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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신으로 추앙받다가 졸지에 악귀 소리를 들은 이그드라실은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뭐, 내가 이그드라실을 걱정해 줄 하등의 이유가 없지만.
“그야 사람을 해치는 신은 선하다고 배운 적이 없으니까요. 그런 건 신이 아닙니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광신도, 하비에르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대꾸했다. 릴은 턱으로 무심하게 나를, 정확하게 말하면 내 모습을 뒤집어쓴 이그드라실을 가리켰다.
“얘가 진짜 이시스라니까?”
내 몸을 빼앗은 이그드라실은 무표정하게 릴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냉기가 풀풀 날리는 모습이었다. 누가 봐도 부부는 무슨, 천하의 원수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아니면 부부싸움을 한 직후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려나.
하비에르의 시선이 흘끗 내게 닿았다.
“신화에서도 초대 말리카께서 이그드라실로 화해 프레이르를 지키게 된 것은 맞으나, 이그드라실이 초대 말리카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만?”
초대 말리카가 이그드라실이라고 해놓고, 이그드라실이 초대 말리카가 아니라니. 저건 무슨…… 궤변이란 말인가?
릴도 같은 생각을 했던 듯 한 박자 늦게 대꾸했다.
“……그 말이 그 말 아닌가?”
“그럴 리가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비에르는 딱 잘라 대답했다. 릴은 뺨을 긁적거리다가 무심하게도 물었다.
“대체 뭐가 다른데?”
“본질이 다릅니다. 초대 말리카께서 이그드라실로 화했다는 건 누구든 자격만 갖추면 이그드라실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니까요.”
“반대는?”
“이그드라실이 초대 말리카라는 건 오직 초대 말리카만이 이그드라실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랬다면 그 누구도 원대하신 카림을, 이그드라실을 섬기지 않았겠지요.”
하비에르는 열심히 자신의 믿음을 설파했다. …이쯤 되면 하비에르가 단순한 광신도를 넘는 무언가로 보일 지경이었다.
아니, 저 인간은 왜 사제가 안 되고 카림의 시종으로 있던 거람? 아무리 봐도 대사제까지는 어렵지 않게 될 수 있을 법한 믿음과 신분인데 말이다.
“오, 그러니까.”
하비에르의 이야기를 듣던 릴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네 눈에 내 다람쥐는 그럴 자격이 있어 보였다는 얘기네?”
“물론 제 상상과는 많이 다른 분이긴 하셨습니다만…….”
그렇게 대꾸하던 하비에르가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아니, 대체 내 어디가 뭐가 어때서! 너야말로 못 말리는 광신도잖아! 나도 너 같은 사람의 섬김을 받고 싶지는 않다고! 네가 제일 무섭단 말이야!
“이미 훌륭하게 증명하지 않으셨습니까? 몇 번의 기적을 베푸시면서요.”
“그게 원래 내 능력이란다, 솔테의 아이야.”
두 사람의 대화답지 않은 대화에 끼어든 이그드라실은 부드럽게도 속삭였다. 내 몸으로 말하고 있지만 도저히 내 목소리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내 모습을 흘끗 살펴본 하비에르가 말을 돌렸다.
“어쨌든 월계수 나무가 있나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일단 뭐라도 해봐야지요.”
“아냐, 됐어.”
릴의 어조는 무겁지 않았다. 다만 나를 살펴보는 시선은 가라앉은 채였다.
엉엉, 릴. 이 안에 나 있어요……. 포기하지 말란 말이야.
“진짜 같잖은 악귀라면 모를까, 저게 그까짓 일로 쫓겨날 일은 없겠지.”
“잘 아는구나.”
한 차례 굴러간 릴의 시선이 내 팔에 닿았다. 그가 꼭 움켜쥐고 있는 팔이 새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그게 안쓰러워 보였던 걸까. 손아귀의 힘이 조금 느슨해졌다. 살짝 보이는 곳이 새빨갛게 부풀어 있었다.
릴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 멍 들겠다.”
하비에르는 그런 릴을 슬쩍 흘겨보았다. 하비에르의 입술이 비죽 튀어나온 것처럼 보이는 건 내 눈의 착각일까.
“……솔직하게 말씀하시죠.”
“뭘?”
“아무리 제령 의식이라고 하더라도 차마 이그드라실께 손을 댈 수 없다고요.”
“네가 말하는 이그드라실이라면 손을 대도 얼마든지 댔지. 정말 때려서 쫓아낼 수 있었으면 월계수 나무를 뽑아 왔을 텐데.”
그 대답은 늘 그렇듯 심드렁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제법 진지했다.
“하지만 프리드린을 다치게 만들 수는 없어. 하비, 당연한 말은 하는 게 아냐.”
어떻게 보면 굉장히 당연한 소리였지만 감동이 삐질 밀려올 것만 같았다. 평소에 맨날 괴롭히고 놀려먹어도 날 생각해주는 건 릴밖에 없구나, 싶어서.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밀려오던 감동이 썰물처럼 사라졌지만.
“일단 밧줄이나 가져와. 튼튼한 걸로.”
“……예?”
‘응? 밧줄?’
릴은 또다시 턱으로 나를 가리켰다.
“가둬둬야 할 거 아냐. 이러다가 도망쳐서 무슨 사고를 칠지 어떻게 알고?”
당연한…… 걱정이었다. 일단 내가 할 줄 아는 것은 신화에 나온 그대로의 일일 뿐이지만, 이그드라실은 다를 것이다. 조금 더 폭넓은 사용이 가능하겠지.
캄신을 가라앉혔다는 건 반대로 말하면 캄신을 불러올 힘도 있다는 것이고, 사람을 살렸다는 건 죽이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위험천만한 힘을 지닌 데다가 프레이르에 썩 좋은 감정이 없는 이그드라실을 풀어 두는 건 악수였다.
그 와중 운동 부족에 근육이 없는 내 육신은 밧줄이 뭐야, 실로 묶어둬도 끊고 도망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일단 묶어두고 가둬두겠다는 건 타당하고 합리적인 선택이긴 한데…….
‘……왜 기분이 묘하지?’
이 와중 하비에르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순순히 긍정을 표했다.
“그도…… 그렇군요. 프레이르에 어떤 재앙이 닥칠지 모릅니다.”
“…….”
내 안면 근육이 움직였다. 입꼬리가 사소하고도 미묘하게.
……그렇게 불쌍한 나는 방에 묶인 채 감금되었다.
* * *
‘이게 대체 무슨 꼴이야.’
내 방에서, 내가 묶여서 갇혀야 한다니! 그것도 남편의 손에!
이거 무슨, 말로만 보면 언니가 보던 빨간책에서 나오는 상황 아닌가? 물론 그런…… 그, 그런…… 내 입으로 차마 말할 수 없는 상황은 아니지만.
내 내면의 외침을 공유하는 이그드라실이 중얼거렸다.
“너 참…….”
‘시, 시끄러워요!’
“응?”
제 발 저린 내가 소리치자 이그드라실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응? 왜 그러니?”
‘내 말 엿듣지 말란 말이에요!’
“아니……. 난 그냥 많이 억울한가 보구나 싶어서 말을 꺼낸 건데.”
아마 지금 내 마음대로 내 몸을 쓸 수 있었다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을 것이다. 처음으로 육신을 멋대로 다루지 못하는 게 고마웠던 순간이었다.
‘……그건 당연하지.’
“쯧쯧.”
이그드라실이 가볍게 혀를 찼다. 그 소리에 혈압이 하늘까지 치솟았다.
뻐근해지기 시작한 뒷목을 움켜쥐고 싶었지만 내 몸은 여전히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뭐, 어차피 손발을 꽁꽁 묶어둔 밧줄 덕에 움직이지는 못할 테지만 말이다.
“이러니 내가 남자를 믿는 게 아니라고 경고했잖니.”
‘뭐라는 거예요! 이건 당신 때문이잖아요, 이 악신아!’
“그렇게 되나?”
아무것도 모르는 척, 천연덕스럽게 중얼거리는 것에 정말 폭발하고 싶었다. 와, 화가 난다! 정말 미쳐버리겠네!
‘대체…… 대체 무슨 꿍꿍이예요?’
“응? 뭐가 말이야?”
‘왜 이러는 거냐고요.’
악만 남은 나는 아득바득, 일단 따지고 보았다.
‘당신, 대체 목적이 뭐야?’
“정말 몰라서 묻니?”
‘그럼 알면 내가 이러고 있겠어?’
“내 목적은 늘 하나란다. 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지.”
그 목적 말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원대한 꿈을 꾸고 계신 분께서 왜 얌전히 앉아 계시냐는 말이지!
이그드라실이 씁쓸한 미소를 덧그렸다. 이윽고 나를 위로하는 것처럼 비교적 자유로운 어깨를 한 번 움직였다.
“내 아가야. 미쳐버린 내가 잘하는 것이 뭔지 아느냐?”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참는 것. 인내하는 것. 기다리는 것.”
그 소리에는 뭐라고 대답해줄 말이 없었다. 오천 년을 이러고 보냈다면 저건 정말 잘하겠구나 싶어서.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지쳐 나가떨어지더라도, 이그드라실은 얌전히 기다릴 수 있지 않을까. 그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아가야.”
나를 부른 이그드라실은 노래하듯 잘도 중얼거렸다.
“이 기회에 하나, 배워두렴.”
‘배워서 뭐에 쓰라고요. 나 죽일 거라면서어!’
…억울한 일이다. 이 꽃다운 나이에 유일무이한 꿈인 무병장수를 박탈당해야 하냐고.
“사람을 내 마음대로 움직이는 방법은 참 다양하지만, 그중 하나는 협박이지.”
내 외침을 무시한 이그드라실은 자신이 할 말만을 내뱉었다.
“협박하는 방법도 다양하거든. 직접적인 폭력만이 협박인 게 아니란다. 사람을 괴롭게 만드는 게, 그래서 버틸 수 없게 만드는 게 가장 효율적인 협박이지.”
‘……뭐라고요?’
“너도 곧 알게 될 거다.”
이유 모를 말을 내뱉은 이그드라실은 불온하게도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