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랑데부(Rendez-vous) (2)
***
팬-마케팅팀의 회의실. 도욱은 벌써 두 번째 방문이었다.
유성전자 모델 건으로 조애나 팀장이 도욱을 따로 호출했다. 자세한 설명을 하기 위해서였다.
갑작스러운 전화로 조애나 팀장이 자리를 비운 사이, 인턴 직원이 들어와 도욱에게 커피를 마시겠냐고 물어왔다.
“제가 커피는 안 마셔서······. 물 한 잔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럼요!”
도욱의 부탁에 인턴 직원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세게 끄덕였다.
힛 엔터테인먼트는 케이케이의 성공적인 데뷔와 이후의 행보로 인해 급히 인원을 충원해야만 했다. 케이케이의 담당 팬-마케팅팀 인원만 하더라도 당분간은 한 명이면 충분할 거라는 당초의 예상과는 상황이 달랐다. 팬클럽 모집 인원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도라희가 팬-마케팅 관련해서는 나름 연차가 쌓인 프로였어도 그녀 한 명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다른 팀원을 붙이기도 애매했다. 이미 도라희부터가 몬스터에서 손을 떼고 케이케이 쪽 일을 하기 시작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선 팬-마케팅 팀에서 도라희의 아래 팀원으로 뽑은 게 인턴 직원 한 명이었다. 추가 충원도 고려 중이었다.
앨범제작팀 쪽에서도 케이케이의 앨범 활동이 왕성해지면서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아 한 명을 구인한 상태였다.
“여기······.”
물을 부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인턴 직원이 다시 돌아와 잔을 도욱의 앞에 놓았다.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인사를 하는 도욱에 그녀는 ‘역시 도욱의 인성은 진짜였구나!’ 성급하게 꽝꽝 마음속의 확정을 내리며 웃었다.
티를 안 내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자꾸만 도욱을 조금 더 보고 싶어 회의실 문 쪽으로 뒷걸음질 쳐 가는 그녀의 걸음이 느려졌다.
사실 그녀는 케이케이의 열렬한 팬이었다. 다른 아이돌의 팬이었던 이력도 있다 보니 기획사를 목표로 취업 준비를 하다 졸업 직전 힛 엔터테인먼트의 구인 공고를 발견하고 망설임 없이 지원했다.
힛 엔터테인먼트의 경쟁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했다. 물론 케이케이의 성공으로 힛 엔터의 비전이 명확하게 드러난 덕이었다. 와중에는 능력 있는 ‘누나 팬’들의 지원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그녀였고, 몇십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소위 말하는 SKY 대학 출신인 그녀가 입사하게 된 것이었다.
도욱에게 시선을 빼앗긴 인턴 직원이 문을 열기도 전에 회의실 문이 벌컥 열렸다.
조애나 팀장이었다.
“급한 전화가 와서. 바쁜데 기다리게 해서 미안.”
“아니, 괜찮습니다.”
이제 입사한 지 2주된 인턴 직원이었지만, 눈치 빠른 그녀는 팬-마케팅 팀 내부 정도는 이미 제대로 파악했다.
자신이 케이케이의 팬이라는 것을 도라희는 알아도 되지만, 조애나는 아니었다.
사실 팬-마케팅 팀이라면, 팬들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아야 되는지라 일부 기획사는 팬 고용을 지향했다. 그러나 그럴 경우 공사 구분이 안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조애나가 가장 싫어하는 게 공사 구분 안 되는 사람이었다. 팬이라고 무조건 내치지는 않겠지만, 괜히 더 매의 눈으로 관찰당할 게 뻔했다.
“인턴, 왜 그러고 서 있어?”
“아, 아닙니다.”
인턴 직원은 바람같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총알같이 문밖으로 나가 쥐도 새도 모르게 문을 닫았다.
조애나는 ‘랑데부 프로젝트’와 관련해서 유성전자 마케팅 팀으로부터 받은 PPT 자료들을 테이블 위에 놓으며 훑어보라고 도욱에게 건넸다.
사실 내용이야 거의 다 알고 있었지만, 소비자의 입장이었지 출연자로서 내부 자료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도욱은 유심히 자료를 훑었다.
도욱이 평범한 열아홉이었다면 조애나는 유성전자에서 전달받은 PPT 자료가 아닌, 따로 조애나 팀장이 내부 공유용으로 요약한 자료 정도를 보여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애나 팀장은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의 도욱의 행보를 회사 내에서 면밀히 지켜보고, 이미 도욱과 굿즈 관련 대화도 나눈 상태였다. 도욱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대한 이해도가 웬만한 직원보다 높다는 걸 조애나는 나이와 상관없이 인정했다.
유성전자의 예술 관련 마케팅 프로젝트에 대한 총체적인 설명이 들어있는 PPT였고, 그 안에는 아폴론 모델에 인기 가수의 곡을 샘플로 넣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자료를 전부 읽어 내린 도욱이 말했다.
“아폴론 새 모델 전부에 케이케이의 노래가 들어간다니······. 너무 대단하네요.”
“조건 맞추느라 애를 쓰긴 했지.”
“아······ 힘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사 좋은 일이라 한 거니까 감사할 것까진 없고. 이번 랑데부 프로젝트 건은 오히려 내가 감사해야겠어?”
“네?”
도욱이 되물었다.
조애나 팀장은 도욱에게 그가 모델로 발탁된 계기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유성전자 마케팅팀은 본래 가창력이 뛰어난 밴드 보컬과, 비주얼이 되는 아이돌 멤버인 데다 노래까지 곧잘 하는 도욱을 놓고 고민 중이었다. 취지에 비추자면 밴드 보컬을 선택하는 게 맞았지만, 그는 스타성이 아쉬웠다.
유성전자 상부 사람들은 프로젝트 취지에 적합한 밴드 보컬에 더 마음이 기울어져 있었다.
모델 캐스팅에 관한 시각이 여러 갈래로 나뉘면서 혼선을 빚던 때, 유성전자 사장이 도욱으로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이철호 사장님이요?”
“그래, 패션쇼에서 자네를 봤다며. 사장 비서실에서 휴대폰도 보내왔고.”
“예. 잠시 스치듯이.”
“런웨이를 인상 깊게 본 데다, 몇 마디 나눠 보고는 광고 모델로 쓰면 좋겠다는 확신을 한 거지.”
“확신······.”
“보통 또래에선 절대 느낄 수 없는 흡인력이 있는 게 사실이니까.”
신뢰감도 가고, 조애나 팀장이 덧붙였다. 조애나 팀장이 자신을 그렇게까지 좋게 보고 있었다는 것에 도욱은 조금 놀랐다.
조애나는 광고의 조건과 내용에 대해 설명했다. 어차피 돈을 벌려는 게 이 광고의 목적이 아니었다. 유성전자의 광고 모델이라는 타이틀만으로도 충분했다.
내용은 도욱이 아는 대로였다. 각 분야의 예술인으로 구성된 ‘랑데부 프로젝트’ 멤버들은 ‘청춘, 열정, 꿈’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을 표현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이 모두 고스란히 영상으로 남겨져 편집, 광고와 뮤직비디오가 된다.
‘가장 중요한 건 광고 음악이다. 재즈피아니스트는 재즈피아노곡으로 재편곡해 간주 부분에 삽입할 테고, 비보이는 그에 걸맞은 춤을 춘다. 그래픽 디자이너는 주제와 곡에 맞는 영상으로 광고와 뮤직비디오를 채워 넣을 것이다.’
가수인 도욱의 역할은 작곡된 노래를 부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모든 작업의 근본이 되는 그 음악이 나중에는 표절곡으로 낙인찍혀 버릴 것이다.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도욱은 조애나에게 물었다.
“그 프로젝트 음악······. 곡은 나왔나요?”
“아직 외국 사는 한국인 천재 작곡가 곡을 받으려고 섭외 중인 모양이던데.”
“그 사람이······ 됐나요?”
“슬럼프라고 자꾸 고사한다더군. 그래서 일정도 미뤄지고 있고. 배가 아주 불렀어. 금액을 자꾸 올리려는 수작인가.”
도욱은 그제야 조금 이해했다. 슬럼프인 작곡가에게 큰돈을 불러 참여시켰으니 궁지에 몰린 그가 곡 표절이라는 엄청난 짓을 저질러 버린 것이다.
물론 상황이 어떻다고 하더라도 표절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 유성전자 쪽에 제 곡을 보내보면 어떨까 싶은데.”
순간, 조애나의 눈이 번뜩였다. 하! 기가 막히다는 듯 조애나가 웃었다.
기회는 기회로, 그리고 위기까지 기회로 만들어버리려는 도욱의 작전은 이것이었다.
‘곡을 바꾸려 다른 작곡가를 추천하는 건 오히려 주제넘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스스로 곡에 참여하고 싶다고 하는 건 조금 다른 문제다. 이 프로젝트의 취지가 정말로 젊은 예술가들의 ‘직접 참여’로 만들어지는 작품이라면 오히려 더 취지에는 부합한다.’
조애나 팀장의 반응을 확인한 후 도욱은 자신의 생각이 옳았음을 확신했다.
“아주 영특하네. 준비된 곡은 당연히 있겠지?”
물론 조애나 팀장은 도욱이 자신을 더 돋보이게 하려고 이런 제안을 한 것이라 생각해서 하는 말이었다.
목적이야 어찌 됐든 궁극적으로 좋은 결과를 만들려고 욕심을 내고 있는 것은 맞았다. 조애나 팀장이야 도욱이 잘되면 그만큼 이득을 보는 사람이었다.
“네, 써 놓은 곡 중 어울릴 만한 곡이 있습니다.”
도욱은 본래 유성전자 측에서 컨택한 작곡가의 곡 퀄리티를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이 따로 만들어둔 곡이 용수철 피디와 함께 다듬은 ‘Very Sorry’ 정도의 퀄리티는 아니어도 그만한 퀄리티는 된다고 자부했다.
활동 중에는 이동 시간 틈틈이, 리패키지 앨범을 준비하면서도 새벽까지 이런저런 곡 작업을 해둬 정말로 다행이었다.
‘같은 퀄리티의 곡이라면 더 의미 있고, 적극적인 쪽을 선택하는 게 당연하겠지.’
조애나 팀장이 진한 레드 립스틱을 바른 입꼬리를 한쪽으로 올리며 답했다.
“그래, 보내 봐. 유성전자 쪽에 제안해 보지.”
다행히 유성전자 마케팅팀의 반응은 무척이나 긍정적이었다.
작곡가 섭외로 난항을 겪던 터였다. 더 큰 계약금을 부르려 연락하기 직전에 힛 엔터테인먼트 쪽에서 해온 제안과 보내온 도욱의 곡은 반가울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퀄리티도 상당했다. 유성전자 마케팅 담당자는 도욱이야말로 자신들이 찾던 ‘랑데부 프로젝트’에 꼭 어울리는 인재라며 도욱을 극찬했다.
그렇게 도욱은 ‘랑데부 프로젝트’에 가수이자 작곡가로서 참여하게 됐다.
***
“안녕하십니까.”
“나 알죠? 맨투맨.”
“오빈······ 선배님?”
“오우, 아네! 반가워요!”
오빈이 악수를 하자며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반가워요~! 여러 번 반복해서 말하는 게 도욱을 만나 정말로 기쁘기라도 한 듯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근육이 잘 잡힌 커다란 체구를 하고선 반가워하는 오빈의 모습이 대형견 같았다.
도욱은 당황으로 잠시 주춤하다 이내 오빈의 손을 맞잡았다. 오빈이 도욱의 손을 꼭 잡고는 세차게 흔들었다.
‘왜 맨투맨 오빈이 여기에······. 설마 비보이 출신이라?’
오빈이 비보이 출신이었던 게 떠올랐다. 원래라면 다른 비보이가 광고에 참여했을 터였다.
그러나 밴드 가수가 아닌 도욱으로 광고 모델이 결정되면서, 비보이 후보에서도 비보이팀 멤버가 아닌 맨투맨의 오빈이 발탁됐다.
케이케이는 되고, 왜 우리는 안 되냐는 식의 아라 엔터테인먼트 쪽 반발이 너무나 예상되기도 했다. 아무리 아라 엔터가 대형 기획사여도 유성전자 쪽에서야 무서울 건 없었지만, 관계자나 대중에게도 괜히 힛 엔터만 밀어준다는 인상을 주기 싫었던 것이다.
유성전자가 이렇게 된 것 스타성으로 밀어붙여 취지보다 더 큰 홍보 효과를 누려보자는 식으로 방향성을 튼 것도 이유였다.
‘많은 것들이 바뀌고 있다. 점점 예측하기 힘들어질지도······.’
마케팅 담당자가 오빈과 인사를 한 도욱에게 다른 이들을 소개했다.
“여긴 재즈피아니스트 권휼 씨고, 이쪽은 그래픽 디자이너 나은수 씨입니다.”
“만나뵙게 돼 영광입니다. 반갑습니다.”
도욱의 말에 나은수가 꺄르르 웃으며 박수를 쳤다. 맨투맨 멤버인 오빈에 케이케이의 도욱까지. 연예인을 눈으로 보니 신기하다며 기뻐했다.
“제가 더 영광인데요!”
나은수가 웃자 오빈이 넉살좋게 웃으며 사인도 해주겠다고 했다.
마케팅 담당자가 미소 지으며 도욱을 소개했다.
“다들 아시겠지만 여긴 케이케이 멤버이자, 우리 프로젝트 작곡가 겸 가수인 강도욱 군.”
“잘 부탁드립니다.”
도욱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이 곡을 작곡한 게 그쪽이에요?”
곡에 대해서 까다로운 평가를 내리기로 유명한 재즈피아니스트 권휼이었다. 권휼이 휴대폰에서 노래를 재생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