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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드라실은 굳이 따지자면 거대한 물푸레나무로 분류되었다. 그런데 릴이 물푸레나무라고 부득불 입술에 얹었다는 건…….
‘알아본 거야?’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역시 남편이 최고다! 나중에 엉덩이라도 두들겨줘야겠다.
무서웠던 마음이 사그라들었다. 한순간 안도감이 찾아온 마음이 평온하게 물들었다. 릴이 있다면 그 어떤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만 같았다.
뿌듯한 내 속마음과 다르게 입술은 반대로 움직였다.
“어떻게 알았지?”
이윽고 이그드라실이 내 입술을 와그작 짓씹었다. 하지 마, 아프다고!
어딘지 모르게 멍청하게 느껴지는 속삭임에, 릴은 어이가 없다는 듯 대꾸했다.
“……아내를 못 알아보면 그거야말로 멍청이 아닌가?”
“아, 그런가?”
……놀라울 정도로 황당한 수긍이었다. 이런 상황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뭐가 되었든 간에 말이다.”
내 입술이 부드럽게 말려 올라갔다. 눈은 움직이지 않고. 얼굴 근육이 평소보다 몇 배는 자유분방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덕분에 거울이 있으면 보고 싶을 지경이다, 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적어도 평상시 내가 지을 수 없는 표정이라는 건 분명했다.
“이만 돌려주겠니, 사하크의 아들아?”
“뭘.”
“내 힘.”
짧지만 나지막하게 울리는 목소리는 제법 절박했다.
“내겐 그게 필요해.”
“아, 그거?”
릴이 심드렁하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보기에도 제법 얄미운 태도였는데, 이그드라실이 볼 때에는 어땠을까. 자신을 약 올리는 것처럼 보일 것만 같았다.
“가져갈 수 있으면 가져가 봐. 나도 별로 갖고 있고 싶지는 않은 거라 기꺼이 줄 수 있어.”
‘그런 말 하면 안 된다고, 이 인간아! 그러면 이 악신이 죽이려고 들 게 뻔하잖아!’
내 발악이 릴에게 닿았던 건지, 릴은 내 모습을 노골적으로 훑어보았다.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근데 너 그 몸으로 아무것도 못 할 텐데.”
음?
갑작스러운 말은 나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그드라실도 그랬던 듯, 낮은 음성으로 되물었다.
“무슨 의미더냐?”
“걔 포크도 겨우 드는 애야. 대체 날 어떻게 할 생각으로 온 건지 모르겠네.”
……이보세요, 남편님. 그건 과장이 조금 심한 편이지 않나요?
뭐, 심각한 저질 체력이라는 건 나도 인정한다. 아파서 침대에 누워만 있던 세월이 몇 년인데, 체력이 좋으면 그거야말로 비정상이지.
그런데 나름대로 등산까지는 무사히 하잖아!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가는 거긴 하지만.
물론 신체 건장한 릴과 비교하면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긴 했다. 예전에 릴은 상성이 어쩌고…… 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건 분명히 과장이었다.
그 증거로, 릴은 지금도 내 육체를 간단하게 제압하고 있었다. 고작 팔목을 움켜쥐고 있는 단순한 행위 하나만으로도 이그드라실은 꼼짝하지 못했다.
…덕분에 깨닫게 되는 것이다. 평소에 내가 베개로 릴을 때릴 때, 그가 얼마나 나를 봐주고 있었는지. 그가 날 제압하는 건 숨 쉬는 일보다 쉽지 않을까? 하하…….
무병장수하려면 앞으로 바짝 엎어져야겠다. 새삼스러운 다짐이 내 안에 새겨지던 그때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원대하신 카림.”
하비에르였다. 하비에르에게 내린 명령이 있던 릴의 인상은 당연하게도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성주께서 찾고 계십니다.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되어갑니다.”
“하비에르, 내가 너 한동안 오지 말라고…….”
릴이 말꼬리를 흐렸다. 정말 누굴 닮았는지 말을 지지리도 안 들어 먹는 시종이다.
……뭐, 보고 배울 사람이 한 명밖에 없으니 범인은 뻔하긴 하잖아?
볼 사람은 없지만―물론 이그드라실이 있기야 하지만― 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됐다. 일단 들어와.”
기다렸다는 듯 방문이 왈칵 열렸다. 하비에르가 방 안으로 발을 디디자, 릴이 턱으로 나를 가리켰다.
“마침 왔으니까 구경이나 하고 가. 이거 아무 때나 오는 기회가 아니다?”
…이보세요, 구경이라뇨. 내가 무슨 원숭이냐고! 우끼끼거리면서 재롱이라도 부리면 됩니까?
‘아참. 지금 이거 나 아니지?’
그런데 그 구경이라는 말에 기분이 묘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어쨌든 육신은 내 거잖아!
릴의 말을 들은 하비에르가 미간을 모았다. 릴의 말을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듯 되물었다.
“구경이라뇨?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네가 그토록 좋아하고 찬양하는 네 신이 지금 여기에 와 계시거든? 그러니까 구경이라도 해야지.”
그에 하비에르가 나를, 정확하게 말하면 내 껍데기를 뒤집어쓴 이그드라실을 바라보았다. 두 눈이 황당함으로 짙게 젖은 채였다.
“……예?”
하비에르가 멍청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대충 내 몸을 턱으로 가리킨 릴은 무심하게 툭 내뱉었다.
“이게 지금 진짜 이그드라실이야. 네가 그렇게 부르짖는 초대 말리카, 이시스의 영혼.”
신을 마주한 광신도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하비에르하고 비교하면 신앙심이 썩 깊지 않은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지만, 늘 침착했던 그의 시선이 흔들렸다. 손가락을 바들바들 떨며 제대로 말도 내뱉지 못했다.
“시, 신께서……? 신께서 오셨다니, 그게 사실…….”
내게 맨날 이그드라실이여…… 어쩌고 하더니, 그것과 진짜 신화 속의 이그드라실은 좀 다르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광신도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장난은 그쯤 하거라, 아이야.”
그때 입술을 비집는 음성이 내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더 위엄 있고, 낮고, 품위가 있었다.
…나도 저런 목소리를 낼 수 있구나. 엄마야.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품위 있는 음성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일단 네 목을 주면 나도 물러서마.”
“내 목?”
릴이 한쪽 속으로 자신의 목을 매만졌다. 조금 전 이그드라실이 맹렬하게 손을 뻗던 걸 생각했던 듯, 눈빛이 가라앉았다.
“이게 필요하다고……. 그럼 그다음은?”
릴의 음성이 사나워졌다. 여전히 잡혀 있던 손목이 조금 더 욱신거렸다. 릴이 조금 더 강하게 움켜쥔 듯싶었다.
“내 다음은 프리드린의 목인가?”
화내는 듯하는 말에 이그드라실은 대꾸하지 않았다. 긍정의 표현이란 걸 이 방 안에 있는 모두가 알았다.
이그드라실이 내게 유병단수 타령을 했던 게 생각났다. 설마…… 이거 때문이었나? 근데 이건 병은 아니잖아?
“이봐, 이시스.”
릴을 올려다보던 눈이 한 차례 깜빡거렸다. 이시스, 하고. 이그드라실이 자신의 이름을 곱씹는 것만 같았다.
“나도 댁 때문에 사는 게 참 힘들어서. 몇 번 봤으니까 잘 알 거 아냐. 난 신앙심이고 나발이고 애저녁에 팔아먹었다는 거.”
그건……. 릴이 프레이르를 살아가는 사람치고는 신앙심이 깊지 않기는 했다. 그건 자신이 경험한 일이 크기 때문일 터였다.
“내게는 댁의 말을 들어줄 이유가 하등 존재하지 않거든? 지긋지긋하다, 정말.”
이그드라실을 노려보는 그의 눈이 한 차례 번뜩였다.
“내 아내를 돌려주기나 해.”
“…….”
“싫다면 어쩔 수 없고. 강제로 쫓아내 버리면 그만이니까.”
이리 생각하고, 저리 생각해도 협박인 발언이었다. 이그드라실은 초연한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어디 한번 해보거라.”
릴의 발언이 협박이라면, 이그드라실의 속삭임은 조롱에 가까웠다.
“네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때 지금까지, 반쯤 넋이 나가 있던 하비에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왜.”
“몇 대 때리면 간단하게 해결될 일 아닙니까?”
하비에르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말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고개를 홱 돌린 릴이 하비에르를 바라보았다. 황당함이 짙게 물든 음성이 울려 퍼졌다.
“하비, 너 정신이 나갔구나? 지금 갑자기…… 뭐? 아내를 때리라고?”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네가 그러니까 여자 손 한 번 못 잡아본 거라니까.”
…한 세 번쯤은 들은 말이었다. 다만 이번만큼은 억울했던 듯, 하비에르가 제자리에서 펄펄 뛰며 내뱉었다.
“원대하신 카림, 카림께서 아실 방법은 아닌 것 같기에 드린 말씀입니다.”
“응? 무슨 방법?”
“원래 신전에서도 악귀를 쫓을 때에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월계수 나뭇가지로 귀신에 씐 이를 때리는 거지 않습니까?”
……그건 그랬다. 가장 기본적인 제령 방법이다.
아니, 나한테 오해하기 좋게 말하는 버릇 고치라고 해놓고! 왜 자기가 오해하기 좋게 말하는데!
“카림께서는 사제 대신 하실 수 있는 일이니 제안드린 것뿐입니다.”
릴은 그런 하비에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근데 하비.”
“예?”
“너 이제 네 신을 악귀라고 불러?”
……어라, 그러게?
이그드라실도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내가 참…… 살다 살다 별 취급을 다 당해보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