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 베어야 할 것은 (1)
“이런 말도 안 되는……!”
크로노의 주인, 이안의 목소리가 떨렸다.
대륙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검사가 바로 그다. 당연히 오러 운용의 6개념 역시 극한까지 익혔다.
게다가 그중에서도 ‘감각 개화’는 이안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분야였다.
물론 항상 오감을 예민하게 하고 다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도 기본적인 능력 자체가 범인과는 달랐다.
더군다나 신성왕국으로부터 악마 발호 소식까지 들은 참이기에, 그의 경계심은 평소보다 더욱 높아져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그런 내 감각을 속이고, 이만한 마(魔)가 출몰했다고?’
이렇게 넓은 호수를 어둠으로 물들일 정도의 존재라면 마인이 아니다. 무조건 악마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지금껏 쌓아온 경험과 연륜, 그리고 역사를 통해 배운 지식이 확신을 심어 주었다.
이해할 수 없는 점은, 그만큼 강대한 존재의 출현을 불과 몇 분 전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허나 이미 벌어진 일이기도 했다.
손에 땀이 흐르는 것을 느낀 이안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한 뒤, 재차 발을 움직였다.
일단 어둠의 장막 가까이 다가가 상황을 파악할 생각이었다.
‘내 감각에는 문제가 없어. 여전히 모든 것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도대체 어떤 수를 쓴 거지? 마인이라면 몰라도, 태생부터 다른 차원의 존재인 악마가 자신의 소굴을 나와 수작을 부렸는데…… 그걸 간파하지 못했다고?’
‘조만간 악마와 검을 맞댈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아빌리우스의 요청이 있기도 전에 일이 벌어질 줄이야…….’
‘혹시, 제자 일행이 휘말린 건 아니겠지?’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중에서 가장 강렬하게 머리를 휘젓는 건 당연히 마지막 생각이었다.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잠시 자리를 떴던 게 이런 결과를 불러올 줄이야.
‘아니, 침착하자. 아직 밝혀진 건 아무것도 없다.’
이안이 숨을 골랐다. 근육의 이완과 긴장을 반복하여 최적의 몸 상태를 만들었고, 오러 운용에도 만반의 준비를 했다.
순식간에 절대자의 위엄을 찾은 뒤, 눈에 불을 켜고 전방을 노려봤다.
그의 앞에 드리워져 있는 장막, 아니 결계.
이안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선의 힘을 끌어올렸다.
즈으으으으으으으응-!
무지막지한 양의 오러가 몸을 타고, 검신을 타고 흘렀다.
줄기줄기 뽑혀 나온 기운이 하늘 높이, 쿤과 대적할 때보다도 높이 치솟았다가 2미터 길이까지 응집되었다.
태산조차 가를 수 있을 듯한 기세가 이안의 몸에서, 크로노의 주인의 몸에서 흘러나왔다.
-!
기합은 없었다.
허공을 베는 소리조차 없었다.
시간조차 베어 버린 듯, 누구도 파악할 수 없을 속도로 검을 내리그은 이안이 암흑 결계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허망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허어…….”
“우리들로는 안 돼요.”
“…….”
관주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등장한 키릴 파레이라, 그리고 루루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잠시 안도했다가 다시 표정을 굳혔다. 둘이 무사한 것은 다행이지만, 여전히 아이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말했다.
“상황을 설명해다오.”
“확실하게 설명할 순 없어요. 저도, 루루도 처음 본 현상이라…… 다만, 우리들이 보기에는 이건 요술에 가까워요.”
“요술?”
“네. 오빠에 의해 탄생한 결계…… 누구도 들어올 수 없고, 누구도 부술 수 없는 오빠의 세상이요.”
“……몇 년 전에 있었던 그 요술 결계와 똑같은 건가?”
이안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키릴은 고개를 저은 뒤,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그렇지는 않아요. 보시다시피…… 이 결계는 요술로만 만들어진 게 아니에요. 마기, 그것도 엄청나게 진한…… 저는 잘 모르지만, 아마 고대의 악마들이 이만한, 후우, 이만한 힘을 갖고 있었겠죠?”
“진정하거라.”
우우웅
빠르게 다가선 이안이 키릴의 손을 잡고 오러를 불어넣었다.
젊은 시절, 두르칼리 부족에서 배운 오행신공 화(火)의 기운이 그녀 안에 퍼지는 두려움을 몰아내 줬다.
“감사해요, 후우. 아, 호수의 다른 사람들은 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멀리 떨어진 곳에 옮겨 놨으니…….”
“그래, 장하다.”
“하여튼, 설명을 이어 가면…… 아마 오빠의 강한 염원…… 그사이에 끼어든 악마가 뭔가 수작을 부린 모양이에요. 요술이라고 보기도 힘들고, 악마와의 계약이라 보기도 어려운 굉장히 기묘한 공간…….”
“…….”
“그게 이 장막의 정체라고, 저랑 루루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묘하게 차분하군. 아, 비꼬는 건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다오. 절대로.”
이안이 아차 싶은 표정으로 말했다.
경황이 없다 보니 속마음을 직설적으로 말해 버렸는데, 그게 키릴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당장이라도 주저앉아 울고 싶은 마음일 수도, 그것을 억지로 참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허나 다행히도, 키릴은 진실로 침착한 상태였다.
고개를 저은 그녀가 이안에게 답했다.
“아니에요, 오해 안 해요.”
“그렇다면 다행이다. 그런데 어찌…….”
“오빠가 악마 따위에게 질 리 없으니까요.”
키릴이 당찬 목소리로 말했다.
보낸 세월에 비해 함께한 시간은 적었지만, 그녀는 지금껏 오빠가 역경을 극복하는 모습을 여러 번 지켜봤고, 들어왔다.
어릴 적 트라우마를 완벽히 이겨 냈고.
자신을 무시하던 이들 앞에서 당당히 일어섰다.
마인 토벌대에서 그 누구보다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며.
이야기로만 듣던 끔찍하고 강대한 악마를 멋지게 쫓아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최근에는 자신조차 놀랄 정도로 듬직한 모습을 보여 줬다.
그 모든 것을 떠올린 그녀가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빠는 나올 거예요. 자기 힘으로 결계를 부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
“물론 걱정이 하나도 없는 건 아니지만…….”
“으음.”
이안이 신음을 흘렸다.
키릴이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깨달았다. 결계를 뚫고 나오기까지 걸릴 시간을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허나 그런 것 치고는 표정이 아주 나쁘진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믿고 있는 구석이 있었다.
관주의 시선을 받은 그녀가 루루를 쳐다봤다.
뾰로롱
하늘로 날아오른 루루가 암흑 결계 쪽을 주시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진정한 어둠.
허나 검은 고양이의 눈은, 마치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처럼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느껴져.”
“……설마, 아이른이 보이나?”
“아니. 아이른이 보이는 건 아니야. 하지만 느낄 순 있어. 정확히는…….”
잠시 뜸을 들인 루루가 말을 이었다.
“아이른이 걸고 있는 목걸이, 오행 목걸이의 기운이 느껴져.”
“…….”
“이상하게, 그 목걸이만 생각하면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느낌이 그래.”
근거 따위 전혀 없는, 누군가가 들으면 말도 안 된다고 화를 낼 법한 이야기.
하지만 이안도 키릴도, 루루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그저 믿을 뿐. 기다릴 뿐.
어둠을 바라보는 세 존재의 눈에 강한 염원이 맺혔다.
* * *
“…….”
어둡다.
선 채로 명상에 잠겨있던 아이른이 주변을 돌아봤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봤다.
온통 암흑이었다. 흔하게 보이던 별빛도, 달빛도 쏟아지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낀 그가 기감을 통해 주변을 살폈다.
허나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근처에 있던 자신의 동생도.
물장구가 지겹다며 뒤편의 나무에 올라가 그루밍을 하던 루루도.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이 사라졌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생각이 드는데,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졌다.
툭, 투둑
투두두두두……
처음에는 부슬부슬 떨어지던 비가 어느새 굵은 줄기로 변하였다.
아이른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마치 홍수가 난 듯, 조금씩 불어나는 호숫물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여기 있으면 안 되겠어.’
일순 머리가 아찔해졌다.
고개를 흔든 아이른이 신형을 돌렸다. 그리고 빠르게 뛰어갔다.
일단은 여기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었는데, 한참을 달려도 어둠은 그대로였다. 떨어지는 빗물도 그대로였다.
더 황당한 것은, 그렇게 먼 거리를 이동했음에도 호수로부터 멀어질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좋아.”
아이른이 대검을 소환했다.
지그시 눈을 감은 그가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이미지를 떠올렸다.
그 어떤 단단한 것보다도 베기 힘든 것.
바위보다도, 강철보다도, 태산보다도 베기 힘든, 물을 베어 내는 자신의 모습!
그것을 떠올린 그가 번쩍 눈을 뜨며 검을 내리그었다.
콰아아아아아-!
어느새 뿜어져 나온 황금색 오러 소드가 수면을 갈랐다.
눈으로 좇기 힘들 정도까지 튀어 오른 물줄기가 빗줄기와 만나서 산산이 부서졌다. 엄청난 위력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물을 베는 것에 실패한 아이른이 한숨을 한 번 쉬었다가, 다시 검을 들었다.
“괜찮아. 될 때까지 하면 된다.”
그가 과거를 떠올렸다.
지금껏 수많은 역경과 시련, 난관을 마주했던 아이른이지만, 결국엔 버텨 냈다.
포기하지 않고 끝끝내 성취해 냈으며, 그로 인해 더 강한 자신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결국엔 이겨 낼 것이다.
물의 검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물조차 베어 내는 검술을 익힐 수만 있다면.
이 이상하고 불쾌한, 온통 습기만이 가득한 공간에서도 벗어날 수 있겠지.
생각을 마친 아이른 파레이라가 재차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이었다.
“그래? 과연 그럴 수 있을까?”
“……!”
뒤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깜짝 놀란 아이른이 신형을 돌렸다. 이렇게 가까이 누군가가 다가올 동안 아무 느낌도 받지 못하다니.
방심도 방심이지만, 떨어지는 빗줄기와 발치를 적시는 물이 자신의 감각을 방해하고 있다는 의심이 들었다.
그 의심은 당연히 지금 모습을 드러낸 존재에게로 향했다.
아니, 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상대의 모습을 확인한 그가 으득,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광대 악마.”
“하하, 어떻게 알아챘지? 그때랑은 모습이 많이 다른데! 어이쿠, 이 가면 때문인가?”
광대 악마가 가면을 벗으며 미소를 보여 줬다.
끔찍한 얼굴이었다. 살점이 뜯겨 나간 탓에 군데군데 뼈가 보였고, 상처에서는 피와 고름이 줄줄 흘러나와 바닥을 적셨다.
그것은 이내 지면의 물과 뒤섞였고, 아이른이 서 있는 곳까지 빠르게 퍼져 나갔다.
표정을 굳힌 그가 빠르게 거리를 벌렸다.
허나 피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공간 전체로 번져나간 악의를 느끼며, 아이른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이봐, 이봐. 그렇게 심술난 표정 짓지 말라고. 나는 너를 도와주러 온 거니까.”
“그런…….”
“아하? 못 믿는구나? 괜찮아, 사실은 거짓말이니까. 하지만 결국엔 같아. 너도 알다시피,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웬만한 검술로는 어림도 없으니까. 그러니까…….”
“…….”
“……네가 베어야 하는 것. 베어야만 하는 것. 그것을 벨 정도는 되어야…… 이 질척하고, 습하고, 불쾌한 공간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뒤져야지, 별 수 있겠어?
키히히, 말을 마친 광대 악마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른 파레이라의 속에서 울컥, 파도와 같은 감정이 솟구쳤다.
우우우우웅-!
아이른 파레이라의 검이 긴 울음을 토했다. 그에 따라 어둠을 불사르는 황금색 불꽃이 검을 뒤덮었다.
그 대단한 광대 악마조차 긴장하게 했던 바로 그 검이었다.
아니, 그렇지 않았다.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가르침이 더해져 오히려 더욱 강해졌다.
촤아아악!
허나 그렇게 강력한 오러 소드로도, 광대 악마를 처치할 수는 없었다.
물보라를 일으키며 부서진 그가 수면으로 가라앉았다.
허나 잠시 후, 완벽한 모습으로 다시 등장했다.
재차 가면을 벗고 미소를 보인 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안 돼. 안 되지, 친구. 애석하게도 자네는 날 죽일 수 없다네. 적어도 이곳에서는, 자네가 아무리 강력한 불꽃을 휘둘러도 나를 해할 수 없어. 이곳은 그대의 염원과 나의 악의가 맞닿아 만들어진 내기 장소. 한쪽이 다른 쪽을 일방적으로 찍어 누를 수 있는 장소가 절대 아니거든.”
“내기 장소?”
“이봐, 너도 어느 정도 느끼고 있잖아. 내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너 정도 되는 녀석을 강제로 끌고 올 수 있을 만큼은 아니야.”
“그 말은…….”
“나는 너를 죽이고 싶다.”
광대 악마가 입을 열었다.
직전까지와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형형한 눈빛으로, 지독한 악의로 무장한 그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그냥 죽이고 싶은 게 아니야. 고통스럽게, 처절하게, 네가 원하는 것을 절대로 얻지 못하고 괴로워하며 죽는 모습을 오랫동안, 아주 천천히 음미하고 싶어. 그래서 나는 네가 원하는 검술을 못 얻는 쪽에 판돈을 걸었다. 대가는 앞서 말했듯이 너의 고통스러운 죽음이야.”
‘그런가.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반대쪽에 판돈을 걸었던 건가.’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이해가 됐다. 어째서 자신이 이곳에 들어왔는지. 어째서 자신이 광대 악마에게 아무런 피해도 줄 수 없었는지.
내기와 관련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녀석을 끝장내기 위해서는, 일단 이 승부에서 이겨야 한다. 물을 베어 내고 싶다는 자신의 염원을 이루어야만 추후의 일을 논할 수 있다.
여기까지 생각한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조금 불합리한 것 같기는 하지만…….’
내기에서 승리하면 물을 베는 검을 얻을 수 있다.
헌데 내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물을 베는 검을 깨우쳐야 한다.
이게 도대체 무슨 궤변이란 말인가.
“…….”
그러나 도리가 없었다.
지금의 상황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결국 내기 자리에 나온 것은 자신이었다.
그만큼 자신의 염원이 강하다는 뜻으로밖에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아이른이 광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좋아! 그럼 힘내 보라구, 친구!”
척, 거수경례를 마친 광대가 물이 되어 사라졌다.
더욱 불길한 색을 띠는, 어느새 더욱 불어난 호숫물을 바라보며 아이른이 숨을 내쉬었다.
‘괜찮아. 신경 쓰지 말자.’
자신이 광대 악마를 해할 수 없듯이, 녀석 역시 자신을 해할 수 없다. 즉, 자신은 온전히 수련에만 집중하면 된다.
수련이라 함은, 아이른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분야.
지그시 눈을 감은 그가, 다시 물을 베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