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귀가
비명, 흐느낌, 변명, 눈물, 원망…….
수많은 소리가 쏟아지다 멈추고, 다시 처음인 것처럼 시작하고.
“살려 주세요, 제발. 저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아무것도요.”
오랜 시간 사용하지 않은 로앙가의 낡은 별관에 시작과 끝이 뒤엉겨 신음을 터뜨렸다. 라스페 공작이 등불에 의지해 소리가 뻗쳐 나오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아, 죄송합니다. 바람이 불어서…….”
공작가의 지하 감옥에 익숙한 병사들은 깨진 창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막지 못해 자꾸 등불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내부를 밝혀 주던 불빛이 희미해지자 자비를 구하던 목소리도 조금씩 잦아들었다.
마치 숨을 내쉬듯 가녀린 목소리로만 삶을 구걸해 댔다.
만찬장으로 사용했을 커다란 방, 세워 둔 장식물처럼 대기하고 있던 기사가 다가와 들고 있던 등불에서 빛을 덜어 주었다.
조각난 불빛이 다시 타오르며 지독한 밤을 밝혀 주었다.
사위가 환해진 방에는 삭아 부서진 가구들, 여기저기 구멍 난 옷처럼 내려앉은 나무 바닥, 그리고 결박된 채 방 안에 널브러진 로앙가의 사용인 한 명이 있었다.
“이자가 마지막이었습니다.”
불빛이 다시 돌아오고 취조가 재개될 듯했으나 공작가의 기사는 더 추궁할 자가 없다는 말을 고해 왔다.
“어떻게 할까요?”
끝을 예감케 하는 짧은 말에 무릎 꿇은 젊은 사용인이 울음을 터뜨렸다. 옆에 있던 로앙가의 기사 하나가 입을 다물게 한다고 검을 치켜들었지만, 도리어 애원하는 소리만 부추겼다.
“제발, 제발 시몬 님. 베, 베르트 님…….”
마지막 남은 사용인은 앞서 기절하거나 다른 곳으로 끌려간 사람들의 행동을 반복했다.
눈앞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제가 아는 로앙가 기사들의 이름을 하나씩 읊어 가며 자비를 구했다.
“저는, 저는 정말 죄짓지 않았습니다! 제가 어떻게 엘리아 아가씨한테, 도련님께…… 아시잖습니까. 예?”
에드문트는 오늘만 벌써 스무 번이 넘게 들었는데도 낯선 애원을 지켜보았다.
공작가 사용인들의 단조로운 신음이 정상인 건지, 내내 기사들의 이름이며 그들과의 추억담을 방패처럼 꺼내 들어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쪽이 정상인 건지.
혹은 양쪽 모두, 비정상인 건지.
“데이지, 데이지! 제발, 제발 나 좀 구해 주게! 제발……!”
“끌고 가.”
“예, 공작님.”
“안, 안 돼. 안 됩니다. 살려 주십시오, 제발. 공작님! 나리!”
에드문트의 한 마디에 라스페가의 병사들이 남자를 어디론가 끌고 갔다.
“저는, 저는 죄가 없습니다! 정말로 제 방에 있었다는 그 병, 그거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이름이 불리었던 로앙가의 기사들은 참담한 표정을 지으며 남자의 비명을 외면했다.
그 목소리가 점차 멎어 들며 비명 뒤에 숨어 있던 누군가의 목소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안해요. 아르망, 정말 미안해요.”
아마도 마지막으로 끌려 간 남자의 이름을 읊조리는 건, 데이지의 목소리였다.
‘태어날 때부터 로앙가에서 자랐다고 했던가.’
평생을 함께해 온 데다가 자식처럼 키워 왔으니, 엘리아와는 고작 여덟 해를 함께한 친부모보다 막역한 사이였다.
<미안해, 미안해 에디. 정말 미안해. 로앙가 때문에, 나 때문에…….>
그러니 말투도, 목소리도 에드문트가 착각하리만치 빼닮은 것도 당연하리라.
결코, 두고 온 여자가 미치도록 그리워 남자가 환청을 듣는 것은 아니어야 할 테니까.
* * *
가지고 있던 독으로 자진하려 했던 두 사용인, 그리고 그들과 긴밀했거나 봉투에 마찬가지로 접근할 수 있었던 사용인들까지.
도합 스물여섯 명의 취조를 끝내고 낡은 별관에서 나왔을 땐 이미 모두 지쳐 있었다.
폐허나 다름없는 별관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도 잠시, 어둑한 바깥 풍경에 에드문트가 멈추어 섰다.
“등불은 이것뿐인가?”
“바로 더 가져오겠습니다.”
이미 길을 걷기에 충분히 밝았는데도 에드문트는 등불을 더 가져와 길을 밝히도록 했다. 수하들은 묵묵히 명령에 따라 여분의 등불에 불을 붙였다.
로앙가 별관 앞은 금세 낮처럼 환해졌다.
에드문트에게만, 여전히 시커먼 밤이 남아 있었다.
“공작님, 바로 공작가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새까만 암흑. 조금만 발을 헛디디면, 타닥타닥 심지를 태우는 불꽃에서 멀어진다면.
“에드문트 님?”
집어 삼켜질 것만 같았다. 그가 내내 만들었던 비명, 흐느낌, 변명, 눈물, 원망…….
그리고 한 번 죽었던 자신마저.
<사, 살려 주세요. 공작님…….>
다시 죽음의 커다란 아가리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공작님.”
행선지를 정하지 못한 채 우두커니 멈추어 있자 뒤편에서 데이지가 에드문트를 불렀다.
두고 온 연인을 떠올리게 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간신히 공작의 의식을 깨워 냈다.
“라스페 공작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피와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데이지가 그의 앞까지 걸어 나왔다. 당장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도 목소리만은 선명하게 들렸다.
‘그러고 보니, 울질 않는군.’
목소리도, 말투도 어딘가 엘리아를 연상케 했지만, 연인의 목소리와 달리 데이지 슈미츠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심문을 받던 사용인들이 아가씨의 이름을 들먹일 때마다 들려오던 환청과는 달리.
<에디, 에드문트.>
눈물조차 말라 버린 듯 거칠기만 했다.
‘그래. 다른 사람이니까.’
환청과 현실의 목소리를 분간하고 나서야 에드문트는 데이지와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혹여 환각까지 보게 될까 봐 내내 무시해 왔기에, 얼굴을 확인한 건 오늘 중 처음이었다.
짙은 색의 머리칼, 훤칠한 키, 연녹빛의 눈동자까지. 눈앞의 여자는 어느 한 군데도 엘리아와 같아 보이지 않았다.
몸을 팽팽히 감고 있던 긴장감이 스치는 밤바람에 떨어져 나갔다.
“공작님, 남은 뒤처리는 로앙에서 맡겠습니다.”
에드문트의 도움은 필요 없다는 되바라진 제안만 남았다. 공작에게 익숙한 자들이라면 감히 입에도 담지 않을 소리였다.
“취조한 내용을 전달받는 대로, 백작께서 선택하실 겁니다.”
하나 데이지는 로앙가의 사람이었다. 또한 자진을 시도하던 두 사용인을 발견한 직후, 집사를 대신해 저택을 폐쇄하고 사용인들을 구금하는 결단을 내린 자이기도 했다.
<데이지, 제발. 대체 왜 너까지 심문을 받겠다는 거야!>
<외젠 님, 저도 엘리아 아가씨를 모시는 사람이니 예외를 두시면 안 됩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너까지…….>
<금방 결백을 증명할 수 있으니 염려 마세요.>
심지어 저 또한 혐의점을 추궁 받아야 한다며 스스로 별관에 몸을 가뒀던 자였다.
외젠과 에드문트까지 나서 여자를 취조 대상에서 제외하려 했지만, 데이지는 자신만 특혜를 받을 수 없다며 고문이 동반되는 취조를 견디고자 했다.
<고집부리는 게, 빼닮았군.>
주어 없는 에드문트의 말에도 외젠은 금방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아챘다. 모든 게 버겁고 참담한 시간 속에서, 외젠은 체념이 만든 미소를 보였다.
<예, 엘리와 데이지 두 사람 다 고집까지 꼭 닮았지요.>
새벽부터 외젠의 집무실에서 서류를 보느라 단 한 번도 봉투에 가까이 가지 않았다는 증언이 나온 뒤에야, 데이지는 스스로 구속한 인신의 자유를 되찾아 갔다.
그러나 당장 로앙 백작에게 달려가 기쁨을 누리는 대신, 데이지는 다음 순서를 기다리는 별관에 남고자 했다.
<다시, 겪어야 할지도 모르니까요.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아 두고 싶습니다.>
변절자를 대하는 에드문트와 벨젠 경의 모습을 모두 지켜보기 위해서. 로앙은 이 모든 절차가 처음이었으니, 라스페 공작가를 스승 삼아 배우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리고, 데이지가 목격한 광경은 전부 엉망진창이었다. 취조에 익숙한 라스페가의 기사들조차 당황할 정도로, 로앙가의 사용인들은 어수룩하기 짝이 없었다.
“공작님께서 어떤 점을 염려하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로앙이 그동안 사용인에게 너무나 관대하여 추태를 보이고 말았습니다.”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만 입을 열어야 마땅하거늘, 로앙의 사람들은 그저 인정에 기대기 위해 로앙 백작의 이름을 함부로 불렀다.
<제가 왜 엘리아 아가씨를 해치려고 합니까, 나리. 아가씨께 물어보십쇼. 그분도 절 믿으실 겁니다. 저는 배신 같은 거, 정말 그런 거 꿈도 꾼 적 없습니다!>
계시지 않는 아가씨에게 호소하려 들기도 했다.
<메리가 그럴 애가 아닌데요. 분명, 분명 무슨 오해가 생긴 걸 겁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결혼할 것 같다고 좋아하던 애였는데…….>
제 결백을 호소하기에도 모자랄 시간에 이미 자백까지 마친 동료들을 감싸겠다고 입을 열기도 했다.
설사 자신들이 죄를 저지른다고 한들 버리겠느냐는 헛된 믿음이 공고히 자리 잡고 있었다.
“끊어 낼 것입니다. 백작께서, 그리하시리라 다짐하셨습니다.”
백작을 지칭했지만, 결국 데이지는 스스로의 각오를 에드문트에게 드러냈다.
단호한 의지에 궁금증이 일었다.
충성심일까. 제 배로 낳은 것도 아닌 엘리아를 향한 모정일까.
“곁에서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혹은 사랑일까.
“로앙 백작이, 할 수 있으리라 보나.”
“하셔야지요. 전부 그분의 사람들이니까요. 보좌하는 저희가 부족한 탓에 공작가에 폐를 끼쳤지만, 백작님께서 결단을 내리시어 마무리하실 겁니다. 그러니, 공작님.”
아마 사랑이리라. 결코 맺어질 수 없음에도 포기할 수 없어서, 스스로를 별관에 가두어 제 동료들의 비명과 애원까지 감내케 한 것도. 여자가 끝까지 로앙 백작의 곁을 지키겠다 다짐할 수 있는 것도.
“엘리아 아가씨 곁에 있어 주세요.”
사랑이 그를 강하게 만들어 준 덕분이리라.
“…….”
연인의 이름을 들은 남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장갑에 덕지덕지 붙은 채 굳었던 핏물이 가루가 되어 바닥으로 추락했다.
서걱거리는 감각이 거슬려 손을 내려다보았다. 붉은 핏빛으로 물들었을 장갑에 어둠이 스며 본디 색이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
햇빛 아래에서 보면, 희게 빛날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일었다.
그러나 몇 번을 씻어 내도 지워지지 않을 핏물 때문에 불길에 던져야 하리라.
재 가루만 남을 장갑을 떠올리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아쉬움이었다. 우습게도.
<장갑 말이야. 답답해 보이는데. 벗지 않을래?>
단추를 하나씩 열어 내던 손길을 떠올렸으니까. 천 너머로 흘려주던 체온에, 아무렇지 않게 맨살에 스치던 감각까지.
<실은 답답해 보여서 그러는 게 아니고…… 내가, 내가 손 한번 잡아 보고 싶어서 그래.>
기억으로 남은 감각이 하나씩, 하나씩 맺혔다. 에드문트는 자신이 겨우 흰 장갑에 의미 부여를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마저도 사랑이었다. 누군가의 사랑은 마음을 더욱 굳건하게 하던데.
<에디, 내가 너 욕심내는 거야.>
자신을 향한 연인의 사랑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기만 하던데.
남자의 사랑은 핏물 같았다. 새하얀 천에 덕지덕지 붙어선 시커먼 집착만 키워 내다가, 딱딱하게 굳어 바스러졌다. 더러운 흔적만 남기며 바닥에 흩뿌려졌다.
‘지금 이 심정을, 네게 고백한다면.’
차마 이미 사랑하게 된 남자를 저버리지는 못하고, 혐오하지도 못하여 슬퍼하겠지.
하필 망가진 남자를 사랑하고 말아서, 나를 연민하며 여린 네 마음까지 상하고 말겠지.
“기사 열 명을 남겨 두고 갈 테니, 도움을 받도록.”
“예, 감사합니다.”
“그전에 좀 씻어야겠군. 백작가 욕실을 빌리고 싶은데.”
엘리. 언젠가 내 사랑이 얼마나 추한지 전부 알게 된다고 할지라도.
그때까지는 악취 나는 이 사랑을 아름다운 꽃인 양 치장해 보이기가 버겁다 해도.
전부 홀로 감당해야 할 뿐.
“바로 준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여 너만은, 잠시나마 아름다운 채 남기를.
* * *
한나절 동안 죽음에 절어 있던 몸을 씻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연신 물을 끼얹어 본들 몸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그렇다고 전부 씻겨 내려갈 때까지 욕실에 처박혀 있을 수는 없었으니, 목욕에 쓰는 향유와 뒤엉켜 조금이라도 흔적을 덮어 내는 요행을 바라야 했다.
“주인님, 떠나시기 전에 인사 올리겠다고 찾아왔습니다.”
대강 물기를 털어 내고 욕실에서 나오니, 보좌관이 고한 대로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백작가의 가신들, 일찍이 결백을 증명했던 로앙가의 사용인들.
“에드문트 님.”
그리고 파리한 행색의 외젠 로앙 백작. 그 곁에는 데이지가 있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공작이 무시할 걸 알면서도 외젠은 로앙 백작가를 대표하여 마음을 가득 담은 감사 인사를 전했다.
에드문트는 셔츠의 단추를 잠그며 공허한 인사를 들었다.
“사후 처리는 공작님께서 제안해 주신 방향과 다르지 않을 예정입니다. 부디 부상한 집사가 쾌차하길 기원하겠습니다. 그리고 엘리아는…….”
감사 인사는 엘리아에 관한 이야기까지 넘어갔다. 막 마지막 단추를 끼우려던 에드문트가 손을 거두지 않은 채 로앙 백작을 바라보았다.
“공작께서 배려해 주신 덕분에 엘리아의 소식도 전해 들었습니다. 엘리아가, 제 딴엔 잘 버티는 모습 보여 주고 싶었는지 와중에 저녁까지 챙겨 먹었다고 하더군요.”
“엘리 이야기라면 아까 전해 들었네.”
“아. 그러셨군요.”
제 누이동생 이야기를 하는 로앙 백작은 별관에서 봤을 때보다는 괜찮아 보였다. 막 저택에 당도했을 때는 새파랗게 질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으니까.
엘리아도 아닌 그의 오라비일 뿐이니, 그대로 눈으로만 보고 지나치려다가…….
“자네는 괜찮은가.”
충동적으로 물어보았다. 어차피 눈으로 확인했으면서.
“아, 그…… 저는 괜찮습니다.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외젠은 제가 매번 공작에게 지껄이던 말을 되돌려 받더니 무척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 줄 몰라 딱딱하게 굳었던 외젠은 이내 목이 죄인 듯 먹먹한 소리를 뱉었다.
“늘 공작께 이리 신세만 지니…… 송구스럽습니다. 로앙가에서 공작님께 죄를 지은 거나 진배없으니, 이번 일에 대한 배상에 부족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죄책감이었다. 과거엔 몰랐으나, 지금의 에드문트는 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 남자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에드문트의 숨통까지 죄어들려 했다.
죄. 대체 누구의 죄란 말인가. 되바라지게 굴던 사용인마저 얌전을 떨며 그에게 죄를 지었다고 지껄여 대니, 화가 치밀었다.
<정말 미안해. 로앙가 때문에, 나 때문에…….>
저들이 자식처럼 키운 엘리아도 같은 생각을 하며 앓고 있지 않겠는가. 제가 죄인이라고, 공작가에 해를 끼친 장본인이라며 스스로를 갉아 대고 있으리라.
한데, 누가 죄인이던가.
세상이 전부 눈 가리고 귀 막아 오직 그만이 알았다.
분명 에드문트 라스페가 죄인일진대. 그가 침묵하여 누구도 몰랐으므로…….
“로앙 백작, 죄인을 자처하여 자네 누이까지 죄인 취급할 건가?”
“예?”
“자네 논리대로라면 연루된 엘리 역시 죄인이 아닌가. 하나 나는 약혼자를 죄인으로 몰아 로앙가를 치죄할 생각 없네. 죽어야 할 죄인은 후작가 저택에 있을 테니.”
에드문트는 죄인을 자청하는 남자를 향해, 여기 있는 누구의 죄도 아니라고 말했다.
실로 인정 넘치는 오만함이었다.
온전히 거짓도 아니고, 진실도 아니었으니 죄책감을 외면했다. 단지 침묵한 것뿐이라 스스로를 속였다.
긴장이 풀린 백작의 얼굴에 미소가 감도는 모습, 살짝 눈물 맺힌 그를 달래 주겠다며 손을 끌어 잡아 주는 데이지의 모습.
충만한 안도감에 웃음 짓는 이들을 보며, 에드문트는 자신이 옳은 선택을 했다고 믿었다.
“그렇게 말해 주시니, 정말로 감사합니다.”
침묵은 비록 그를 비겁한 자로 만들었을지언정, 모두를 안도케 했다.
외젠 로앙을. 데이지 슈미츠를. 엘리아 로앙을.
에드문트 라스페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가시는 길 살피지 못함을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앙 백작과 그의 가신들은 마지막 절차를 진행하기 위해 별관으로 향했다.
에드문트는 옷을 갈아입고 돌아갈 준비를 마친 뒤에야 제가 빌린 공간을 둘러보았다.
<아가씨 침실 수색이 전부 끝났으니, 괜찮으시다면 그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엘리아의 침실이었다. 그의 저택에서는 찾을 수 없는 연한 빛깔의 천, 어린아이의 것처럼 작은 가구들이 즐비한 방은 그리 낯설지 않았다.
10년 전, 결혼식이 끝나고 엘리아의 침실에서 하룻밤을 보냈을 때와 다르지 않았으니까.
<그러고 보니 에드문트는 내 방 처음이겠구나. 음…… 나의 마지막 날이자, 당신의 첫날이라니. 왠지 이상하네. 이상하네요.>
그때와 달라진 건 계절이 달라지며 바꿔 달았을 커튼. 그리고 과거로 돌아온 에드문트가 선물이랍시고 박아 넣은 흔적들 정도였다.
에드문트는 협탁에 놓인 오르골 하나를 집어 들어 태엽을 감았다.
잔잔한 음이 정적을 두드려 깨우는 사이, 에드문트는 오르골을 지나쳐 침대에 다다랐다.
긴장했으면서 티 내지 않겠다고 입술을 꾹 말아 물고 있던 스무 살의 신부가 그곳에 있었다.
그 위로, 에드문트는 다른 기억을 겹쳐 올렸다. 열여덟 그의 연인의 모습을.
<에디, 웃는 게 좋은데. 응……?>
아픈 와중에도 저를 원망하기는커녕 웃어 달라고 말하던 애틋한 얼굴만 떠올리려 했다.
‘네가 부재중인 이 방에서 너를 생각하듯, 기다리고 있겠지.’
달라진 건 오직 엘리아 하나뿐이었던 시간에 종말이 고해졌다. 그 달라진 시간의 모든 책임은 에드문트 라스페에게 있었다.
에드문트는 이제 사무치도록 그 진실을 실감했다.
바뀐 세상에서 만일 누군가 다시 엘리아를 해친다면, 그 또한 오롯이 제 책임이 되리라.
과거와는 다르게 요동칠 세상에서, 엘리아를 무사히 지킬 수 있을까.
<엘리. 엘리아, 약속할게. 네가 다치지 않게, 위험하지 않게 내내 너를 지켜 줄게.>
이미 잃어버린 네게 지키지 못했던 맹세를, 지켜 보일 수 있을까.
* * *
문이 닫히고, 남자가 떠나며 일으킨 바람이 오르골에 닿았다.
성글게 감은 오르골은 금방 멈추어 버리고 말았지만, 태엽을 감으면 다시 빙글빙글 춤을 추리라.
정해진 궤적을 따라서, 음악에 맞추어 둥글게, 둥글게.
혹은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리라. 같은 곳을 향하는 게 이제는 지루한 나머지 가지 않은 길을 탐하고야 말아서.
과거에 잡힌 발을 억지로 하나씩 떼어 이미 지나온 궤적을 벗어나려 들지도 모른다.
그러다 망가질지도 모른다. 갈 수 없는 길을 탐욕스럽게 좇다가 다리가 부러진다면…….
그래도 태엽을 감으면, 음악이 연주되겠지. 오르골 위에서 추락한 인형을 버려둔 채 시간은 흐를 테니, 인형은 스스로 자초한 신세에 슬퍼하며 그리워하게 되리라.
소녀에게 닿을 수 없어 슬퍼하던 예전의 제 모습을. 그때의 지독한 외로움을.
* * *
처음은 늘 어렵다.
부모의 죽음을 처음 알게 된 날. 혼자가 되었음을 처음 실감한 순간.
남매처럼 지내던 소년이 제 첫사랑으로 자리매김했을 때.
<데이지 네가 기사가 되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면 가능성이야 있었겠지만…… 외젠 님께서는 성년이 되면 로앙 백작이 되실 텐데, 너는 기사도 뭣도 아닌 평민일 뿐이잖아.>
서로가 서로를 마음에 품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그런 사랑도 세상에 있음을 깨달았을 때.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함께 웃고 떠들던 동료들의 고통 어린 비명과 마주했을 때. 살려 달라는 외침을 외면해야 했을 때.
매 순간이 전부 버거웠으니, 데이지는 전부 처음인 탓이라 여겼다.
“로앙 백작가의 엘리아 로앙을 해하려 한 죄, 라스페 공작가의 에드문트 라스페 공작을 해하려 한 죄, 공작가의 집사에게 상해를 입힌 죄. 그 악랄한 죄의 이면에 로앙 백작가의 정적인 크라우제 후작가와의 결탁이 있었던 바, 배신행위가 자명함을 스스로 자백한 바이니…….”
이미 독이 퍼져 죽은 루아의 시신 앞에서, 극심한 고통으로 기절한 메리를 향해 외젠이 형을 확정했다. 두 배반자가 침묵한 채 백작의 선고를 받아들였다.
“……죄인을 참형하고, 그 수급을 20일간 효수하겠다.”
백작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이미 죽은 여자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을 처벌이었고,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여자에게는 자비를 베푸는 것과 다를 바 없었으니 죄책감이 목소리에 비칠 정도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도 힘들어 보이시는 건 역시 처음인 탓이겠지. 나도, 외젠 님도.’
공모 혐의를 완전히 벗지 못한 두 명의 사용인들과 로앙가의 가신들이 형의 집행을 지켜보았다. 저항도, 비명도 없어 실로 고요한 끝이었다.
기사들의 지시에 따라 두 사용인이 시신을 수습했다. 외젠은 잠시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데이지가 남은 이들에게 묵례한 뒤 그의 뒤를 따랐다.
3층 계단을 오르고, 집무실 문이 열릴 때까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후…….”
적갈색 소파에 몸을 파묻고 난 뒤에야, 외젠이 한숨을 내뱉기 위한 척 입을 열었다.
“데이지.”
외젠이 허공에 쏟아 낸 이름을, 데이지가 등불을 발견한 날벌레처럼 맹목적으로 쫓았다. 오랜 습관대로 건너편 자리 대신 그의 옆에 자리를 잡자 손이 뻗어 왔다.
뺨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정리해 주는 손길이 아플 정도로 다정했다.
“미안해. 혼자 남아 험한 꼴 보게 하고, 고생만 자꾸 시켜서. 어머니 아버지 돌아가신 이후로 너한테 계속 한심한 꼴만 보이네.”
“그렇지 않아요. 공작가에는 제가 안 가겠다고 고집부린 거잖아요.”
“내가 미덥지 않아서 못 간 거잖아. 안 그랬음 엘리아랑 같이 있었을 텐데.”
“이럴 때 보면 아가씨가 절 닮은 게 아니라, 외젠 님 닮아 고집이 세신가 싶어요.”
“그래. 우리 둘 다 만만찮은 고집이긴 하지.”
데이지는 순순한 대꾸에 웃음 짓고는, 외젠을 흉내 냈다. 손을 뻗어 경직되어 있던 이마와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주었다.
얼룩진 피로감을 지워 주고 싶어 한 일이었는데. 데이지의 손길은 되레 불쏘시개처럼 외젠의 감정을 부추기고 말았다.
불어난 감정이, 외젠이 애써 세워 둔 둑 위로 넘쳐 데이지의 앞에 쏟아졌다.
“내가, 안일했어.”
라스페 공작이 남긴 말을 이어 가듯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라는 변명으로 지나갈 수 있다면 편했을 텐데. 외젠은 차마 그러질 못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남은 사람들을 어떻게든 지키고 싶었어. 그때의 나는……. 너를 대할 때처럼 가신들과 저택 사용인들을 가족처럼 대한다면 전부 다 괜찮아지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고.”
새파랗게 어린 가주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으며, 외젠은 라스페 공자처럼 충성할 자만 남기고 모두 잘라 버릴 자신이 없었다.
대신 그는 다정한 가주가 되고자 했고, 마지못해 선택한 길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배신당하지 않고, 목적을 이룰 때까지 무탈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어리석게도.
“상황이 조금씩 나아지는 걸 보면서, 내가 옳은 선택을 했다고 착각하고 말았어. 어느 쪽도 완벽하지 않다는 걸 잊지 말아야 했는데. 옳고 그른 선택이라는 건, 애초에 존재하질 않았는데.”
외젠은 데이지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 올리고는, 얼굴 아래로 미끄러트렸다.
늘 궂은일을 하느라 물기가 마를 틈 없었을 손에 입술을 대고 고백했다.
나태했음을. 제 안일함이 벌려 놓은 구멍으로 파고든 크라우제 후작이 모두를 상처 입혔으니, 사과해야 마땅했다.
“미안해. 다 품지도 못할 사람들을 위하겠다고 제일 소중한 엘리아와 너를, 상처 입힌 거. 그런데도 곁에 있어 주지도 못하고, 엘리아 곁에 보내 주지도 못해서…….”
입술이 좀 더 세게 데이지의 손을 눌러 왔다. 눈물을 삼키기 위한 떨림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이럴 땐 부모님이 그리워. 살아 계셨다면, 버거운 이 현실을 대신 떠안아 주시지 않으셨을까. 적어도 짐을 덜어 주시지는 않았을까 싶어서 그리워. 비겁하게도.”
“외젠 님, 저도 마찬가지예요. 늘 그런 생각을 해요.”
그리움은 다른 감정들보다 몇 배로 넉넉하여, 그 위로 무엇을 쌓아도 넘치는 법이 없었다.
하여 데이지는 다신 볼 수 없는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 위에 차곡차곡 새로 돋아나는 마음을 잘라 쌓아 올렸다.
사랑, 슬픔, 원망, 죄책감……. 둘 만한 곳이 없어 전부 그리움 위에 쌓아 올리면, 어느새 그리움과 섞이고 말았다.
“우리가 소중히 여겼던 사람들이 돌아와, 빈자리를 채워 주시길 바랐어요. 전부 다 놓아 버리고 그저 누군가의 딸로 자라 사랑받고 싶기만 했어요. 외젠 님께서 힘들어하실 때면…… 먼저 가신 분들을 원망했고요.”
단 한 번도 서로를 향하지 않은 적 없던 시선을 타고, 감정이 흘러갔다. 슬픔, 원망, 두려움, 갈망…….
전부 잡아먹은 건 그리움이었다. 그리움이 곁에 있는 남자를 향했고, 여자를 향했다.
“저 역시 도망치고 싶어 그리워했으니, 비겁하다 하실 건가요.”
도무지 떨어질 줄 모르던 손이 떨어지고, 틈 없이 닿아 있던 입술이 이별하고.
“그럴 리가.”
입술을 담았던 여자의 손이 남자의 등을 다독였다. 눈매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슬픔을 걷어 가던 남자의 손이 여자의 어깨를 감쌌다.
“내가 너를 비난할 리가 없잖아.”
사랑이었으나, 잠시 그리움에 묻어 둔 감정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 * *
어둑한 밤, 누군가의 생이 끝나고. 그래서 이별하는 소리가 들렸다.
“주방에 좀 다녀올까요? 오늘 아무것도 못 드셨잖아요.”
“됐어. 하루 정도 굶는다고 큰일 날 것도 아닌데.”
“조금이라도 드셔야죠. 우리 아가씨도 챙겨 드셨다잖아요.”
“……그래. 엘리가, 괜찮다고 전하고 싶어 애썼다고 했지.”
“네, 그러니 아가씨 돌아오시면 저희도 잘 지냈다고 이야기해 드려야죠.”
어딘가에서는 슬픔이 남아서, 서로를 보듬는 소리가 울렸다.
귀 기울이거든 담을 수 있는 소리를 뒤로한 채, 남자는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왔다.
“에디?”
장갑을 잊은 맨손이 문고리를 잡아, 문이 열리는 소리로 적막에 끝을 고했다.
동시에 여자의 기다림도, 남자의 그리움도…….
“엘리.”
끝을 마주했다.
“다녀왔어.”
그리움에 묻어 두었던 사랑이, 다시 서로를 향하게 했다.
* * *
날짜가 바뀌고, 절반이 넘는 밤이 지나간 시각.
“아가씨, 에드문트 님께서 도착하셨다고 합니다.”
바깥 상황을 살피러 나갔던 기사가 에드문트의 도착을 알려 왔다.
“바로 이곳으로 올라오실 듯합니다.”
오랜 기다림이 끝난다는 소식에, 반가움에 앞서 긴장이 되었다. 그리고 긴장을 덜어 낼 틈도 없이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문고리가 달그락거렸다.
‘별일 없다고 했는데, 왜 이렇게 긴장이 되지?’
엘리아는 소파에서 일어나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저도 모르게 숄을 찾아 손으로 가슴께를 더듬다가 달리 잡을 게 없음을 깨닫고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마침내 문이 열리고, 새카만 머리칼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내내 기다리던 사람이었는데, 생각해 둔 말이 참 많았는데. 준비한 말을 꺼내긴커녕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엘리.”
굳어 버린 엘리아 대신 에드문트가 먼저 다가왔다.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만큼만 거리를 좁혀 다시 멈추어 서더니…….
“엘리, 다녀왔어.”
나지막한 인사말을 듣고 나서야 실감했다. 그가 돌아왔음을.
엘리아는 겨우 고개를 끄덕여 인사해 주었다. 그러곤 천천히, 탄식 같은 한숨을 뱉었다.
고여 있던 숨을 뱉고 다시 들이켜자 익숙한 향이 훅 끼쳐 왔다.
에드문트에게 묻어온 로앙가의 흔적이었다.
자각한 순간, 엘리아는 가슴이 들썩일 정도로 크게 숨을 들이켜 옅은 흔적을 담아내고자 했다.
“후우…….”
순간, 엘리아를 응시하던 에드문트의 몸이 움찔거리며 반응했다. 미미한 그의 움직임에 맞춰 젖은 머리칼이 흔들거렸다.
숨을 몰아쉬던 엘리아가 뒤늦게 살랑이는 머리칼에 시선을 주었다. 빛을 전부 잡아먹을 듯 새카만 색이었는데, 물기가 어리니 반짝거려 도리어 빛이 났다.
‘에디가 로앙가에서 씻고 와서, 그래서 익숙한 향이 나는 거였구나. 아직 밤에는 서늘한데 머리카락은 다 말리지도 않고…….’
물기 어린 머리칼을 보니 혹시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나 걱정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심장을 죌 듯한 애틋함을 느꼈다.
덜 마른 머리칼은 자신을 만나기 위해 서둘렀다는 의미였으니까.
다녀왔다는 말을 들은 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는데. 시각과 후각에 더불어 남자의 목소리를 기다리는 청각, 품에 안겼을 때 느꼈던 감촉까지.
남은 감각마저 전부 눈앞의 단 한 사람을 향해 바짝 곤두서고 말았다.
‘조급하게 굴지 않으려고 했는데.’
기다리는 동안 차곡차곡 모아 둔 인내심이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려 들었다. 아무리 손을 세게 쥐어 봐도, 틈을 비집고 바닥에 쏟아져 버리고 말았다.
“에디.”
결국, 얕은 인내심에 패배하고 말았다. 마음이, 세찬 비처럼 쏟아졌다.
“정말, 내가 정말 미안한데 나 부탁, 한 번만 들어주면 안 돼?”
자제심을 잃었다는 부끄러움에 얼굴이라도 가리고 싶었건만, 경직된 몸은 움직임을 허락지 않았다. 푸른색 숄에서 손을 떼지 못했던 그날로 되돌아온 기분이었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안아 보면 안 될까? 살짝만…….”
스스로가 부끄러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멈출 수가 없었다.
다녀왔다는 인사로도 모자랐으니까. 온몸으로, 모든 감각을 통해 그가 제게 돌아왔음을 확인하고 싶었으니까.
* * *
아마 겨우 몇 초였겠지만, 엘리아에게는 시간이 멈춘 듯 긴 기다림이었다.
눈을 뜨면 혹시나 곤란해하는 에드문트의 표정이 보일까 봐 숨죽여 소리를 들어 보려 했다.
이윽고 감은 눈 너머로 한 걸음, 한 걸음 끊어 내며 다가오는 에드문트의 발소리가 들렸다.
‘내 기대감이 만든 환청은 아니어야 할 텐데.’
의심했지만 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전부 현실이라는 걸.
발소리에 이어 남자의 체향에 섞인 익숙한 향이 가까워졌으니까. 그마저 제가 꾸며 낸 환상일 리는 없었으니까.
눈을 뜨자 다행히 새하얀 셔츠가 보였다. 이번에도 에드문트는 딱 한 걸음 떨어진 채 멈춰 서 있었다.
익숙한 거리감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엘리아는 고개를 바짝 들어 에드문트와 눈을 마주쳐 보았다. 남겨 둔 한 걸음은 어떤 의미인 건지, 확인하기 위해서.
“……에디.”
까만 밤하늘이 엘리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자신을 향해 전부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욕심이 나지 않을 리가. 엘리아는 남은 한 걸음을 좁히는 대신, 그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
“한 번만, 안아 봐도 돼?”
마지막 확인을 구하는 질문에, ‘그래.’라는 대답은 들려오질 않았다.
그러나 다시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엘리아가 바라 마지않던 대로, 온 감각을 타고 에드문트가 제게 전해져 왔으니까.
마치, 별을 머금은 밤하늘이 우르르 쏟아져 내리듯. 에드문트가 예고 없이 엘리아를 으스러지게 껴안았다.
“아, 에디…….”
가장 먼저, 익숙한 향이 엘리아를 덮쳤다. 더없이 짙어진 체향에 이어 억센 팔이 엘리아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심장이 뛰는 진동이, 높이 오른 체온이 온몸에 닿아 감각을 깨워 냈다.
“에디, 보고 싶었어. 너무 보고 싶었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웠거늘, 이제는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보고 싶었어. 에디, 에드문트…….”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연신 그의 이름을 불렀다.
‘보고 싶었어.’라는 말, 그리고 남자의 이름. 그 두 단어만 새겨진 오르골처럼 쉴 새 없이 이름을 부르고 보고 싶었다 고백했다.
바짝 굳어 있던 엘리아의 몸이 품 안에서 녹아내리는 걸 느끼며, 에드문트는 엘리아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보고 싶었다는 아득한 감정이 그의 이성을 잠식해 나갔다. 격정을 이기지 못해 탄식처럼 이름을 불렀다.
“엘리, 엘리아.”
침실로 엘리아를 데려왔을 때와는 달리, 오로지 서로를 느끼기 위한 포옹이었다. 하여 에드문트도 온 감각을 동원해 엘리아를 자각해 나갔다.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던 체온을 느끼며 천 너머로 맥박 치는 심장에 파고들었다.
품에 담고도 잃어버릴 것만 같아 간절해지는 여린 몸을 더욱 세게 옭아맸다.
“흣…….”
이내, 서로가 이름을 부를 여유조차 사라지고 말았다. 가슴께에 얼굴을 묻은 엘리아가 이름이 되지 못한 흐느낌을 토해 내고, 엘리아의 머리칼에 입술을 묻은 채 에드문트가 간신히 숨을 골랐다.
전부 처음이었다. 자신을 기다렸을 아내에게 다녀왔다는 인사말조차 건네 본 적 없었으니.
<다녀왔어? 그……. 피곤하겠다. 들어가서 쉬어.>
잘 다녀왔느냐는 인사말이 끝나고도 달싹이는 입술을 보며 의구심을 가진 적은 있었지만 아는 척 한 번 하질 않았다.
‘그때의 너도, 한 번이라도 안아 주길 바랐던 걸까.’
잘 다녀왔다는 인사라도 했더라면, 만일 내가 먼저 팔을 뻗어 안아 보려 했다면 좋았을 텐데.
“엘리.”
제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연인을 불러 보았다. 허리를 감아쥔 팔은 그대로 두고, 어깨를 끌어안았던 손을 가져다 간신히 보이는 이마를 쓸었다.
구불구불한 잔머리를 한쪽으로 밀어내자 둥근 이마가 보였다.
입을 맞추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다간 더 많은 걸 욕심내게 될 것만 같았다.
이 이상 선을 넘었다간, 자제할 자신이 없었다.
또한, 자신의 품에 힘겹게 매달려 있는 연인을 더 몰아붙이고 싶지도 않았다. 에드문트는 욕망을 끊어 낸 다정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엘리아.”
“싫어. 조금만, 조금만 더…….”
허리를 감은 팔을 살짝 풀어내고, 제 셔츠를 말아 쥔 손을 떼어 내려 하자 엘리아가 버둥거렸다. 맞닿은 몸이 떨어지기는커녕 더욱 밀착해 왔다.
“엘리, 괜찮아. 절대 안 놓을게.”
그가 몇 번 더 설득해 보려 했으나 엘리아는 계속 고개를 저으며 그에게 매달렸다.
하는 수 없이 에드문트는 한 팔로 허벅지 아래를 받쳐 엘리아를 안아 들었다.
몸이 공중에 들리자 반쯤 넋을 놓고 있던 엘리아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휘청거리는 감각에 적응할 새도 없이 다시 몸이 주저앉는 감각이 일었다.
“손 때문에……. 불편하면 이야기해, 엘리.”
소파 위에 내려 줄 생각이었지만 엘리아가 셔츠를 붙든 채 떨어지질 않았으니, 에드문트는 대신 엘리아를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가슴팍에 붙어 있던 엘리아의 얼굴이 이제는 그의 목덜미까지 올라왔다. 규칙적인 숨결이 그의 목선을 휘감았다.
“아니, 괜찮아. 이대로가 좋아.”
엘리아는 그제야 손을 떼고 에드문트의 상체에 완전히 기대었다. 에드문트가 한 팔로 허리를 감아 안고 반대쪽 손으로 등을 천천히 쓸었다.
엘리아가 눈을 감은 채 어설픈 손길을 받아들였다. 규칙적으로 닿아 오는 체온에, 커다란 손이 쓸어내리는 손길에 긴장이 차츰 풀어졌다.
나긋한 감각에 취해 저도 모르게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
그러자 아래에 있던 에드문트의 몸이 살짝 움직였다.
여태까진 엘리아가 자각하지 못했을 뿐, 얇은 셔츠만 입은 몸에 자극이 가해져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덕분에 가물가물하던 정신이 반짝 켜졌다.
‘설마, 나 때문에 불편한 건가?’
엘리아는 에드문트의 반응이 그저 우연인지, 아니면 제가 짐작하는 그 상황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일단은 눈치채지 못한 척 몸을 최대한 움직이지 않아 보려 했다.
그러나 한번 의식한 몸이 전과 같을 리 없었다. 에드문트는 금방 엘리아가 자신을 신경 쓴다는 걸 알아챘다.
바짝 경직된 등을 쓸던 손을 멈춘 뒤 얼굴을 살짝 틀어 엘리아의 표정을 살폈다. 몽롱한 기색이 드러난 눈, 그리고 벌어진 입술이 보였다.
“엘리, 불편해?”
“응? 아니, 나는 괜찮은데 그게…… 내가 너 불편하게 할까 봐.”
설마 에드문트가 그 잠깐 새 눈치챌 줄 몰랐기에 엘리아는 깜짝 놀라 본심을 털어놓고 말았다.
이야기하고 나니 부끄러워서, 엘리아는 어깨에 기대어 있던 얼굴을 푹 숙였다.
부끄러움을 숨기느라 바빠, 에드문트가 대답을 망설이는 기색은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괜찮아.”
에드문트는 고심한 대답에 이어 엘리아를 살짝 더 당겨 안았다. 엘리아였다면 ‘괜찮으면 그냥 여기 있어 줘.’라고 말로 했을 의사 표현을 몸으로 보인 셈이었다.
엘리아는 그의 ‘괜찮다.’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말로 오해해서는, 가만히 두었던 팔을 뻗어 와 에드문트의 목을 끌어안았다.
“에디, 아까 내가 정신이 없어서. 그래서 잘 다녀왔느냐는 인사도 못 해 줬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규칙적인 자극에서 벗어나,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며 공기를 울리는 감각이 목덜미를 자극했다.
엘리아는 자신의 말 한 자 한 자가 그를 자극하는 줄도 모르고 말을 이었다.
“어디 다치거나 한 데는 없지? 보좌관한테 로앙가의 일 대충은 전해 들었어. 두 명이었다는 거랑, 네가 심문에 참여했다는 것도. 다른 일은 더 없었던 거지?”
“……다른 일은 없었어. 심문을 끝내고 로앙 백작에게 마무리를 맡기고 왔으니, 지금쯤 다 끝났을 거야.”
“그렇구나. 마무리를……. 어쩔 땐 며칠씩 걸리기도 한다고 들었는데, 일찍 끝났네.”
“이미 자백을 받았으니까.”
에드문트는 로앙가에서 겪은 일에 대해 깊게 이야기하려 들지 않았다. 어떤 단어로 표현하든 전부 엘리아에게는 듣기 괴로울 이야기가 될 테니까.
엘리아 역시 로앙에서 있었던 일을 더 캐물으려 하지 않았다. 마치 위로하듯 다시 등을 도닥이는 손길에 대꾸해 주듯 어깨와 목에 연신 뺨을 비볐다.
로앙가에서 묻어온 비누 향이 아직 희미하게 느껴졌다.
어리광 부리듯 드러난 목덜미에 코끝을 꾹꾹 눌러 대니 꽃잎에서 향이 퍼지듯 옅게 배어 있던 향이 강해졌다.
“……엘리.”
“응? 아. 미안해…… 간지러웠겠구나. 비누 향이 나서…… 내가 좋아하는 향이거든.”
엘리아가 목을 감고 있던 팔을 풀고는 에드문트에게서 살짝 떨어졌다. 내내 안겨 있느라 볼 틈이 없었던 에드문트의 얼굴이 보였다.
본래 늘 시선부터 마주쳐 오던 남자가 어째선지 슬쩍 시선을 피해 엘리아의 가운을 바라보았다.
‘……옷 때문에 그러나?’
혹시 흐트러졌나 싶어 그의 시선을 따라 가운을 살펴봤지만, 쇄골을 가로질러 몸을 감싸는 옷깃은 입었을 때 그대로였다.
‘근데, 왜 시선이…….’
의도적으로 시선을 피하는 에드문트의 눈동자는 바닥을 모르는 심해처럼 깊고 어두웠다.
“에디, 왜…… 괜찮아?”
눈이 마주치거든, 잡아먹힐 것만 같았다.
새카만 짐승이 두려움을 이겨 내지 못하고, 그만 저를 콱 물어 버릴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