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배웅
겨우 잠들었던 엘리아가 일어난 건 정오가 살짝 지난 시간이었다.
자는 사이 피로가 조금이라도 덜어지길 바랐으나 겨우 네 시간 자고 일어난 거로 괜찮아질 리 만무했다.
‘아……. 잠들기 전보다 더 몸이 무거워.’
엘리아는 눈도 못 뜬 채 꼼질거리며 폭신한 침구에 얼굴을 비비었다. 졸음을 떨치려고 한 행동이었는데, 보드라운 천이 주는 감각이 좋아서 되레 다시 잠이 들 것만 같았다.
‘일어나야지. 일어나야 하는데…….’
혼자 한참 끙끙거리다 간신히 몸을 일으키니, 주변에는 침대에서 갓 일어난 아가씨를 본척만척하는 기사들뿐이었다.
‘기사들밖에 없네. 에드문트도 안 보이고.’
엘리아는 마차만큼이나 높다란 침대에서 내려왔다. 커튼을 꼭꼭 쳐 둔 방은 여전히 어젯밤에 고정된 듯 어둑했으나, 벽시계를 확인하니 밖은 해가 한창일 시간이었다.
“저기, 누구 아무나 사용인 좀 불러 줄래요?”
슬슬 사람 꼴을 해야겠다 싶어 시중들 사람을 불러 달라고 하자, 기사들이 서로 눈치를 보더니 근처 소파로 시선을 향했다.
엘리아가 덩달아 소파 근처로 다가가자 등받이 너머로 짙은 색의 머리칼이 보였다.
“에디?”
그러나 에드문트인 줄 알았던 소파 위 남자의 정체는, 한스 마이어였다.
‘뭐야. 에디인 줄 알았잖아.’
혹시 에드문트가 겨우 잠든 걸 깨울까 싶어 조심스럽게 움직이던 엘리아가 소파를 팡팡 두들겨 한스를 깨웠다.
“한스, 한스! 왜 여기서 자고 있어요?”
“……자기는요, 제가 무슨. 잠깐 눈 감고 있었습니다.”
“한스, 이 방에 거울 진짜 많던데 아무거나 들고 확인해 봐요. 누가 봐도 30분 이상 잔 얼굴이니까.”
엘리아의 지적에 한스가 마침 탁자 위에 있던 거울에 제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영락없이 철야를 하다가 꾸벅꾸벅 졸았을 때 얼굴이었다.
“죄송합니다. 잠깐 눈 감고 있는다는 게…….”
“에드문트는요?”
“지금 씻고 계십니다. 아가씨께서 일어나시는 대로 로앙가에 바래다 드리겠다 하셨으니, 외출 준비를 도와 드리겠습니다.”
한스는 자다 일어난 얼굴로 사용인들을 불러들여 엘리아의 시중을 들게 했다. 그새 취향을 파악했는지 침실로 옮겨 준 세숫물은 살얼음이 낀 것처럼 차가웠다.
“세숫물 하나만 더 들여와. 여기 한스 경께서도 좀 씻어야 할 것 같으니까.”
이미 거울로 제 꼴을 확인했던 한스도 군말 없이 세숫물을 받아 얼굴을 씻었다. 그사이 먼저 세안을 마친 엘리아가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옷 방에 들어서니, 전날 한스와 둘이 청승 떨었던 흔적이 말끔하게 사라진 채였다. 안내를 받아 방을 가로지르는 칸막이 뒤로 갔더니 옷 두 벌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하나는 로앙가에서 보내왔을 엘리아의 옷이었고, 그 옆에 걸려 있는 건 에드문트가 갈아입을 외출복이었다.
‘일부러 내 옷이랑 비슷한 색으로 골라 둔 걸까? 만날 때마다 각자 편한 대로 입고 와서 단절된 느낌이 들었는데. 이렇게 색이 비슷하니까 짝 맞춘 것 같네.’
엘리아는 걸어 둔 옷을 그림을 감상하듯 바라보다가 가운을 벗었다. 두 명의 사용인들이 가운을 받아 든 뒤 착의를 도왔다.
‘다들 옷 시중드는 게 처음인가 보구나.’
태도는 정중했으나, 머리부터 꿰어 입어야 하는 옷을 착용하는 걸 돕는 손길이라든가 옷 주름을 정리하고 허리끈을 매어 주는 손길이 무척 어설펐다.
“허리만 다시 묶어 줘. 풀어질 것 같아.”
“죄송합니다. 다시 고쳐 드리겠습니다.”
당황한 사용인들이 몇 번 더 허리끈을 고쳐 주었지만, 세게 묶는 게 겁이 났는지 도통 나아지질 않았다.
다시 하라고 했다간 바닥에 엎드려 죄송하다고 고할 기세이길래 적당히 타협하고 마무리했다.
“라스페 공작께서는 아직 씻고 계시니?”
“예, 혹시 같은 공간에서 준비하시는 게 불편하시면 자리를 옮겨 드리겠습니다.”
“음. 칸막이도 있으니 상관없지 않을까? 머리 손질이나 해 줘. 그냥 빗질만 해도 충분해.”
그나마 빗질은 익숙한지 엘리아의 긴 머리를 빗어 내려 다듬는 데에는 실수가 없었다.
“잘하네. 혹시 자신 있는 모양 있으면 해 줘도 되는데. 묶든지, 땋든지.”
“그럼……. 양 갈래로 땋아 드려도 될까요?”
엘리아가 고개를 끄덕여 주니, 두 사용인이 절반씩 머리칼을 나눠 잡고 땋아 내리기 시작했다.
절반가량 땋았을 때쯤, 에드문트가 가운 차림으로 옷 방에 들어왔다. 커다란 물기 어린 몸을 감싼 가운은 그의 머리칼처럼 새카만 검은색이었다.
저도 모르게 에드문트의 벌어진 가운에 시선을 집중하던 엘리아가 황급히 눈을 올렸다. 다행히 시선을 옮기고 나니 금방 부끄러움이 가라앉았다.
‘저렇게 표정 없는 모습 오랜만에 보네.’
거울을 통해 본 에드문트의 얼굴은 감정이 절제된 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평생 보다시피 한 익숙한 표정이었는데, 다정한 모습에 금세 익숙해진 탓인지 낯설게 다가왔다.
“주인님, 아가씨께서…….”
옆에서 수건을 건네던 하인이 에드문트에게 엘리아가 같은 공간에 있음을 알렸다.
그제야 화장대 앞에 앉은 엘리아를 발견한 에드문트가 거울 너머로 시선을 맞춰 왔다.
겨우 입꼬리만 살짝 올렸을 뿐인데 순식간에 전체적인 인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엘리.”
착각일까?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 주는 모습이, 직전의 표정과 대비되어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에드문트가 엘리아를 향해 다가오자 머리를 손질하던 사용인들이 엘리아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자리를 피했다. 거울 앞에 엘리아와 에드문트 두 사람만 남겨졌다.
“몸은 괜찮아?”
“그럼. 네 시간이나 잤는걸? 에디는 어때. 좀 잤어?”
“충분히 쉬었어.”
그는 한스에게 공언한 대로 세 시간 만에 심문을 끝내고, 그대로 가신들을 불러 모아 회의까지 마치고 침실로 돌아왔다.
잠깐 목욕물에 담그고 있던 시간이 유일한 휴식 시간이었으나, 엘리아가 깨어나기 전에 준비를 마쳐야 했으니 잠들 틈이 없었다.
“얼마 쉬지도 못하고 또 일한 것 같은데. 아니야? 밖에 한스 경 보니까 피곤해서 쓰러지기 직전이었단 말이야.”
예리한 추측에 에드문트가 난처함을 웃음으로 표현했다. 둥글게 곡선을 그리는 입술에 아직 엘리아의 흔적이 대롱대롱 남아 있었다.
반듯하게 앉아 거울을 통해 그를 보던 엘리아가 몸을 돌려 왔다. 에드문트를 향해 손을 뻗으니, 그는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허리를 굽혀 가깝게 다가와 주었다.
입술 위에 손가락이 닿자 동시에 에드문트가 눈을 감았다. 마치 그가 마음껏 탐하라고 입술을 내어 주는 것처럼 보였다.
겨우 진정되었던 마음이 다시 잘게 떨렸다.
“에디, 조금만 더 숙여 줘.”
작은 목소리로 부탁하자 다시 눈을 살짝 뜬 에드문트가 이마가 닿을 만큼 가깝게 다가왔다.
‘눈 다시 감아 달라고 해야 하나? 책에서 보면 다들 눈을 감던데.’
그러나 가까이서 본 눈동자가 너무도 아름다워, 엘리아는 그대로 시선을 맞댄 채 입술을 겹쳤다.
어제의 흔적 위에 잠시 머무르다가 떨어지는, 옅은 입맞춤이었다.
“음…… 얼른 나으라고. 그리고 아침 인사 겸해서.”
속삭일 때마다 채 다 떨어지지 않은 입술이 입맞춤을 이어 가듯 닿았다 떨어졌다. 에드문트가 엘리아를 그대로 흉내 내 옅은 입맞춤으로 답했다.
이어 볼을 따라 천천히 올라온 입술이 눈가를 꾹 눌렀다 떨어졌다.
“읏…….”
생소한 감각에 흠칫하자 옅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웃음소리에 이어,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마저 여유가 느껴졌다.
“갈아입고 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준비 끝나는 대로 로앙가에 데려다줄게.”
그래서 저만 이렇게 부끄럽고, 욕심을 삼키는 건 줄 알았다.
엘리아가 앉아 있던 의자를 내내 잡고 있었을, 그의 왼손에 막 피가 몰려 살짝 붉어진 걸 보고서야 알았다.
<미안해. 내가 자제했어야 했는데.>
여유 있는 척하고, 자제했을 뿐이었음을.
* * *
“에디, 정말 저택에 데려다주려고? 그 시간에 조금이라도 쉬지.”
에드문트도 걱정이었지만, 무엇보다 저를 데려다주기 위해 동행하는 기사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다른 가문의 일이었으니 가신들이 피곤해 보이는 거로 참견할 수는 없었고, 에드문트에게 제발 쉬면서 일하라고 당부하는 수밖에 없었다.
“로앙가에서 저녁이라도 먹고 가는 게 어때? 곧 저녁 시간이잖아.”
“다음에 초대해 줘. 오늘은 바로 영지에 내려가 봐야 해.”
“로앙에 들렀다가 바로 영지로 내려가려고?”
에드문트의 일정을 알고 난 뒤에 기사들을 보니 더욱 연민이 일었다. 이 저택에서 반나절을 잠으로 보낸 사람은 엘리아가 유일한 셈이었다.
‘로앙까지 포함해도 제대로 쉰 사람은 나 하나뿐이겠지. 외젠은 당연히 한숨도 못 잤을 테고, 데이지도 외젠 신경 쓰느라 쉬질 못했을 테니까.’
두 가문의 강행군이 조금이라도 일찍 끝나려면 엘리아가 공작가를 어서 떠나고, 로앙에 돌아가 외젠의 일을 거들어 주는 방법뿐이었다.
에드문트가 마차에 오르기 전 기사들과 마지막으로 일정을 점검하는 사이, 한스가 반만 뜬 눈으로 엘리아의 곁에서 무료함을 달래 주었다.
“아가씨께서 걱정해 주신 덕분에 집사는 많이 안정되었습니다.”
“에디가 알려 줬어요. 고비 넘겼다니 다행이에요.”
“낮에 잠시 의식을 되찾았는데 아가씨 걱정부터 하더군요.”
다른 사람이었으면 신경 써 주지 않아도 된다 했겠지만, 말 많은 보좌관에게는 사담을 나누는 시간이 휴식보다 더 귀했다.
그 증거로 죽을상을 하고 있던 한스가 입을 열자 생기를 되찾았다.
“한스도 같이 영지에 내려가야 한다면서요? 다들 쉴 틈이 없네요.”
“기사들이 고생이고, 저는 가는 길에 몰래 졸면 됩니다.”
“그럼 안 되죠. 에드문트를 지켜야 하잖아요.”
동행하는 기사만 열 명이 넘는데 한스까지 합세해 호위하라니. 한스가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씀을, 제가 누굴 지킨답니까. 만약에 가는 길에 도적 떼라도 나타나면, 저는 당장 공작님 뒤에 숨을 겁니다. 제일 안전할 테니까요.”
“에디가 그렇게 강해요?”
“모르셨습니까? 저분 일생에 상처를 입힌 자는 단 한 사람뿐입니다.”
“그게 누군데요?”
한스는 말로 대답하는 대신 엘리아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
어젯밤 엘리아가 깨물어 낸 상처를 두고 한 농담임을 눈치챈 아가씨가 작달막한 주먹으로 저를 콩콩 두드려 댈 거라고 확신하며.
“한스.”
“옙.”
“샘나서 그러는 거 다 알아요. 한스도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나 엘리아는 한스를 질투에 눈이 멀어 아가씨를 놀려 먹는 사람 취급하더니, 주먹 대신 손바닥으로 그의 어깨를 도닥여 주었다.
“제가 졌습니다, 아가씨.”
“그럼 1골드짜리 셔츠 사 주는 거예요?”
한스는 기사들과 에드문트가 잠시 대화를 끊을 정도로 크게 웃고 말았다. 그렇게 실컷 웃고도, 웃음이 채 다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마저 쓰지 못하고 남은 웃음은 행복을 기원하는 꽃처럼 흩뿌렸다.
손을 잡고 함께 마차에 오르는 두 사람은 이미 서로를 마주 보며 환한 꽃을 피웠지만, 그래도 한스는 제 몫의 꽃까지 흠뻑 뿌리며 소원을 빌어 보았다.
‘그래. 아무것도 없이 버티는 삶보다야 낫지. 사랑이 함께하면 잠시나마 행복할 테니까.’
함께하는 시간이나마, 지금처럼 웃으시기를.
부디 행복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