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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고백 (39/79)

39. 고백

에드문트는 여전히 시선을 떨군 채, 감정을 삭이듯 눈을 내리감았다. 몇 번이나 반복하고 나서야 격정을 삭인 눈이 엘리아를 향했다.

“……반나절 동안 심문을 했으니까. 그런 날은, 몸에 밴 것들이 잘 지워지질 않아.”

그는 제가 느끼는 감정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가 어려웠다.

가슴 한편에 깊게 박혀 있던 가시가 뽑혀 나간 것 같은 감정은, 분명 안도감이었다. 엘리아가 저를 불쾌하게 여기지 않음을 확인했으니까.

그러나 통증과 동시에 가시가 물려 있었던 상처에서 피가 콸콸 쏟아지는 감각은, 그가 느끼는 감정이 하나가 아님을 증명했다.

“오늘도 몇 번이나 씻어 냈는데, 확신이 없었어.”

“……걱정했어?”

엘리아를 곧게 지탱해 주던 그의 팔이, 어둑한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간신히 안도감 뒤에 밀려온 고통의 정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죄책감이었다.

제게 배었을 고통과 비명의 흔적들까지 아무렇지 않게 포용해 주는 연인을, 어쩌면 평생 속여야 한다는…….

“두려웠어.”

죄책감을 견뎌야 하는 삶을 향한, 두려움이었다.

무사히 연인을 속였음에 안도함과 동시에 바닥이 없는 죄책감과 공포의 호수에 던져졌으니, 당장이라도 익사할 것 같은 공포감이 밀려왔다.

그의 유일한 구원은, 되찾은 연인뿐이었다.

제 과오로 상처 받지 않았기에 그를 사랑해 주는 엘리아뿐이었다.

“있잖아, 나도 그랬어. 실은 여기 혼자 있으면서 많이 무서웠어.”

엘리아의 작은 손이 그의 얼굴 위로 올라왔다. 그가 흘린 적 없는 눈물 자국을 지워 내듯 눈가에서부터 뺨을 타고 미끄러졌다.

“내 실수로 누군가 다쳤다는 게 너무 괴로웠고, 함께 있어 주지 못해서 아팠고, 무력하게 기다리는 거…… 전부 다 힘들었어. 억지로 괜찮은 척했지만, 누군가가 나를 비겁하다고 비난할 것만 같았으니까.”

굳은 입가를 살며시 쓸던 손이 그의 얼굴을 가득 담았다. 서로의 체온이 섞여 두 사람 모두 따듯한 온기를 느꼈다.

“근데 에디, 네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그때 깨달았어. 내가 너를, 너를 정말 좋아한다는 걸. 왜냐하면 너를 본 순간, 전부 다 괜찮아졌거든. 정말로.”

환한 웃음과 함께, 아름다운 눈동자에 지극한 애정이 스몄다.

오직 그 하나만을 향해 오는 감정이 방울져 뚝뚝 떨어지는 모습에, 에드문트는 숨이 막혔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나도, 네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거야. 절대로 너를 함부로 비난하거나 원망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할게.”

아름다운 조각상처럼 늘 희고 단정하던 남자의 눈에, 여자의 눈동자가 비쳐 보였다. 붉은 꽃이 활짝 피어 꽃잎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에드문트의 손가락이 눈에 담은 붉은 흔적을 더듬었다. 고여 있던 물기가 손끝으로 옮겨 와 팔목까지 죽 미끄러져 내려왔다. 엘리아가 다정한 손길에 눈물을 보내며 속삭였다.

“무슨 일이 생겨도 내가 네 곁에 있어 줄게. 우리 같이 봤던 공연 속 주인공들처럼. 그 이야기 속 연인들보다 훨씬 더 많이 너를 생각할 거야.”

에드문트가 허리에 감은 팔로 엘리아를 좀 더 깊게 안았다. 맞닿은 곳에서 도무지 착각이라 치부할 수 없는 떨림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이름을 부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지만, 엘리아는 깨달았다.

‘너도 마찬가지였구나.’

불안감과 공포를 모조리 홀로 어깨에 지고 돌아왔으나 문을 열어 여자를 본 순간, 그가 제 사랑을 다시금 확인한 순간만큼은.

지극한 마음, 충동, 열망…….

사랑만 오롯이 그에게 존재했으리라.

“……엘리.”

꽉 막힌 목소리에,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에. 엘리아는 그의 옷자락을 왈칵 구겼다.

에드문트의 맨손이 느릿하게 눈가 아래를 훑어 냈을 때, 그의 절박함과 채 다 정제되지 못한 열망이 떨림으로 나타나 조금은 두렵기도 했지만.

끌어당기듯 눈을 감으며, 엘리아는 생각했다.

‘나는 후회하지 않아.’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할 거라고.

‘에드문트, 너를 사랑한 것을 후회하지 않을 거야. 만약 내 사랑이 한때의 꽃이라면, 순간을 영원 삼아 네 곁에 남을 거야.’

감은 눈 너머로는 그저 어둠뿐이었다. 그럼에도 엘리아는 눈꺼풀 너머로 비쳐 오는 희미한 빛을 느꼈다.

연인의 짙은 눈동자 속에 뛰어들듯 기꺼이 어둠에 파묻혔다.

지독하게 뜨거운 입술이 눈가에 닿아, 이내 눈물이 닦아 낸 길을 따라 입술에 내려앉았다.

터질 것같이 요동치는 심장에 저와는 다른 박동이 닿았고, 으스러지듯 자신을 끌어안은 팔에 숨이 막혔지만.

서로의 입술이 맞닿은 순간, 두려움은 전부 사라져 버렸다.

천천히 입술을 머금고, 숨을 나누어 마시다 결국 그가 전부 집어삼켜 버리는. 일견 다급해 보이는 그의 입맞춤에 흠뻑 취한 탓에.

빼앗아 간 숨 대신 받아 낸 남자의 열기에 파묻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으니.

다만, 녹을 듯한 숨결이 멀어진 후 궁금해했을 뿐이었다.

전해졌을까.

얽힌 혀와 맞붙은 입술 너머로 쉼 없이 전한 사랑이, 그의 심장까지 닿았을까.

* * *

“엘리.”

“으응……. 응?”

“로앙가에는 내일 오후에 데려다줄 테니, 그때까지 좀 자 둬.”

짙은 입맞춤이 끝나고, 에드문트의 무릎 위에서 숨을 고르다 꾸벅꾸벅 졸던 엘리아가 살포시 눈을 떴다.

누적된 피로에 낯선 감각까지 받아 내느라, 안쓰러울 정도로 눈에 피곤이 가득 배어 있었다.

에드문트가 옆에 잠시 밀어 두었던 물수건을 들어 엘리아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으응…….”

조심스러운 손길마저 성가셨는지 고개를 저어 피하다가, 이내 포기하고는 미적지근해진 손수건에 얼굴을 맡겼다.

서툰 손길이나마 효과가 있었던 건지 말간 얼굴이 살짝 드러났다. 수건을 치운 뒤 제가 닦아 준 이마에 살짝 입술을 눌렀다.

품에 안긴 몸이 가만히 그의 애정 표현을 받아 주었다.

이마부터 시작한 입맞춤은 볼을 지나 입술을 살짝 누른 뒤에야 떨어졌다. 다정한 입맞춤이 남긴 여운에 취해 흐트러진 얼굴이 너무나도 유혹적이었다.

“3층에 손님방 준비해 두었어. 벨젠 경이 내부 호위를 맡을 거야.”

재차 입술을 붙이는 대신, 에드문트가 엘리아를 침대까지 옮겨 주겠다며 허락을 구해 왔다.

“3층……?”

여운에 취해 있느라 그냥 고개를 주억거릴 줄 알았는데. 엘리아는 저를 다른 방에 데려다 놓겠다는 에드문트의 말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나는 3층 가면…… 에디는, 여기 있어?”

“응, 밀린 일이 좀 있어서. 지금 데려다줄게.”

순간 그가 겨우 피로를 덜어 낸 얼굴이 구겨졌다.

“싫어.”

엘리아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어 보이더니 자신을 안아 올리려던 에드문트의 품에서 벗어나 소파 옆자리로 도망가 버렸다.

“나 여기 있을래. 여기서 자도 돼. 옆에서 일해…….”

엘리아는 잠결에도 고집을 부리며 그의 품에서 벗어나서는 에드문트의 옆에 웅크려 누웠다.

혹여 저를 번쩍 들어 옮겨다 놓을까 싶어선 소파 틈새에 팔을 끼워 넣기까지 했다.

태어나서 소파 구석에 팔이 쑥 들어가는 광경을 처음 본 에드문트가 잠시 당황하고 말았다. 쿠션 사이에 팔을 밀어 넣는다고 제가 못 들어 옮길 것도 아닌데.

선잠이 들어 어린애 같은 고집을 부리는가 싶었다.

“엘리, 손님방이 싫으면 내 침대에라도 누워 있어.”

“아니야. 나는 소파…… 이런 데서 잘 자고…… 바닥에서도 막 자는걸. 에디, 나 상관 말고 일해.”

엘리아는 괜찮다고 했지만, 소파에 웅크린 모습을 보는 에드문트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잠시 내버려 두었다가 깊이 잠든 것처럼 보일 때 즈음 제 침대에라도 옮겨 보려 했다.

“안 간다니까……. 나 말고 일해, 일. 일 끝나면 가서 잘 테니까…….”

그때마다 잠든 줄 알았던 엘리아는 칭얼거리며 반항했다.

한데 에드문트가 탁자 끝에 둔 새 서류를 가져오기 위해, 혹은 엘리아가 뒤척이다가 바닥에 떨어진 담요를 주워 올리기 위해 일어날 때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에드문트는 웅크려 잠든 연인을 옆에 둔 채 서류를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혹시 저 때문에 깰까 봐 신경 쓰이는 것도 잠시, 엘리아는 서류 뒤적거리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곤히 잠들었다.

“……에디. 아직도 일해?”

엘리아가 다시 일어난 건, 해가 어스름히 뜬 새벽. 한스가 탁자 위 한가득 쌓아 두고 간 서류가 바닥을 보일 때 즈음이었다.

목소리로 먼저 인기척을 내자 종이가 팔랑거리는 소음이 이어졌다. 에드문트가 보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엘리아를 바라보는 소리였다.

“거의 다 끝났어.”

“음…… 쉬어야 할 텐데.”

희미하게 끝난 말소리에 이어, 작은 손길이 그의 허벅지를 스쳤다.

한시도 잠들지 못했을 그를 도닥인다고 손을 뻗었는데 힘이 들어가지 않아 그의 허벅지 위에 얹는 데에 그치고 말았다.

다시 팔을 거두어 보려 했지만 밀려오는 수마 탓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으음…….”

꿈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엘리아 대신, 에드문트가 불편하게 뻗어 낸 손을 되돌려 주었다.

바닥으로 흘러내리려는 담요까지 추어올려 준 뒤 엘리아의 얼굴을 살폈다.

제가 짓씹었던 입술이 몇 시간 전보다 더 통통하게 부어 있었다.

사실 에드문트도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잠을 못 잔 게 벌써 여러 날인지라 새파란 눈가에 붉은 기가 열매처럼 맺혀 있었고, 입술은 온통 붉은빛이었다.

<어떻게 해, 미안해. 내가, 나도 모르게……. 많이 아파?>

처음 배운 쾌락에 허우적대면서도, 엘리아는 서툴게나마 그가 하는 행위를 흉내 내었다.

입을 열고, 혀를 얽는 데에 이어 옅게 이를 박는 행동까지 따라 하더니, 급기야 에드문트의 입술에 아릿한 통증을 남겼다.

몇 군데는 살짝 찢어져 피가 비친 탓에 엘리아가 발을 동동 구르며 약을 찾았다.

<상처 남으면 어쩌지? 에디, 지금 바로 약 바르자. 응?>

에드문트야 이보다 더 심한 상처가 평생의 흔적으로 남아도 기껍기만 하겠지만, 엘리아가 상처를 보며 속상해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건 아니었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보좌관을 시켜 약을 가져오게 했다.

<계속 지금처럼, 스스로를 돌보시면 좋겠습니다.>

한스는 약을 가져오라는 에드문트의 지시에 엘리아 몫이라며 붓기를 가라앉히는 연고까지 챙겨 왔다.

상처의 원인을 두고 아는 척해 오는 것도 모자라, 방을 나서기 전 에드문트를 향해 한마디 덧붙이기도 했다.

<그게 뭐가 어렵습니까. 지금 하시는 것처럼 엘리아 아가씨가 걱정하실까 싶어 약 한 번 더 챙겨 바르시고, 그게 스스로 돌보는 거지요. 저같이 평범한 사람들도 하는 건데, 공작님께 어려울 게 있겠습니까.>

에드문트는 머릿속에 자꾸 맴도는 한스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평범하게 살며 남들 누리는 행복 누려 보시라는 말이었지만, 뒤집어 보면 결국 에드문트가 비정상임을 꼬집는 말이기도 했다.

‘남을 위해 스스로를 돌보라고. 내가 전에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던가.’

서류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빈손으로 입술을 만져 봤다. 피딱지가 앉은 입술은 어느새 거칠한 감촉만 남아 있었다.

죽기 전의 그였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구태여 상상해 볼 필요는 없었다.

<에드문트, 미안해. 피가……. 나는 상처가 있는 줄 모르고, 정말 미안해. 미안해요.>

저를 어설프게 따라 하다가 채 아물지 않은 상처가 벌어져 피가 비쳤을 때, 놀라 엉엉 울었던 어린 아내를 어떻게 대했던가.

제멋대로 파고들고, 제풀에 지쳐 눈물을 그칠 때까지 몰아붙였었다.

<공작님, 마님께서 상처에 꼭 바르시라고 챙겨 주신 겁니다.>

다음 날 집사가 제 앞에 약병을 내밀었지만, 에드문트는 단 한 번도 열지 않았다. 스쳐 가듯 ‘괜찮으니 상관하지 말라.’라고 이야기한 거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니까.

한 번도 손대지 않은 약병을 보며, 아내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감히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대신 스물둘의 에드문트는 손을 뻗어 한스가 두고 간 약병을 열었다.

열여덟의 엘리아는 과거가 된 그의 사랑이 겪은 슬픔을 겪지 않기를 바라며.

알싸한 향이 방 안에 퍼지고, 연고를 바른 입술에 아린 통증이 서렸다. 연고가 스며 일으킨 통증보다도 끈적한 감촉이 불쾌했다.

‘그래 봐야 내가 느낄 불편함은 겨우 잠시뿐이지만.’

더디게 아물 상처를 보며 속앓이했을 심정에 비하면, 찰나일 뿐이었다.

잠시, 그의 손자국이 남은 약병을 바라보았다.

상처처럼 팬 곳에 같은 약을 채워 넣는다면 티가 나지 않으려나.

상실의 순간을, 전부 없었던 일로 만들 수 있을까.

* * *

허무하리만치 간단한 처치를 끝내고, 에드문트는 체온에 녹아 흐른 연고를 닦아 내던 참이었다.

“에디, 입술 아파서 그래?”

도로 잠들지 못하고 눈만 감고 있던 엘리아가 에드문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아까 나 때문에 생긴 상처에서 피 나는 거야?”

“아니야. 생각난 김에 약을 발라 두었어.”

에드문트는 엘리아의 작은 입술에도 연고를 발라 주었다. 차갑게 보관한 연고가 입술에 닿을 때마다 엘리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미안해. 내가 자제했어야 했는데.”

“음……. 나야말로 미안해. 자제했어야 했는데.”

에드문트는 엘리아의 부은 입술을 보고 애처로워했지만, 그렇게 치자면 엘리아는 훨씬 더 미안해해야 마땅했다.

생전 상처 한 번 입어 본 적 없었을 약혼자가, 저 때문에 입에 연고까지 바르지 않았는가.

“근데 나 진짜 일부로 그런 거 아니야. 나도 모르게, 어쩌다 보니까…….”

엘리아는 정말 일부러 세게 깨문 게 아니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나 실은, 반듯한 얼굴에 자신이 만든 흔적을 보니 싫지가 않았다.

오히려 입술 위 살짝 찢어진 작은 상처에 소유욕이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다음에는 정말 조심할게. 다음에는.”

엘리아는 제 본심에 충실하여 다음에는 안 하겠다는 말 대신 다음부터는 조심하겠다는 말로 사과해 왔다.

얼굴 붉히면서도 이야기하는 걸 보면 자근자근 깨무는 게 싫지 않은 모양이었다.

에드문트는 어울리지 않게도 짓궂은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 또 하려고?”

분명 다음이라는 말 하나만으로도 부끄러워서 담요 안으로 얼굴을 숨기고는 다시 잠이 들 거라 예상했다.

그럼 깊이 잘 때까지 곁에서 지켜보다가 침대에 옮겨 줄 생각이었다.

“왜 다음에…… 그렇게 물어봐? 혹시 싫었어?”

한데 예상치 못한 대답이 들려왔다. 에드문트는 머리칼을 정리해 줄 참으로 뻗었던 손을 허공에서 멈추고 말았다.

엘리아가 겨우 반만 뜬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더니 배시시 웃어 보였다.

“나는 좋았는데. 에디 네가, 말 대신 행동으로 내가 좋다고 표현해 주는 거 말이야. 그리고…….”

잠시 멈추었던 손을 움직여 이마를 쓸어 주자, 힘겹게 뜨고 있던 눈이 살포시 감겼다.

“이렇게 머리카락에 닿아 오는 것도 좋고, 눈 마주쳐 주는 것도 좋고. 전부 다 좋아.”

“……차갑지 않아?”

“에디 손이 차가운 게 아니라 내가 뜨거운 건데…… 차갑게 느껴져서 좋아.”

차가워서 좋다는 말에, 에드문트가 제 손을 물수건 삼아 눈두덩이를 덮어 주었다.

“후우…….”

서늘한 체온이 눈가를 지그시 눌러 주자, 엘리아가 몸을 이완시키며 한숨을 뱉었다.

맨손에 스치는 감각이 그의 신경을 하나하나 일깨우는 반면, 눈가를 짚어 오는 무게감에 엘리아는 조금씩 잠에 젖어 들어갔다.

“……에디. 손 아프겠다.”

그의 노력에 보상을 해 주듯, 엘리아의 목소리에 다시 잠이 묻어왔다.

“내가 자야 에디도 좀 쉴 텐데. 근데 사실 이 시간이 조금 아까워. 우리 이렇게 늦은 시간에 같이 있는 거 처음이고, 흔치 않은 기회잖아.”

그제야 에드문트도 엘리아와 자신을 감싼 현실을 인식했다.

누구도 들여 본 적 없는 스물두 살 때의 침실 안이었고, 자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한 연인과 함께 밤을 지새우는 중이었다.

그리고 입맞춤까지. 에드문트는 엘리아를 흉내 내어 제 모든 현실을 ‘처음’이라는 단어로 의미 부여했다.

순간 치민 감정을, 엘리아에게 닿지 않은 다른 쪽 손으로 세게 움켜쥐었다.

“물론 안 좋은 일 때문에 같이 있게 된 거고, 마냥 좋아하면 안 되겠지만. 잠깐씩 오는 감정을…… 억지로 다 외면하고 싶지는 않아.”

이마에 남아 있던 그의 맨손 위로, 엘리아의 작은 손이 올라왔다. 장갑을 흉내 내듯 손등을 덮어 주었다.

“오늘 분명 많이 괴롭고 힘들었는데, 기쁜 일도 분명 있었어. 무엇보다 네가 나한테 마음을 많이 열어 준 것 같아서. 그게 좋았어.”

집사의 상태는 아직 좋아졌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았고, 절차가 끝났을 뿐 사람을 잃고 배신당한 로앙의 슬픔은 이제 시작이었다.

또한 사랑도, 이제 시작이었다.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고난과 막막함에 엘리아는 제 사랑까지 저물지 않을까 두려워했지만.

문이 열리고 새파란 눈동자를 가진 연인이 들어옴과 동시에.

<엘리, 다녀왔어.>

깨닫지 않았던가. 끝을 생각하기엔 너무나 일렀음을. 그 어떤 고난이 닥치더라도 사랑을, 지켜 내겠다 각오하지 않았던가.

<곁에 있을게.>

벅찬 마음을 고백했고, 서로를 껴안고 체온을 나누는 행위보다도 더 짙은 첫 입맞춤으로 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엘리아를 황홀케 한 건 두려웠다는 남자의 고백이었고, 장갑 없이도 제게 먼저 뻗어 온 그의 손이었다.

‘장갑이 없어서 아직은 어색한가 봐. 나한테 닿을 때마다 불안해 보이는 걸 보면. 괜찮은 척하는 중이겠지.’

엘리아는 남자가 도망갈 수 있도록 서둘러 제 손을 치워 주었다. 곧고 아름다운 손이 나비처럼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티 한 점 없는 손을 모른 척하려고 해도 자꾸 시선이 가고 말았다.

‘저렇게 예쁜데. 역시 상처를 숨기거나 닿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의지로 통제되지 않는 불안감 같은 걸 숨기려고 장갑을 껴 온 거겠지. 에디와 나는, 그런 약한 부분까지 비슷한 셈이네.’

제가 먼저 숨겨 온 두려움을 고백하고 극복하려는 모습을 보인다면 에드문트도 용기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힘들 때 기댈 수 있고, 앞서 걸어 의지할 발자국을 남기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나도, 에디 네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

* * *

어스름한 새벽을 지나 완연한 아침이 찾아온 시간. 푸른색의 두꺼운 커튼으로 만들어 낸 어둠 속에서 엘리아가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에드문트가 조심스럽게 엘리아를 안아 들어 제 침대 위에 눕혀 주었다.

“으응…….”

잠시 뒤척이던 엘리아는 등을 쓸어 주는 그의 손길에 다시 수마에 빠져들었다. 잠든 모습을 지켜보는 건 아무리 반복해도 지겹지가 않아, 에드문트는 침대맡에 기댄 채 엘리아를 바라보았다.

장갑이 없는 맨손을 입가를 향해 뻗었다. 깊이 잠든 이의 미약한 숨결이 느껴졌다.

아마 장갑이 있었더라면 느껴지지 않았을 감각이었다.

<비누 향이 나서…… 내가 좋아하는 향이거든.>

이 손에도 엘리아가 좋아한다던 향이 묻어 있었을까. 그랬다면 좋았을 텐데.

쉼 없이 여자를 어루만지고 약을 담았던 손에는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터였다.

에드문트는 엘리아가 잠든 이상 아무래도 좋을, 자신에 관한 관심을 잘라 냈다.

시선도, 감정도 엘리아에게 전부 쏟아부었다.

몸을 일으킨 에드문트가 잠든 엘리아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여자의 위에 남자가 만든 새카만 하늘이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까만 어둠 속에서도 가운 자락 사이로 드러난 목덜미가 새하얗게 빛났다.

가까이 다가가 체향을 들이켰다. 색으로 표현하면 아마 청량한 초록빛일 비누 향이 느껴졌다.

공작가의 저택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익숙한 향이었다.

순간 지극한 충족감을 느꼈다.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아마 엘리아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연인에게 밴 익숙한 향에 그리움을, 안정감을 느끼고는 커다란 꽃에 얼굴을 묻듯 그의 품에 기대었으리라.

그러나 결코 같을 수는 없었다. 에드문트가 느낀 건, 고작 비누 하나로 제 음습함을 숨길 수 있음을 깨달은 희열이었으니.

결코 엘리아의 감정과 같을 수는 없었다.

‘같을 수는 없겠지. 언제까지고.’

같은 마음임을 확인하기까지는 너무나 오랜 시간을 허비했는데. 다름을 인정하는 건 어찌나 쉬운지.

“……좋은 꿈 꿔. 엘리.”

잠든 연인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엘리아의 몸 위로 드리운 그림자를 치워 냈다.

다시 연인을 등지고 떠나야 했지만, 이번에는 그리 어렵진 않았다.

<에디, 나 한 번만 안아 주면 안 될까?>

다시 돌아올 때, 나는 짙은 꽃향기로 비겁함을 숨기고. 다정함으로 치장하여…….

변하지 않을 네 사랑을 끌어안게 될 테니까.

* * *

문을 열자 보좌관과 기사들이 사열한 채 그를 맞았다. 에드문트는 엘리아를 호위할 기사들을 방에 들어가도록 한 뒤, 자신은 복도로 빠져나와 바로 옆에 있는 집무실로 향했다.

“공작님, 지하 감옥에 준비가…….”

“잠시.”

에드문트는 손을 들어 기사 랄프 경의 말을 중단시켰다. 문이 굳게 닫혔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의 보고가 재개되었다.

“로앙가 사용인들에게 접근하였던 자들, 그리고 독을 전달한 크라우제 후작의 하수인까지 모두 찾아냈습니다. 공작님께서 예상하신 대로 전부 북부 출신들의 집성촌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에드문트가 로앙가로 출발하면서 먼저 후작가의 은신처를 짚어 수색하도록 지시한 덕분에, 랄프 경은 고작 반나절 만에 크라우제 후작의 하수인을 찾아내 공작가로 귀환했다.

“몇 명이었는가.”

“여섯이었습니다. 그중 한 명이 로앙가의 사용인들과 접촉을 시도했던 ‘상단 직원’이라는 자와 인상착의가 일치합니다. 그자가 독을 전달한 이로 추정됩니다.”

“그자도 살아 있나.”

“예, 전부 살려서 데려왔습니다. 심문은 로앙 백작이 오는 대로 시작할까요.”

“아니, 백작가에는 아직 추적 중이라 전해. 바로 심문하겠다.”

공작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들 맡은 바를 수행하기 위해 움직였다.

순식간에 커다란 집무실을 메우고 있던 기사들이 전부 빠져나갔다.

단 한 사람, 한스 마이어만 우두커니 남아 그를 마주 보았다.

“공작님, 엘리아 아가씨는…….”

에드문트는 스물이 넘는 기사들이 메우고 있던 거리를 좁혀 나갔다. 협탁 앞, 한스의 바로 앞에서 멈추어 섰다.

협탁에는 흰 장갑과 작은 약병 하나가 놓여 있었다. 모두 집사가 그를 위해 매일 준비해 주던 물품들이었다.

에드문트는 약병을 바라보며 언제부터 집사가 저 작은 병에 약을 덜어다 챙겨 주었는지를 떠올려 보았다.

<도련님, 기사들에게 물어보니 검을 쥐느라 살이 벗겨지는 상처에는 이만한 약이 없다고 합니다.>

열둘, 열하나, 열……. 서른두 해부터 되짚어 돌아가려니 까마득했다. 에드문트는 아홉 살의 기억을 반추해 보는 걸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집사는 아직 의식이 없는가.”

“아침에, 잠시 눈을 떴다고 합니다.”

“…….”

한스의 대답을 들은 에드문트가 약병을 집어 올렸다. 이미 왼팔의 상처는 아물었으니 챙겨 봐야 짐만 될 뿐인데, 그는 작은 약병을 겉옷 안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그리고, 흰 장갑을 집어 직접 착용했다.

“한스, 세 시간 안에 심문을 끝낼 테니 엘리아 곁에 있어.”

장갑은 어제 그가 착용했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손을 끼워 넣고, 팔목에 있는 단추 세 개를 잠갔다. 보석으로 만든 단추가 팔이 움직일 때마다 새파란 빛을 반사했다.

말하려고 했다. 아가씨께 왜 말하지 않으시냐고, 대체 언제까지 저분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취급하실 거냐고 따져 묻고자 했다.

‘저 빌어먹을 장갑도 이제 놓으시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아가씨가 당신께서 사람 죽이고 돌아오시기 전에 깨시거든 뭐라 말씀드려야 하냐고도 물어봐야 했는데.’

별관에서 아직 독과 싸우고 있는 집사의 상태를 물어볼 줄은 몰랐다.

새파란 엘리아의 꽃 그림 아래, 집사를 흉내 내 흰 장갑과 약병을 올려놓고 스스로 멍청한 짓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필요도 없는 약을 품어 가실 줄은 몰랐다.

변하고자 하나, 아직 달라지지 못하는 남자를 향해.

아무것도 종용해 댈 수가 없었다. 고작 작은 약병 하나가 마음 쓰인 탓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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