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그날, 차분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저녁을 먹던 중이었다.
“이해가 안 갑니다.”
말리크가 릴에게 재상직을 내렸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하비에르가 저렇게 운을 떼었다. 릴은 무성의하게 대꾸했다.
“뭐가?”
“아무리 생각해도 카림께 지나치게 좋은 일 같습니다만.”
사실 나도 릴에게는 좋은 일 같다고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저 일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당사자는 인상을 확 일그러뜨렸다.
“이봐, 하비.”
“예.”
“이게 좋은 거라면 네가 할래?”
당연히 ‘감사한 제안이지만 사양하겠습니다.’ 따위의 겸손한 말이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하비에르는 릴이 좋아하는, 만만치 않은 인간이었다.
“네, 기꺼이 하겠습니다.”
“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네가 가.”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만 제게 자리를 내리셔야 가죠.”
나로서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전혀 구분할 수 없는 대화였다.
“말리크께서 제게 그 어마어마한 자리를 내어 주시지는 않으시더군요. 그래서 못 하고 있습니다만. 시켜만 주신다면 얼마든지 할 텐데요.”
“네가 그렇게 간절하게 원하니까 형님께 말씀드려 볼게. 솔테의 야심만만한 막내, 하비에르가 부친의 자리를 노린다고.”
릴의 대꾸에 하비에르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한마디 내던졌다.
“그러면 이제 제가 원대하신 카림의 상관이 되는 겁니까?”
“어라?”
말리크가 릴에게 내린 건 제8재상 자리. 솔테는 제3재상이니 부친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다면 상관이 맞긴 했다. 여덟 명의 재상에게 위아래가 없다는 건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얘기지, 사실은 철저하게도 서열순이었다.
“……듣고 보니 그렇네?”
한 박자 늦게 되물은 릴이 헛웃음을 머금었다. 아무래도 시종이 자기 머리 위에 앉는 건 썩 유쾌한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릴은 늘 그렇듯 친절하고 사근사근하게 한마디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 그래서 그런 깜찍한 하극상을 꿈꾸고 있었어, 우리 하비?”
“반역의 기운은 늘 귀족들의 혈맥을 타고 흐르는 겁니다. 아시면서 그러십니까.”
지지 않고 대꾸하는 말은 상당히 의외였다. 이 광신도가…… 웬일이래? ‘내가 감히 어떻게 당신의 자리를 넘보겠느냐.’ 따위의 말을 해야 하지 않나?
오늘 여러모로 예상을 벗어나는 답이 많이 튀어나오는 것 같다. 릴이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나를 돌아보았다.
“프리드린?”
“네?”
“이 역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그 말에 내가 기겁한 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농담과 장난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위험한 말 아니냐고.
“여, 역도라뇨.”
“반역의 기운을 타고났다잖아. 정말 큰일 치기 전에 샥.”
릴이 장난스레 스스로의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정작 제3자인 나는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흐름이었는데, 당사자인 하비에르의 반응은 참 심드렁했다.
“카림께서 제 목을 베면 이그드라실께서 살려주시겠죠. 그런 협박, 하나도 안 무섭습니다.”
……저기요, 누가 언제 살려준다고 했습니까?
내 기막힌 시선이 하비에르를 스칠 때 릴이 손가락을 퉁겼다. 딱,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참, 저 얘기 들으니까 생각났네. 처형을 게르드로 불러올까 하는데.”
듣던 중 반가운 말이었다. 아마 그를 바라보는 내 얼굴이 환하게 물들었을 터였다.
“언니를요?”
“응. 일단 내가 없을 때 널 놀아줄 사람이 필요할 것 같거든.”
하긴, 릴이 없으면 나는 완벽한 왕따였다. 하비에르도 두 번째 기적 이후에는 부러 나를 외면하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지금도 말 한 마디 못 붙이는 게, 오펠에 있을 때처럼 나를 대하기에는 자신 안의 무엇이 걸리는 모양이었다.
……하비에르는 광신도니까, 뭐.
무엇보다 할아버지마저 날 어색하게 대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하겠나. 신앙이란 그런 것이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서 정시 출근은 하는 거고요?”
“그럼……. 지각하면 야근이라잖아.”
학을 뗀 릴은 날 보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내가 널 어떻게 독수공방을 시키겠어.”
“저기요? 남 앞에서 그런 얘기 하지 말아욧!”
“그렇다고 안 가면 강제 구인일걸? 네가 아직 형님을 잘 몰라서 그러는데, 형님은 그러시고도 남아.”
다른 때였으면 독수공방이라는 말에 야릇한 생각을 한다고 날 놀려먹었을 그가 현실을 입에 담았다. 그에 괜히 생각했다.
릴도 무서워하는 게 있구나. 아버지 같은 형이라더니.
“내 발로 가서 담판을 짓든가 해야지. 누구 말대로 최소한의 품위 유지는 해야 하니까, 아랫것들 손에 질질 끌려갈 수는 없잖아.”
이 인간, 뒤끝 보소?
내 뺨이 둥글게 부풀어 오르자 릴은 빠르게 말을 돌렸다.
“그리고 처형도 지금 브렌델에서 제법 시달리고 있을 거야. 기적의 당사자니까.”
“그러면 제가 브렌델 영주에게 전달하겠습니다.”
정말 목이 떨어질 걸 걱정한 건지, 하비에르가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조금 다르게 생각하자면 나였어도 커플 사이에 끼어 있고 싶지는 않을 것 같긴 하지만…….
‘……커플이라니!’
자연스럽게 이어진 생각에 소름이 오스스 돋았다.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대체 언제부터 릴이 내게 스며든 거람?
* * *
그렇게 밝아온 아침이었다.
“집 잘 보고 있고.”
현관에서 나를 마주한 릴은 정말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광경을 연출했다. 그를 기다리는 마부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우리 둘을 흘끗거렸다.
…제, 제발 남들 앞에서는 안 이러면 안 되겠니?
“누가 문 열어달라고 해도 열어주면 안 되고, 사탕 준다고 해도 쫓아가면 안 된다?”
“…….”
어쩐지 저번에 언니에게 들었던 말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내가 기막힌 시선으로 바라보자 그는 걱정스럽게 한마디 했다.
“넌 정말 저럴 거 같아서 걱정이거든.”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는 게 더 황당할 뿐이었다. 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람?
나는 일단 그의 등을 밀어내고 보았다.
“얼른 가기나 해요. 늦겠어요.”
“왜 넌 매번 날 쫓아내지 못해서 안달이야? 서운하게.”
꼬리 내린 강아지처럼 릴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 모습이 괜히 내 안의 어떤 것을 자극했다.
불쌍하고 처량해 보이기는 하는데…….
“지각하면 야근시킨다잖아요. 릴을 집에 못 들어오게 만들면 안 되죠.”
그를 달래며 슬쩍 안아주려고 손을 뻗었던 그때, 릴의 손이 먼저 움직였다. 검지가 자신의 하얀 뺨을 툭툭 건드렸다.
……의미하는 바가 명확해서 그에게 뻗어 나가던 손이 고스란히 굳어버렸다. 석상이 된 나를 보던 그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얼른.”
“…….”
“해 줘야 가지.”
스윽, 그 뺨이 내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채근하듯 한 마디 덧붙인다.
“응?”
툭, 툭. 자신의 뺨을 건드리는 검지 끝이 검붉은 무언가처럼 보였다면 내가 미친 걸까.
“나 그냥 야근해? 오늘 집에 오지 마?”
“……그냥 좀 가요!”
난 내게 다가오는 얼굴을 일단 밀어내고 보았다. 애정 표현은 좀 적당히 하란 말이야! 그것도 남 앞에서!
그렇게 겨우 그를 쫓아 보낸 나는 지나치게 넓은 저택에서 혼자 뒹굴거리며 시간을 죽여야 했다.
말 한마디 섞을 사람이 없었다. 라일라에게 그렇게 차인 이후에는 새 사람을 만나는 것도 조금 꺼려졌다. 그 사람에게는 내 행동이 민폐일 수도 있으니까.
느긋하게 시간이 흘러, 점심시간이 지나 티타임이 찾아왔을 때였다.
“이그드라실의 영광을. 말리카께서 방문하셨습니다.”
페라엘 샤리프스가 직접 말리카를 모시고 이곳에 강림했다.
기겁한 나는 릴이 아침에 한 친절한 걱정을 뒤로하고 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이건 거절할 수가 없는 일이니까.
몇 달 만에 마주한 상관에게 나는 습관대로 고개를 숙이고 보았다.
“아름다운 말리카.”
“이그드라실의 영광을.”
말리카의 정중한 인사에 소름이 끼쳤다. 제발 저렇게 부르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래선 안 된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았다.
“……어서 이쪽에 앉으세요.”
내가 자리를 안내하자,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수려한 말리카는 우아하게 의자에 걸터앉았다. 내 모습을 꼼꼼하게도 살펴본 말리카는 그린 듯한 눈웃음을 내비쳤다.
“역시 제 눈이 틀리지 않았어요. 이제 성후 티가 나는군요.”
“그, 그런가요?”
나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확실히 시녀로 있을 때보다는 값진 옷을 입고 진귀한 장신구를 했으니까…… 그런 티가 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이그드라실이여…… 그래요.”
내 반응에 말리카는 선선하게도 속삭였다.
“신께서 두 번의 기적을 일으키셨고 제 눈으로 직접 보았죠. 두 번 모두 놀라웠습니다.”
그 말에 뭐라고 반응해야 했을까. 어색한 웃음조차 터뜨릴 수가 없는 미묘한 공기가 우리를 감싸고 있었다.
말리카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사근사근하게 나를 불렀다.
“하지만 프리드린.”
그 의외의 태도에 고개를 바짝 들어 올렸다. 언니와 릴을 제외한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는 걸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것 같다.
“제 제안은 아직 유효하답니다.”
하지만 들려오는 말에는 귀를 의심했다. 자연스럽게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네?”
“딱 일 년만, 카림의 옆에 머물러 달라고 말씀드렸었지요.”
나는 마주한 눈을 깜빡거렸다. 하비에르가 이전에 했던 말이 생각났다.
내 상황이 특수하지 않았더라면 말리카가 나를 이용하고 있었을 거라는.