내어주었다. 노래가 흘러나오고 헤드폰을 쓴 LIL과 도욱의 눈이 녹음실 유리창 사이로 마주쳤다.
LIL은 자연스럽게 눈을 감으며 사랑을 속삭이듯 부드럽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입안에서 혀가 굴러가며 나오는 노래들은 평소 LIL이 부르던 노래와는 확실히 달랐다. 그러나 뒤편의 멤버들도 놀랄 정도로 좋은 목소리였다.
“Where is the love? I’m sailing through the light―”
한 소절만 불렀을 뿐인데도 귀를 쫑긋 세우게 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도욱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음······. 노래를 멈췄으면 좋겠는데요.”
도욱은 빠르게 생각하고는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LIL이 아무리 대단한 가수이고, 뛰어난 보컬이라고 해도 작곡가는 도욱이었다.
도욱의 말에 프로듀서인 댄 윌슨의 입에서 노래를 멈추라는 사인이 나왔다.
노래가 멈추고, LIL은 무엇이 문제냐는 듯한 눈으로 도욱을 보았다. 노래를 멈추게 한 도욱을 보는 LIL의 눈은 조금 전 도욱을 환영하던 눈빛과는 전혀 달랐다.
댄 윌슨 역시 말해보라는 듯 도욱을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